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49장
이 장의 자리 · 44–50장 · 조상들을 기림
무너진 도시에 남은 이름들
집회서 49장은 향기로 시작하여 한 사람의 창조로 끝납니다.
첫머리에서 저자는 요시야 왕의 기억을 잘 배합된 향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몇 절 뒤에는 예루살렘이 불타고 거리가 황폐해집니다. 왕들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언자는 박해를 받습니다. 나라의 영광이 완전히 무너진 듯한 자리에서 저자는 뜻밖에도 다시 무언가를 세우고 심는 사람들을 불러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저자는 갑자기 이스라엘의 아주 먼 과거로 돌아가 에녹과 요셉, 셈과 셋, 그리고 아담을 기억합니다.
왕조의 몰락과 예루살렘의 재건을 이야기하다가 왜 창조의 첫 사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일까요?
이 장의 중심에는 무엇이 무너진 뒤에도 남는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요시야 — 향기롭게 기억되는 왕
사람의 이름이 향기가 되다 (1절)
요시야에 대한 기억은 향 만드는 이가 솜씨로 배합한 향과 같다. 그 기억은 모든 입에서 꿀처럼 달콤할 것이며, 포도주 잔치의 음악과 같을 것이다.집회서 49:1 · 본디새김
저자는 요시야를 소개하면서 그가 얼마나 많은 전쟁에서 승리했는지, 얼마나 넓은 영토를 다스렸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를 기억할 때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이 남는지를 묘사합니다.
향기는 코로 맡고, 꿀은 입으로 맛보며, 음악은 귀로 듣습니다. 서로 다른 감각이 하나의 인물을 기억하는 경험 안에 모입니다. 그의 삶이 후대 사람들에게 기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다는 찬사입니다.
그의 이름은 사람들이 마지못해 기억하는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다시 떠올리고 싶은 기쁨에 비유됩니다.
백성을 돌이키게 한 왕 (2–3절)
그는 백성을 돌아서게 하는 일에서 올바르게 나아갔고, 불법의 가증한 것들을 없앴다.집회서 49:2 · 본디새김
열왕기하 22–23장에 따르면 요시야 시대에 성전을 수리하던 중 율법책이 발견됩니다. 왕은 그 말씀을 듣고 자기 옷을 찢습니다. 그는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백성과 함께 언약을 새롭게 하며 우상 숭배와 관련된 시설들을 제거합니다.
그는 왕이었지만 율법책을 듣고 자신과 백성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왕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왕과 백성을 판단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을 주에게 곧게 향하게 했고, 불법을 일삼는 이들의 시대에 경건을 굳게 세웠다.집회서 49:3 · 본디새김
2절에서는 백성의 방향을 돌리는 행동이 등장합니다. 3절에서는 요시야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합니다. 요시야가 백성에게 요구한 변화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요시야가 바로잡으려 했던 것은 백성의 종교적 행동만이 아니라, 그 행동이 향해야 할 방향이었습니다.
요시야는 경건을 굳게 세우려 했지만, 그가 살던 시대 전체가 그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은 아닙니다. 한 왕이 하나님께로 돌아섰다고 해서 공동체의 오랜 불순종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향은 귀하게 여겨졌으며 예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0:34–38에는 성소에서 사용할 향을 일정한 방식으로 제조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집회서가 요시야를 반드시 그 특정한 성소의 향에 직접 대응시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향의 이미지가 그의 기억에 품격을 더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2절의 ‘올바르게 나아갔고’와 3절의 ‘곧게 향하게 했고’에 같은 어근의 동사가 쓰입니다. 저자는 요시야의 외적인 개혁과 내적인 방향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왕이 있었지만, 나라는 무너졌다
왜 세 왕만 예외로 남았는가? (4절)
다윗과 히스기야와 요시야 말고는 모두 허물을 저질렀다. 그들이 지극히 높은 이의 율법을 버렸기 때문이다. 유다의 왕들은 사라졌다.집회서 49:4 · 본디새김
저자는 유다 왕들의 긴 역사를 세 사람의 이름으로 압축합니다.
