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풀어 읽기 · 22장

이 장의 자리 · 16–27장 · 다윗의 등장

죽이는 왕, 품는 도망자

사무엘상 22장에는 두 지도자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왕궁의 권력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굴에 숨어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명령을 수행할 신하들이 있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빚지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끝날 무렵, 왕은 자기 백성의 생명을 빼앗고, 도망자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지키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장이 묻는 것은 누가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곁에서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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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 — 다윗은 어떤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는가

사무엘상 22:1–2 본문 →

다윗은 블레셋 땅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뒤 아둘람 굴로 피신합니다. 블레셋의 도시에서도 안전을 얻지 못한 그는 이제 유다 지역의 굴에 몸을 숨깁니다.

그런데 이 굴이 뜻밖에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됩니다.

먼저 형제들과 아버지의 온 집안이 찾아옵니다.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위협이 그의 가족에게도 미칠 수 있는 상황이므로, 이들의 이동은 이해할 만합니다. 다만 본문은 가족들이 찾아온 구체적인 동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전혀 다른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어려움에 몰린 사람들,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 마음이 쓰라린 사람들이 모두 다윗에게 모여들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400명쯤 되었습니다.사무엘상 22:2 · 두루새김

「어려움에 몰린 사람들」은 여러 형태의 압박이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당시 빚은 단순히 돈을 갚아야 하는 부담을 넘어 생계와 가족의 자유까지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2:25–27과 레위기 25:35–43의 규정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난과 빚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보여 줍니다.

「마음이 쓰라린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사무엘상 첫머리에서 한나를 묘사하던 말과 연결됩니다. 한나는 자녀가 없는 고통 속에서 마음이 괴로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사무엘상 1:10). 그때 사용된 표현도 쓰라린 마음을 뜻하는 같은 낱말의 결합입니다.

본문은 그들의 신앙이나 도덕성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일 수도 있고, 불만이나 분노를 품은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삶에서 안정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며, 왕궁이 아니라 도망자 다윗에게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그는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이미 사람들을 이끄는 책임을 맡기 시작합니다. 그는 풍요로운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왕권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조차 불안정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책임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하실지」 — 아직 자기 앞날을 모르는 사람

사무엘상 22:3–5 본문 →

다윗은 곧 모압의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부모를 맡깁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모압의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하실지 알 때까지, 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곳으로 와서 임금님 곁에 머물게 해 주십시오.」사무엘상 22:3 · 두루새김

그는 계속 이동하며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부모까지 그 위험 속에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증조모 룻은 모압 여자였습니다. 룻기 4:17–22는 룻과 보아스의 후손으로 오벳, 이새, 다윗을 연결합니다.

따라서 룻기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독자에게 다윗의 모압행은 가족사의 기억을 불러일으킵니다. 한때 이스라엘로 들어온 모압 여자의 후손이 이제 모압에서 부모의 피난처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만 다윗이 바로 이 혈연 관계 때문에 모압을 선택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다윗은 이미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사무엘상 16:13). 그러나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에게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과정이나 시기를 모두 알려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약속과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현실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예언자 갓이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이 요새에 머물지 마세요. 떠나서 유다 땅으로 가세요.」 다윗은 그곳을 떠나 헤렛 숲으로 갔습니다.사무엘상 22:5 · 두루새김

여기서 하나님이 다윗을 인도하시는 방식은 눈에 띄는 기적이 아닙니다. 예언자를 통한 구체적인 지시입니다. 그리고 그 지시는 더 안전한 곳에 머물라는 말이 아니라, 위험이 남아 있는 유다 땅으로 가라는 말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지만,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게 된 것입니다.

창을 쥔 왕 — 사울은 왜 모두가 자신을 배반했다고 생각하는가

사무엘상 22:6–8 본문 →

장면이 갑자기 바뀝니다.

