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빗기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두 집의 기도
죽음을 구한 두 사람에게 열린 살 길
토빗기 3장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니느웨에 사는 눈먼 노인 토빗이고, 다른 한 사람은 메디아의 엑바타나에 사는 젊은 여자 사라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지 못합니다. 처한 형편도 다릅니다. 토빗은 선행을 베풀다가 재산을 잃었고, 이제는 시력마저 잃어 아내의 노동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사라는 일곱 번이나 결혼했지만 남편들이 모두 죽었고, 그 죽음에 대한 책임까지 자신이 떠안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같은 날 거의 똑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기도입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삶이 끝나기를 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서로 떨어져 있는 그들의 삶을 연결하여 고치실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지만,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3장은 앞 장 마지막에 있었던 안나와의 다툼에서 바로 이어집니다. 토빗은 아내가 정직하게 받은 선물까지 의심했고, 안나는 남편이 베푼 의로운 일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 뒤 토빗이 보인 반응은 반박이 아니라 울음이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받은 모욕만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곧 이어지는 기도를 보면, 그의 마음에는 자신의 고난과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 조상들의 죄까지 함께 얽혀 있습니다.
「주님은 올바르십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올바르며, 주님의 모든 길에는 자비와 진실이 있습니다. 주님은 온 세상을 심판하십니다.」토빗기 3:2 · 두루새김
토빗은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배운 신앙의 말로 이야기합니다.
원문에서는 1:3에서 토빗이 진실의 길을 걸으며 의롭게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3:2에서는 「주님의 모든 길에는 자비와 진실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말을 합니다.
「제 죄 때문에 저에게 내리시는 주님의 많은 판결은 옳습니다. 저희가 주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고, 주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토빗기 3:5 · 두루새김
그는 자신이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의 역사를 돌아볼 때에는 자신과 조상들이 「주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길에는 한결같이 자비와 진실이 있지만, 그 길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탄식이 이스라엘 전체의 고백이 되다
「주님, 이제 저를 기억하고 살펴 주십시오. 제 죄 때문에, 또 저와 제 조상들이 모르고 저지른 잘못 때문에 저를 벌하지 마십시오. 저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지었고,」토빗기 3:3 · 두루새김
처음에는 「저를 기억하고 살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곧 「저희가 가진 것을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가며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자신의 죄를 언급했다가, 끝에서는 「저희가 주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고」라고 말합니다.
토빗의 기도에는 「저」와 「저희」가 계속 오갑니다.
그가 지금 겪는 괴로움은 개인적인 일이지만, 그가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틀은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이 기도는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어길 때 주어진 경고를 배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면 다른 민족들에게 패배하고, 흩어지고,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경고를 듣습니다(신명기 28:25, 36–37, 64).
비슷한 기도의 방식은 다니엘 9:4–19에서도 나타납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만을 호소하지 않고, 왕들과 지도자들과 조상들을 포함한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고백합니다.
토빗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북이스라엘의 잘못된 예배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해서, 민족이 겪는 심판의 역사와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개인적인 삶의 기억과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에 대한 고백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토빗이 자신의 죄와 조상들의 죄를 고백한다는 사실이, 그가 앞을 보지 못하거나 가난해진 일이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벌이었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은 토빗이 눈먼 일을 앞선 사고로 설명했으며(2:9–10), 그 사고가 특정한 죄의 결과였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토빗은 자기 고난의 원인을 모두 아는 사람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올바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으로 기도합니다.
죽음을 구하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찾다
6절에 이르면 기도는 더욱 절박해집니다.
「이제 주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저를 대하십시오. 제가 이 땅을 떠나 흙으로 돌아가도록 제 숨을 거두어 가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저는 거짓된 말로 모욕을 당했고 큰 슬픔에 잠겨 있으니, 사는 것보다 죽는 편이 낫습니다. 주님, 제가 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명령해 주십시오. 저를 영원히 머물 곳으로 보내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십시오. 살아서 이 큰 고통을 겪느니 죽는 편이 낫습니다. 더는 모욕을 듣지 않게 해 주십시오.」토빗기 3:6 · 두루새김
죽기를 바라면서도 하나님께 버림받고 싶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 드리는 기도에는 이러한 긴장이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토빗은 더 살아갈 힘이 없다고 느끼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끊어지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3절의 「저를 기억하고 살펴 주십시오」와 6절의 「저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십시오」는 같은 마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눈길에서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의 간절한 기도가 끝나자마자 전혀 다른 장소로 옮겨 갑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영원히 머물 곳」으로 보내 달라는 표현 역시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토빗은 숨이 거두어지고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만으로 그가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구체적인 교리를 말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똑같은 모욕을 듣는 사람
바로 그날, 메디아의 엑바타나에 사는 라구엘의 딸 사라도 아버지의 여종 하나에게 모욕을 들었습니다.토빗기 3:7 · 두루새김
지금까지 독자는 주로 토빗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토빗은 자신이 무엇을 했고, 누구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어떻게 고통을 당했는지 직접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7절부터는 이야기를 전하는 이가 토빗이 알지 못하는 사건을 들려줍니다.
