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오기 하권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14–15장 · 니카노르와 마지막 승리

평화와 위협의 오른손

평화를 약속했던 오른손이 성전을 향해 뻗어질 때

마카베오기 하권 14장에는 뜻밖의 우정이 등장합니다.

유다 마카베오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온 니카노르가 정작 유다와 평화 협약을 맺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유다에게 마음이 끌려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라고 권하기까지 합니다. 유다는 실제로 결혼하여 평온한 생활을 시작합니다.

적군의 지휘관과 저항군의 지도자가 서로를 신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알키모스가 두 사람의 관계를 왕에게 고발하자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니카노르는 유다를 묶어서 보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자신이 맺은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왕에게 복종하려 합니다.

마침내 그는 성전 앞에서 오른손을 뻗어 성전을 무너뜨리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평화를 무너뜨린 것은 알키모스의 고발과 왕의 명령, 그리고 그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 니카노르의 선택이었습니다.

악한 동기로 평화를 파괴하는 사람도 있지만, 평화가 옳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두 사람 사이의 우정과 평화였던 이야기가, 마지막에는 한 사람의 몸과 부활의 소망으로 옮겨 갑니다.

사람이 옳다는 것을 알고도 지키지 못할 때, 그 무너진 신뢰의 대가는 누가 치르게 됩니까?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714장 본문 읽기 →

대제사장직을 되찾으려는 사람이 민족의 평화를 말하다

마카베오기 하권 14:1–14 본문 →

왕이 바뀌자 다시 찾아온 알키모스

1–2절에서는 셀레우코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왕권을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는 트리폴리스 항구로 들어와 안티오코스 왕과 리시아스를 죽이고 나라를 차지했습니다. 앞 장에서 유대 사람들과 평화 협약을 맺었던 통치자들이 이제 사라진 것입니다.

3절은 그가 전에 대제사장이었던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더럽혔기 때문에 더 이상 거룩한 제단에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본문은 그가 어떤 행동으로 자신을 더럽혔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서로 갈라져 지내던 시절」이라는 표현도 누구와 누구 사이의 분리를 가리키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어 전승에는 이 자리에 ‘섞이지 않음’과 ‘뒤섞임’으로 달리 읽히는 형태도 있습니다.

다만 저자는 알키모스가 자진해서 자신을 더럽혔으며, 그 때문에 정상적인 방식으로 제사장직을 되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에게 금관과 종려나무 가지, 성전의 올리브 가지들을 바칩니다. 이것은 왕에게 접근하기 위한 외교적 선물의 성격을 지닙니다.

거룩한 제단에 나아갈 길을 잃은 사람이, 왕의 궁정에서 다시 제단에 접근할 길을 찾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직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알키모스에게 그것을 되찾는 방법은 왕의 권력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영예로운 자리」라는 말

7절에서 알키모스는 자신이 대제사장 자리를 빼앗겼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그 자리를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영예로운 자리」라고 부릅니다. 대제사장직은 이스라엘의 제사장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8–29장과 민수기 18장은 아론의 집안에 주어진 제사장의 일을 설명합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7장 14절에서도 알키모스를 아론 계열의 제사장으로 인정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제사장 가문의 혈통을 지녔다는 것과 그 자리에서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해낸다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알키모스는 자신의 자리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권리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저자는 그가 자신의 행동으로 거룩한 제단에 나아갈 길을 잃었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리를 자기 지위와 명예의 문제로 바꾸는 순간,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의 목적은 뒤로 밀려납니다.

왕의 이익을 말하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다

5–10절에서 알키모스는 왕 앞에서 치밀하게 말을 이어 갑니다.

그는 자신이 왕국의 안정을 걱정한다고 주장합니다. 동포들의 처지도 염려한다고 말합니다. 유다가 이끄는 사람들이 전쟁과 반란을 계속하여 나라가 안정을 찾지 못한다고 고발합니다.

「유다가 살아 있는 한, 나라의 일이 평온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4:10 · 두루새김

그러나 독자는 이 연설을 듣기 전에 이미 알키모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직을 되찾을 수 없게 되자 왕을 찾아왔습니다. 따라서 알키모스의 연설은 객관적인 정치 상황 보고로만 제시되지 않습니다.

