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3–21장 · 정탐과 광야 세월

죽음이 머문 자리를 다시 깨끗하게 하는 길

민수기 19장은 처음부터 독자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죽으면 누군가는 그 시신을 돌보아야 합니다. 가족이 죽은 사람의 몸을 만지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사랑과 책임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께서는 시신에 닿은 사람을 부정하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을 돌보는 일이 죄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죽음 자체가 도덕적으로 악하다는 뜻일까요?

성경에서 부정한 상태가 된다는 것은 반드시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레위기 12장에서는 출산한 여인이 일정 기간 부정한 상태에 놓입니다. 레위기 15장에서는 정상적인 신체 현상으로도 부정한 상태가 생깁니다. 이런 경우 부정함은 그 사람이 악한 행동을 했다는 도덕적 판결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호와야훼의 거룩한 임재와 관련하여 정해진 제의적 상태입니다. 특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성소나 거룩한 것에 접근하는 데 제한이 따르고, 다시 정결한 상태가 되기 위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본문은 시신을 만지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시신을 만진 사람에게 정해진 기간과 정화 절차를 제시합니다.

그런데 그 길은 놀라운 방식으로 준비됩니다.

붉은 암소 한 마리를 진영 밖에서 태워 재를 만들고, 그 재를 샘물에 섞어 부정한 사람에게 뿌리라는 것입니다. 더욱 이상한 점은 그 재를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들이 오히려 부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민수기 19장은 이 모순처럼 보이는 규정들을 통해 여호와야훼의 거룩함과 죽음의 관계, 그리고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어떻게 다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17장 끝에서는 백성이 성막에 가까이 갔다가 죽을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19장은 그 두려움에 대한 또 하나의 구체적인 응답입니다. 이번에는 허락되지 않은 성소 접근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삶 속에서 피할 수 없이 마주하는 죽음의 문제를 다룹니다.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819장 본문 읽기 →

붉은 암소는 왜 진영 밖에서 태워지는가?

민수기 19:1–6 본문 →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암소를 준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여호와야훼가 명령한 율법의 규례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온전하고 흠이 없으며 멍에를 멘 적이 없는 붉은 암소를 네게 데려오게 하여라.」민수기 19:2 · 본디새김

흠이 없는 제물이라는 조건은 레위기의 여러 제사 규정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붉은색과 멍에를 멘 적이 없다는 조건은 이 의식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너희는 그 암소를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어라. 그는 그 암소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그의 앞에서 그 암소를 잡아야 한다.」민수기 19:3 · 본디새김

일반적인 제사에서는 제물을 성막의 제단으로 가져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암소는 제단 위에 올려져 향기를 내는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영 밖에서 태워져 재가 되고, 그 재는 이후 부정을 없애는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됩니다.

그런데 진영 밖에서 의식이 진행되는데도, 성막과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엘르아살은 암소의 피를 조금 묻혀 만남의 천막 정면을 향해 일곱 번 뿌려야 합니다. 엘르아살이 성막 안으로 들어가 피를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진영 밖에서 만남의 천막이 있는 방향을 향해 피를 뿌립니다.

이것은 진영 밖에서 준비되는 정화 수단도 결국 여호와야훼의 거룩한 임재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시신으로 인해 부정해진 사람들이 다시 성막의 거룩함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 이 의식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보는 앞에서 그 암소를 태워야 한다. 그 가죽과 고기와 피를 똥과 함께 태워야 한다.」민수기 19:5 · 본디새김

일반적인 정화 제물에서는 피를 정해진 방식으로 사용하고 지방이나 고기를 구별하여 처리합니다. 그러나 이 의식에서는 조금 뿌리는 피를 제외한 암소의 피까지 가죽과 고기와 함께 태웁니다. 이 의식에서 필요한 것은 고기나 지방의 특정 부분이 아니라, 암소 전체를 태워 얻는 재이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는 그 불에 백향목과 에조브와 진홍색 실을 던지도록 합니다. 이 세 가지 재료는 레위기 14:4–7에서도 함께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차라아트가 있던 사람이 정결해지는 의식에 사용됩니다.

