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0–28장 · 둘로 갈라진 나라

전쟁에서 이기고도 잃어버린 것

아사 왕은 적의 공격을 막아 냈습니다. 자신을 위협하던 이스라엘 왕 바아사는 군대를 물렸고, 적이 쌓던 요새의 건축 자재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그 자재로 새로운 성읍들을 세웠으니,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성공적인 대응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선견자 하나니가 나타나 뜻밖의 말을 합니다.

아사는 적을 물리쳤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니는 오히려 아사가 무언가를 놓쳤다고 말합니다. 왕의 눈에는 승리로 보였던 일이 하나님의 눈에는 잃어버린 기회였습니다. 어떻게 같은 사건을 이렇게 다르게 볼 수 있을까요?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외면했던 왕이 아닙니다. 한때는 거대한 군대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했고,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혁했던 왕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이제는 자신을 찾아온 선견자를 감옥에 가둡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본문은 그가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을 통해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16분소단락 616장 본문 읽기 →

막힌 길을 열기 위해 다른 길을 택하다

역대하 16:1–6 본문 →

라마의 요새가 겨냥한 것은 사람들의 발걸음이었다

아사의 위기는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라마를 튼튼하게 세우면서 시작됩니다.

아사가 왕이 된 지 36년째 되는 해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 라마를 튼튼하게 세웠습니다. 사람들이 유다 왕 아사에게 드나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역대하 16:1 · 두루새김

라마는 예루살렘 북쪽의 중요한 교통로에 자리한 곳이었습니다. 바아사가 이곳을 요새로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국경에 방어 시설을 세우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다와 북왕국 사이의 이동을 통제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을 압박하는 군사적 행동이었습니다.

역대하 15:9에 따르면, 북왕국의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에서 많은 사람이 아사에게로 넘어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라마의 요새는 이러한 사람들의 이동을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다만 16장은 바아사의 동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앞 장을 고려한 해석입니다.

아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봉쇄를 풀어야 했습니다.

성전의 은과 금이 다마스쿠스로 향하다

아사의 대응은 직접적인 군사 공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과 왕궁의 보물 창고에서 은과 금을 꺼내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냈습니다.

「저와 임금님 사이에는 조약이 있고, 제 아버지와 임금님의 아버지 사이에도 조약이 있었습니다. 제가 임금님께 은과 금을 보냅니다.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맺으신 조약을 깨뜨려 주십시오. 그러면 그가 저를 공격하다가 물러갈 것입니다.」역대하 16:3 · 두루새김

아사는 바아사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대신, 바아사의 북쪽에서 새로운 위협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아람이 이스라엘 북부를 공격하면 바아사는 라마의 공사를 중단하고 병력을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벤하닷은 아사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아람군은 이욘과 단과 아벨마임을 공격했습니다. 납달리 성읍들에 있는 모든 물자 보관 창고도 공격했습니다. 북왕국의 북부 지역이 침략을 받자 바아사는 라마를 세우던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아사의 외교적 계산은 정확했습니다.

첫째, 아사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은과 금을 꺼냈습니다.

앞서 역대하 15:18은 아사가 자기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님께 바치려고 따로 구별해 둔 은과 금과 기구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여왔다고 기록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성전은 왕이 귀중한 재물을 바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성전은 외국 왕의 협력을 얻기 위해 재물을 꺼내는 곳이 되었습니다.

한때는 하나님께 드리던 왕이 이제는 외국 왕에게 재물을 보냅니다.

둘째, 아사는 벤하닷에게 기존의 조약을 깨뜨리라고 요구했습니다.

왕들 사이의 조약은 정치적 안전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아사는 자신의 아버지와 벤하닷의 아버지 사이에 있었다고 말하는 조약까지 내세우며 외교적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새로운 우호 관계를 맺자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벤하닷이 바아사와 맺은 조약을 깨뜨리고 북왕국을 공격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격받은 곳은 이스라엘의 성읍들이었습니다. 아사는 유다의 위협을 줄이기 위해 북왕국에 새로운 위협이 발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본문은 아사의 행동을 즉시 평가하지 않습니다. 외교적 조치의 결과부터 보여 줍니다. 바아사는 물러났고, 아사는 그가 라마를 세우는 데 쓰던 돌과 목재를 가져다가 게바와 미스바를 세웠습니다.