이들은 집회서가 특별히 신실한 왕으로 기억하는 인물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왕조의 언약을 받은 왕이며, 히스기야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한 왕이고, 요시야는 율법을 되찾아 백성을 돌이키려 한 왕입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을 세 사람만 죄가 없었으며 다른 모든 왕은 아무런 선도 행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에게도 심각한 죄가 있었고(사무엘하 11–12장), 열왕기와 역대기는 아사나 여호사밧 같은 다른 왕들의 선한 행적도 기록합니다(열왕기상 15:11–15; 역대하 17:3–6). 집회서는 각 왕의 모든 행동을 빠짐없이 평가하는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율법을 대하는 태도에서 특별히 기억할 세 왕을 부각하면서, 유다 왕국 전체가 결국 어떤 길로 나아갔는지를 요약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향기롭게 기억되는 왕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왕이 속했던 왕조 전체의 종말이 등장합니다.
열왕기하 23:25는 요시야가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하나님께 돌아섰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말합니다(열왕기하 23:26–27).
집회서는 요시야의 삶을 향기롭게 기억하면서도, 그가 속한 나라가 맞이한 멸망을 숨기지 않습니다.
뿔을 빼앗기고 성읍이 불타다 (5–6절)
그들은 자기들의 뿔을 다른 이들에게, 자기들의 영광을 낯선 민족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다.집회서 49:5 · 본디새김
여기서 ‘뿔’은 군사적·정치적 힘과 위세를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유다 왕들은 왕권을 통해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버린 결과, 그 권세는 다른 민족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 낯선 민족은 성소가 있는 선택된 도시를 불살랐고, 그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대로 그 도시의 길들을 황폐하게 했다.집회서 49:6 · 본디새김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불태웠으며, 성벽을 무너뜨렸습니다(열왕기하 25:8–10). 유다의 왕권도 바벨론의 지배 아래 무너졌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계속 하나님을 거역한다면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고는 오랫동안 거절당했습니다.
성전의 영광이나 왕궁의 화려함을 말하지 않고 ‘그 도시의 길들’이 황폐해졌다고 말합니다. 길은 사람들이 오가고 삶을 이어 가는 곳입니다. 장사하고, 서로 만나고,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일상적인 생활이 펼쳐지는 자리입니다.
그 길들이 황폐해졌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 몇 채가 파괴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도시를 살아 있게 하던 사람들의 삶이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애가 1:4에서도 시온의 길들이 슬퍼한다고 묘사합니다. 절기를 지키러 오는 사람이 없고, 성문은 황폐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던 도시가 이제 침묵과 폐허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곧바로 성전을 다시 세우는 사람들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 폐허를 미리 경고했던 예언자를 기억합니다.
예레미야 — 무너뜨리는 말씀 속에 심는 사명이 있었다
그들이 예레미야를 해쳤기 때문이다. 그는 뿌리째 뽑고 해치고 멸망시키며, 마찬가지로 세우고 심도록 태 안에서 예언자로 거룩하게 구별되었다.집회서 49:7 · 본디새김
예레미야 1:5에서 하나님은 그를 태 안에서 빚기 전에 아셨고, 태어나기 전에 거룩하게 구별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전한 말씀 때문에 적대와 박해를 받았습니다. 성전에서 심판을 선포했다가 죽음의 위협을 받았으며(예레미야 26장), 매를 맞고 감금되었고(예레미야 20:1–2), 진흙 구덩이에 던져지기도 했습니다(예레미야 38:6).
그러나 예레미야가 겪은 박해는 그가 전한 말이 거짓이라는 증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유다가 하나님의 경고를 얼마나 완강하게 거부했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뿌리째 뽑고 해치고 멸망시키며, 마찬가지로 세우고 심도록.’ 이 표현은 예레미야 1:10에 주어진 사명을 압축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여러 나라와 왕국 위에 세우시며, 뽑고 무너뜨리고 멸망시키는 일뿐 아니라 건설하고 심는 일도 맡기십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심판 이후에 하나님이 다시 백성을 회복시키시겠다는 말씀도 전했습니다. 예레미야 31:28은 이 두 방향을 더욱 분명하게 연결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백성을 지켜보시며 뽑고 무너뜨리고 멸망시키셨던 것처럼, 다시 그들을 지켜보시며 세우고 심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전한 심판의 말씀이 성취된 뒤에도, 아직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회복의 말씀이 남아 있었습니다.
