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10–28장 · 둘로 갈라진 나라
하나님을 찾았고, 그를 만났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큰 소리로 맹세합니다. 나팔과 뿔나팔이 울리고, 온 유다는 기뻐합니다. 그들은 온 마음과 온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찾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맹세에는 섬뜩한 조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사람이든 어른이든, 남자든 여자든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엄격한 규정을 세운 사람들이 어떻게 동시에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자발적인 사랑과 신뢰의 문제인가요, 아니면 공동체 전체가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인가요?
역대하 15장은 이 긴장을 쉽게 해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사 왕과 유다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얼마나 중대한 일로 받아들였는지 보여 주면서, 그들의 결단이 가진 아름다움과 엄격함을 함께 기록합니다.
이 장은 하나님을 찾으라는 명령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을 찾은 사람들이 그분을 만났다는 증언으로 나아갑니다.
승리한 왕에게 찾아온 예언자
앞 장에서 아사는 구스의 대군을 물리쳤습니다. 그 승리는 아사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이 적군을 치신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역대하 15장은 승리를 축하하는 왕의 연설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셨습니다.역대하 15:1 · 두루새김
이 한 문장에서 이야기의 주도권이 바뀝니다.
전쟁에서는 왕이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이 한 사람에게 임하시고, 그 사람이 왕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다는 것은 예언자가 자신의 통찰력이나 정치적 판단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은 말씀을 전달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가 전하는 첫 말씀은 승리에 대한 칭찬이 아닙니다.
아사랴는 아사를 만나러 나가 말했습니다. 「아사 왕과 온 유다와 베냐민 여러분, 제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여호와야훼와 함께하면, 여호와야훼께서도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찾으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분을 버리면, 그분께서도 여러분을 버리실 것입니다.」역대하 15:2 · 두루새김
이 세 문장은 모두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일방적인 소유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어떤 삶을 살든 그분이 함께하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당연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사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왕조가 소유한 특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 관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아사랴에게 영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언자를 보내 백성에게 자신을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말씀으로 그들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하나님을 찾는 일은 인간이 홀로 시작하여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먼저 부르시는 하나님께 사람들이 응답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버리면, 그분께서도 여러분을 버리실 것입니다」라는 경고는 왕국의 승리가 앞으로도 무조건 지속되리라는 생각을 막습니다. 하나님이 지난 전쟁에서 함께하셨다고 해서, 백성이 그분을 떠나도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보호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사랴는 승리한 왕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하나님도, 가르치는 제사장도, 율법도 없던 때
아사랴는 자신의 경고를 설명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겪었던 혼란을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참되신 하나님도, 가르치는 제사장도, 율법도 없이 지냈습니다.」역대하 15:3 · 두루새김
참되신 하나님 없이 지냈다는 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셨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섬김과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제사장은 단순히 제물을 바치는 역할만 맡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책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레위기 10:11에서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33:10에서도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야곱에게 가르치는 역할을 맡습니다.
따라서 「가르치는 제사장도, 율법도 없이 지냈습니다」라는 말은 종교 시설이나 의식이 모두 사라졌다는 뜻으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공동체 안에서 제대로 가르쳐지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질서가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삶은 단지 개인의 마음이 차가워지는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전하는 통로가 약해지며, 공동체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살아야 하는지도 흔들립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고난을 겪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를 찾았고 그분을 만났습니다.」역대하 15:4 · 두루새김
여기서 2절의 약속이 과거의 경험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만나게 된다는 말씀은 단순한 미래의 가능성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실제로 겪었던 일로 설명됩니다.
