민수기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10–12장 · 광야 길의 시작

고기를 얻고도 잃어버린 것

민수기 11장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간절한 요청이 나옵니다.

백성은 고기를 달라고 울부짖습니다. 모세는 더 이상 백성을 감당할 수 없다며 자신을 죽여 달라고 호소합니다.

모세에게는 백성의 짐을 함께 질 장로 일흔 명을 세워 주십니다. 백성에게는 원하는 고기를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의 응답은 공동체를 살리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다른 응답은 참혹한 재앙으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배고픈 사람들이 고기를 먹고 싶어 했다는 것 자체가 죄였을까요? 그리고 모세 역시 자신의 처지를 원망했는데, 왜 그의 호소에는 다른 응답이 주어졌을까요?

민수기 10장에서 이스라엘은 시나이산을 떠나 첫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앞서 가시는 행렬은 질서 있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11장에 들어서자, 그 아름답게 조직된 공동체 안에서 전혀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은 나팔 대신 불평과 울음소리입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911장 본문 읽기 →

무엇을 불평했는지도 모르는 첫 번째 사건

민수기 11:1–3 본문 →

백성은 불평했고, 그것은 여호와야훼가 듣기에 불쾌했다. 여호와야훼가 듣고 분노가 타올랐다. 여호와야훼의 불이 그들 가운데 타올라 진영 가장자리를 삼켰다.민수기 11:1 · 본디새김

11장은 아무런 설명 없이 불평으로 시작합니다.

1절은 백성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보다 그들의 불평이 여호와야훼께 어떻게 들렸는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호와야훼가 듣기에 불쾌했다」는 표현에서 히브리어는 백성의 불평이 여호와야훼의 귀에 나쁘게 들렸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어서 「여호와야훼가 듣고」라는 말이 다시 나옵니다.

불평의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되었지만, 그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 누구인지는 강조됩니다.

불은 진영 가장자리를 삼킵니다. 이것이 단순히 천막과 물건들을 태웠다는 뜻인지, 사람들의 피해까지 포함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백성은 모세에게 부르짖고, 모세는 여호와야훼께 기도합니다. 그러자 불이 가라앉습니다.

그는 불평하는 백성에게 맞서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 하지 않습니다. 백성이 도움을 요청하자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모세의 기도가 어떤 말로 이루어졌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여호와야훼께 기도했고, 불이 가라앉았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이후 그곳은 「타브에라」라고 불립니다. 히브리어 타브에라(⁨תַּבְעֵרָה⁩)는 불타다라는 의미의 동사와 연결되는 지명입니다.

하나의 장소가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을 남기고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곧이어 훨씬 더 구체적인 불평이 시작됩니다.

이집트의 생선은 기억하면서 노예 생활은 잊다

민수기 11:4–9 본문 →

그들 가운데 모여든 무리가 몹시 갈망했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말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주겠어?」민수기 11:4 · 본디새김

본문은 처음에 「그들 가운데 모여든 무리」가 갈망했다고 말합니다. 이 무리를 특정 민족이나 출신 집단으로 확정할 근거는 이 구절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어서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갈망은 무리의 일부에서 시작되지만 곧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소리가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불평은 단순히 고기를 먹고 싶다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집트에서 거저 먹던 생선이 생각나.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양파와 마늘도 생각나.」민수기 11:5 · 본디새김

문제는 그 음식 자체가 아닙니다.

본문은 이집트에서 그러한 음식들을 먹었던 기억이 모두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욕구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기억에는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이집트는 출애굽기 1–2장에서 이스라엘이 노역에 시달리며 부르짖던 바로 그 땅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압제를 받았고, 남자아이들의 생명까지 위협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이 떠올리는 이집트에는 생선과 채소만 남아 있습니다.