토빗이 자신의 고난을 견디지 못해 기도하던 날,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누군가가 모욕을 듣고 깊은 괴로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토빗은 6절에서 자신이 「거짓된 말로 모욕을 당했고」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라도 7절에서 여종에게 「모욕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반복되는 「모욕」이라는 말은 두 사람의 삶을 연결합니다.
그러나 모욕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릅니다.
토빗은 자신이 베푼 선행이 비웃음을 당하고 가족 안에서도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을 겪습니다. 사라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죽음의 책임을 떠안고 있습니다.
사라는 일곱 남자와 차례로 결혼했지만, 부부로서 잠자리를 같이하기도 전에 악한 귀신 아스모대오스가 남편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 여종은 사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남편들을 죽이는 건 바로 너야. 벌써 일곱 남자와 결혼했으면서, 그중 한 사람의 아내로도 불리지 못했잖아.」토빗기 3:8 · 두루새김
여종의 말은 이야기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사라는 일곱 남편을 죽인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곱 번이나 남편을 잃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은 그를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로 취급합니다.
여기서 아스모대오스는 단순히 사라의 불행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를 남편들을 실제로 죽인 악한 귀신으로 소개하고, 17절에서 그를 사라에게서 떼어 놓는 일을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포함합니다. 따라서 사라가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남편들이 죽었다고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일곱 번 결혼했지만 누구의 아내로도 살지 못한 사람
여종의 비난은 남편들의 죽음만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중 한 사람의 아내로도 불리지 못했잖아」라는 표현은 어느 남편의 이름으로도 불리지 못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어떤 혼인도 부부로 살아갈 만큼 유지되지 못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사라는 결혼할 때마다 기대했던 삶을 시작하기도 전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여종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네 남편들이 죽었다고 왜 우리를 채찍으로 때려? 너도 그들을 따라가 버려. 우리가 네 아들도 딸도 영영 보지 않기를 바란다.」토빗기 3:9 · 두루새김
이것은 사라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까지 부정하는 말입니다.
남편이 모두 죽었으니 너도 죽으라는 뜻이고, 네게서 자녀가 태어나는 일도 없기를 바란다는 저주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가족 사회에서 결혼과 자녀는 가문이 이어지고 재산을 물려주는 일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사라가 뒤에서 자신이 외동딸이며 아버지에게 재산을 물려받을 다른 자녀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과 관련됩니다.
다만 여종이 사라에게 자신들을 왜 「채찍으로 때려」라고 항의한 내용도 본문에 있습니다. 사라가 여종들을 실제로 부당하게 대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 대목은 여종의 주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삶이 더는 견딜 만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사라도 죽음을 생각합니다.
사라는 다락방에서 다시 생각했습니다
사라는 여종의 말을 듣고 울면서 아버지 집의 다락방으로 올라갑니다.
그날 사라는 마음이 몹시 슬퍼 울었습니다. 아버지 집의 다락방으로 올라가 목을 매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하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당신에게는 사랑하는 외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괴로운 일들 때문에 목을 맸어.』 하며 모욕할지도 몰라. 내가 늙으신 아버지를 슬픔 속에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 거야. 목을 매기보다 주님께 간청하는 편이 낫겠어. 나를 죽게 하셔서 살면서 더는 모욕을 듣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겠어.」토빗기 3:10 · 두루새김
이 짧은 전환이 사라의 생명을 지킵니다.
그는 자신이 이미 수많은 모욕을 당하고 있지만, 자신의 죽음으로 아버지까지 모욕과 슬픔을 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본문은 사라의 절망을 신앙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가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에 대한 염려였지만, 이것을 극심한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가족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다는 식의 단순한 교훈으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사라는 여전히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에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스스로 생을 끝내려던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로 옮겨 갔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토빗의 기도와 사라의 기도가 서로 만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이 「죽음으로 몰아넣고」라고 옮긴 자리에는 원문에서 그리스어 「하데스」(ᾅδης)가 나옵니다. 이 문맥에서는 죽은 자들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구약의 히브리어 「스올」과 대응되는 쓰임이며, 반드시 후대에 말하는 영원한 벌의 장소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슬퍼하며 죽은 자들의 세계로 내려가겠다고 말합니다(창세기 37:35). 훗날 베냐민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야곱과 유다는 그것이 야곱의 흰머리를 슬픔 가운데 죽은 자들의 세계로 내려가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창세기 42:38, 44:29–31).
토빗은 용서를 구했고, 사라는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습니다
사라는 창문을 향해 두 손을 펴고 기도합니다.
바로 그때 사라는 창문을 향해 두 손을 펴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주님은 찬양받으실 분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영원히 찬양받을 이름입니다. 주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게 해 주십시오.」토빗기 3:11 · 두루새김
토빗은 하나님이 올바르시며 그분의 모든 길에 자비와 진실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자비와 영원히 찬양받으실 이름을 고백합니다. 두 사람의 기도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시작되었지만, 하나님을 부르는 방식에서 닮았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기도의 내용은 다릅니다.
토빗은 죄를 고백했습니다.