적이 자신을 봉쇄하려고 준비했던 자재가 이제 자신의 방어 시설을 강화하는 데 사용됩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아사의 선택은 훌륭한 정치적 결단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역대기는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역대하 16:1은 이 사건을 아사가 왕이 된 지 36년째 되는 해로 기록하지만, 열왕기상 15:33과 16:8에 따르면 바아사는 아사 통치 3년째에 왕이 되어 24년 동안 다스렸고, 아사 통치 26년째에는 이미 그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역대하의 36년을 왕국이 나뉜 뒤부터 센 연도로 이해하여 아사 개인의 통치 16년째로 계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대하 15:19의 35년과 16:1의 36년에 글을 베껴 쓰는 과정에서 숫자 오류가 생겼다고 보는 것입니다. 첫째 견해에는 본문의 표현이 분명히 아사의 통치를 가리킨다는 어려움이 있고, 둘째 견해에는 전해지는 숫자를 수정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현재 본문만으로 어느 설명이 확실한지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왕이 얻었다고 생각한 것과 하나님이 잃었다고 말씀하신 것

역대하 16:7–9 본문 →

하나니는 승리의 결과가 아니라 승리의 방식을 묻는다

라마의 위기가 해결된 바로 그때 선견자 하나니가 아사에게 찾아옵니다.

그때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왕께서는 왕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역대하 16:7 · 두루새김

아사의 계획에서 아람 왕은 도움을 주는 동맹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니의 말에서 아람 왕의 군대는 하나님이 아사의 손에 넘겨주실 수도 있었던 대상입니다.

아사는 아람 왕의 힘을 빌려 당장의 위협을 없앴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했다면 아람의 군대까지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역사의 범위 안에서 다른 결과를 맞을 수 있었다는 것이 하나니의 평가입니다.

하나니가 문제 삼는 것은 외교를 사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아사가 그 외교적 수단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수단을 사용하는 것과 그 수단을 가장 깊이 의지하는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다릅니다.

예레미야 17:5–8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대조합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삶의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도움을 받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잠언 3:5–7은 자기 판단만을 의지하지 말고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라고 권합니다.

아사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잊었다

하나니는 곧바로 아사의 과거를 불러옵니다.

「구스 사람들과 리비아 사람들은 군사의 수도 많고 병거와 말을 탄 군사들도 아주 많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왕께서 여호와야훼를 의지하셨으므로,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을 왕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역대하 16:8 · 두루새김

하나니가 떠올리는 것은 역대하 14:9–15에 기록된 구스 군대와의 전쟁입니다. 그때 아사는 거대한 적군을 마주했지만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역대하 14:11에서 아사는 자신에게 군사적 우위를 보장할 힘이 없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원문에서는 역대하 14:11에서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했던 말이, 이제 16:7–8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아람 왕을 의지했다는 비판으로 돌아옵니다. 아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의 뜻을 몰랐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 말을 직접 고백했고, 실제 전쟁에서 그 결과를 경험했던 왕이었습니다.

이전의 아사는 큰 군대 앞에서 자신의 힘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아사는 외국 왕을 움직일 돈과 외교적 관계가 있었고, 그것으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두 사건에서 적군의 규모만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도움을 기대한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니가 아사에게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까닭은 단순히 옛 승리를 추억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 이미 경험한 하나님의 도움을 현재의 판단에도 적용하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온 땅을 살피는 눈은 누구를 찾는가

하나니의 말은 9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온 땅을 두루 살피십니다. 마음이 그분께 온전히 향한 사람들 편에서 힘을 발휘하시려는 것입니다. 왕께서는 이번 일에서 어리석게 행동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왕께 전쟁이 닥칠 것입니다.」역대하 16:9 · 두루새김

이 문장은 흔히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물론 하나님이 인간의 행동을 알고 계신다는 뜻도 포함합니다. 그러나 문장의 중심은 하나님이 무엇을 보시는가보다 무엇을 하시기 위해 보시는가에 있습니다.