특히 8절에서 그는 첫째로 왕의 일을 염려하고, 둘째로 동포들을 생각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가 동포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제안하는 일은 유다의 제거입니다.

그가 원하는 평온은 유대 사람들이 조상의 율법을 지키며 안전하게 살아가는 평화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다시 대제사장직에 오르고 왕국의 통치 질서가 안정되는 상태일까요?

본문은 알키모스가 진정으로 동포들의 평안을 원했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자기의 어리석은 일을 밀어붙이려 했다고 소개합니다.

평화를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평화를 이루려는 것은 아닙니다. 평화라는 말이 자기 권력을 되찾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6장 14절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예언자는 실제로는 평안하지 않은데도 평안하다고 말하며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다루는 지도자들을 비판합니다. 알키모스의 상황이 예레미야 당시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현실을 외면하면서 평화를 말할 수 있다는 문제는 공통적입니다.

하시딤은 누구였을까

6절에서 알키모스는 유다의 무리를 「하시딤」이라고 부릅니다.

이 이름은 히브리어 하시딤(Ασιδαῖος), 곧 경건한 사람들, 신실한 사람들을 뜻하는 표현에서 나왔습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2장 42절에서는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의 무리가 마타티아스에게 합류합니다. 그런데 상권 7장 12–17절에서는 하시딤이 알키모스와 평화 협상을 시도했다가 배신당하는 사건이 기록됩니다.

따라서 하시딤이라는 집단과 유다의 군대가 어느 시기에도 완전히 동일한 조직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서로 겹치는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지만, 두 집단의 관계를 정확히 되짚어 볼 자료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들로 알려진 이들을 왕국의 평화를 방해하는 반란 세력으로 규정합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에 충실한 것이 자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특징이었지만, 알키모스는 그들의 행동을 정치적인 위협으로 바꾸어 설명합니다.

왕에게는 바로 그 설명이 효과적이었습니다.

왕은 무엇을 명령했는가

데메트리오스는 니카노르를 유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합니다.

12절은 그가 전에 코끼리 부대장이었다고 소개합니다. 왕의 명령은 세 가지였습니다. 유다를 죽이고,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흩어 버리고, 알키모스를 대제사장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유다를 제거하는 일은 단순히 반란군의 지휘관을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알키모스를 성전의 대제사장으로 세우기 위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누가 대제사장이 될지를 결정하기 위해 군대가 파견됩니다.

알키모스는 거룩한 제단에 나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길은 다른 사람을 죽이고 군대를 동원하여 자리를 되찾는 길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이제 유다와 니카노르 사이에 펼쳐질 뜻밖의 평화까지 위협하게 됩니다.

적을 죽이러 온 장군이 그와 평화를 맺다

마카베오기 하권 14:15–25 본문 →

하나님께 나타나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

유대 사람들은 니카노르가 쳐들어오고 다른 민족들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몸에 흙을 뿌리고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자기 백성을 영원히 세우시고, 언제나 모습을 드러내어 자기에게 속한 백성을 도우시는 분께 간청한 것이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4:15 · 두루새김

하나님의 백성은 왕국의 통치자가 마음대로 처분하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신명기 32장 9절에서도 야곱은 하나님의 몫이자 그분께 속한 백성으로 묘사됩니다.

왕은 그들을 반란 세력으로 생각합니다. 알키모스는 그들을 제거해야 평화가 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곧 전투가 벌어집니다.

17절에서 유다의 형제 시몬은 니카노르의 군대와 맞붙었다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뜻밖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니카노르는 왜 싸움을 멈추려 했을까

18절에서 니카노르는 유다와 부하들이 얼마나 용감한지 듣습니다.

그들이 나라를 위해 싸울 때 보여 준 담대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피를 흘리는 싸움으로 승부를 내기를 꺼립니다. 왕은 그에게 유다를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니카노르는 유다와 협상하기로 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보내 평화 협상을 제안합니다. 19절에서는 포시도니오스와 테오도토스, 맛다디아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서로 「화해의 약속을 주고받게」 하려고 파견됩니다.