「그때에는 나가는 사람도 들어오는 사람도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땅의 모든 주민에게 큰 혼란이 닥쳤기 때문입니다.」역대하 15:5 · 두루새김
「나가는 사람도 들어오는 사람도」라는 표현은 일상의 이동과 활동 전반을 가리키는 관용적인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집을 떠나 일하러 나갔다가 안전하게 돌아오는 평범한 생활조차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한 성읍이 다른 성읍을 쳐서 무너뜨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온갖 고난으로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셨기 때문입니다.」역대하 15:6 · 두루새김
이 말은 당시 폭력을 저지른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들이 서로를 공격하는 역사적 현실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한 예언자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본문이 모든 고난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사랴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특정한 공동체의 역사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마친 예언자는 다시 현재의 아사와 유다 백성에게 돌아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힘을 내고 손을 놓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일에는 보상이 있습니다.」역대하 15:7 · 두루새김
「손을 놓지 마십시오」라는 말은 하던 일을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입니다. 아사는 이미 우상을 제거하고 백성에게 하나님을 찾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제 예언자는 그 일을 계속하라고 격려합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에는 보상이 있습니다」라는 말씀도 이 문맥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종교적 행위를 하면 반드시 원하는 대가를 받게 된다는 일반적인 보상 공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뜻에 따라 공동체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격려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런데 아사랴가 말하는 시대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3–6절은 특정한 왕이나 사건을 지명하지 않습니다. 사사기에서 반복되던 혼란과 고난을 떠올리게 하지만, 사사시대의 어느 사건을 직접 가리킨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북쪽 이스라엘의 종교적 혼란을 염두에 둔 말씀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민족과 성읍 사이의 넓은 지역에 걸친 혼란을 고려하면, 특정 왕국의 현재 상황만으로 좁히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아사랴가 강조하는 것은 정확한 연대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잃어버렸을 때 어떤 삶을 경험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언자의 말씀은 왕의 행동을 바꾸었다
아사랴의 말씀을 들은 아사는 힘을 얻습니다.
아사는 이 말과 예언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힘을 냈습니다. 그는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또 자신이 에브라임 산지에서 점령한 성읍들에서 혐오스러운 우상들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야훼의 성전 현관 앞에 있는 여호와야훼의 제단을 고쳤습니다.역대하 15:8 · 두루새김
여기서 「힘을 냈습니다」라는 말은 아사랴가 앞서 「힘을 내고」라고 권고한 것과 연결됩니다. 아사는 이미 우상과 산당을 제거하는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언자의 말씀을 듣고 그 일을 더욱 넓은 지역으로 확대합니다.
특히 이번에는 유다와 베냐민뿐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에서 점령한 성읍들도 포함됩니다. 이 지역은 북쪽 이스라엘과 맞닿아 있거나 이전의 전쟁을 통해 유다의 영향력이 미치게 된 곳이었습니다. 아사의 개혁은 왕국의 중심지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없애는 것은 잘못된 숭배 대상을 없애는 일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제단을 고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자리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아사는 없애는 일과 세우는 일을 함께 수행합니다.
이것은 뒤이어 등장할 예루살렘의 큰 모임을 준비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겠다는 언약을 맺기 전에, 그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장소가 정비됩니다.
아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얻은 용기는 더 많은 것을 차지하는 데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이미 맡겨진 공동체의 예배를 바로 세우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셨다고 기록했지만, 8절에는 「예언자 오뎃의 예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앞의 아사랴를 가리키는 줄인 표현으로 이해하거나, 글을 베껴 쓰는 과정에서 이름이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설명이 정확한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왕국의 경계를 넘어 모여든 사람들
아사의 개혁이 진행되자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아사는 온 유다와 베냐민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에서 와서 그들 가운데 살던 사람들도 모았습니다.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로 넘어와 있었기 때문입니다.역대하 15:9 · 두루새김
유다와 베냐민은 아사가 다스리는 왕국의 중심 지파였습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북쪽 왕국에서 중요한 지파들이었습니다. 시므온은 본래 유다 지역 안에 성읍들을 배정받았던 지파이므로(여호수아 19:1–9), 지파의 이름과 당시 정치적 국경이 반드시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유다가 군사적으로 강해졌다는 사실만 본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아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아보았다고 기록합니다.
르호보암 시대에도 북쪽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을 찾기로 마음을 정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11:13–16). 이제 아사 시대에는 비슷한 움직임이 더욱 분명한 공동체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분열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그 경계를 넘어섭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여로보암의 후계자들이 다스리는 북쪽 왕국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에 속한 백성 전체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 백성이 비록 정치적으로 갈라져 있지만, 하나님을 찾기 위해 함께 모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역대기는 중요하게 다룹니다.
