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오기 하권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6–7장 · 박해와 순교

엘아자르가 끝까지 지키려 한 것

마카베오기 하권 6장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은 어쩌면 엘아자르가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에게 죽음을 피할 방법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흔 살의 엘아자르는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율법이 금한 음식이었으므로 그는 거절했고, 고문당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그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이 조용히 해결책을 제안합니다.

실제로 돼지고기를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먹어도 되는 고기를 따로 준비하면 됩니다. 다만 사람들 앞에서 왕이 명령한 고기를 먹는 것처럼 행동하면 됩니다.

그런데 엘아자르는 그 제안을 거절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실제로 금지된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율법을 지킨 것 아닌가요? 그저 먹는 척하는 행동 때문에 목숨까지 버려야 했을까요?

6장 전반부에서 안티오코스의 박해는 유대 사람들이 율법을 어기도록 강요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점차 그들이 유대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를 드러낼 수 없게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성전의 이름을 바꾸고, 안식일과 명절을 금지하고, 다른 신에게 바치는 제사에 참여하도록 강제합니다.

박해자들은 사람들을 굴복시켜 하나의 본보기를 만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엘아자르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전혀 다른 본보기를 남겼습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106장 본문 읽기 →

율법을 어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따라 살지 못하게 하다

마카베오기 하권 6:1–3 본문 →

5장 끝에서 예루살렘은 왕의 군대에 짓밟혔고, 유다와 소수의 동료들은 산으로 물러났습니다. 6장은 그 뒤 박해가 일상의 삶 전체로 확대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은 아테네 출신의 노인을 보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조상 대대로 내려온 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지 말라고 강요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1 · 두루새김

아테네는 그리스 문화와 시민 교육의 중요한 중심지였습니다. 따라서 이 인물의 출신지는 이후 강요되는 그리스식 종교와 생활 질서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그리스어 게론타(γέρων) 아테나이온(Ἀθηναῖος)은 「아테네 출신의 노인」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첫 단어를 ‘게론’이라는 고유명사로 이해할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본문만으로 그의 정확한 신분과 이름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언제 쉬어야 하는지,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아이에게 어떤 표지를 남겨야 하는지, 어떤 축제를 지켜야 하는지까지 국가 권력이 결정하려 합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율법은 성전에서만 지키는 종교 규칙이 아니었습니다. 출생과 가족, 음식과 노동, 휴식과 명절을 통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살아 내는 질서였습니다.

따라서 율법에 따라 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단지 종교 의식을 제한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무너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의 이름을 바꾸는 일

또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고 ‘올림포스의 제우스 성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했습니다. 그리짐의 성전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걸맞게 ‘나그네를 보살피는 제우스 성전’이라고 부르게 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2 · 두루새김

「나그네를 보살피는 제우스」는 제우스가 손님과 나그네에 대한 환대를 보호하는 신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다만 그리짐 성전의 이름을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걸맞게」 붙였다는 설명은 해석이 갈립니다. 그들이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들 자신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반영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만으로 어느 쪽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짐산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배의 중심으로 여긴 장소였습니다. 신명기 11:29에서는 그리짐산이 축복과 연결되어 등장하며, 훗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독자적인 성소 전통과도 깊이 관련됩니다. 따라서 왕이 예루살렘과 그리짐의 성전 이름을 함께 바꾸려 했다는 사실은 박해 정책이 예루살렘의 유대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성전은 어떤 신을 예배하는가를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구별된 곳이었습니다.

앞 장에서는 성전의 재물이 약탈당했습니다. 이제는 성전의 목적 자체가 바뀌려 합니다.

더욱이 이것은 자유로운 종교적 선택이 아니라 왕의 명령으로 강제된 변화입니다. 성전을 무너뜨리지 않고도 성전의 의미를 빼앗을 수 있습니다. 원래 그곳에서 누구를 예배해야 하는지 바꾸면 되기 때문입니다.