「거저 먹던」 음식들을 실제로 대가 없이 얻었는지는 본문만으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지금 이집트에서의 삶을 먹거리가 풍족했던 시절로 기억합니다. 음식의 대가로 얼마를 지불했느냐와 별개로, 이집트에서의 삶은 자유로운 삶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먹었던 음식을 기억하면서, 그 땅에서 자신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잊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이야」

「그런데 이제 우리는 말라 버렸어. 아무것도 없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이야.」민수기 11:6 · 본디새김

아무것도 없는 것과, 원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만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나가 더 이상 만족스러운 음식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때 본문의 서술자가 끼어들어 만나가 어떤 음식인지 설명합니다.

만나는 고수 씨와 같았고, 그 겉모습은 브돌라흐의 모습과 같았다.민수기 11:7 · 본디새김

이어 8절에서는 만나를 주워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고, 솥에 익혀 둥근 빵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맛은 「기름진 별미의 맛과 같았다」고 합니다.

만나는 먹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모아 여러 방식으로 조리했고, 맛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성은 그것을 「이 만나뿐」이라고 부릅니다.

밤에 진영 위로 이슬이 내릴 때마다 만나도 그 위에 내리곤 했다.민수기 11:9 · 본디새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가져온 식량이 충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나가 반복해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6:4에서 여호와야훼는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11장에서는 그 양식이 계속 공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만나의 가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백성이 만나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광야에서 자신들을 먹이시는 방식을 불충분한 것으로 여기며, 이집트에서의 삶을 더 좋은 것으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울음소리는 지도자인 모세에게 쏟아집니다.

조금 더 깊이

「몹시 갈망했다」는 같은 어근의 동사와 명사를 함께 사용하여 갈망을 강조합니다. 말 그대로 옮기면 갈망을 갈망했다는 식의 표현입니다. 만나를 묘사하는 말 가운데 「브돌라흐」가 정확히 어떤 물질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창세기 2:12에도 등장하는 이름으로, 수지의 일종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지만 이 구절은 만나의 겉모습을 비유할 뿐입니다. 8절의 맛을 묘사하는 히브리어 레샤드(⁨לְשַׁד⁩) 역시 정확한 의미에 논의가 있습니다. 기름의 풍부한 맛을 뜻하는지, 기름을 사용한 특정 음식의 맛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백성은 광야에서 굶어 죽을 것을 두려워하며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앞의 사건에서는 광야에서 먹을 수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번 사건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가가 중심 문제로 나타납니다. 신명기 8:2–3에서 모세는 광야의 만나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낮추시고 시험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으로 산다는 가르침도 그 문맥에서 등장합니다.

「제가 이 온 백성을 낳았습니까?」

민수기 11:10–15 본문 →

모세는 백성이 씨족별로, 저마다 자기 천막 입구에서 우는 소리를 들었다. 여호와야훼의 분노가 크게 타올랐고, 모세도 이를 좋지 않게 여겼다.민수기 11:10 · 본디새김

앞에서는 일부 무리에서 갈망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씨족별로, 저마다 자기 천막 입구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백성을 향해 먼저 책망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여호와야훼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당신의 종에게 고통을 주셨습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에 호의를 얻지 못했기에, 당신은 이 온 백성의 짐을 제게 지우십니까?」민수기 11:11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이 받은 직무를 영광스러운 사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직무가 자신에게 고통이 되었다고 호소합니다.

「제가 이 온 백성을 배었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았습니까? 어찌하여 양육자가 젖먹이를 안듯 그들을 제 품에 안고 당신이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려가라고 제게 말씀하십니까?」민수기 11:12 · 본디새김

그에게 백성은 단순히 명령만 내리면 움직이는 군대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돌보아야 하고, 먹여야 하며, 달래야 하는 아이들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들을 낳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시고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데려가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입니다. 모세는 그 일을 맡은 종입니다. 그러나 백성의 요구는 마치 모세가 자신들의 모든 필요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인 것처럼 그에게 향합니다.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제게 울며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고기를 주십시오』라고 합니다.」민수기 11:13 · 본디새김