6절에서는 도시가 불타고 길들이 황폐해집니다. 7절에서는 뽑고 멸망시키는 일과 함께 세우고 심는 사명이 선언됩니다. 11–13절에서는 실제로 성전과 성벽과 집터가 다시 세워집니다.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회복의 소망으로 넘어가기 전에 또 다른 예언자를 소개합니다.
에스겔 — 성전이 무너져도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본 하나님의 영광 (8절)
에스겔은 영광의 환시를 보았다. 그룹들의 수레 위에서 그에게 보여 준 환시였다.집회서 49:8 · 본디새김
에스겔은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유다의 멸망과 유배라는 시대적 비극을 경험한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는 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배민 가운데서 예언자로 부름받았습니다(에스겔 1:1–3).
네 생물이 나타나고, 그 곁에 바퀴들이 있으며, 그 위에는 왕좌처럼 보이는 형상이 있습니다. 왕좌 위에는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있고, 그 주위에는 눈부신 광채가 나타납니다(에스겔 1:4–28). 에스겔은 그 광경을 여호와야훼의 영광을 닮은 모습이라고 묘사합니다.
집회서는 이 복잡한 환시를 ‘그룹들의 수레’라는 이미지로 요약합니다. 에스겔 10장은 첫 환시에 등장했던 생물들이 그룹들이었음을 밝혀 줍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땅의 유배민 가운데 있었습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백성이 끌려간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루살렘의 한 건물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에스겔 10–11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에스겔 43:1–5에서는 그 영광이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는 환시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이스라엘의 죄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성전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모든 관계의 소멸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성전은 무너질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유배지에서도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소나기 속의 원수들 — 해석이 어려운 한 구절 (9절)
또 소나기 속에서 원수들을 기억했고, 길을 곧게 하는 이들을 잘되게 할 일도 기억했기 때문이다.집회서 49:9 · 본디새김
이 절은 집회서 49장에서 의미를 확정하기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스어의 ‘원수들과 소나기’를 따르면 심판과 의로운 길을 걷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대우가 강조됩니다. 히브리어 전승의 ‘욥’을 따르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의를 지킨 사람에 대한 기억이 강조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어느 한쪽을 에스겔의 특정한 사건에 대한 확실한 설명이라고 단정하지 않는 편이 타당합니다. 다만 이 구절을 에스겔에 대한 평가의 연장으로 읽든, 의로운 욥을 떠올리는 별도의 언급으로 읽든,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시고 의로운 길을 기억하신다는 주제는 주변 문맥과 어울립니다.
조금 더 깊이
본디새김이 따른 그리스어 본문에는 ‘원수들’과 ‘소나기’가 등장합니다. 이를 에스겔의 예언과 연결한다면, 하나님이 폭우와 폭풍을 통해 악을 심판하시는 장면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에스겔 13:11–13에서는 거짓된 안전을 약속하는 예언자들을 심판하는 이미지로 폭우와 우박과 폭풍이 등장합니다. 에스겔 38:22에서도 하나님이 원수들을 심판하시는 장면에 큰비와 우박이 나타납니다. 또한 히브리어 전승에는 ‘욥’을 언급하는 읽기가 있습니다. 이를 따르면 에스겔이 욥을 기억했다는 뜻이 됩니다. 에스겔 14:14, 20에서 하나님은 노아와 다니엘과 욥을 의로운 사람들의 사례로 언급하십니다. 따라서 욥을 읽는 본문은 에스겔서의 실제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열두 예언자 — 무덤에 있는 뼈가 다시 꽃피기를
그리고 열두 예언자의 뼈들이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다시 꽃피기를. 또 그는 야곱을 위로했고, 소망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을 속량했다.집회서 49:10 · 본디새김
열두 예언자는 호세아에서 말라기까지 이어지는 열두 소예언자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소예언자’라는 이름은 그들의 사명이 덜 중요했다는 뜻이 아니라, 전승된 책들의 분량이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긴 예언서에 비해 짧다는 뜻입니다. 집회서는 이들을 각자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하나의 무리로 기억합니다.