사울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있는 곳이 드러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 사울은 손에 창을 들고 기브아의 높은 곳에 있는 위성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하들은 모두 그의 곁에 서 있었습니다.사무엘상 22:6 · 두루새김

그런데 사울이 신하들에게 꺼낸 말은 승리나 나라의 평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울이 곁에 서 있는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베냐민 사람들아, 잘 들어라. 이새의 아들도 너희 모두에게 밭과 포도원을 주겠느냐? 너희 모두를 천 명이나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지휘관으로 세워 주겠느냐?」사무엘상 22:7 · 두루새김

자신이 속한 지파의 사람들에게 충성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가 내세우는 것은 밭과 포도원, 군대의 지휘관 자리입니다. 왕에게 충성을 바치면 권력과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사무엘은 왕이 백성의 밭과 포도원을 가져다가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사무엘상 8:14). 지금 사울은 실제로 그렇게 땅을 나누어 주었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밭과 포도원을 자기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왕의 권한을 충성의 근거로 내세웁니다.

백성을 보호해야 할 왕이, 이제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백성의 충성을 거래하려 합니다.

그는 다윗의 이름 대신 「이새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7절과 8절에서 반복되는 이 호칭은 다윗 개인을 인정하기보다 그를 경쟁자로만 바라보는 사울의 말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모두 나를 해칠 음모를 꾸몄다.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언약을 맺었는데도 아무도 내게 알려 주지 않았다. 내 아들이 내 종을 부추겨 지금처럼 나를 공격하려고 숨어 기다리게 했는데도, 너희 가운데 나를 걱정하거나 내게 그 일을 알려 주는 자가 하나도 없다.」사무엘상 22:8 · 두루새김

다윗은 사울을 공격하려고 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울에게 죽지 않으려고 도망치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하는 행동을, 자신을 공격하려는 행동으로 해석합니다. 요나단의 충성스러운 우정도 자신을 향한 음모로 해석합니다. 신하들의 침묵도 배신으로 받아들입니다.

사실과 해석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집니다.

그 결과 사울에게는 자신과 다른 판단을 내리는 모든 사람이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한나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일으키시고, 높은 자를 낮추시며, 자신의 왕에게 힘을 주실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사무엘상 2:7–10). 그 노래가 말하는 왕권의 근거는 왕이 가진 창이나 땅, 지휘관의 수가 아닙니다. 사람의 힘만으로 승리를 결정할 수 없으며, 왕에게 권세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도엑의 보고 — 사실을 말해도 진실을 가릴 수 있다

사무엘상 22:9–15 본문 →

바로 이때 에돔 사람 도엑이 나섭니다.

도엑은 자신이 본 일을 보고합니다. 다윗이 놉으로 갔고, 제사장 아히멜렉이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그를 위해 여호와야훼께 여쭙고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었습니다.」사무엘상 22:10 · 두루새김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왕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사무엘상 21:2). 아히멜렉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는 도망자라는 사실을 알고 협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도엑의 보고에는 그 사정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도엑의 말은 사건의 일부를 전달하지만, 사울이 그 사건을 해석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맥락은 전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 보고를 듣자마자 아히멜렉이 다윗과 함께 음모를 꾸몄다고 몰아갑니다.

사울이 아히멜렉에게 말했습니다. 「너와 이새의 아들은 왜 나를 해칠 음모를 꾸몄느냐? 왜 그에게 빵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해 하나님께 물어서, 그가 지금처럼 나를 공격하려고 숨어 기다리게 했느냐?」사무엘상 22:13 · 두루새김

빵을 준 것, 칼을 준 것, 하나님께 물은 것 자체가 반역의 증거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역이 되려면 아히멜렉이 다윗의 사정을 알고 사울을 공격하도록 도왔다는 사실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그러한 입증이 없습니다.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했습니다. 「임금님의 모든 신하 가운데 다윗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는 임금님의 사위이고, 임금님의 명령을 받들며, 왕실에서도 존중받는 사람이 아닙니까?」사무엘상 22:14 · 두루새김

사울이 「이새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아히멜렉은 「다윗」이라고 부릅니다. 그에게 다윗은 왕을 대적하는 반역자가 아니라 왕실에서 존중받던 사람입니다.