원문에서는 이 약속을 서로 오른손을 주고받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오른손은 신뢰와 약속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었습니다. 서로를 적으로만 대하지 않고, 앞으로 약속을 지킬 상대방으로 인정하겠다는 행동입니다.

그 손은 평화를 위한 손입니다.

유다는 혼자 결정하지 않는다

20절에서 저자는 평화 협약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제안을 충분히 검토합니다. 유다는 무리와 의논합니다. 모두의 뜻이 하나로 모이자 협약에 동의합니다.

이는 앞서 유다가 장로들과 의논하고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일을 생각하여 행동했던 모습과 연결됩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명예가 아닙니다. 공동체가 살아갈 수 있는 평화입니다.

그런데 22절은 그가 사람들과 의논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적들이 갑자기 해를 끼칠 경우에 대비하여 무장한 사람들을 전투에 중요한 곳들에 배치합니다.

그들은 이미 평화를 가장한 학살과 약속의 파기를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상대방과 협상한다는 사실이 곧 모든 위험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평화의 가능성을 열어 두면서도 공동체의 안전을 위한 책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다

21절은 협상의 장소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두 사람은 따로 만날 날짜를 정합니다. 그리고 양쪽에서 의자를 하나씩 내어 앉을 자리를 마련합니다.

앞에서는 서로를 죽이기 위해 군대를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합니다. 상대방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자신의 말을 듣고 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유다에게 결혼하라고 권한 니카노르

23–25절은 14장에서 가장 뜻밖의 부분입니다.

니카노르는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부당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모여들었던 무리도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유다를 늘 곁에 둡니다. 24절은 그가 진심으로 유다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25절에서는 니카노르가 유다에게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라고 권합니다. 유다는 결혼하고 평온하게 지내며 아내와 함께 삽니다.

전쟁을 멈춘다는 것은 단순히 오늘 적을 죽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다는 것은 내일을 기대하는 행동입니다.

처음에 니카노르는 유다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에게 자녀를 낳으며 살아가라고 권합니다.

죽여야 할 대상으로 보았던 사람을, 미래를 살아가야 할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평화가 알키모스에게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21절의 원문에는 드문 그리스어 낱말이 있어 수레나 가마를 뜻하는지, 좌석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의자를 내어 앉을 자리를 마련한 것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두 사람이 정해진 장소에서 공식적으로 만나 대화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평화를 파괴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고발이었다

마카베오기 하권 14:26–30 본문 →

알키모스는 왜 두 사람의 우정을 두려워했을까

26절에서 알키모스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는 유다와 니카노르가 서로 호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맺은 협약을 가지고 데메트리오스 왕에게 찾아갑니다. 그런데 알키모스는 그 협약을 평화의 성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왕국의 권위를 위협하는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는 니카노르가 왕의 뜻을 거스르는 생각을 품고 있다고 고발합니다. 심지어 유다를 자기 후임으로 세웠다고 주장합니다.

본문이 확인해 주는 사실은 니카노르와 유다가 협약을 맺었고 서로 호의를 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카노르가 유다를 자기 후임으로 공식 임명했다는 사실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알키모스가 왕에게 한 주장입니다. 더구나 27절에서 저자는 그의 말을 「거짓 비방」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대제사장직이었습니다. 왕은 유다를 제거하고 알키모스를 대제사장으로 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니카노르가 유다와 평화를 맺으면서 그 계획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유다가 살아 있고 그를 지지하는 공동체가 유지된다면 알키모스가 자기 지위를 되찾기도 어려워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우정은 알키모스에게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계획을 가로막는 현실적인 장애물이었습니다.

10절에서 그는 유다가 살아 있는 한 「나라의 일이 평온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유다와 니카노르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자,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알키모스에게 필요한 것은 평화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권력 질서를 유지하는 평화였습니다.

니카노르는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었다

왕은 알키모스의 고발을 듣고 분노합니다.