사라는 자신의 결백을 호소합니다.
「주님은 제가 어떤 남자와도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깨끗하게 지냈다는 것을 아십니다.」 「저는 포로로 사는 이 땅에서 저 자신과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외동딸이고, 아버지에게는 재산을 물려받을 다른 자녀가 없습니다. 아버지에게는 가까운 형제나 친척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몸을 지키며 기다렸다가 결혼할 사람도 없습니다. 저는 벌써 남편 일곱을 잃었습니다. 제가 더 살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 저를 죽이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제가 받는 모욕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토빗기 3:14–15 · 두루새김
사라가 결백을 주장하는 영역은 구체적입니다.
그가 듣고 있는 모욕이 바로 결혼과 남편들의 죽음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그들에게 자신을 변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고난당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고난을 죄의 결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라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는 것도 정당한 기도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시편 7:3–5에서 시인은 자신이 비난받는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에 합당한 심판을 받겠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호소합니다. 시편 26:1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올바른 삶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근거로 판단해 달라고 구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흠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릅니다. 오히려 자신이 당하는 부당한 비난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진실을 아신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외동딸에게 남은 길이 없다는 절망
그에게 결혼은 단지 개인적인 행복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의 노후와 가문이 이어지는 일,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삶이 어떤 자리를 갖게 되는지와도 연결됩니다. 사라는 일곱 남편을 잃었고, 이제는 자신의 앞날을 도무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이 질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라는 죽음을 원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면, 「제가 받는 모욕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라고 구합니다. 그는 여전히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그 방법이 반드시 죽음이어야 한다고 끝까지 고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뜻을 가지고 계실 가능성을 남겨 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두 기도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라엘의 율법에는 아들이 없는 가정의 재산을 딸이 물려받을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민수기 27:1–11). 또한 민수기 36:6–9에서는 물려받은 땅이 다른 지파로 넘어가지 않도록 그 땅을 물려받은 딸이 자기 조상 지파 안에서 결혼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사라가 아버지에게 가까운 형제나 친척이 없어 자신이 결혼할 사람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17절에서 토비야에게 사라를 아내로 맞을 우선적인 권리가 있다고 설명하는 것에는 이러한 친족과 재산 상속의 관습이 배경으로 놓여 있습니다. 다만 토빗기의 혼인 관계를 민수기 규정에 하나하나 맞추어 보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본문은 토비야가 먼저 사라와 결혼할 권리가 있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모든 가족 관계와 법적 절차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두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만났습니다
바로 그때 두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 받아들여졌습니다.토빗기 3:16 · 두루새김
두 사람의 나이도 다르고, 고통의 종류도 다르며, 기도의 내용도 다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그들의 기도를 「두 사람의 기도」라고 하나로 묶습니다.
서로의 존재도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의 사건 안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토빗은 자신이 아는 세계만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의 가족과 과거의 선행, 자신의 고난이 그의 이야기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제 토빗의 삶 바깥에서도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압니다.
죽음을 요청한 두 사람을 고치기 위해 보내진 라파엘
17절은 그 응답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라파엘이 보내졌습니다. 토빗의 눈에서 백태를 없애 그가 자기 눈으로 하나님의 빛을 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라구엘의 딸 사라를 토빗의 아들 토비야와 결혼시키며 악한 귀신 아스모대오스를 사라에게서 떼어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라와 결혼하려는 다른 누구보다 토비야가 먼저 사라를 아내로 맞을 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토빗은 뜰에서 집 안으로 돌아왔고, 라구엘의 딸 사라도 다락방에서 내려왔습니다.토빗기 3:17 · 두루새김
그런데 「고쳐 주도록」이라는 말이 두 사람에게 적용되는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토빗은 실제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사라는 남편들을 죽이는 악한 귀신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그로 인해 부당한 비난을 받고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남겨지는 고통을 겪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두 사람에게 똑같은 처방을 내리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이 자신들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요청한 방법과 다른 방식으로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죽음의 탄식에 언제나 극적인 회복이 뒤따른다는 보편적인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토빗기는 이 두 사람에게 실제로 어떤 구원이 마련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모든 고난이 반드시 비슷한 방식으로 해결된다는 원리를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빛을 본다는 것
17절에서 토빗에게 약속된 회복은 단순히 눈이 낫는 것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빛」이라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여기서 먼저 가리키는 것은 토빗이 다시 볼 수 있게 될 빛입니다.
토빗은 3절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살펴 달라고 구했고, 6절에서는 자신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그가 다시 「자기 눈으로 하나님의 빛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께 자신을 봐 달라고 요청한 기도가, 그 자신이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약속과 연결됩니다.
그 빛을 다시 보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제 그날을 기대할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뜰에서 집으로, 다락방에서 아래로
토빗기 3장은 기적이 일어나는 장면이 아니라, 아직 기적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독자는 이제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토빗과 사라에게는 아무런 설명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눈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기도는 이미 하나님 앞에 이르렀습니다.
토빗은 여전히 앞을 볼 수 없는 채 집으로 돌아갑니다.
사라는 여전히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한 채 다락방에서 내려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내일을 향해 걸어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