「제가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 여쭌 것이 오늘 처음입니까? 제가 그런 음모를 꾸밀 리 없습니다. 임금님의 종인 저와 제 아버지의 온 집안에 죄를 돌리지 마십시오. 임금님의 종은 이 모든 일에 대해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전혀 몰랐습니다.」사무엘상 22:15 · 두루새김

사울이 이 답변을 받아들였다면 사건은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사실관계를 더 확인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앞 장에서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빵과 골리앗의 칼을 주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다만 앞 장의 서술에는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 물었다는 행동이 직접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정보는 도엑의 보고에 나오는 「여호와야훼께 여쭙고」라는 말을 통해 등장하고, 이어지는 아히멜렉의 답변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물었다는 부분이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앞 장에서 생략된 장면의 세부 내용을 복원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 여쭌 것이 오늘 처음입니까?」라는 첫 번째 반문은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 묻는 일이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의 신임을 받는 인물을 위해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이 왜 반역으로 여겨져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다만 원문에서 이어지는 부인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음모를 꾸민 적이 없다는 부인으로 읽을 수도 있고,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 묻는 일을 이 상황에서 부인하는 표현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제사장들을 죽여라」 — 왕의 명령이 넘지 말아야 할 선

사무엘상 22:16–19 본문 →

사울은 아히멜렉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아히멜렉아,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안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사무엘상 22:16 · 두루새김

아히멜렉의 답변이 그의 무죄를 설명하는 데 충분했는지를 살피는 과정도, 각 사람의 책임을 가리는 과정도 없습니다.

왕 개인이 느끼는 위기가 공동체 전체를 향한 폭력으로 번지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장면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왕이 곁에 서 있는 호위병들에게 말했습니다. 「돌아서서 여호와야훼의 제사장들을 죽여라. 이들도 다윗 편을 들었다. 다윗이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내게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왕의 신하들은 여호와야훼의 제사장들에게 손을 대어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다.사무엘상 22:17 · 두루새김

본문은 호위병들이 정확히 어떤 생각으로 거부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왕의 명령만으로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곧 도엑에게 명령합니다.

왕이 도엑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돌아서서 제사장들을 쳐라.」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서서 직접 제사장들을 쳤습니다. 그는 그날 아마포 에봇을 입은 사람 85명을 죽였습니다.사무엘상 22:18 · 두루새김

그들은 무장한 반란군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제사장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폭력은 제사장들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도엑은 제사장들의 성읍 놉도 칼로 공격했습니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젖먹이까지 죽였고, 소와 나귀와 양도 칼로 죽였습니다.사무엘상 22:19 · 두루새김

이 구절의 말은 전쟁에서 성읍을 철저히 파괴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사무엘상 15장과 비교하면 섬뜩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그곳에서 사울은 아말렉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을 완전히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아각과 좋은 가축들을 남겨 두었기 때문입니다(사무엘상 15:3, 9).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제사장들과 그들이 사는 성읍을 향해 남녀노소와 가축까지 죽이는 폭력이 벌어집니다. 두 사건의 역사적·윤리적 성격을 단순히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왕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사울이, 이제는 자신의 말로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의 죽음은 엘리 집안에 관한 이전의 심판 예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의 집안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그 제사장 가문의 힘이 꺾일 것을 예고하셨습니다(사무엘상 2:27–36; 3:11–14). 열왕기상 2:27은 훗날 아비아달이 제사장직을 빼앗기는 일을 이 예언과 분명하게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예언이 있다고 해서 사울과 도엑의 행동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 장은 죽임당한 제사장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를 밝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히멜렉이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를 부인했고, 사울이 그것을 입증하지 못한 채 죽음을 명령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더 긴 역사적 맥락이 인간의 폭력에 대한 책임을 지워 버릴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왜 하나님이 그 순간 학살을 막지 않으셨는지 해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비아달 한 사람이 살아남은 사실만으로 죽임당한 사람들의 고통과 부당한 죽음을 가볍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다윗 편을 들었다」는 말을 그들의 손이 다윗과 함께 있다는 표현으로 합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왕의 신하들은 제사장들을 치기 위해 자기 손을 뻗으려 하지 않았다고 기록됩니다. 사울은 제사장들의 손이 다윗 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손은 자기 신하들의 손입니다. 아마포 에봇은 제사장의 일과 관련된 옷입니다. 사무엘상 2:18에서도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을 섬길 때 아마포 에봇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비아달의 탈출 — 사울이 끊으려 한 것이 다윗에게 이어지다

사무엘상 22:20–21 본문 →

끔찍한 학살의 서술 뒤에 짧은 문장이 나옵니다.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는 아비아달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혼자 빠져나와 다윗에게 도망쳤습니다.사무엘상 22:20 · 두루새김

다윗의 집안은 다윗에게 모여 보호를 구합니다. 아히멜렉의 집안은 사울에 의해 파괴되고, 살아남은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보호를 구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고립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오히려 다윗에게 새로운 사람들을 보내는 결과를 낳습니다.

