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7장 · 떠돌게 된 언약궤

궤를 가져왔는데 왜 구원받지 못했는가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그러자 장로들은 실로에 있는 여호와야훼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기로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궤가 진영에 들어오자 이스라엘 백성은 땅이 울릴 만큼 크게 환호합니다. 적군인 블레셋 사람들까지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보다 훨씬 큰 패배를 당합니다. 언약궤는 빼앗기고, 제사장들은 죽고, 실로의 지도자 엘리도 죽습니다. 마지막에는 한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습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이 마음대로 만든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들도록 명령하신 것이며, 그분이 함께 계심과 언약을 나타내는 거룩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언약궤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못했을까요?

사무엘상 4장의 비극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데서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기들 가운데 모셔 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묻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은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을 남깁니다.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면, 하나님 자신도 패배하신 것일까요?

읽는 시간 18분소단락 74장 본문 읽기 →

사무엘의 말은 전해졌지만, 전쟁은 다른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사무엘상 4:1–2 본문 →

온 이스라엘에 전해진 말씀

4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사무엘의 말은 온 이스라엘에 전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러 나가 에벤에셀 곁에 진을 쳤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을 쳤습니다.사무엘상 4:1 · 두루새김

첫 문장은 앞 장의 결말과 직접 연결됩니다. 사무엘은 여호와야훼의 예언자로 인정받았고, 이제 그의 말은 온 이스라엘에 전해집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부터 사무엘은 이야기에서 사라집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러 나갑니다. 양쪽 군대가 진을 치고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스라엘은 패배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전쟁을 지시했다거나, 백성이 사무엘을 통해 여호와야훼의 뜻을 물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근거로 사무엘이 전쟁에 반대했거나 장로들이 일부러 그를 무시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앞 장에서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사무엘을 통해 온 이스라엘에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장에서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이 선택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에벤에셀이라는 이름에 담긴 아이러니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서쪽의 해안 평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민족으로, 사사기와 사무엘서에서 이스라엘의 주요 적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사사기 13:1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배 아래 놓였던 시기를 전합니다.

아벡은 이스라엘의 산지와 블레셋의 평야 지역을 잇는 길과 관련된 곳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다고 이해됩니다. 에벤에셀의 정확한 위치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에벤에셀」이라는 지명은 독자에게 특별한 여운을 남깁니다.

히브리어 에벤 하에제르(⁨אֶבֶן הָעֵזֶר⁩)는 「도움의 돌」이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상 7:12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친 뒤 돌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부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자신들을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4장에 나오는 에벤에셀과 7장의 돌을 정확히 같은 지점으로 볼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이름이 패배의 이야기와 승리의 이야기에 등장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4장에서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가져오고도 패배합니다. 7장에서는 사무엘이 이끄는 가운데 백성이 여호와야훼께 돌아오고, 사무엘이 그들을 위해 부르짖는 가운데 승리를 경험합니다.

두 장의 차이는 단순히 언약궤가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위기에 맞섰는가에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전투에서 약 사천 명을 잃었습니다.

올바른 질문에서 잘못된 해결책으로

사무엘상 4:3–4 본문 →

장로들은 패배의 원인을 누구에게서 찾았는가

전투에서 패한 군사들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말합니다.

군사들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왜 오늘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패하게 하셨을까? 실로에서 여호와야훼의 언약궤를 가져오자. 그 궤가 우리 가운데 와서 원수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하게 하자.」사무엘상 4:3 · 두루새김

그들은 단순히 블레셋의 군사력이 강했기 때문에 패배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결과가 여호와야훼의 다스림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음 문장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질문은 「왜」로 시작했지만, 그 이유를 알아보려는 과정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장로들은 곧바로 언약궤를 가져오자고 결정합니다. 적어도 본문에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거나, 예언자를 찾아가거나, 자신들의 행동을 돌아보는 과정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려는 질문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우시도록 만들 방법을 찾는 행동으로 바뀐 것입니다.