성전과 달력, 그리고 일상까지 빼앗기다

마카베오기 하권 6:4–9 본문 →

성전에서 벌어진 일을 묘사하는 4–5절은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이방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멋대로 흥청거리며 잔치를 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여자들과 어울려 놀고, 성전 담 안에서 여자들과 잠자리를 같이했습니다.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것들까지 성전 안으로 가져왔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4 · 두루새김

제단 역시 율법에서 금한 것들로 가득 찹니다. 저자가 문제 삼는 것은 하나님께 구별된 성전이 본래의 예배 질서와 전혀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을 점령한 사람들의 종교적 관습과 욕망에 따라 사용됩니다.

이어서 왕의 정책은 성전이라는 공간에서 사람들의 시간으로 확대됩니다.

안식일을 지킬 수도, 조상 대대로 지켜 온 명절을 지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이 유대 사람이라고 밝히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6 · 두루새김

안식일과 명절은 유대 사람들의 삶에서 시간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기억하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출애굽기 31:13–17에서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표징으로 제시됩니다. 레위기 23장에서는 절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거룩한 모임으로 규정됩니다.

따라서 안식일과 명절을 없애는 것은 단순히 휴일을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하나님의 구원과 언약을 되풀이하여 기억하는 시간을 빼앗는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정책은 마침내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게 만드는 정책으로 이어졌습니다.

자신들의 절기는 빼앗기고 왕의 축제에는 끌려가다

매달 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면 사람들은 거센 강요에 못 이겨 제물로 바친 짐승의 내장을 먹는 자리에 끌려갔습니다. 디오니소스 축제가 열리면 담쟁이덩굴을 몸에 두르고 디오니소스를 위한 행렬에 억지로 참여해야 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7 · 두루새김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 활동이 제한된 상황이 아닙니다. 기존의 거룩한 시간을 없애고 다른 권력과 신을 기념하는 시간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디오니소스는 그리스의 포도주와 축제, 황홀경 등과 관련된 신입니다. 담쟁이덩굴은 그의 종교 의식과 행렬에서 사용되던 대표적인 상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담쟁이덩굴을 몸에 두르고」 행렬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한 장식물을 걸치고 걷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 신을 기념하는 종교적 행렬에 참여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아니라 왕의 명령이 일상의 흐름을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8–9절에 따르면 이러한 정책은 이웃한 그리스 도시들로까지 확대됩니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거나, 그 요구를 거절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 상황이 뒤에서 엘아자르에게 다시 나타납니다.

그에게 먹으라고 강요된 돼지고기는 단순한 식사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명령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사람들 앞에서 보여 주도록 강요하는 수단이었습니다.

할례를 행한 어머니들과 안식일을 지키려던 사람들

마카베오기 하권 6:10–11 본문 →

왕의 정책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저자는 두 사건으로 보여 줍니다.

첫째는 자녀에게 할례를 베푼 두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자녀에게 할례를 베푼 여자 둘이 끌려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자들의 가슴에 아기들을 매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여자들을 끌고 도시를 돌아다닌 뒤 성벽 아래로 떨어뜨렸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10 · 두루새김

창세기 17:9–14에서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명령하신 언약의 표징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신체적 관습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속해 있음을 나타내는 행위였습니다.

국가 권력이 부모가 자녀에게 조상의 언약 표징을 이어 주는 일까지 막으려 했습니다. 이는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의 행동만 통제하는 정책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가 어떤 정체성을 이어받을 수 있는지까지 통제하려는 시도입니다.

둘째 사건은 안식일을 지키려던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몰래 안식일을 지키려고 근처 동굴들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빌립에게 밀고하여 모두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들은 그토록 거룩한 날을 존중했기에 공격에 맞서 자신들을 지키는 일도 삼갔던 것입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11 · 두루새김

앞선 5장에서 아폴로니오스는 유대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시간을 이용해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이제 6장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려고 숨어 있던 사람들까지 찾아내어 죽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쉼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날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쉼을 누리기는커녕 숨어 지내야 했고, 결국 살해당했습니다.