그들은 아사가 왕이 된 지 15년째 되는 해 셋째 달에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역대하 15:10 · 두루새김
11절은 그들이 소 700마리와 양과 염소 7,000마리를 제물로 바쳤다고 기록합니다. 이 제물들은 그들이 전쟁에서 빼앗아 온 것 가운데서 마련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얻은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되고, 그 제물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다짐하는 자리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왕국의 군사적 승리 이야기는 공동체의 언약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조금 더 깊이
셋째 달은 이스라엘의 절기 달력에서 칠칠절, 곧 오순절이 있는 시기와 겹칩니다(레위기 23:15–21). 따라서 이 모임이 그 절기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하 15장은 이 집회를 칠칠절이라고 직접 부르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날짜나 절기 의식도 밝히지 않으므로, 두 사건을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온 마음으로 맺은 언약과 죽음의 규정
그들은 온 마음과 온 목숨을 다해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찾겠다는 언약을 맺었습니다.역대하 15:12 · 두루새김
이미 그들은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찾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 다시 충실하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임은 이미 맺은 언약을 공동체가 충실히 지키겠다고 새롭게 다짐하는 자리입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의지와 삶 전체를 하나님을 찾는 방향으로 두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은 현대 독자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그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찾지 않는 사람은 어린 사람이든 어른이든,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역대하 15:13 · 두루새김
자발적인 헌신과 강제적인 처벌이 한 장면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규정을 전하지만, 그날 누가 이 조항에 따라 처형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규정의 엄격함을 약화시켜서도 안 됩니다. 죽음의 형벌이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와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공동체가 어떤 백성인지, 어떤 법과 질서를 따라 살아야 하는지를 정하는 기반이었습니다.
또한 이것을 오늘의 종교 공동체가 신앙을 강제하거나 신앙이 없는 사람을 처벌해도 된다는 명령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고대 이스라엘의 정치적·종교적 공동체가 맺은 언약의 모습을 기록합니다. 그것이 현대의 모든 사회나 종교 공동체에 동일한 처벌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큰 목소리와 함성으로 여호와야훼께 맹세했습니다. 나팔과 뿔나팔도 울렸습니다.역대하 15:14 · 두루새김
여기서 맹세는 개인이 조용히 마음속으로 결심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큰 목소리와 함성, 나팔과 뿔나팔이 울리는 공개적인 공동체의 선언입니다.
온 유다가 그 맹세를 기뻐했습니다. 온 마음으로 맹세하고 온 뜻을 다해 여호와야훼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를 만났고, 여호와야훼께서는 사방에 평안을 주셨습니다.역대하 15:15 · 두루새김
여기에 긴장이 남습니다.
본문은 그 기쁨이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온 마음으로 맹세하고 온 뜻을 다해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에 기뻐했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본문이 온 유다가 기뻐했다고 기록한다고 해서, 그 사회의 모든 개인에게 아무런 갈등이나 두려움도 없었다고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은 그들에게 기쁨의 이유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의 모습을 눈으로 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찾는 백성에게 응답하셨으며, 그들이 그분과의 관계를 실제로 누리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응답의 구체적인 결과가 「사방에 평안을 주셨습니다」라는 표현입니다. 앞 장에서도 아사는 하나님이 평안을 주셨기 때문에 성읍을 세울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평안은 왕 개인의 통치만이 아니라 언약을 새롭게 한 공동체 전체에게 주어진 선물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6:5는 이스라엘에게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역대하 15장의 표현이 그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사람의 삶 일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같은 신학적 방향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마음은 단순히 감정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히브리어에서 마음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단하는 인간의 내적 중심을 가리킵니다. 목숨 역시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만을 뜻하기보다 살아 있는 사람의 존재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신명기 13:6–11과 17:2–7에는 다른 신들을 섬기도록 유혹하거나 실제로 우상 숭배를 행하는 사람에게 죽음의 형벌을 적용하도록 하는 규정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신명기의 어떤 처벌 규정을 정확히 적용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신명기에는 특정한 우상 숭배나 신앙을 저버리는 행위와 그에 대한 조사 절차가 언급되지만, 역대하 15:13은 더 넓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찾지 않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규정을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어떻게 적용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신명기에서 반복되는 언약의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충실하게 살아갈 때 땅에서 평안을 누리고, 하나님을 버릴 때 혼란과 고난을 겪는다는 주제입니다(신명기 28장).
왕실 안에 있던 우상까지 제거하다
언약을 맺는 큰 모임이 끝난 뒤, 이야기는 뜻밖에도 왕실 내부로 들어갑니다.