그의 호소는 결국 한 문장으로 압축됩니다.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짊어질 수 없습니다. 제게는 너무 무겁기 때문입니다.」민수기 11:14 · 본디새김

백성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울고 있습니다. 모세는 그 백성 전체가 자신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죽음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당신이 제게 이렇게 하신다면, 제가 당신의 눈에 호의를 얻었다면, 부디 저를 죽여 버리십시오. 제가 제 비참함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민수기 11:15 · 본디새김

본문은 모세가 실제로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그가 얼마나 고립되고 압도되었는지 그의 말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백성의 불평과 모세의 호소는 무엇이 다른가?

백성은 이집트가 좋았다고 말하며 자신들을 그곳에서 나오게 하신 일을 문제 삼기 시작합니다. 반면 모세는 자신의 짐이 너무 무겁다고 말하면서도 여호와야훼를 향해 호소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언급하고, 바로 그 땅으로 백성을 데려가는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기보다 그 뜻을 수행하는 자신의 한계를 토로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물론 모세의 말이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기도라고 본문이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요청은 매우 극단적이고, 그 자신도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곧 드러냅니다.

자신을 이 자리에 세우신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가져갑니다.

모세는 백성의 짐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그 고백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양육자를 가리키는 표현은 실제로 젖을 먹이는 어머니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젖먹이를 품에 안고 돌보는 보호자나 양육자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기보다 먼저 짐을 나눌 사람들을 마련하신다

민수기 11:16–20 본문 →

모세는 두 가지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백성을 혼자 감당할 수 없다는 것과, 그들에게 줄 고기를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모세와 함께 일할 장로들을 세우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모세에게 말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 가운데 네가 백성의 장로이자 관리로 알고 있는 사람 일흔 명을 나를 위해 모아라. 그들을 만남의 천막으로 데려오고, 그들이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여라.」민수기 11:16 · 본디새김

이스라엘에는 이미 공동체를 이끌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8:21–26에서도 모세는 백성의 재판을 돕도록 여러 지도자를 세웠습니다. 다만 그때의 관리들과 지금의 일흔 명을 같은 집단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민수기 11장은 이번에 세워지는 장로들에게 특별히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내가 내려가 거기서 너와 말하겠다. 네 위에 있는 영의 일부를 떼어 그들 위에 두겠다.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짊어질 것이니, 네가 혼자 짊어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민수기 11:17 · 본디새김

모세는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짊어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짊어질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정 조직 개편이 아닙니다.

장로들이 모세의 업무를 분담하는 것은 맞지만, 그들이 그 일을 감당하게 되는 근거는 하나님이 그들 위에 영을 두시는 데 있습니다. 모세의 지도력은 그 자신의 뛰어난 능력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다른 장로들도 하나님의 영에 의해 공동체를 섬기는 일에 참여합니다.

여기서 「영의 일부를 떼어」라는 표현을 모세의 영적 능력이 줄어드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원문은 모세 위에 있는 영으로부터 취하여 장로들 위에 두신다고 표현하지만, 그 결과 모세가 무엇을 잃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더 강해져서 모든 짐을 견디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 짐을 함께 짊어질 사람들을 세워 주십니다.

원하는 것을 주시되, 그 욕망을 드러내신다

「백성에게는 이렇게 말하여라. 『내일을 위해 너희 자신을 성별하여라. 너희가 고기를 먹을 것이다. 너희가 여호와야훼께 들리게 울며, 이집트에 있을 때는 좋았으니 누가 고기를 먹여 주겠느냐고 말했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실 것이고, 너희는 먹을 것이다.』」민수기 11:18 · 본디새김

그러나 그 말씀은 기쁨의 약속으로만 이어지지 않습니다.