할례를 베푼 어머니들과 동굴에서 안식일을 지킨 사람들은 공격을 일으킨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에게서 받은 신앙의 질서를 이어 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째서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이토록 참혹하게 죽어야 했을까요?

조금 더 깊이

이와 관련된 문제는 마카베오기 상권 2:32–41에서도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안식일에 공격받은 사람들이 저항하지 않아 죽임을 당한 뒤, 마타디아와 동료들이 공격받을 경우 안식일에도 싸우기로 결정합니다. 따라서 6:11의 사람들의 행동을 모든 유대 사람이 언제나 따라야 하는 안식일의 유일한 실천 방식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두 기록을 함께 읽으면 당시 유대 사람들이 박해 속에서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실제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은 멸망을 뜻하는가,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셨다는 뜻인가?

마카베오기 하권 6:12–17 본문 →

여기서 이야기가 잠시 멈춥니다.

지금까지 저자는 박해의 참상을 서술했습니다. 그러나 12절부터는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건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읽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이 재난 때문에 위축되지 마십시오. 이런 벌은 우리 민족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가르쳐 바로잡으려는 것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마카베오기 하권 6:12 · 두루새김

그는 독자들이 재난 때문에 「위축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공동체가 겪은 참혹한 일들을 읽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완전히 버리셨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은 박해자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설명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언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관한 저자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바로잡는다는 말의 의미

「가르쳐 바로잡으려는」은 단순히 잘못한 사람에게 고통을 주어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올바른 삶으로 이끌기 위해 가르치고 훈련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는 신명기 8:5가 중요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겪은 일을 돌아보게 하면서, 사람이 자기 아들을 훈계하듯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훈계하셨다고 말합니다. 잠언 3:11–12에서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훈계하신다는 가르침이 등장합니다.

마카베오기 하권의 저자는 이러한 언약의 전통 안에서 공동체의 재난을 해석합니다. 그는 고난을 단순히 파괴의 증거로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직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들의 악을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는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지지 않고 곧바로 벌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신다는 증거입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13 · 두루새김

일반적으로 우리는 처벌받지 않고 넘어가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는다면,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더욱 깊은 파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아모스 3:2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특별히 아셨기 때문에 그들의 죄악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잘못을 저질러도 책임을 면제받는 특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죄가 가득 차기까지 기다린다는 것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오래 참으시며, 그들의 죄가 가득 찰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벌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정하셨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14 · 두루새김

「죄가 가득 찰 때까지」라는 표현은 창세기 15:16과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아모리 사람들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표현에는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심판하지 않으시며, 죄의 역사에 대해 오래 참으신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다만 마카베오기 하권 6:14를 모든 민족의 역사에 적용되는 똑같은 심판 일정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겪는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민족들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자비를 결코 거두지 않으십니다. 재난으로 가르쳐 바로잡으시면서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16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쳐 바로잡으신다는 말보다 마지막의 「버리지 않으십니다」입니다. 재난이 닥쳤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이 언약을 버리셨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로 앞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율법을 버렸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키려 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하나님이 가르쳐 바로잡으시는 벌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자의 설명은 「우리 민족」 전체가 겪는 재난에 관한 것입니다(6:12). 그는 공동체가 경험하는 고난을 언약의 역사 속에서 해석하지만, 죽임을 당한 어머니들이나 동굴에 숨었던 사람들이 개인적인 죄 때문에 그러한 일을 당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무고하게 고통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벌하고 계신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재난 속에서도 자비를 거두지 않으신다는 고백이 박해자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자는 왕의 명령과 학살을 계속해서 악행으로 묘사합니다.

인간의 폭력은 악합니다. 그러나 그 폭력이 벌어졌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고 말한 직후, 저자는 하나님께 충실했던 한 노인이 고문당해 죽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따라서 6:16을 하나님이 충실한 사람을 언제나 죽음에서 구해 주신다는 약속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자비는 모든 개인이 당장의 위험에서 벗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충실한 사람들이 왜 죽어야 했는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본문은 그 질문을 쉬운 설명으로 없애지 않습니다.

대신 한 사람의 죽음을 자세히 들려줍니다.

