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빗기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두 집의 기도

죽음을 구한 두 사람에게 열린 살 길

토빗기 3장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니느웨에 사는 눈먼 노인 토빗이고, 다른 한 사람은 메대의 엑바타나에 사는 젊은 여자 사라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지 못합니다. 처한 형편도 다릅니다. 토빗은 선행을 베풀다가 재산을 잃었고, 이제는 시력마저 잃어 아내의 노동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사라는 일곱 번이나 결혼했지만 남편들이 모두 죽었고, 그 죽음에 대한 책임까지 자신이 떠안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같은 날 거의 똑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기도입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삶이 끝나기를 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서로 떨어져 있는 그들의 삶을 연결하여 고치실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읽는 시간 16분소단락 63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은 의로우시지만,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토빗기 3:1–6 본문 →

3장은 앞 장 마지막에 있었던 안나와의 다툼에서 바로 이어집니다. 토빗은 아내가 정직하게 받은 선물까지 의심했고, 안나는 남편이 베푼 의로운 일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 뒤 토빗이 보인 반응은 반박이 아니라 울음이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받은 모욕만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곧 이어지는 기도를 보면, 그의 마음에는 자신의 고난과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 조상들의 죄까지 함께 얽혀 있습니다.

「주님, 당신은 의로우시며, 당신의 모든 일은 의롭고, 당신의 모든 길은 자비와 진실입니다. 당신은 세상을 심판하십니다.」토빗기 3:2 · 본디새김

토빗은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배운 신앙의 언어로 말합니다.

1:3에서 토빗은 자신이 ‘진실의 길’을 걸으며 의롭게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3:2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길이 ‘자비와 진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말을 합니다.

「이제 제 죄 때문에 저에게 내리시는 당신의 많은 판결은 참됩니다. 저희가 당신의 계명을 행하지 않았고 당신 앞에서 진실하게 걷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토빗기 3:5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이 진실의 길을 걸으려고 노력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의 역사를 돌아볼 때에는 자신과 조상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걷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한결같이 자비와 진실의 길이지만, 그 길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탄식이 이스라엘 전체의 고백이 되다

3–5절에서 토빗은 반복해서 죄를 말합니다.

「이제 주님, 저를 기억하고 살펴 주십시오. 제 죄와 저와 제 조상들이 모르고 저지른 잘못 때문에 저를 벌하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 앞에서 죄를 지었고,」토빗기 3:3 · 본디새김

처음에는 ‘저를 기억하고 살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곧 ‘저희를 약탈과 포로살이와 죽음에 넘기셨고’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자신의 죄를 언급했다가, 끝에서는 ‘저희가 당신의 계명을 행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토빗의 기도에는 ‘나’와 ‘우리’가 계속 오갑니다.

그가 지금 겪는 괴로움은 개인적인 일이지만, 그가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틀은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자신이 북이스라엘의 잘못된 예배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해서, 민족이 겪는 심판의 역사와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이 기도는 신명기 28장의 언약적 경고를 배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면 다른 민족들에게 패배하고, 흩어지고,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는 경고를 듣습니다(신명기 28:25, 36–37, 64).

비슷한 기도의 방식은 다니엘 9:4–19에서도 나타납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만을 호소하지 않고, 왕들과 지도자들과 조상들을 포함한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고백합니다.

토빗이 자신의 죄와 조상들의 죄를 고백한다는 사실이, 그의 시각 장애나 가난이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이었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은 토빗의 실명을 앞선 사고로 설명했으며(2:9–10), 그 사고가 특정한 죄의 결과였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토빗은 자기 고난의 원인을 모두 아는 사람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으로 기도합니다.

죽음을 구하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찾다

6절에 이르면 기도는 더욱 절박해집니다.