그리고 니카노르에게 유다를 묶어서 안디옥으로 보내라고 명령합니다. 28절은 니카노르의 반응을 자세히 기록합니다.

이 지시를 받은 니카노르는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유다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맺은 약속을 저버려야 한다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4:28 · 두루새김

그러므로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단순한 오해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지만 왕을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꾀를 써서 명령을 실행할 알맞은 기회를 기다렸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4:29 · 두루새김

그는 약속을 지키는 대신 그것을 저버릴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어려운 처지를 인정하는 것과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옳은 것을 안다는 사실만으로 그 옳음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보다 먼저 달라진 태도

30절에서 유다는 니카노르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그가 전보다 차갑게 대합니다. 평소의 만남에서도 더 거칠게 행동합니다. 유다는 그 태도가 좋은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부하들을 모아 숨습니다.

유다는 실제로 니카노르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그 우정이 있었다는 이유로 지금의 위험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신뢰는 무너집니다.

그런데 니카노르는 유다를 붙잡지 못하자 전혀 다른 곳을 향합니다.

성전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카베오기 상권 7장 26–32절에서는 같은 사건의 전개가 다르게 기록됩니다. 상권의 니카노르는 처음부터 유다를 속여 붙잡으려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는 평화를 말하며 접근하지만, 실제로는 유다를 체포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하권에서는 니카노르가 유다에게 진정한 호의를 품었다고 기록합니다. 특히 28절에서는 니카노르가 유다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까지 설명합니다. 두 기록을 억지로 합쳐 니카노르가 처음부터 속임수를 쓰면서 동시에 진심으로 우정을 품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두 기록 가운데 어느 쪽이 니카노르의 속마음을 역사적으로 더 정확히 그렸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평화의 오른손이 성전을 위협하는 손으로 바뀌다

마카베오기 하권 14:31–36 본문 →

니카노르는 왜 성전으로 갔을까

31절에서 니카노르는 유다의 뛰어난 꾀에 자기가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갑니다. 그때 제사장들은 정해진 제물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니카노르는 그들에게 유다를 넘겨 달라고 명령합니다. 제사장들은 유다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맹세합니다.

그는 유다를 붙잡으려는 자신의 정치적·군사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전과 제사장들을 압박합니다. 유다의 행방을 모르는 제사장들에게 책임을 지우려는 것입니다.

23절에서 그는 예루살렘에 머물며 부당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사 중인 제사장들을 위협합니다.

다시 등장한 오른손

그러자 니카노르는 성전을 향해 오른손을 뻗고 맹세했습니다. 「너희가 유다를 묶어서 내게 넘겨주지 않으면, 나는 이 하나님의 집을 무너뜨려 평지로 만들겠다. 제단도 헐어 버리고, 이곳에 디오니소스를 위한 화려한 신전을 세우겠다.」마카베오기 하권 14:33 · 두루새김

19절에서 원문이 말하는 오른손은 상대방과 신뢰를 나누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33절의 오른손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는 서로를 인정하는 약속입니다.

다른 하나는 상대방이 따르지 않으면 파괴하겠다는 위협입니다.

손은 같지만, 그 손이 향하는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가 맹세하는 능력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능력을 잘못된 목적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형식을 갖추었다고 해서 그 약속의 내용까지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 디오니소스의 신전인가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장소를 없애고 그리스 신을 위한 장소로 바꾸겠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들이 겪었던 종교적 강압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위협입니다.

더구나 성전은 얼마 전에 깨끗하게 회복된 곳입니다. 10장에서 사람들은 성소를 깨끗하게 하고 새로운 제단을 세웠습니다. 다시 제사를 드리고 향을 피우고 등불을 켰습니다. 그런데 이제 니카노르는 바로 그 제단을 헐어 버리겠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을 붙잡으려는 권력이 마침내 공동체가 가장 거룩하게 여기는 장소까지 인질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의 반응은 니카노르의 행동과 정반대입니다.

니카노르는 오른손을 뻗고, 제사장들은 두 손을 든다

34절에서 제사장들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습니다.

니카노르의 손은 파괴를 선언합니다.

제사장들의 손은 보호를 간청합니다.