뼈는 생명이 떠난 몸의 흔적이고, 꽃은 새롭게 돋아나는 생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예언자들의 기억이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시적인 기원입니다. 조금 전 예레미야에게 맡겨진 사명은 뽑고 멸망시키는 일만이 아니라 다시 세우고 심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예언자들의 뼈에서 꽃이 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구체적인 육체 부활의 방식이나 시점을 설명하는 선언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의 직접적인 관심은 죽은 예언자들의 기억과 그들이 전한 말씀이 계속해서 생명의 의미를 갖는 데 있습니다.
이어지는 ‘그는 야곱을 위로했고’라는 문장은 주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고 속량하셨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열두 예언자의 말씀을 하나의 전승으로 보아, 그 말씀이 백성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열두 예언자의 책에는 죄에 대한 날카로운 심판의 말씀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호세아 14장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초대와 회복의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요엘 2:25–27은 메뚜기 떼가 먹어 치운 세월을 하나님이 회복시키시겠다고 말합니다.
아모스 9:11–15는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성읍을 재건할 것을 약속합니다. 심판을 선포한 예언자들이 동시에 회복의 소망도 전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몸은 땅에 묻혔지만 그들이 전한 말은 공동체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회복의 약속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저자는 이제 유배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전승에는 위로하고 속량했다는 동사가 단수로 나타나는 형태와 복수로 나타나는 형태가 있어, 본디새김의 ‘그’를 어느 한쪽으로 확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소망을 전하셨다는 큰 흐름은 분명합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 — 하나님이 다시 세우기 시작하신 공동체
오른손의 인장
우리가 스룹바벨을 어떻게 높이 기릴까? 그는 오른손에 있는 인장과 같았다.집회서 49:11 · 본디새김
스룹바벨은 바벨론 유배 이후 유다의 회복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지도자입니다.
에스라 3:2와 학개 1:1에 따르면 그는 여호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함께 성전 재건에 참여했습니다. 학개서에서는 유다 총독으로 소개됩니다.
인장은 문서나 물건에 찍어 그 소유권과 권위를 확인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왕이나 고위 관리의 인장은 그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오른손에 있는 인장은 가까이 간직하는 귀한 물건이자 권위를 행사하는 도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학개 2:23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스룹바벨을 자신의 종으로 부르시며, 그를 인장처럼 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22:24에서 하나님은 유다 왕 여호야긴을 향해, 그가 자신의 오른손에 있는 인장이라 하더라도 뽑아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때 다윗 왕조에 주어진 권세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거두어졌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배 이후 스룹바벨에게는 다시 인장의 이미지가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왕권의 역사를 외면하지 않으셨지만, 그 실패가 자신의 백성을 향한 모든 약속의 끝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으셨습니다.
스룹바벨은 유다의 왕으로 즉위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 활동한 유다의 지도자였습니다. 따라서 인장의 약속을 곧바로 다윗 왕조가 이전과 같은 독립 왕국으로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아직 정치적 자유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위해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건물만이 아니라 백성을 세우다
여호사닥의 아들 예수아도 그러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시대에 집을 지었고, 영원한 영광을 위해 준비된, 주를 위한 거룩한 백성을 높였다.집회서 49:12 · 본디새김
여기서 예수아는 여호수아라는 이름과 같은 히브리어 이름 계열에 속하지만, 모세의 뒤를 이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아닙니다. 그는 유배 이후 성전 재건에 참여한 대제사장 예수아입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았습니다. 스룹바벨은 정치적 지도자였고, 예수아는 제사장으로서 공동체의 예배를 이끄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하나님의 집을 다시 세우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여기서 ‘집’은 성전을 가리킵니다. 에스라 3장과 5–6장은 귀환한 사람들이 제단과 성전을 다시 세우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거룩한 성전’으로 읽으면 성전을 건축했다는 말이 강조됩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읽으면 건물을 세우는 일과 함께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 강조됩니다. 두 읽기는 서로 배타적인 의미만을 갖지는 않습니다.