두 의식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14장에서는 살아 있는 새와 다른 재료들을 사용하고, 민수기 19장에서는 암소를 태우는 불에 그것들을 넣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은 부정한 상태에서 정결한 상태로 돌아오는 의식에 같은 재료들이 사용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에조브는 18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그때에는 정화용 물을 찍어 뿌리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반면 백향목과 진홍색 실은 여기서 왜 사용되는지 본문이 별도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결국 암소는 재가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재를 만드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조금 더 깊이

붉은색은 피나 죽음과 연결하여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본문 자체는 왜 붉은색이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색에 특정한 신학적 의미를 확정하여 부여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멍에를 멘 적이 없다는 조건 역시 일상적인 노동에 사용되지 않은 암소를 요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조건의 상징적 의미까지 본문이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레위기의 정화 의식에서도 일곱 번 뿌리는 행동이 사용됩니다(레위기 4:6, 14:7). 다만 민수기 19장이 일곱 번이라는 횟수의 의미를 별도로 해설하지는 않습니다.

정결하게 만드는 일을 하면서 부정해지는 사람들

민수기 19:7–10 본문 →

암소를 태운 뒤,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씻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엘르아살은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어야 합니다. 그 뒤 진영에 들어올 수 있지만, 저녁까지 부정합니다. 암소를 태운 사람도 옷과 몸을 씻어야 하며, 저녁까지 부정합니다.

그리고 정결한 사람이 암소의 재를 모아 진영 밖의 정결한 장소에 보관해야 합니다. 그런데 재를 모은 사람도 옷을 빨아야 하며, 저녁까지 부정합니다.

부정한 사람들을 정결하게 할 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결했던 사람들이 부정한 상태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정해진다고 해서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께서 명령하신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정결한 상태에서 의식에 참여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상태가 의식이 끝난 뒤에도 자동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도 씻는 절차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정결한 사람이 암소의 재를 모아 진영 밖 정결한 곳에 놓아두어야 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을 위해 부정을 없애는 물에 쓰도록 보관해 두어야 한다. 그것은 정화 제물이다.」민수기 19:9 · 본디새김

이것은 진영 밖이라는 공간이 언제나 부정하거나 거룩함과 무관한 장소라는 뜻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진영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것만으로 이 의식의 의미를 전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제 재는 보관됩니다.

보통 동물 제사는 한 번 바치고 나면 그 의식이 끝납니다. 그러나 붉은 암소의 경우에는 재를 남겨 두었다가 이후 여러 정화 의식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죽음으로 인한 부정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한 번만 일어날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앞으로도 반복해서 발생할 수 있는 현실임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10절은 이 규정이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그들 가운데 머무는 거류민에게도 적용된다고 밝힙니다. 죽음으로 인한 부정과 정화의 필요는 민족적 출생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가는 거류민 역시 같은 규정 아래 있습니다.

이제 본문은 암소의 재를 준비하는 이야기에서, 사람이 죽은 뒤 남겨진 공간과 사람들의 이야기로 옮겨 갑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정화 제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타트(⁨חַטָּאָה⁩)입니다. 이 낱말은 죄를 뜻하기도 하고, 제사 규정에서는 흔히 죄를 다루는 제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에서는 단순히 도덕적 잘못의 용서만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이 재는 시신에 닿아 부정해진 사람들을 정결하게 하는 데 사용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정화 제물」이라는 번역이 이 의식의 실제 기능을 잘 드러냅니다.

죽은 사람을 만지면 왜 이레 동안 부정한가?

민수기 19:11–13 본문 →

11절부터는 정화 의식이 필요한 상황을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의 시신에든 닿은 사람은 이레 동안 부정하다.」민수기 19:11 · 본디새김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시신을 만진 사람이 어떤 의도로 만졌는지는 이 구절의 기준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시신을 만졌든, 우연히 죽은 사람의 몸에 닿았든, 시신과 접촉한 사람은 정해진 기간 동안 부정한 상태에 놓입니다.

그렇다면 왜 죽음이 이런 부정을 일으킵니까?