「『너희가 먹을 기간은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닷새도 아니고, 열흘도 아니고, 스무 날도 아니라,』」 「『한 달 내내다. 고기가 너희 코에서 나오고 너희에게 역겨워질 때까지 먹을 것이다. 너희 가운데 계신 여호와야훼를 너희가 거부하고, 그분 앞에서 도대체 왜 이집트에서 나왔느냐고 말하며 울었기 때문이다.』」민수기 11:19–20 · 본디새김

이 표현은 고기를 지나치게 많이 먹어 결국 혐오하게 되는 모습을 강렬하게 그립니다. 그들이 갈망했던 것이 도리어 역겨운 것이 됩니다.

문제는 고기 자체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실제로 고기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출애굽기 16:13에서도 이미 메추라기가 이스라엘의 진영을 덮은 적이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금지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온 일을 후회하며, 자신들 가운데 계신 여호와야훼를 거부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하신 사건과 현재의 인도에 등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시지만, 그 응답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를 드러내는 심판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원하는 것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는 일이 곧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긴장은 마지막 장면에서 비극적으로 드러납니다.

「여호와야훼의 손이 짧으냐?」

민수기 11:21–23 본문 →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모세가 말했다. 「제가 함께 있는 백성 가운데 보병은 육십만 명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그들에게 고기를 주어, 그들이 한 달 내내 먹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수기 11:21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규모를 생각하면 모든 사람에게 한 달 동안 고기를 먹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가능한 자원을 떠올립니다.

「그들을 위해 양과 염소와 소를 잡으면 그들에게 충분하겠습니까? 아니면 바다의 모든 물고기를 그들을 위해 모으면 그들에게 충분하겠습니까?」민수기 11:22 · 본디새김

백성은 생선을 그리워합니다. 모세는 바다의 모든 물고기를 모아도 충분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자원과 필요한 양을 비교하며 계산하고 있습니다.

그의 질문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대답은 그 계산의 전제를 문제 삼습니다.

여호와야훼가 모세에게 말했다. 「여호와야훼의 손이 짧으냐? 이제 내 말이 네게 이루어지는지 아닌지 네가 보게 될 것이다.」민수기 11:23 · 본디새김

「손이 짧으냐」는 표현은 하나님의 능력에 한계가 있느냐는 뜻입니다. 그는 백성을 혼자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백성에게 고기를 먹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도 자신의 계산 범위 안에서 이해하려 합니다.

모세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옳은 방향이었지만, 그 한계를 하나님의 한계로 생각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17절에서는 하나님이 모세의 한계를 인정하시고 장로들을 세우십니다. 23절에서는 하나님이 모세의 계산을 넘어서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가 하나님의 능력을 규정하게 하지도 않으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두 말씀을 실제로 이루기 시작하십니다.

모세의 영이 장로들에게 임하다

민수기 11:24–30 본문 →

24절에서 모세는 장로 일흔 명을 모아 만남의 천막 둘레에 세웁니다.

25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구름 속에 내려오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모세 위에 있는 영의 일부를 떼어 장로들 위에 두십니다. 그 결과 장로들이 예언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미래에 관한 예언을 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는지, 어떤 형태의 신적인 감동을 표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영이 그들 위에 머물렀을 때 그들이 예언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언은 한 번뿐이었는가?

본디새김은 「그들이 예언했지만, 다시 하지는 않았다」고 옮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언이 그치지 않았다는 해석도 전해집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건이고, 그들에게 주어진 계속적인 책임은 공동체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본문은 예상 밖의 두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천막 밖에서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다

두 사람이 진영에 남아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엘닷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메닷이었다. 그들 위에도 그 영이 머물렀다. 그들은 명단에 기록된 이들이었으나 천막으로 나가지 않았고, 진영에서 예언했다.민수기 11:26 · 본디새김

왜 그곳에 가지 않았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단으로 자신을 지도자로 내세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명단에 포함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일이 만남의 천막 앞이라는 장소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한 젊은이가 달려가 이 사건을 모세에게 알립니다. 여호수아는 즉시 말합니다.