아흔 살의 엘아자르에게 강제로 벌린 입

마카베오기 하권 6:18–20 본문 →

으뜸가는 율법학자들 가운데 엘아자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나이가 많았고 얼굴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입을 억지로 벌려 돼지고기를 넣고 먹도록 강요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18 · 두루새김

당시 율법학자는 단순히 문서를 베껴 쓰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과 기록을 다루는 지식과 역할을 지닌 사람일 수 있었습니다. 엘아자르가 구체적으로 어떤 공직이나 교육 활동을 담당했는지는 본문에 나오지 않지만, 「으뜸가는 율법학자들」이라는 표현은 그가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는 인물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저자는 엘아자르를 품위 있는 외모를 지닌 노인으로 소개하면서, 뒤이어 그의 행동이 지닌 고결함을 보여 주려 합니다.

레위기 11:7–8과 신명기 14:8은 돼지를 이스라엘이 먹어서는 안 되는 부정한 동물로 규정합니다. 6:1에서 왕은 유대 사람들이 율법을 따라 살지 못하도록 강요하려 했습니다. 이제 6:18에서 그 강요가 한 노인의 입에까지 이릅니다.

공동체 전체를 향한 정책이 한 사람의 몸에서 실행되려는 순간입니다.

그는 먼저 입에 든 고기를 뱉어 냈습니다. 살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커도 율법이 금한 음식을 먹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20 · 두루새김

왕의 명령은 엘아자르의 입 안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의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 몸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입을 억지로 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으로 거부합니다.

저자는 그의 선택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는 더럽게 사는 것보다 명예롭게 죽는 편을 택하고 스스로 고문대로 나아갔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19 · 두루새김

실제로 먹지 않아도 되니, 먹는 척만 하라는 제안

마카베오기 하권 6:21–23 본문 →

그러나 본문은 뒤에서 그가 죽음을 피할 방법을 제안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히 보여 줍니다.

율법을 어기고 제물의 내장을 먹게 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은 엘아자르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그들은 엘아자르를 따로 데리고 가서 권했습니다. 율법에 따라 먹어도 되는 고기를 직접 준비해 가져온 다음, 왕이 명령한 제물의 고기를 먹는 척하라는 것이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21 · 두루새김

처음에는 실제로 돼지고기를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실제로 금지된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먹는 음식에 관한 율법을 직접 어기는 일은 피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들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줄 것인가?

그들이 제안한 것은 음식을 바꾸는 작은 요령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엘아자르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전할 뜻을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몸 안으로 어떤 음식이 들어가는지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전해질지도 생각합니다. 오히려 실제 행동과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행동이 서로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를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들이 제안한 방법은 현실적으로 살아남을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엘아자르에게는 그 방법이 자신의 생존과 다른 사람들의 신앙 사이에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엘아자르는 올바르고 떳떳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그의 나이와 노년의 품위, 그가 쌓아 온 훌륭한 삶과 어린 시절부터 지켜 온 바른 행동에 걸맞은 판단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율법을 따른 판단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어서 하데스로 보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23 · 두루새김

그의 명예가 중요한 까닭은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받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가 살아온 삶이 하나님의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모습을 드러내 왔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충실히 따르기 때문에 자신의 평판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책임 있게 생각합니다.

조금 더 깊이

23절의 「하데스」는 죽은 사람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문맥에서 그것을 곧바로 마지막 심판에서의 지옥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아닙니다.

아흔 살의 사람이 미래 세대를 생각하다

마카베오기 하권 6:24–28 본문 →

「제 나이에 거짓으로 꾸미는 행동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면 많은 젊은이가 아흔 살 된 엘아자르가 이방 풍습을 따르게 되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24 · 두루새김

아흔 살까지 살아오면서 공동체 안에 남긴 삶의 흔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는 자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짧고 덧없는 목숨을 조금 더 이어 가려고 거짓 행동을 한다면, 그들도 저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질 것입니다. 저 또한 이 늙은 나이에 더러움과 오점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25 · 두루새김

그는 자신의 남은 시간을 조금 더 얻으려는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오랜 삶에 잘못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산 사람은 자신의 삶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무엇인가를 남깁니다. 그것은 말로 가르친 교훈일 수도 있지만, 마지막 순간에 내린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엘아자르는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와 마지막에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가 서로 어긋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인간의 눈을 피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손은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내리는 벌을 피한다 해도, 전능하신 분의 손에서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26 · 두루새김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보고 판단합니다. 엘아자르가 왕의 명령에 따라 음식을 먹었다고 생각하면 그를 풀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아십니다.