아사는 자신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먼 다마스쿠스에 있는 왕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이미 온 땅을 살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사가 찾아 나서야 비로소 상황을 알게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도울 힘을 잃으신 것은 아닙니다. 아사가 그 도움을 의지하는 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어리석게」라는 말은 지능이나 판단 능력이 부족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치적 계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마땅히 선택했어야 할 길을 놓쳤다는 평가입니다.

아사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아람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니는 그 선택 때문에 앞으로 전쟁이 닥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향하기만 하면 모든 정치적 선택이 성공하고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약속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니는 아사의 구체적인 선택을 그의 과거 경험에 비추어 평가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마음이 그분께 온전히 향한」이라는 말은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 도덕적 완벽성을 가리킨다기보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갈라지지 않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역대하 15:17은 아사의 마음이 평생 온전했다고 평가합니다. 하나의 읽기는 15:17의 평가를 아사가 전반적으로 신앙에 충실했다는 뜻으로, 특히 우상 숭배를 없애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대한 평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16장은 그가 전반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왕이었더라도 특정한 위기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또 다른 읽기는 두 진술 사이의 긴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사의 생애를 긍정적으로 요약하는 평가와 그의 후기 행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함께 놓임으로써, 한 사람의 신앙을 단순한 성공이나 실패로만 정리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본문은 아사가 우상 숭배로 돌아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막으려는 왕

역대하 16:10 본문 →

하나니의 책망을 들은 아사의 반응은 그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여 줍니다.

아사는 이 말을 듣고 하나니에게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죄수를 꼼짝 못 하게 묶어 두는 기구가 있는 감옥에 그를 가두었습니다. 그 무렵 아사는 백성 가운데 일부도 가혹하게 억눌렀습니다.역대하 16:10 · 두루새김

앞서 역대하 15장에서 아사는 예언자의 말을 들었을 때 힘을 얻어 개혁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언자의 말을 듣고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한때는 말씀이 왕의 행동을 바꾸었습니다. 이제는 왕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행동을 제한합니다.

아사는 선견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 그를 억압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왕의 분노가 선견자 한 사람에 대한 처벌을 넘어 백성 일부를 향한 가혹한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 그는 바아사가 유다 사람들의 출입을 막으려 하자 그것을 나라의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대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사 자신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습니다.

라마의 봉쇄를 무너뜨렸던 왕이 자기 왕국 안에서는 선견자를 가두고 백성을 억누릅니다.

하나니의 말이 틀렸다고 반박하거나 자신의 선택을 설명하는 장면은 없습니다. 왕이 보인 행동은 분노와 감금이었습니다.

아사는 자신을 위협하던 요새는 허물었지만, 자신의 결정을 돌아보게 하는 말 앞에서는 마음을 닫았습니다.

하나님은 아사의 잘못을 곧바로 파멸로 끝내지 않으시고, 먼저 선견자를 보내 왕의 선택을 드러내고 책망하십니다. 그 책망은 아사가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도움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아사가 다시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던 셈입니다.

이 장에서 가장 심각한 장면은 아사가 처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순간만이 아닙니다. 그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에도 돌이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의 베트 함마흐페케트는 단순히 자유를 제한하는 일반적인 감옥보다는 몸을 묶어 고통을 주는 형벌 시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죄수를 꼼짝 못 하게 묶어 두는 기구가 있는 감옥」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왕이 마지막으로 찾은 사람들

역대하 16:11–12 본문 →

선견자를 가둔 사건 이후, 본문은 아사의 마지막 시대를 간결하게 정리합니다.