본문은 그 이유를 철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막과 정결에 관한 율법 전체의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막은 그분이 백성과 만나시는 장소입니다. 반면 시신은 생명이 떠난 사람의 몸입니다.

이 둘을 연결하면, 시신으로 인한 부정은 단순한 위생 문제가 아니라 죽음과 여호와야훼의 거룩한 임재 사이에 놓인 제의적 구별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이 직접 ‘죽음은 생명의 하나님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부정하다’고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성막의 거룩함과 죽음에 관한 규정들을 함께 읽을 때 도출되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죽은 사람의 몸을 악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죄가 있다는 뜻도 아니고, 시신을 돌보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더럽혀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는 셋째 날에 그 물로 자신을 정화해야 하며, 일곱째 날에 정결해질 것이다. 그러나 셋째 날에 자신을 정화하지 않으면 일곱째 날에도 정결해지지 않을 것이다.」민수기 19:12 · 본디새김

19절에서 분명히 하듯, 정결한 사람이 두 날 모두 정화용 물을 뿌려야 하며, 일곱째 날에는 정화받는 사람이 자기 옷을 빨고 몸을 씻은 뒤 저녁에 정결해집니다. 따라서 단순히 시간이 이레 지나면 저절로 정결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시신, 곧 죽은 사람의 몸에 닿고도 자신을 정화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여호와야훼의 성막을 부정하게 한 것이다. 그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이다. 부정을 없애는 물이 그에게 끼얹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부정한 상태로 있을 것이다. 그의 부정이 여전히 그 안에 있다.」민수기 19:13 · 본디새김

여기서 이 사람이 실제로 성막 안에 들어갔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막에 들어가 부정을 옮긴 사건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화되지 않은 부정은 성막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일로 취급됩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집과 천막에서 살아가지만, 그들 가운데 여호와야훼의 성막이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의 부정한 상태도 성막의 질서와 무관한 사적인 문제로만 남지 않습니다.

시신과의 접촉은 사람을 부정한 상태에 놓이게 하지만,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상태가 그 사람의 영구적인 운명이 되도록 하지는 않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민수기 9:6–14에서는 시신 때문에 부정해진 사람들이 정해진 때에 유월절을 지킬 수 없게 되자, 그들을 위해 둘째 달에 유월절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이 주어집니다. 그 사건과 민수기 19장은 직접적으로 같은 정화 의식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공통된 문제를 다룹니다. 시신으로 인해 부정해진 사람이 이스라엘의 예배와 공동체 생활에 어떻게 다시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천막 안의 모든 것이 부정해진다

민수기 19:14–16 본문 →

14절은 죽음이 일상의 공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합니다.

「율법은 이러하다. 사람이 천막 안에서 죽으면 그 천막에 들어오는 사람 모두와 그 천막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이레 동안 부정해진다.」민수기 19:14 · 본디새김

앞에서는 시신을 직접 만진 사람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직접 시신에 손을 대지 않은 사람도 부정해집니다.

천막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가족들이 먹고 자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누군가 죽으면 바로 그 일상적인 공간에 죽음이 들어옵니다.

「끈으로 묶은 덮개가 없는 열린 그릇은 모두 부정하다.」민수기 19:15 · 본디새김

왜 열린 그릇을 특별히 언급하는지는 본문이 충분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덮개가 제대로 묶여 있지 않은 그릇이 부정의 영향을 받는다는 규정은, 죽음으로 인한 부정이 생활용품을 다루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 줍니다.

이를 현대적인 감염 예방이나 위생 지침과 동일하게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시신과 접촉하지 않은 천막 안의 사람이나 물건까지 부정해진다는 규정은 일상적인 감염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과 다릅니다. 이것은 성막의 거룩함과 관련하여 사람과 물건의 제의적 상태를 구별하는 질서입니다.

16절은 장소를 천막 밖으로 넓힙니다.