당시 성전 재건은 단순히 낡은 건물을 복구하는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다시 함께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갈 공동체를 재형성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세우려 하신 것은 무너진 건물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백성이었습니다.
이제 저자는 성전 밖으로 시선을 넓힙니다.
백성이 함께 살아갈 도시의 성벽과 문과 집터가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거룩한 백성’에는 중요한 그리스어 본문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 전승은 ‘거룩한 성전’에 해당하는 표현을 전하지만, 본디새김이 따른 본문에서는 ‘거룩한 백성’을 뜻하는 라온 하기온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신약과의 연결도 조심스럽게 살필 수 있습니다. 신약은 스룹바벨을 다윗의 후손 계보 안에 포함하며(마태복음 1:12–13), 예언자들이 전한 회복의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읽습니다. 이는 집회서 49장의 직접적인 주장이라기보다, 구약의 약속과 회복에 관한 전통을 이어받은 후대의 정경적 읽기입니다.
느헤미야 — 무너진 집터를 다시 일으킨 사람
또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무너진 성벽을 일으키고, 문과 빗장을 세우며, 우리의 집터들을 다시 일으킨 이를 널리 기린다.집회서 49:1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느헤미야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들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느헤미야 1:3–4). 그는 그 소식 앞에서 울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후 페르시아 왕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이끕니다.
성벽이 무너진 도시는 외부의 공격과 약탈에 취약했습니다. 문과 빗장이 없으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공동체의 안전을 지키기도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성벽의 재건은 사람들이 다시 일상을 이어 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도시를 재건한다는 것은 높은 성벽을 완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사람들이 살아야 합니다. 가족들이 머물 집이 있어야 하고, 이웃들이 함께 생활할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집회서는 그 생활의 공간까지 다시 세워졌다는 점을 기억합니다.
6절에서는 예루살렘의 길들이 황폐해졌습니다. 이제 13절에서는 성벽과 문과 빗장과 집터가 다시 일어납니다. 불타고 텅 비었던 도시가 다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일을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사역은 다음 세대가 살아갈 공동체의 터전을 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성벽을 쌓은 사람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후대의 ‘우리’가 살아갈 도시를 세운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참된 회복은 무너진 것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사람들이 살아갈 자리를 마련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나 저자는 마지막에 전혀 다른 시대의 인물들을 불러옵니다.
조금 더 깊이
일반적인 그리스어 본문에는 느헤미야의 이름이 직접 나타납니다. 본디새김은 다른 어형을 따라 이름을 명시하지 않고 기억이 널리 전해지는 것으로 옮겼지만, 성벽과 문과 빗장이라는 내용은 느헤미야 2–6장의 재건 활동과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에녹과 요셉 — 떠난 사람과 남겨진 뼈
에녹은 왜 이 자리에 등장하는가?
땅 위에서는 에녹 같은 이가 하나도 창조되지 않았다. 그 자신이 땅에서 들려 올라갔기 때문이다.집회서 49:14 · 본디새김
에녹은 창세기 5:21–24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의 후손들이 차례로 기록되며, 각 사람의 삶은 반복해서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에녹에 관한 설명은 다릅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으므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회서는 그 특별한 사건을 ‘땅에서 들려 올라갔다’고 표현합니다.