젊을 때부터 모세를 보좌하던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응답하여 말했다. 「나의 주인 모세님, 그들을 막으십시오.」민수기 11:28 · 본디새김

본문은 그의 구체적인 동기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대답을 보면 여호수아가 모세의 권위와 특별한 지위를 지키려 했다는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모세가 그에게 말했다. 「네가 나를 위해 시기하느냐? 여호와야훼께서 그들 위에 자신의 영을 두셔서, 여호와야훼의 온 백성이 예언자가 되면 좋겠다.」민수기 11:29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모세는 혼자 백성을 짊어지는 것이 너무 무겁다고 호소했습니다. 이제 그는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예언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자신의 짐을 나누어 질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본문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단순히 업무 분담을 넘어섭니다. 그는 자신의 특별한 지위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영이 다른 사람들에게 임하는 일을 막으려 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영을 혼자 소유하려는 데 있지 않고, 모든 백성이 그 영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데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그의 부담을 나누시는 방식은 단순히 사람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영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의 히브리어 벨로 야사푸(⁨יָסַף⁩)는 문자적으로 더하지 않았다는 표현입니다. 이 문맥에서는 예언을 다시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다시 계속하지 않았다는 방향으로 읽습니다. 반면 일부 고대 유대교 해석 전통은 이 표현을 예언이 그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예언의 지속 기간을 확정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모세가 「여호와야훼의 온 백성이 예언자가 되면 좋겠다」고 말한 소망은 요엘 2:28–29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는 약속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요엘서가 민수기 11:29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영이 특정한 지도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주제가 이어집니다. 신약 사도행전 2장은 요엘의 그 약속을 직접 인용하지만, 민수기 11장 자체는 모세의 소망이 그의 시대에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같은 '루아흐'가 장로들에게 임하고 메추라기를 몰아온다

민수기 11:31–32 본문 →

31절에서는 다시 고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호와야훼에게서 바람이 일어나 바다에서 메추라기들을 몰아와 진영 위에 흩어 놓았다. 메추라기들은 진영 둘레 이쪽으로 약 하루 길, 저쪽으로 약 하루 길까지 퍼졌으며, 땅 표면 위로 약 두 암마 높이에 있었다.민수기 11:31 · 본디새김

앞서 하나님이 장로들에게 주신 「영」(⁨רוּחַ⁩)과 지금 메추라기들을 몰아온 「바람」은 히브리어로 같은 단어입니다. 한쪽은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영이고, 다른 한쪽은 자연 속에서 움직이는 바람입니다.

모세에게 필요한 것은 백성을 함께 짊어질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백성이 요구한 것은 고기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람을 일으켜 메추라기들을 가져오셨습니다.

두 사건 모두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었던 결과를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이것은 23절의 「여호와야훼의 손이 짧으냐?」라는 질문에 대한 실제 응답이기도 합니다.

엄청난 양의 메추라기

백성은 일어나 그날 온종일, 밤새도록, 이튿날도 온종일 메추라기들을 모았다. 가장 적게 모은 사람도 열 호메르를 모았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진영 둘레에 메추라기들을 널리 펼쳐 놓았다.민수기 11:32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주겠어?」라고 울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고기가 넘쳐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모든 분위기가 뒤집힙니다.

조금 더 깊이

루아흐는 문맥에 따라 바람, 숨, 영을 뜻합니다. 25절에서는 장로들 위에 임하여 그들이 예언하게 되는 영을 가리킵니다. 31절에서는 바다에서 메추라기들을 몰아오는 바람을 가리킵니다. 메추라기들이 땅 위 약 두 암마 높이로 날고 있었다는 뜻일 수도 있고, 메추라기들이 그만큼 두껍게 쌓였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한쪽을 확정할 만큼 구체적인 동작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호메르는 부피를 재는 단위입니다. 여기서는 가장 적게 모은 사람조차 매우 많은 양을 모았음을 강조합니다.