「이제 당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저를 대하십시오. 제가 땅 위를 떠나 흙이 되도록 제 숨을 제게서 거두어 가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그러니 제게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거짓된 모욕을 들었고 큰 슬픔이 저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가 이 고난에서 풀려나도록 명령해 주십시오. 저를 영원한 곳으로 보내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지 마십시오. 그러니 제 삶에서 큰 고난을 겪느니 죽어 모욕도 듣지 않는 편이 제게 더 낫습니다.」토빗기 3:6 · 본디새김

죽기를 바라면서도 하나님께 버림받고 싶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3절의 ‘저를 기억하고 살펴 주십시오’와 6절의 ‘당신의 얼굴을 돌리지 마십시오’는 같은 마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눈길에서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의 간절한 기도가 끝나자마자 전혀 다른 장소로 옮겨 갑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영원한 곳’으로 보내 달라는 표현 역시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토빗은 숨이 거두어지고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만으로 그가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구체적인 교리를 진술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똑같은 모욕을 듣는 사람

토빗기 3:7–9 본문 →

그날 메대의 엑바타나에 사는 라구엘의 딸 사라도 자기 아버지의 여종 하나에게 모욕을 들었다.토빗기 3:7 · 본디새김

지금까지 독자는 주로 토빗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토빗은 자신이 무엇을 했고, 누구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어떻게 고통을 당했는지 직접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7절부터는 서술자가 토빗이 알지 못하는 사건을 들려줍니다.

토빗이 자신의 고난을 견디지 못해 기도하던 날,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누군가가 모욕을 듣고 깊은 괴로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토빗은 6절에서 자신이 ‘거짓된 모욕’을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라도 7절에서 여종에게 모욕을 당합니다.

그러나 모욕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릅니다.

토빗은 자신이 베푼 선행이 비웃음을 당하고 가족 안에서도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을 겪습니다. 사라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죽음의 책임을 떠안고 있습니다.

사라는 일곱 남자에게 시집갔지만, 여자들에게 정해진 대로 그들이 사라와 잠자리를 갖기도 전에 악한 귀신 아스모대오스가 그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 여종이 사라에게 말했다. 「네 남편들을 죽이는 사람은 바로 너야. 봐라, 너는 벌써 일곱 남자에게 시집갔지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의 아내로도 불리지 못했잖아.」토빗기 3:8 · 본디새김

사라는 일곱 남편을 죽인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곱 번이나 남편을 잃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은 그를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로 취급합니다.

여기서 아스모대오스는 단순히 사라의 불행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를 남편들을 실제로 죽인 악한 귀신으로 소개하고, 17절에서 그를 사라에게서 떼어 놓는 일을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포함합니다. 따라서 사라가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남편들이 죽었다고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일곱 번 결혼했지만 누구의 아내로도 살지 못한 사람

여종의 비난은 남편들의 죽음만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의 아내로도 불리지 못했다’는 표현은 어느 남편의 이름으로도 불리지 못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어떤 혼인도 부부로 살아갈 만큼 유지되지 못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사라는 결혼할 때마다 기대했던 삶을 시작하기도 전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네 남편들이 죽었다고 왜 우리를 채찍질하느냐? 그들과 함께 가 버려라. 우리가 네 아들도 딸도 영영 보지 않기를 바란다.」토빗기 3:9 · 본디새김

이것은 사라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까지 부정하는 말입니다.

남편이 모두 죽었으니 너도 죽으라는 뜻이고, 네게서 자녀가 태어나는 일도 없기를 바란다는 저주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가족 사회에서 혼인과 자녀는 가문의 존속과 재산의 계승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사라가 뒤에서 자신이 외동딸이며 아버지에게 다른 상속자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과 관련됩니다.

다만 여종이 사라에게 자신들을 왜 채찍질하느냐고 항의한 내용도 본문에 있습니다. 사라가 여종들을 실제로 부당하게 대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 대목은 여종의 주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사라도 죽음을 생각합니다.

사라는 다락방에서 다시 생각했습니다

토빗기 3:10 본문 →

사라는 여종의 말을 듣고 울면서 아버지 집의 다락방으로 올라갑니다.

