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4–7장 · 떠돌게 된 언약궤
하나님의 궤 앞에 쓰러진 다곤
전쟁에서 이긴 사람들은 패배한 민족의 가장 귀중한 것을 빼앗아 갑니다. 왕의 보물이나 무기를 전리품으로 가져가기도 하고, 정복한 민족이 섬기던 신의 형상을 자기 신전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물건을 차지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상대방의 신까지 굴복시켰다는 승리의 선언이 될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언약궤를 빼앗았습니다. 이제 그 궤를 자신들의 신 다곤의 신전으로 가져갑니다.
이 장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무엘도, 엘리도, 다른 제사장도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나서서 언약궤를 되찾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여호와야훼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무엘상 5장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군사력에 의지하지 않으시고도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시는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왜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전리품이 된 언약궤
승리한 사람들은 언약궤를 어디에 두었습니까
이야기는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아스돗으로 가져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아스돗은 블레셋의 주요 성읍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여호수아 13:3은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을 블레셋의 다섯 주요 거점으로 열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다곤의 신전으로 가져가 다곤의 신상 곁에 놓았습니다.사무엘상 5:2 · 두루새김
다곤은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던 신입니다. 사사기 16:23에서도 블레셋의 통치자들이 다곤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고 있습니다.
다곤이라는 이름은 고대 서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알려진 신인 다간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5장은 다곤이 구체적으로 어떤 신인지, 어떤 모습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고대 전쟁에서는 정복한 민족의 신상이나 거룩한 물건을 승리한 나라의 신전에 가져다 놓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신이 상대편의 신보다 뛰어나다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언약궤를 다곤의 신전에 놓은 행위도 승리를 기념하고 다곤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블레셋 사람들이 정확히 어떤 의도로 언약궤를 놓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곤에게 바치는 전리품이었는지, 다곤의 지배 아래 두려는 상징적 행동이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자신들이 다룰 수 있는 전리품으로 취급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궤를 빼앗았고, 옮겼으며, 자기들이 원하는 장소에 놓았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이 함께 계심과 그분의 언약을 나타내는 거룩한 물건입니다. 그러나 언약궤와 하나님 자신을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사람들이 놓아둔 것과 실제로 서 있는 것이 달라집니다.
두 번의 아침, 두 번 쓰러진 다곤
첫 번째 아침 — 누가 누구 앞에 엎드렸습니까
다음 날 아침, 아스돗 사람들이 일찍 일어납니다.
이튿날 아스돗 사람들이 일찍 일어나 보니, 다곤의 신상이 여호와야훼의 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곤의 신상을 제자리에 다시 세웠습니다.사무엘상 5:3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행동은 왕이나 권위 있는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경배하는 모습도 같은 말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다곤의 자세는 단순히 신상이 넘어져 있다는 설명을 넘어, 여호와야훼의 궤 앞에 굴복한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신에게 도움을 구하고 보호받으려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자기 신의 형상을 일으켜 세워 주어야 합니다.
다곤은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일으켜집니다.
두 번째 아침 — 머리와 손이 잘립니다
그러나 그다음 날 아침,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그다음 날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 보니, 다곤의 신상이 여호와야훼의 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머리와 두 손은 잘려 문턱에 놓여 있었고, 몸통만 남아 있었습니다.사무엘상 5:4 · 두루새김
전쟁에서 이긴 쪽은 블레셋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전 안에서는 블레셋의 신이 패배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를 물리쳤다는 사실이 다곤이 여호와야훼보다 강하다는 증거는 아니었습니다. 다곤의 머리와 손이 잘려 나간 장면은 바로 그 생각을 무너뜨립니다.
다곤의 손은 잘렸지만, 여호와야훼의 손은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 장의 다음 장면에서 「손」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6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손이 아스돗 사람들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7절에서는 아스돗 사람들이 「그분의 손」이 자신들과 다곤을 혹독하게 짓누른다고 말합니다.
9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손이 가드에 미칩니다.
11절에서는 하나님의 손이 에그론을 매우 무겁게 짓누릅니다.
다곤의 손은 잘려 나갔지만, 여호와야훼의 손은 계속 행동하고 있습니다.
다곤은 사람들이 만들고 세워 둔 형상을 통해 존재를 나타냅니다. 그 형상은 쓰러지면 사람이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반면 여호와야훼는 사람들이 만든 형상으로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권능은 신상처럼 눈에 보이는 손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언약궤를 차지했다고 하나님의 행동까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 다곤의 문턱을 밟지 않았습니까
5절은 이 사건의 결과를 전합니다.