고기가 입안에 있는 동안 재앙이 찾아온다

민수기 11:33–35 본문 →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 있어 미처 씹히기도 전에, 여호와야훼의 분노가 백성을 향해 타올랐고 여호와야훼가 매우 큰 재앙으로 백성을 쳤다.민수기 11:33 · 본디새김

백성은 자신들이 원했던 고기를 받았지만, 그 일을 기뻐하며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주신 뒤에 심판하셨을까?

하나님은 이미 고기를 주시기 전에 백성의 문제를 설명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계신 여호와야훼를 너희가 거부하고, 그분 앞에서 도대체 왜 이집트에서 나왔느냐고 말하며 울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33절의 재앙을 고기에 독이 있었기 때문이라거나, 지나치게 많이 먹어서 병이 생긴 자연적인 결과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원인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앙의 주체를 명시합니다.

그럼에도 재앙의 정확한 범위와 죽은 사람들의 수, 재앙이 어떤 방식으로 발생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빈자리를 임의의 이야기로 채워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보다 이집트의 식탁을 더 좋게 여겼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광야보다 이전의 삶을 더 그리워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기는 그러한 태도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해서, 그것을 원하게 만든 마음의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갈망이 무덤의 이름이 되다

그곳의 이름을 키브롯 핫타아와라고 불렀다. 갈망했던 백성을 거기에 묻었기 때문이다.민수기 11:34 · 본디새김

히브리어 키브롯 핫타아와(⁨קִבְרוֹת הַתַּאֲוָה⁩)는 갈망의 무덤들이라는 의미입니다. 4절에서는 사람들이 「몹시 갈망했다」고 했습니다. 그 갈망을 가리킨 명사가 이제 지명의 일부가 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던 갈망이었습니다. 그 갈망이 울음소리가 되었고, 이집트에 대한 그리움이 되었으며, 고기를 향한 집착으로 나타났습니다.

마침내 그 갈망은 사람들이 묻힌 장소의 이름으로 남습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이 원했던 것은 입으로 먹을 고기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들이 얻은 것은 무덤의 이름입니다.

조금 더 깊이

「미처 씹히기도 전에」(⁨כָּרַת⁩)라는 표현의 핵심 동사는 히브리어로 끊기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를 입안의 고기가 아직 씹혀 끊어지기 전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고기가 아직 다 떨어지지 않았을 때라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을 따르면 재앙은 고기를 먹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납니다. 두 번째 해석을 따르면 고기를 먹는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때 재앙이 닥쳤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 78:18–31과 106:13–15도 광야에서 백성이 음식을 갈망했던 사건을 돌아봅니다. 두 시편은 백성의 욕망과 하나님을 시험한 태도, 그리고 그에 따른 심판을 연결합니다. 특히 시편 106편은 하나님이 그들이 구한 것을 주셨지만, 그 가운데 쇠약하게 하시는 심판을 보내셨다고 회상합니다.

두 가지 부족함과 하나님의 두 가지 응답

민수기 11:1–35 본문 →

백성은 고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짐을 함께 짊어질 사람이 부족하다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지워진 짐을 여러 사람이 함께 지게 하셨지만, 하나님을 거부하며 끝없이 불어난 갈망은 결국 그 갈망을 품은 사람들을 무너뜨렸습니다.

물론 이것을 모든 결핍이나 고통을 단지 마음가짐의 문제로 돌리는 교훈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의 고통은 실제였고, 그는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생각을 바꾸기만 하라고 하시지 않고, 실제로 짐을 나누어 질 사람들을 마련하셨습니다.

민수기 11장은 이 두 모습을 나란히 남깁니다.

하나는 백성의 짐을 함께 지게 된 사람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들이 그토록 원했던 고기를 얻고도 광야에 묻힌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그 무덤들을 뒤로하고 하체롯으로 떠납니다. 길은 계속되지만, 그곳의 이름은 남습니다.

키브롯 핫타아와 — 갈망의 무덤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