누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가

히브리어 문장에서 와서 구하는 주체는 앞에 나온 언약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로들은 언약궤가 자신들 가운데 오면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 표현만으로 그들이 언약궤를 하나님과 완전히 같은 존재로 여겼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언약궤가 여호와야훼께서 함께 계심과 깊이 연결된 거룩한 물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가 언약궤를 가져오는 행위 자체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출애굽기 25:10–22에서 하나님은 언약궤를 만들도록 명령하십니다. 궤에는 증언의 판들이 놓이며, 그 위에는 속죄소와 두 그룹이 있습니다. 특히 출애굽기 25:22에서 하나님은 속죄소 위,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를 만나시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실 말을 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시며 말씀하신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약궤 안에 갇혀 계시거나, 사람들이 그 궤를 원하는 곳으로 가져가면 하나님도 반드시 그들의 목적에 따라 행동하셔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민수기 10:35에서는 언약궤가 떠날 때 모세가 여호와야훼께 일어나셔서 원수들을 흩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호수아 3장과 6장에서도 언약궤는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에서는 하나님의 명령과 이끄심이 먼저 주어집니다.

사무엘상 4장에는 이번 전쟁에서 언약궤를 가져오라는 하나님의 지시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거룩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 거룩한 물건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대신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는 데 있습니다.

언약궤와 함께 온 두 사람

백성은 실로로 사람들을 보내 언약궤를 메어 왔습니다. 그룹들 위에 앉아 있는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궤였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핀하스도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있었습니다.사무엘상 4:4 · 두루새김

「그룹들 위에 앉아 있는 만군의 여호와야훼」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심을 나타냅니다. 그룹은 언약궤 위에 만들어진 날개 달린 존재들의 형상과 연결됩니다. 시편 99:1에서도 여호와야훼가 그룹들 위에 앉아 다스리신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엄 있는 호칭 뒤에 뜻밖의 이름 둘이 등장합니다.

홉니와 핀하스.

그들은 2장에서 하나님의 제물을 업신여기고, 자신들에게 맡겨진 제사장 일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전쟁터에 나타납니다.

궤는 거룩합니다. 그러나 그 궤와 함께 있는 제사장들의 행동은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이 함께 계심을 나타내는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의 행동까지 옳게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예레미야 7:4–15에 나오는 성전 설교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여호와야훼의 성전이 자신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에 의지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실제 삶과 행동을 문제 삼으십니다. 특히 예레미야 7:12–14는 실로에 일어난 일을 돌아보라고 말씀합니다.

두 본문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장소나 제도를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거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하나님께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자는 이미 홉니와 핀하스에게 어떤 심판이 예고되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언약궤와 함께 그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순간, 전쟁터에 거룩한 물건이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궤를 따라온 두 제사장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긴장이 높아집니다.

땅이 울릴 만큼 큰 함성이 왜 승리로 이어지지 않았는가

사무엘상 4:5–10 본문 →

이스라엘의 함성과 블레셋의 두려움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오자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환호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오자 온 이스라엘이 큰 함성을 질렀고, 땅이 울렸습니다.사무엘상 4:5 · 두루새김

전쟁에서 패배해 돌아온 군대가 다시 용기를 얻습니다. 언약궤가 자신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승리를 확신하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듣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다가, 이스라엘의 진영에 여호와야훼의 궤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말했습니다. 「신이 진영에 들어왔다!」 그들은 또 말했습니다. 「우리는 큰일 났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사무엘상 4:7 · 두루새김

전쟁의 승패가 뒤집힐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승리를 보장하는 말이 아니라 전투 직전의 두 군대가 보이는 반응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확신과 하나님의 약속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

「우리는 큰일 났다! 누가 저 막강한 신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해 주겠느냐? 저들은 광야에서 온갖 재앙으로 이집트를 친 신들이다.」사무엘상 4:8 · 두루새김

그들은 이집트에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출애굽의 사건이 이스라엘 안에서만 전해지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 2:9–11에서도 라합은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셨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온갖 재앙으로 이집트를 친 신들」이라고 말합니다. 출애굽기의 재앙은 이스라엘이 광야에 도착하기 전에 이집트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또한 7절에서는 「신이 진영에 들어왔다」라고 하나의 신을 말하지만, 8절에서는 「저 막강한 신들」이라고 여러 신을 말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이해에 따라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을 본문이 여러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실제로 한 말을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아, 힘을 내고 사내답게 행동해라. 히브리 사람들이 너희를 섬겼듯 너희가 그들을 섬기게 되어서는 안 된다. 사내답게 싸워라!」사무엘상 4:9 · 두루새김

이들의 격려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패배하면 자신들이 지배받는 처지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지만, 그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더욱 필사적으로 싸우기로 합니다.