「들판에서 칼에 찔려 죽은 사람이나 시신이나 사람의 뼈나 무덤에 닿은 사람은 누구나 이레 동안 부정해진다.」민수기 19:16 · 본디새김

사람이 죽은 직후의 몸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 남은 뼈와 무덤도 이 규정에 포함됩니다.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들판에서 뼈를 발견할 수도 있으며, 무덤에 닿을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상황들을 피하기만 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14장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불신앙에 빠진 세대가 광야에서 생을 마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14:29–35). 16–17장에서는 반역과 그에 따른 심판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 사이에 시신으로 인한 부정을 정화하는 규정이 놓여 있습니다.

이 규정이 특정한 사망 사건 직후에 제정되었다고 본문이 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책의 흐름 안에서 이 배치는 의미가 있습니다. 민수기는 계속해서 죽음이 발생하는 광야의 공동체를 보여 줍니다. 이제 그 공동체가 죽음을 경험한 뒤에도 어떻게 성막의 거룩함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또한 민수기 31:19–24에서는 전쟁으로 죽은 사람과 접촉한 사람들이 정해진 기간 동안 진영 밖에 머물며 정화해야 한다는 규정이 등장합니다. 이는 민수기 19장의 정화 규정이 광야의 여러 상황에서 실제로 적용되는 법임을 보여 줍니다.

재 위에 샘물을 붓다 — 죽음의 흔적과 살아 있는 물

민수기 19:17–19 본문 →

17절에서 처음에 준비했던 붉은 암소의 재가 다시 등장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위해 정화 제물을 태운 재를 조금 가져와야 한다. 그릇에 담은 그 재 위에 샘물을 부어야 한다.」민수기 19:17 · 본디새김

여기서 사용되는 물은 일반적으로 아무 물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샘물」은 직역하면 ‘살아 있는 물’입니다. 이 표현은 고여 있는 물과 구별되는 샘이나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공급되는 신선한 물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암소는 불에 타 재가 되었습니다. 이미 생명이 사라지고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재에 살아 있는 물을 붓습니다.

재와 물이 결합하여 시신에 닿은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데 사용됩니다. 물론 본문은 이 조합이 죽음과 생명의 상징이라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재가 죽음을 의미하고 물이 부활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모든 재료를 하나의 상징 체계에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의식은 단순히 물로 몸의 더러움을 씻는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재를 보관하게 하셨고, 그것을 물과 섞어 사용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물의 역할은 물 자체의 물리적 성질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정하신 정화 의식 안에서 그 물이 사용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18절에서는 정결한 사람이 에조브를 물에 담그고, 부정해진 천막과 모든 기구와 사람들에게 뿌리도록 합니다. 이 점은 앞서 14–16절에서 규정한 부정의 범위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이 의식을 통해 여호와야훼께서는 단순히 개인의 상태만을 회복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해 부정해진 일상의 공간도 다시 정결하게 하십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살던 천막을 영원히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폐기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정해진 절차를 통해 다시 정결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정결한 사람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부정한 사람에게 그 물을 뿌려야 하며, 일곱째 날에 그를 정화해야 한다. 정화받는 사람은 자기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어야 하며, 저녁에 정결해질 것이다.」민수기 19:19 · 본디새김

이 절차에서 부정한 사람은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없습니다. 정결한 사람이 그를 위해 정화용 물을 준비하고 뿌려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정결한 사람들은 부정한 사람을 무조건 피하는 역할만 맡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다시 정결한 상태로 돌아오도록 돕는 역할도 맡습니다. 이 장에는 부정의 확산을 막는 규정과 더불어, 부정한 사람을 회복시키는 규정이 함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14:5–6에서도 차라아트가 있던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에 ‘살아 있는 물’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신약의 히브리서 9:13–14는 암송아지의 재로 몸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비교합니다. 이는 민수기 19장을 직접 인용하기보다, 그 정화 의식의 의미를 후대의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확장해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수기 19장의 본래 초점은 먼저 시신으로 인해 부정해진 이스라엘 사람이 성막의 거룩함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부정해진 것이 죄인가, 정화를 거절하는 것이 죄인가?

민수기 19:20 본문 →

20절은 13절의 경고를 거의 되풀이합니다.