아사가 왕이 된 지 39년째 되는 해에 발에 병이 생겼고, 그 병이 매우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플 때에도 여호와야훼를 찾지 않고 의사들을 찾았습니다.역대하 16:12 · 두루새김

성경은 치료 행위 자체를 언제나 불신앙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열왕기하 20:7에서는 히스기야의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무화과 반죽을 종기에 붙이는 행위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구체적인 치료 수단이 반드시 서로 배척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사 이야기에서 문제는 의사를 찾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람 왕에게 도움을 구했을 때의 문제는 아람 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이 들었을 때에도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사들을 찾았습니다.

나라의 위기와 개인의 질병이라는 서로 다른 상황에서 같은 태도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그분의 뜻과 도움을 구하고,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길을 정하려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아사는 통치 초기부터 백성에게 하나님을 찾으라고 명령했던 왕이었습니다(역대하 14:4). 역대하 15장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일이 언약을 새롭게 맺는 일의 중심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자신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의 병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본문은 발에 병이 생겼고 그 병이 매우 심해졌다고만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본문이 그 질병을 특정한 죄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이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니의 예언은 전쟁에 관한 것이었고, 아사의 병은 그 뒤에 별도로 기록됩니다. 두 사건은 아사의 삶을 하나의 흐름으로 보여 주지만, 병의 발생 원인을 그의 외교 정책이나 선견자를 감옥에 가둔 일에 직접 연결하는 것은 본문을 넘어섭니다.

열왕기상 15:23은 아사의 노년에 발에 병이 들었다는 사실을 간단히 기록합니다. 역대하 16:12는 여기에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사들을 찾았다는 평가를 더합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면서 역대기는 왕의 병 자체보다 그가 병 가운데 보인 태도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아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찾는 일은 사라졌습니다.

아주 큰 불과 함께 끝난 왕의 생애

역대하 16:13–14 본문 →

아사는 왕이 된 지 41년째 되는 해에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사가 다윗 성에 자신을 위해 파 놓은 무덤에 그를 묻었습니다. 장례 때 그들은 여러 종류의 향료를 솜씨 있게 섞어 가득 채운 침상에 그를 눕히고, 그를 위해 아주 큰 불을 피웠습니다.역대하 16:14 · 두루새김

본문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사는 백성의 존중을 받으며 묻히는 왕입니다. 그가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했다거나, 죽은 뒤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장례가 앞서 받은 하나니의 책망을 지우지는 않습니다.

아사의 장례가 화려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모든 선택이 옳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가 말년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이전의 신앙과 개혁이 아무 의미 없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역대기는 두 사실을 함께 기억하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유다 왕의 장례에서 불을 피우는 행위가 특별한 애도나 왕실의 예우와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은 예레미야 34:5에서도 확인됩니다. 반대로 역대하 21:19는 여호람 왕이 죽었을 때 백성이 앞선 왕들을 위해 피웠던 것과 같은 불을 그를 위해 피우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아사를 위해 큰 불을 피웠다는 사실은 그가 왕으로서 상당한 장례의 예우를 받았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역대하 16:14는 무엇을 태웠는지 밝히지 않으므로 시신을 화장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 장이 드러내는 신앙의 어려움

역대하 16:1–14 본문 →

그러나 이 본문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결과만이 아닙니다. 아사가 무엇을 얻었는가뿐 아니라 무엇을 의지했는가,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는가,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가 함께 평가됩니다. 처음 하나님을 의지했던 경험이 이후의 모든 선택까지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과거에 올바른 결단을 내렸다는 사실이 오늘의 판단을 자동으로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역대하 16장의 마지막에는 아사의 성대한 장례가 남습니다. 다윗 성의 무덤, 향료로 가득 채워진 침상, 그를 위해 피운 아주 큰 불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나라를 다스린 왕에게 마지막 예우를 다합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장면에 앞서 역대기는 오래 기억해야 할 다른 장면 하나를 남겨 놓았습니다.

왕궁을 찾아온 선견자가 하나님이 온 땅을 두루 살피고 계신다고 말하던 순간입니다.

아사는 나라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먼 나라의 왕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니가 전한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미 온 땅을 살피시며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 편에서 힘을 발휘하려 하고 계셨습니다.

아사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말씀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