이제 전쟁은 다시 시작됩니다.

더욱 커진 패배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자 이스라엘은 패해 저마다 자기 천막으로 달아났습니다. 전투에서 매우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걸어서 싸우는 군사 3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사무엘상 4:10 · 두루새김

처음 전투에서는 약 사천 명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가져오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실제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방향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이 장의 전쟁 이야기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언제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다는 공식을 부정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도, 언약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하나님이 그들의 선택을 무조건 옳다고 인정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사내답게 행동해라」에 이어 「사내답게 싸워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원문에서는 사내답게 행동하라는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이 말은 당시 군사적 용기와 굳은 결심을 촉구하는 표현입니다. 오늘날 남녀의 역할에 관한 교훈을 제시하려는 구절은 아닙니다.

궤가 빼앗기고, 두 제사장이 죽다

사무엘상 4:11 본문 →

전쟁의 결과는 한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핀하스도 죽었습니다.사무엘상 4:11 · 두루새김

두 사람의 죽음은 앞서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전했던 말씀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사무엘상 2:34에서 하나님은 엘리의 두 아들이 같은 날에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무엘상 3:19는 여호와야훼께서 사무엘의 말 가운데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이미 전해진 심판의 말씀이 실제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두 아들의 죽음과 언약궤를 잃은 일을 완전히 같은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홉니와 핀하스의 죽음은 앞선 심판 선언이 이루어진 일로 분명히 제시됩니다. 반면 언약궤가 빼앗긴 일이 왜 허락되었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설명은 이 장에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전쟁터에서 실로로 시선을 옮깁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엘리가 기다린 소식

사무엘상 4:12–18 본문 →

옷을 찢고 달려온 사람

베냐민 지파 사람 한 명이 싸움터에서 실로까지 달려옵니다.

그의 옷은 찢어져 있고 머리에는 흙이 얹혀 있습니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슬픔과 재난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여호수아 7:6에서도 아이 전투에서 패배한 뒤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사람이 도착했을 때 엘리는 길가의 의자에 앉아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걱정되어 마음이 떨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성읍에 들어와 소식을 전하자 온 성읍이 울부짖었습니다.사무엘상 4:13 · 두루새김

엘리는 앞을 볼 수 없지만, 전쟁터에서 돌아올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엘리는 전쟁에 나간 두 아들을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직접 밝히는 그의 불안의 대상은 하나님의 궤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 대한 엘리의 관심과 그가 실제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그가 언약궤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제사장으로서의 실패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엘리는 무엇을 듣고 죽었는가

엘리는 그 소란을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묻습니다. 이어서 소식을 전하던 사람이 그에게 직접 소식을 전합니다.

소식을 전하던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달아났고, 우리 백성이 아주 많이 죽었습니다. 두 아드님 홉니와 핀하스도 죽었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습니다.」사무엘상 4:17 · 두루새김

그 사람은 네 가지 소식을 차례로 전합니다. 이스라엘의 패배, 아주 많은 백성의 죽음, 두 아들의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궤가 빼앗긴 일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궤 이야기를 꺼내자, 엘리는 성문 옆 의자에서 뒤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나이가 많고 몸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엘리는 40년 동안 재판관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사무엘상 4:18 · 두루새김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엘리가 두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쓰러졌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궤 이야기를 꺼내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평생 성소를 섬겨 온 제사장이었습니다. 이제 자신이 지켜야 할 언약궤가 적군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 소식은 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때 재판관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지도자가, 길가의 성문 옆에서 죽습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엘리가 지켜보고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15절에서는 그가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원문에서 지켜본다는 말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주의를 기울이는 행동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무겁다는 말과 영광이라는 말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앞서 사무엘상 2:29–30에서 하나님은 엘리가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엘리의 무거운 몸과 마지막의 영광을 연결하는 말의 울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엘리의 체중이 그의 죄를 상징한다거나, 몸이 무겁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심판받았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의 죽음에 이르게 된 몸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았지만 기뻐하지 못한 어머니

사무엘상 4:19–22 본문 →

전쟁터의 패배가 한 여자의 출산으로 이어지다

엘리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전혀 다른 장소와 인물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엘리의 며느리, 곧 핀하스의 아내입니다.