니카노르는 자신의 군사적 권력으로 성전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사장들은 그 성전을 지키실 수 있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머무실 성전이 저희 가운데 있게 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4:35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없으면 살아 계실 수 없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어떤 건물이나 사람이 자신을 위해 마련한 공간에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는 열왕기상 8장 27절과 역대하 6장 18절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하나님께 바칠 때 했던 고백이 떠오릅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도 하나님을 다 모실 수 없는데, 사람이 지은 성전이 어떻게 하나님을 다 모실 수 있겠습니까?

성전은 하나님을 가두어 두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머무실 곳으로 허락하신 성전을 지켜 달라고 간청합니다.

「모든 거룩함을 다스리시는 거룩하신 주님」

「이제 모든 거룩함을 다스리시는 거룩하신 주님, 얼마 전에 깨끗해진 이 집을 영원히 더럽혀지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마카베오기 하권 14:36 · 두루새김

여기서 「모든 거룩함을 다스리시는 거룩하신 주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거룩함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그분께 속한 성전도 거룩하게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의 기도는 자신들이 성전을 깨끗하게 만들었으니 이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고 주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얼마 전에 깨끗해진 성전을 하나님께서 계속 지켜 주시기를 구합니다.

니카노르의 위협 앞에서 그들은 거룩함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는 성전이 아니라 한 사람의 집이 포위됩니다.

조금 더 깊이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세계에서 포도주와 축제, 황홀경 등과 관련된 신입니다. 6장 7절에서는 유대 사람들이 강제로 디오니소스의 축제 행렬에 참여하도록 요구받았다고 기록합니다.

대제사장직을 탐낸 사람과 「유대 사람들의 아버지」라 불린 사람

마카베오기 하권 14:37–40 본문 →

라지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예루살렘의 어른들 가운데 라지스라는 사람이 니카노르에게 고발되었습니다. 그는 동포를 아끼고 평판이 매우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베푸는 호의 때문에 ‘유대 사람들의 아버지’라고 불렸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4:37 · 두루새김

앞서 26절에서 니카노르와 유다가 서로에게 품었던 호의는 정치적 고발과 왕의 명령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라지스가 오랫동안 동포들에게 베풀었던 호의는 공동체 안에서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직함이 아닙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했는가에 따라 얻은 이름입니다.

누가 진정한 지도자인가

알키모스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직분을 내세웠지만, 라지스는 동포들에게 베푼 삶으로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는 어떤 직함을 가지고 있는가로만 평가될 수 없습니다. 그가 실제로 누구를 돌보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는지도 중요합니다.

라지스는 왜 표적이 되었을까

38절에서는 라지스가 전에 서로 갈라져 지내던 시절에 유대교 때문에 재판을 겪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자신의 몸과 목숨을 위험에 내놓을 만큼 조상의 신앙에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3절에서 알키모스는 서로 갈라져 지내던 시절에 자진해서 자신을 더럽힌 사람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그 시대의 위험에 어떻게 대응했는지가 대비됩니다.

한 사람은 자신을 더럽혔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니카노르는 바로 이 라지스를 붙잡으려 합니다.

39절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품은 적대감을 분명히 드러내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40절에서는 라지스를 붙잡으면 유대 사람들에게 재앙을 안겨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본문은 라지스가 니카노르에게 범죄를 저질렀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유대 공동체 안에서 존경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니카노르에게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던 사람을 붙잡고 모욕하면, 공동체 전체를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전은 유대 공동체의 예배 중심이었습니다. 라지스는 그 공동체 안에서 아버지라고 불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니카노르는 공동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공격하여 그 공동체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이번에는 성전 건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몸이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라지스의 마지막 행동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마카베오기 하권 14:41–46 본문 →

오백 명이 넘는 병사들이 한 사람을 포위하다

니카노르는 라지스를 붙잡기 위해 오백 명이 넘는 병사를 보냅니다.

병사들은 그가 있는 곳을 포위합니다. 문을 힘으로 밀어붙이고, 불을 질러 들어가려 합니다. 그는 무장한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곧 붙잡힐 처지였습니다.