그래서 다곤의 제사장들과 그 신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의 문턱을 밟지 않습니다.사무엘상 5:5 · 두루새김
본문은 그 관습이 다곤의 머리와 손이 잘려 문턱에 놓여 있던 사건 때문에 생겼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정확히 어떤 생각으로 문턱을 피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곤의 형상이 놓여 있던 자리를 특별히 존중했을 수도 있고, 그곳을 두려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곤이 여호와야훼의 궤 앞에 쓰러진 사건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억은 다곤의 신전을 떠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곤의 신전 안에 새로운 관습을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날까지」라는 표현은 이 사건의 기억이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시대까지 관습으로 이어졌다는 뜻입니다. 다만 이 표현만으로 그 관습이 정확히 언제까지 계속되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언약궤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은 이제 신전 바깥으로 퍼집니다.
조금 더 깊이
머리는 생명과 정체성, 다스리는 권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손은 행동하고 힘을 쓰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고대 전쟁에서는 적의 머리나 신체 일부를 베어 승리를 드러내는 행위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7:51에서도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베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다곤의 머리와 손이 잘려 나간 모습을 보면 단순히 신상이 부서진 것이 아니라 패배한 적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다곤의 두 손바닥을 가리킵니다. 시편 115:4–7은 사람이 만든 우상에 입과 눈과 귀와 손이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사야 46:1–7에서는 사람들이 신상을 메어 나르지만, 정작 그 신상은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거나 그들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신전 안에서 시작된 일이 성읍 전체로 퍼집니다
여호와야훼의 손이 무겁게 내려앉습니다
6절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이 새롭게 바뀝니다.
여호와야훼의 손이 아스돗 사람들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을 큰 재앙에 빠뜨리시고, 아스돗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종기가 나게 하셨습니다.사무엘상 5:6 · 두루새김
여기서 손은 하나님이 실제로 신체의 손을 뻗으셨다는 묘사가 아니라, 그분의 능력과 행동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잃었고, 자신의 영광을 잃었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능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종기는 어떤 병이었습니까
여기서 정확한 병명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신전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 도시 전체의 위기로 커진 것입니다.
이 장면을 단순히 블레셋 사람들이 잘못했으니 고통받아도 마땅하다는 식으로 가볍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는 실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마지막에는 죽은 사람들과 살아남아 병을 앓는 사람들이 구별됩니다.
이 재앙은 단지 하나님의 힘을 과시하는 장면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리는 참혹한 사건입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그 원인을 여호와야훼의 손에 돌리지만, 왜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에 관한 모든 도덕적 문제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아스돗 사람들은 사태를 보고 말합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이 일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궤를 우리 곁에 두어서는 안 된다. 그분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혹독하게 짓누르고 있다.」사무엘상 5:7 · 두루새김
그들은 다곤이 쓰러진 사건과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을 서로 무관한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두 사건 모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손과 관련되어 있다고 판단합니다.
다곤이 쓰러지고 머리와 손이 잘려 나가는 일을 경험한 뒤에도, 아스돗 사람들은 여전히 다곤을 자신들의 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능력을 인정했지만,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바꾸기보다는 여호와야훼의 궤를 멀리 보내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경험하는 것과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 대조를 단순히 블레셋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부했다는 식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실제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언약궤를 자신들 곁에 두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생존을 위한 간절한 요청이기도 했습니다.
본문은 그들에게 어떤 종교적 선택지가 구체적으로 주어졌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를 섬기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즉시 여호와야훼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각 사람의 마음을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사무엘상 6:4–5에는 종기 형상과 쥐 형상이 등장합니다. 칠십인역의 일부 본문 전승은 5:6에서도 쥐에 관한 내용을 전합니다. 이런 요소 때문에 전염병의 종류를 추정할 수는 있지만, 본문에 기록된 증상만으로 특정한 현대 의학적 질환을 확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성읍으로 옮깁니다
블레셋 통치자들의 회의
아스돗 사람들은 블레셋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을 모두 모읍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블레셋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궤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통치자들이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궤를 가드로 옮겨라.」 그래서 그들은 그 궤를 옮겼습니다.사무엘상 5:8 · 두루새김
블레셋은 여러 주요 성읍을 중심으로 권력이 형성된 정치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약궤의 처리 문제에 여러 통치자가 관여한다는 것은 이 사건이 한 성읍만의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블레셋 공동체 전체의 문제로 커졌음을 보여 줍니다.