아사 왕은 할머니 마아가까지 태후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마아가가 아세라를 섬기려고 끔찍한 우상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사는 그 우상을 찍어 쓰러뜨리고 가루로 부순 뒤 기드론 골짜기에서 불태웠습니다.역대하 15:16 · 두루새김
태후는 단순히 왕의 어머니라는 가족적 지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왕실에서 특별한 명예와 영향력을 지닌 자리였습니다. 이는 마아가가 왕실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언약에 대한 책임에서 제외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마아가의 경우 본문은 죽음의 형벌을 집행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지위를 빼앗고 우상을 파괴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13절의 처벌 규정이 실제로 어떻게 집행되었는지를 직접 보여 주는 사례는 아닙니다.
아사의 개혁은 다른 사람의 우상을 없애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기 왕실의 권위와 결합된 우상 숭배도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7절은 개혁의 성과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나 산당들은 이스라엘에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사의 마음은 평생 하나님께 온전히 향해 있었습니다.역대하 15:17 · 두루새김
앞 장에서는 아사가 유다의 모든 성읍에서 산당들을 없앴다고 기록했습니다(14:5). 여기서는 산당들이 이스라엘에서 없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한 가지 가능성은 두 구절이 가리키는 지역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14장은 유다의 성읍들을 말하고, 15장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따라서 북쪽 왕국에 여전히 남아 있던 산당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아사의 개혁이 넓은 지역에 걸쳐 시행되었지만 모든 산당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5:14에서도 아사 시대에 산당들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본문들만으로 어느 설명이 정확한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아사의 개혁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역대기 저자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향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아사가 평생 단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왕의 삶에 대한 이 표현은 그가 하나님을 향해 지녔던 기본적인 충성과 헌신을 평가하는 말입니다.
이는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향해 있는 것과 모든 결과가 완벽한 것을 구별하게 합니다.
사람은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자신이 맡은 공동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실패나 미완성의 결과가 언제나 그 사람의 신실함이 부족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 말이 남아 있는 잘못을 그대로 방치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사는 실제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개혁을 적극적으로 시행했습니다.
18절에서는 아사가 아버지가 하나님께 따로 바쳐 둔 것들과 자신이 따로 바쳐 둔 것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왔다고 기록합니다. 그것들은 은과 금과 기구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제단을 고친 일과 함께 성전 예배를 정비하는 또 하나의 행동입니다.
그의 신앙은 말과 결단뿐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났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역대하 11:20–22에서는 르호보암의 아내 마아가가 아비야의 어머니로 등장합니다. 아비야는 아사의 아버지이므로, 이 계보를 따르면 마아가는 아사의 할머니가 됩니다. 다만 역대하 13:2에서는 아비야의 어머니가 미가야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어 계보상의 이름과 관계에는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남습니다. 15:16의 원문은 마아가를 아사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고대 왕실의 계보 표현에서는 어머니라는 호칭이 더 윗세대의 여성에게 사용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앞선 계보에 따른 관계를 드러내어 「할머니 마아가」로 옮겼습니다. 기드론 골짜기는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후에도 우상과 부정한 제사 물건을 처리하는 장소로 등장합니다(열왕기하 23:4–6).
쉼으로 끝나는 이야기
역대하 15장은 매우 짧은 문장으로 끝납니다.
아사가 왕이 된 지 35년째 되는 해까지 전쟁이 없었습니다.역대하 15:19 · 두루새김
아사랴는 3–6절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이 겪었던 혼란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때는 나가는 사람도 들어오는 사람도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한 성읍이 다른 성읍을 쳐서 무너뜨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사 시대의 공동체는 전쟁이 없는 시간을 누립니다.
이것은 영원히 전쟁이 사라졌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실제로 전쟁이 없었던 시간에 관한 기록입니다.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아가고,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공동체가 평온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찾았고, 만났고, 쉼을 얻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진 약속이, 공동체의 결단을 거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는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이 맺은 언약에는 엄격한 의무와 무거운 책임이 있었습니다. 역대기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일 자체는 그분이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응답하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더 이상 전투의 함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울려 퍼졌던 나팔 소리도 잦아들었고, 사람들이 맹세하던 큰 목소리도 멈추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전쟁이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평온한 날들을 바라보면서 역대기 저자가 기억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제물을 바쳤는지, 얼마나 강한 맹세를 했는지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는 평안이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