「부정해지고도 자신을 정화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회중 가운데서 끊어질 것이다. 그가 여호와야훼의 성소를 부정하게 했기 때문이다. 부정을 없애는 물이 그에게 끼얹어지지 않았으니 그는 부정하다.」민수기 19:20 · 본디새김

그 사람이 부정해졌다는 사실만으로 회중 가운데서 끊어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정해졌는데도 자신을 정화하지 않는 경우를 문제 삼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나 이웃이 죽을 수 있고, 시신을 만지는 일을 피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런 사람이 정결한 상태로 돌아올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절차를 무시하고 부정한 상태로 남아 있다면, 이는 단순히 부득이하게 생긴 부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정하신 정화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문제가 됩니다.

본문은 그 결과를 「회중 가운데서 끊어질 것이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집행되는지 20절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에서의 배제나 죽음과 연결될 수 있는 엄중한 표현이지만, 이 구절만으로 집행 방식 하나를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시신에 닿아 부정해진 사람을 ‘죄에 물든 사람’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정화 의식을 현대적인 회개 절차와 그대로 대응시켜서도 안 됩니다. 민수기 19장은 먼저 고대 이스라엘의 성막과 제의적 정결에 관한 규정입니다.

정결하게 하는 물에 닿아도 부정해진다

민수기 19:21–22 본문 →

이 장은 처음에 제기했던 역설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영원한 규례가 되어야 한다. 부정을 없애는 물을 뿌린 사람은 자기 옷을 빨아야 한다. 부정을 없애는 물에 닿은 사람은 저녁까지 부정해진다.」민수기 19:21 · 본디새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물 자체에 어떤 신비한 성질이 있어서 부정함을 흡수한다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원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각 사람이 의식에서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어떤 상태에 놓이는가 하는 규정입니다.

21절은 뿌린 사람에게 옷을 빨라는 명령과, 물에 닿은 사람이 저녁까지 부정하다는 규정을 구별하여 제시합니다. 따라서 모든 참여자의 정결 회복 과정이 완전히 동일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도 일시적으로 부정한 상태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정해진 의식을 수행했고, 이제 자신에게 적용되는 정결 규정을 따라야 합니다.

22절은 부정의 전파에 관한 규정으로 끝납니다.

「부정한 사람이 닿는 것은 무엇이든 부정해진다. 그것에 닿는 사람도 저녁까지 부정해진다.」민수기 19:22 · 본디새김

원문의 마지막 문장은 무엇에 닿는지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앞에서 부정해진 물건에 닿는 경우로 읽을 수 있고, 부정한 사람에게 닿는 경우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부정함이 접촉을 통해 다른 대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원칙을 강조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절은 두려운 경고이면서 동시에 이 장 전체의 정화 규정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죽음이 지나간 천막에 다시 물을 뿌리다

민수기 19:1–22 본문 →

죽음이 사람의 삶에 남긴 부정은 무시할 수 없지만, 여호와야훼께서는 그것이 영원히 남아 있도록 하지는 않으십니다. 여호와야훼의 거룩함은 죽음을 경험한 사람을 영원히 밀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다시 정결한 상태로 그분의 백성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질서와 함께 주어집니다.

민수기 19장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한 천막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곳에서 누군가 죽었습니다. 그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과 물건들은 부정해졌습니다. 죽은 사람의 몸을 만진 사람은 이레 동안 부정한 상태에 놓입니다.

그러나 그 천막이 영원히 버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명령하신 대로 붉은 암소의 재가 진영 밖 정결한 곳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정결한 사람이 그 재를 조금 가져와 샘물에 섞습니다. 그리고 에조브를 물에 담가 천막과 기구들,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뿌립니다.

죽음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들은 다시 정결한 상태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부정해졌던 생활의 공간도 정화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던 천막에 정화용 물이 뿌려집니다.

이레가 지나고, 몸을 씻은 사람에게 저녁이 찾아옵니다.

그는 이제 정결합니다.

민수기 19장은 죽음을 없애겠다는 약속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이 실제로 일어나는 광야에서, 그 죽음으로 인해 부정해진 사람들이 다시 정결해질 수 있도록 마련된 길을 보여 주며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