그는 흉악한 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자기의 품위에 걸맞지 않은 모욕을 당하느니, 명예롭게 죽기를 바랐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4:42 · 두루새김

그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단순히 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붙잡혀 모욕당하고 자신의 신앙과 존엄을 짓밟히는 일이었습니다.

저자는 라지스의 행동을 용감하고 고귀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박해 상황에서 존엄을 지키려 했던 한 인물에 대한 이 이야기의 평가입니다. 이를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자살의 정당화나 모범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특히 라지스가 처한 극단적인 박해와 체포의 위협은 일상적인 고통이나 절망의 상황과 같게 취급할 수 없습니다.

그의 행동은 순교자들과 같은가

라지스의 이야기는 마카베오기 하권 6–7장의 순교자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6–7장의 순교자들은 박해자들에게 고문당하고 처형되었습니다. 반면 라지스는 붙잡혀 모욕당하는 일을 피하려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행동을 앞선 순교자들과 완전히 같은 사건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마카베오기 하권의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라지스가 폭력적인 권력 앞에서 자신이 지켜 온 신앙과 존엄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마지막 행동 자체를 이상적인 모습이나 따라 할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본문의 중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몸은 무너지고, 소망은 하나님께 향한다

43–46절의 묘사는 매우 참혹합니다.

라지스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극심한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향해 간청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피를 거의 다 잃은 채, 상처 입은 자기 몸의 일부를 두 손으로 움켜쥐어 무리를 향해 던졌습니다. 그리고 생명과 숨을 다스리시는 분께 그것을 다시 자기에게 돌려 달라고 간청하며, 그렇게 죽음을 맞았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4:46 · 두루새김

니카노르는 라지스의 몸을 붙잡고 모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사들은 그의 몸을 공격하고 해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지스가 마지막으로 부른 하나님은 생명과 숨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는 자기 몸을 파괴할 수 있는 인간의 권력을 마주하면서도, 생명을 다스리는 최종적인 권한은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시 돌려 달라는 간구의 의미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죽음에 직면한 사람이 자기 몸을 다시 돌려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입니다.

라지스의 몸은 인간의 폭력 앞에서 무너졌지만, 그의 마지막 간청은 그 몸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믿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14장 46절이 부활의 시점과 방식, 몸이 어떻게 회복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7장 11절에서 순교자는 자신의 몸의 각 부분을 하나님에게서 받았으므로 그분께서 다시 돌려주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7장 22–23절에서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생명과 숨을 주신 창조주가 그것을 다시 돌려주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시 자기에게 돌려 달라」는 표현은 상처 입은 몸이 당장 기적적으로 회복되기를 구하는 말로만 읽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어서 라지스가 죽었다고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앞선 순교 이야기의 맥락에서 보면 죽음 이후 하나님이 생명을 다시 일으키시고 몸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부활의 소망과 연결됩니다. 12장에서 유다는 죽은 형제들을 위해 속죄 제사를 마련했습니다. 그 행동은 하나님께서 죽은 이들을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는 소망에 근거했습니다.

마지막에 두 손으로 붙잡고 있던 것

마카베오기 하권 14:1–46 본문 →

이 장에는 여러 사람의 손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붙잡으려 했고, 어떤 사람은 약속을 지키려 했으며, 어떤 사람은 다른 이의 생명을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 했습니다. 니카노르가 알키모스처럼 처음부터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도, 그가 실제로 선택한 행동은 유대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평화가 무너지고, 잘못 없는 사람들이 위협받으며, 공동체의 거룩한 장소가 공격받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라지스의 두 손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기 몸이 무너져 가는 가운데 생명과 숨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다시 돌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몸을 붙잡을 수 있지만, 그 생명의 최종적인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라지스는 자신의 몸을 다시 돌려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한 뒤 죽음을 맞습니다. 본문은 그가 실제로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극심한 폭력과 죽음 앞에서 그가 누구를 불렀는지를 기록합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14장은 한 사람의 몸이 무너지는 장면에서, 그 몸을 다시 돌려주실 수 있는 생명의 주님을 향한 간청을 남기고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