그날 사라는 마음이 슬퍼 울었고, 자기 아버지의 다락방으로 올라가 목을 매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고 말했다. 「사람들이 내 아버지를 모욕하며 아버지에게 『당신에게 사랑하는 외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불행 때문에 목을 맸소.』 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늙은 아버지를 슬픔 속에 하데스로 내려가게 하고 말 것이다. 목을 매지 않고, 내가 죽어 내 삶에서 더는 모욕을 듣지 않도록 주께 간청하는 편이 내게 더 낫다.」토빗기 3:10 · 본디새김

이 짧은 전환이 사라의 생명을 지킵니다.

그는 자신이 이미 수많은 모욕을 당하고 있지만, 자신의 죽음으로 아버지까지 모욕과 슬픔을 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사라가 걱정하는 것은 아버지가 슬픔을 안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사라의 절망을 신앙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가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에 대한 염려였지만, 이것을 극심한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가족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다는 식의 단순한 교훈으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사라는 여전히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에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스스로 생을 끝내려던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로 옮겨 갔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토빗의 기도와 사라의 기도가 서로 만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하데스(ᾅδης)’는 그리스어 하데스로, 이 문맥에서는 죽은 자들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구약의 히브리어 ‘스올’과 대응되는 용법이며, 반드시 후대에 말하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겠다고 말합니다(창세기 37:35). 훗날 베냐민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야곱과 유다는 그것이 야곱의 흰머리를 슬픔 가운데 스올로 내려가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창세기 42:38, 44:29–31).

토빗은 용서를 구했고, 사라는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습니다

토빗기 3:11–15 본문 →

사라는 창문을 향해 두 손을 펴고 기도합니다.

바로 그때 사라는 창문을 향해 두 손을 펴고 간청하며 말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당신은 찬양받으실 분이며, 당신의 이름도 영원히 찬양받을 이름입니다.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이 영원히 당신을 찬양하게 하십시오.」토빗기 3:11 · 본디새김

토빗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자비와 진실을 고백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자비와 영원히 찬양받으실 이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기도의 내용은 다릅니다.

토빗은 죄를 고백했습니다.

사라는 자신의 결백을 호소합니다.

「주인이시여, 당신은 제가 남자와 관련된 어떤 더러움도 없이 깨끗하다는 것과,」 「제가 포로로 사는 땅에서 제 이름도 제 아버지의 이름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을 아십니다. 저는 아버지의 외동딸이며, 아버지에게는 유산을 물려받을 다른 자녀가 없습니다. 제가 아내가 되려고 제 몸을 지켜 둘 상대도 아버지의 가까운 형제나 친척 가운데 없습니다. 저는 이미 일곱 남편을 잃었습니다. 제가 더 살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 저를 죽이는 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이제 제가 받는 모욕을 귀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토빗기 3:14–15 · 본디새김

이 말은 사라가 자신은 평생 어떤 죄도 지은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라가 결백을 주장하는 영역은 구체적입니다. 그가 듣고 있는 모욕이 바로 혼인과 남편들의 죽음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그들에게 자신을 변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고난당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고난을 죄의 결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라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는 것도 정당한 기도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시편 7:3–5에서 시인은 자신이 비난받는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에 합당한 심판을 받겠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호소합니다. 시편 26:1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온전함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근거로 판단해 달라고 구합니다.

외동딸에게 남은 길이 없다는 절망

사라의 기도는 자신의 혼인과 가족에 관한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그에게 결혼은 단지 개인적인 행복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의 노후와 가문의 계속됨,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삶이 어떤 자리를 갖게 되는지와도 연결됩니다.

사라는 일곱 남편을 잃었고, 이제는 자신의 앞날을 도무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제가 더 살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나 기도는 이 질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라는 죽음을 원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모욕을 들어 달라고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뜻을 가지고 계실 가능성을 남겨 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서술자는 두 기도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라엘의 율법에는 아들이 없는 가정의 재산을 딸이 상속받을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민수기 27:1–11). 또한 민수기 36:6–9에서는 상속받은 땅이 다른 지파로 넘어가지 않도록 상속녀가 자기 조상 지파 안에서 결혼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사라가 가까운 친족 가운데 자신이 아내가 될 만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17절에서 토비야에게 사라를 아내로 맞을 우선적인 권리가 있다고 설명하는 것에는 이러한 친족과 상속의 관습이 배경으로 놓여 있습니다. 다만 토빗기의 혼인 관계를 민수기 규정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본문은 토비야의 우선권을 분명히 말하지만, 모든 가족 관계와 법적 절차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두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만났습니다

토빗기 3:16–17 본문 →

바로 그때 두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받아들여졌다.토빗기 3:16 · 본디새김

두 사람의 나이도 다르고, 고통의 종류도 다르며, 기도의 내용도 다릅니다. 그런데 서술자는 그들의 기도를 ‘두 사람의 기도’라고 하나로 묶습니다.