엘리의 며느리인 핀하스의 아내는 임신하여 아이를 낳을 때가 가까웠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고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아이를 낳는 고통이 몰려왔습니다. 그 여자는 몸을 웅크린 채 아이를 낳았습니다.사무엘상 4:19 · 두루새김

앞에서 이스라엘 전체의 패배를 보여 주던 이야기가 이제 한 여자의 몸으로 좁혀집니다. 본문은 그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는 「엘리의 며느리」이자 「핀하스의 아내」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이 장의 마지막 말은 바로 이 여자의 입에서 나옵니다.

왕이나 제사장도 아닌, 죽어 가는 한 여자가 이스라엘에 일어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아들을 낳았어요」

그 여자가 죽어 갈 때 곁에 있던 여자들이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아들을 낳았어요.」 그러나 그 여자는 대답하지도, 그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사무엘상 4:20 · 두루새김

아들은 집안의 대를 이어 갈 수 있는 존재였고, 특히 남편이 죽은 가정에서는 후손의 출생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곁에 있는 여자들은 새로 태어난 아들을 통해 산모를 위로하려 했을 것입니다.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본문은 그의 마음속 생각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이름 짓는 장면에서 그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시아버지도 죽었습니다. 그가 속해 있던 가정의 미래뿐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중심이 무너졌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아들의 출생은 분명 새로운 생명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기쁨을 자신의 상실과 떼어 놓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가봇이라는 이름

그 여자는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며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일과 시아버지와 남편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사무엘상 4:21 · 두루새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이 이스라엘의 영광과 관련됩니다. 출애굽기 40:34–35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했다고 기록합니다. 언약궤 또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특별한 물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단순히 귀중한 종교 물건을 잃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눈에 보이게 나타내던 중요한 표지를 잃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22절은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기 때문이다.」사무엘상 4:22 · 두루새김

21절에서는 언약궤와 함께 시아버지와 남편의 죽음도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궤가 빼앗긴 사실만 남습니다.

처음에 백성은 언약궤가 오자 땅이 울릴 만큼 환호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언약궤가 빼앗겼다는 소식 때문에 한 여자가 영광이 떠났다고 탄식합니다.

승리의 함성으로 시작된 기대가 상실의 선언으로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이가봇」은 히브리어 이카보드(⁨אִי־כָבוֹד⁩)입니다. 이 이름의 앞부분은 부정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되어 「영광이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질문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아 「영광이 어디 있는가?」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가능성을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무엘상 1장은 아들을 기다리는 한 여자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상 2장은 그 여자의 노래로 시작했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얻은 뒤 여호와야훼의 구원을 노래했습니다. 핀하스의 아내는 아들을 낳으면서 이스라엘의 영광이 떠났다고 말합니다. 한쪽에서는 아이의 출생이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연결됩니다. 다른 쪽에서는 아이의 출생이 무너지는 집안과 공동체가 잃은 것을 기억하는 사건이 됩니다.

맺음 — 환호로 맞이한 궤를 빼앗긴 날

사무엘상 4:1–22 본문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궤를 전쟁터로 가져왔지만, 그 궤를 가져오는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보장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그렇게 의지했던 궤는 적군의 손에 있습니다.

언약궤는 빼앗겼지만, 그 궤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패배하셨다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잃어버린 궤 때문에 하나님까지 자신의 능력을 잃으신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는 그 대답을 서둘러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한 아이에게 붙여진 이름을 남깁니다.

이가봇.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언약궤를 맞이하던 거대한 함성은 사라지고, 그 이름만이 패배한 이스라엘에 남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