에녹의 위대함은 왕국을 세우거나 성전을 건축한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앞에서 등장한 요시야나 스룹바벨, 느헤미야와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이유로 특별하게 기억됩니다. 에녹이 이 장의 끝부분에 등장하는 것은 독자를 이스라엘의 왕정과 유배의 역사보다 훨씬 먼 과거로 데려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기억하는 일은 왕국의 역사에서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기 이전에도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에녹의 특별한 떠남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창세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그의 독특함을 찬탄할 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에녹이 이후 어디에서 어떤 상태로 살아가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요셉의 뼈를 보살피다
요셉은 형제들을 이끄는 사람이자 백성의 버팀목이 되었고, 그의 뼈들도 보살핌을 받았다.집회서 49:15 · 본디새김
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이집트로 팔려 갔지만, 훗날 이집트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기근의 시기에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는 역할을 맡았고, 자신을 팔아 버린 형제들과도 다시 만났습니다(창세기 37–50장).
집회서는 그를 ‘형제들을 이끄는 사람’이자 ‘백성의 버팀목’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기근에 대비해 곡식을 저장했고, 굶주림에 처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했습니다. 자신의 가족도 그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의 권한은 사람들을 지탱하는 역할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집회서는 요셉의 업적을 말한 뒤 뜻밖에도 그의 뼈에 주목합니다.
창세기 50:24–25에서 요셉은 죽기 전에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반드시 그들을 찾아 돌보시고,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뼈를 이집트에서 가지고 올라가 달라고 부탁합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높은 지위를 누렸지만, 자신의 마지막 희망을 이집트의 영광에 두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13:19는 모세가 이집트를 떠날 때 요셉의 뼈를 가지고 나왔다고 기록합니다. 여호수아 24:32는 이스라엘이 그 뼈를 세겜에 묻었다고 전합니다.
그의 뼈를 돌보는 일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기억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열두 예언자의 뼈에는 그들의 말씀이 후대에도 생명력 있게 남기를 바라는 기원이 담겨 있습니다. 요셉의 뼈에는 실제로 여러 세대를 거쳐 보존되고 옮겨진 약속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뼈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죽음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오래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뼈를 옮긴 사람들은 그 믿음을 행동으로 기억했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 느헤미야는 무너진 이스라엘의 삶을 다시 세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셉은 아직 땅에 들어가지 못한 시대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바라보며 자신의 뼈를 옮겨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약속의 성취를 기다렸고, 다른 사람들은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며 그 약속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셈과 셋과 아담 — 모든 영광의 출발점
셈과 셋은 사람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았고, 아담은 창조 세계에서 모든 생물보다 더 큰 영광을 받았다.집회서 49:16 · 본디새김
마지막 절은 이스라엘의 역사보다 더 먼 과거로 독자를 데려갑니다.
셈은 노아의 아들이고, 셋은 아담과 하와의 아들입니다. 이들은 창세기의 초기 족보에 등장하며,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인간 역사를 보여 주는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아담이 등장합니다.
이 순서는 단순히 오래된 사람부터 최근 사람까지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역사 속의 왕들과 예언자들을 기억한 뒤, 더욱 오래된 조상들을 거슬러 올라가 창조의 첫 사람에게 이릅니다.
창세기 1:26–28과 2:7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특히 창세기 1장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집회서는 그 창조의 영광을 기억하는 것으로 이 장을 마칩니다.
아담은 왕좌에 앉아 다스린 왕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불타는 도시를 다시 세운 지도자로 소개되지도 않습니다. 그의 영광은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셨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존귀함은 자신이 이룬 업적보다 먼저, 하나님께 생명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맺음말 — 모든 이름의 시작으로 돌아가다
하나님은 왕국이 존재하기 전부터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셨습니다. 왕조가 무너지고 성전이 불탄 뒤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기억하셨습니다. 나라의 존귀함은 사라질 수 있었고, 도시의 영광은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에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사람의 영광은 무너질 수 있지만, 그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행하신 일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집회서 49장은 마지막에 또 다른 왕이나 위대한 예언자를 세우지 않습니다. 아무런 왕관도 쓰지 않은 첫 사람,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을 남깁니다.
수많은 왕과 예언자와 지도자의 이름을 지나, 독자는 마침내 모든 인간의 존귀함이 시작된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곳에는 아직 왕국도 없고, 성전도 없으며, 무너진 성벽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