서로의 존재도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의 사건 안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토빗은 자신이 아는 세계만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의 가족과 과거의 선행, 자신의 고난이 그의 이야기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제 토빗의 삶 바깥에서도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압니다.

죽음을 요청한 두 사람을 고치기 위해 보내진 라파엘

17절은 그 응답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라파엘이 보내졌다. 토빗의 눈에서 백태를 없애 그가 자기 눈으로 하나님의 빛을 보게 하고, 라구엘의 딸 사라를 토빗의 아들 토비야에게 아내로 주고, 악한 귀신 아스모대오스를 사라에게서 떼어 놓기 위해서였다. 사라를 아내로 맞으려는 모든 사람보다 토비야에게 그녀를 아내로 맞을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토빗은 뜰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왔고, 라구엘의 딸 사라도 다락방에서 내려왔다.토빗기 3:17 · 본디새김

그런데 ‘고친다’는 말이 두 사람에게 적용되는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토빗은 실제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사라는 남편들을 죽이는 악한 귀신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그로 인해 부당한 비난과 사회적 고립을 겪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두 사람에게 똑같은 처방을 내리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독자에게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방향을 알려 주는 장면입니다. 다만 그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아직 이야기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빛을 본다는 것

17절에서 토빗에게 약속된 회복은 단순히 눈이 낫는 것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빛’이라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여기서 먼저 가리키는 것은 토빗이 다시 볼 수 있게 될 빛입니다. 그의 시각 장애가 치유된다는 구체적인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토빗은 3절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살펴 달라고 구했고, 6절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돌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그가 다시 자신의 눈으로 하나님의 빛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께 자신을 봐 달라고 요청한 기도가, 그 자신이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약속과 연결됩니다.

그 빛을 다시 보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제 그날을 기대할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라파엘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이 고치셨다’ 또는 ‘하나님이 고치신다’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이름 자체가 그가 맡은 임무와 잘 어울립니다. 시편 36:9는 하나님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본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13:3에서도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눈을 밝혀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에서 빛은 생명과 하나님의 돌보심을 드러내는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창세기 24장에서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먼 길을 떠나고, 하나님께 인도를 구합니다.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 리브가는 물을 길으러 나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만나면서 하나님의 인도가 드러납니다. 룻기에서도 나오미와 룻은 자신들의 앞날을 알지 못한 채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룻이 먹을 양식을 구하려고 밭에 나갔다가 보아스를 만나는 일이 두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 놓습니다(룻기 2:1–3). 이런 이야기들이 말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선택이 처음부터 운명처럼 결정되어 있다는 단순한 주장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자기 앞에 놓인 일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관계와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뜰에서 집으로, 다락방에서 아래로

토빗기 3:1–17 본문 →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셨지만, 사람들은 아직 그 결과를 보지 못합니다. 독자는 이제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토빗과 사라에게는 아무런 설명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눈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기도는 이미 하나님 앞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죽음의 탄식에 언제나 극적인 회복이 뒤따른다는 보편적인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토빗기는 이 두 사람에게 실제로 어떤 구원이 마련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모든 고난이 반드시 비슷한 방식으로 해결된다는 원리를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토빗은 여전히 앞을 볼 수 없는 채 집으로 돌아갑니다.

사라는 여전히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한 채 다락방에서 내려옵니다.

토빗기 3장은 기적이 일어나는 장면이 아니라, 아직 기적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한 사람은 뜰에서 집 안으로 들어가고, 다른 한 사람은 다락방에서 계단을 내려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내일을 향해 걸어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