왜 하필 가드였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언약궤를 다른 성읍으로 옮기면 아스돗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다곤이 쓰러지자 사람들은 그 신상을 다시 제자리에 세웠습니다. 언약궤 때문에 문제가 생기자 사람들은 그 궤를 다른 장소로 옮깁니다. 두 경우 모두 사람들은 문제가 되는 물건의 위치를 바꾸어 상황을 해결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 장에서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물건의 위치까지입니다.
그 물건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행동은 통제하지 못합니다.
가드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언약궤가 가드로 옮겨진 뒤의 사건은 한 절로 기록됩니다.
궤를 옮긴 뒤, 여호와야훼의 손이 가드에 미쳐 매우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그 성읍 사람들을 치셨고, 그들에게 종기가 돋았습니다.사무엘상 5:9 · 두루새김
아스돗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언약궤를 옮겼지만, 재앙은 다른 성읍에서 다시 일어납니다. 이제 가드도 언약궤가 머물 수 없는 장소가 됩니다.
그리고 궤는 또 다른 성읍으로 옮겨집니다.
조금 더 깊이
「아이부터 어른까지」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미카톤 베아드 가돌로, 직역하면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라는 뜻입니다. 나이를 가리킬 수도 있고, 사회적 지위의 낮고 높음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아이부터 어른까지」로 옮겼지만, 원문은 어느 의미로만 읽어야 하는지 명확히 한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뜻은 분명합니다. 재앙이 성읍 사람들 전체에 미쳤다는 것입니다.
에그론 — 이제는 궤가 오기만 해도 두려워합니다
환호가 아니라 공포로 맞이하는 언약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에그론으로 보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냈습니다. 궤가 에그론에 도착하자 에그론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그들이 우리 모두를 죽이려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 가져왔다!」사무엘상 5:10 · 두루새김
아스돗에서는 언약궤를 먼저 신전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다곤이 쓰러지고 사람들이 병에 걸린 뒤에야 언약궤를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가드에서도 언약궤가 옮겨진 뒤에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에그론에서는 언약궤가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이 외칩니다. 이미 다른 성읍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터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서로 힘을 내라고 격려했고,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궤가 자신들의 성읍에 들어오는 것조차 감당하지 못합니다.
전쟁의 승리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통제는 전혀 다른 문제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 회의에서는 결론이 달라집니다
에그론 사람들은 다시 블레셋의 통치자들을 모읍니다.
에그론 사람들은 사람을 보내 블레셋의 통치자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궤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 궤가 우리 모두를 죽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온 성읍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며 큰 혼란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곳을 매우 무겁게 짓눌렀습니다.사무엘상 5:11 · 두루새김
앞서 아스돗에서 통치자들은 언약궤를 가드로 옮기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이상 다른 블레셋 성읍으로 옮기자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다곤의 신상을 제자리에 세워야 했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궤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이야기의 방향이 완전히 뒤집힌 것입니다.
죽음의 혼란 속에서 올라가는 부르짖음
죽지 않은 사람들은 종기로 고통받았습니다. 도와 달라는 성읍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하늘까지 올라갔습니다.사무엘상 5:12 · 두루새김
이것은 한 도시 전체가 감당할 수 없는 재난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자신들의 세계에 들어왔을 때, 그것을 통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운 처지에 이르렀는지도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에서 다곤이 쓰러졌을 때 아스돗 사람들은 그 신상을 「제자리에 다시 세웠습니다」. 11절에서 에그론 사람들은 언약궤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두루새김에서는 서로 다른 말로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두 문장 모두 리메코모(מָקוֹם), 곧 그의 자리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도와 달라는 성읍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하늘까지 올라갔습니다.」 이 표현을 출애굽기 2:23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자손이 고통 때문에 부르짖었고,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올라갔다고 기록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고통받을 때 사용되었던 부르짖음의 이미지가 이제 블레셋 사람들의 고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 연결이 곧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야훼께 기도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들이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맺음 — 하늘로 올라간 성읍의 부르짖음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해서 여호와야훼의 권능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언약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다고 해서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의 지배 아래 놓이신 것도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 능력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지는 못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해결책은 언약궤를 치워 보내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승리의 축하도, 다곤을 향한 찬양도 아닙니다.
에그론의 사람들이 죽어 가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종기로 고통받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읍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하늘까지 올라갑니다.
하나님의 궤를 자기 신전 안에 두었던 사람들이, 마침내 하늘을 향해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부르짖음에 어떤 응답이 돌아올지는 아직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5장은 그 소리가 하늘까지 올라갔다는 문장에서 멈춥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