특히 아비아달은 단순히 살아남은 개인이 아닙니다. 그는 제사장 집안의 생존자입니다. 놉에서 제사장들을 죽임으로써 사울은 자신에게 속한 이스라엘의 제사장 공동체를 심각하게 훼손했습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의 남은 한 사람이 다윗과 함께하게 됩니다.

이후 아비아달은 제사장으로서 다윗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그가 에봇을 가지고 다윗에게 왔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옵니다(사무엘상 23:6).

사울이 파괴한 자리에서 남은 사람이 다윗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옵니다.

「나 때문이에요」 — 다윗은 자신의 책임을 어디까지 인정하는가

사무엘상 22:22–23 본문 →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학살 소식을 전하자 다윗은 뜻밖의 말을 합니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말했습니다. 「그날 에돔 사람 도엑이 그곳에 있어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알릴 줄 알았어요. 당신 아버지 집안의 모든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된 것은 나 때문이에요.」사무엘상 22:22 · 두루새김

이 고백은 다윗의 모습을 단순히 의로운 왕의 모습으로만 그릴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런데도 그가 아히멜렉에게 자신의 실제 처지를 설명하거나 위험을 경고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더구나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왔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윗이 전해 준 잘못된 정보였습니다. 다윗은 왕의 명령을 받고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사무엘상 21:2). 그 말은 아히멜렉이 자신이 처한 위험을 판단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가렸습니다.

물론 다윗이 당시에 취할 수 있었던 다른 행동이 실제로 학살을 막았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직접적인 살해 책임을 다윗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죽음을 명령한 사람은 사울이고, 실행한 사람은 도엑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둘의 잘못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과 판단이 비극에 얽혀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는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만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명백한 죄가 있다고 해서 자신의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태도를 보여 줍니다.

사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다른 사람들의 배신과 음모로 설명했습니다. 아들이 자신을 배신했고, 신하들이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고, 제사장들이 다윗을 도왔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가져온 불행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봅니다.

다윗은 자신도 잘못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그 잘못이 남긴 결과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책임 인정을 말로 끝내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지내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나를 죽이려는 사람이 당신도 죽이려 해요. 내 곁에 있으면 보호받을 거예요.」사무엘상 22:23 · 두루새김

아비아달을 보호한다는 것은 위험을 더 떠안는다는 뜻입니다.

자신도 쫓기는 처지에서 왕이 원수로 여기는 사람까지 보호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아비아달에게는 돌아갈 가족과 성읍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자신과 함께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다윗의 말은 하나님이 아비아달에게 어떤 위험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예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윗 자신이 그를 지키겠다는 약속입니다.

결말 — 「나와 함께 지내요」

사무엘상 22:1–23 본문 →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왕에게 요구되는 것은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 완전함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생명을 지키는 책임입니다. 누구에게 복종할 것인가를 묻기 전에, 그 명령으로 누가 다치고 누가 보호받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사울의 신하들이 제사장들을 치기를 거부한 장면은 권위에 대한 복종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명령에 저항한 사람들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생존자를 받아들인 다윗에게서 끝납니다.

놉의 제사장들이 죽었습니다. 성읍도 파괴되었습니다. 아비아달은 자기 집안의 죽음을 안고 다윗에게 도착했습니다.

그 앞에 있는 다윗도 안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역시 사울에게 쫓기고 있고, 자신의 앞날을 알지 못합니다. 아비아달이 찾아온 곳에는 왕궁도, 튼튼한 성벽도, 막강한 군대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말합니다. 「나와 함께 지내요.」

이 말은 위험이 끝났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위험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당신을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장면의 처음에 사울의 신하들은 창을 쥔 왕 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명령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장면의 끝에서 아비아달은 아무런 왕권도 갖지 못한 다윗 곁으로 피신합니다. 다윗은 그에게 살아 있을 자리를 내어 줍니다.

한 왕의 곁에서는 사람이 죽고, 아직 왕이 아닌 사람의 곁에서는 살아남은 사람이 보호를 약속받습니다.

사무엘상 22장은 바로 이 두 장면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기다려야 할 왕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