이 구절에서 그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이 사람보다 더 강하시다는 고백이 아닙니다. 인간의 판단과 벌을 피하는 일이 하나님의 판단까지 피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엘아자르는 죽음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본보기를 남기기로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제 용감하게 삶을 마쳐 제 나이에 걸맞은 사람임을 보이고,」 「젊은이들에게는 존귀하고 거룩한 율법을 위해 기꺼이 용감하게 죽음을 맞는 훌륭한 본보기를 남기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뒤 엘아자르는 곧바로 고문대로 갔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27–28 · 두루새김

그러나 본문에서 엘아자르는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끊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왕의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죽음이라는 결과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거짓된 복종을 연기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의 행동은 이후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판단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사례로 남습니다. 엘아자르의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한 사람이 목숨을 버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는 거짓된 행동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6:26만으로 엘아자르가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을 구체적으로 겪을 것이라고 믿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가 장차 받게 될 보상보다 지금 내리는 선택에 집중합니다. 신명기 30:19–20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선택하라고 권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듣고 그분께 붙어 있는 것이 그들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엘아자르가 거절한 것은 생명 자체가 아닙니다.

호의가 적의로 바뀌는 순간

마카베오기 하권 6:29 본문 →

엘아자르가 자신의 뜻을 밝히자, 그를 살려 주려고 했던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사람들은 조금 전까지 그에게 보이던 호의를 거두고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엘아자르가 앞서 한 말을 어리석은 소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29 · 두루새김

그 제안에는 실제로 그를 살리려는 뜻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허용하려 한 것은 어디까지나 왕의 명령에 복종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엘아자르가 살아남기를 원했지만, 그가 자신의 양심과 신앙에 따라 선택할 자유까지 존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엘아자르의 선택이 어리석은 짓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을 올바르고 떳떳한 판단이라고 평가했습니다(6:23).

당장 살아남는 것만을 기준으로 삼으면 엘아자르의 선택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충실함과 다음 세대에 미칠 영향을 함께 생각하면 그의 판단이 지닌 의미가 드러납니다.

엘아자르가 거짓된 복종을 거절한 것을 모범으로 제시한다고 해서, 모든 박해받는 사람이 언제나 공개적으로 저항하거나 죽음을 택해야 한다는 명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장의 폭력에 대한 책임은 우선 강요와 고문을 실행한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본문의 목적은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충분히 용감하지 못했다고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옵니다.

몸은 고통받지만 마음은 하나님 앞에 있다

마카베오기 하권 6:30–31 본문 →

매를 맞아 죽어 가던 엘아자르는 깊이 신음하며 말했습니다. 「거룩한 지식을 지니신 주님께서는 분명히 아십니다. 저는 죽음을 피할 수 있는데도 채찍을 맞으며 몸으로 모진 고통을 견디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주님을 두려워하기에 이 고통을 기꺼이 겪고 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30 · 두루새김

저자는 엘아자르의 죽음을 평온한 장면으로 꾸미지 않습니다.

여기서 「기꺼이」라는 표현을 몸의 고통이 즐겁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왜 그 고통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기 때문에 거짓된 행동을 거절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몸을 하찮게 여기고 영혼만 중요하다고 말하는 선언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몸으로 실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자신이 선택한 길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서,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은 엘아자르의 결정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엘아자르는 하나님이 자신이 왜 그 길을 택했는지 아신다고 믿습니다.

그의 결정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행위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적대감을 견디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진실함을 지키려는 행동이 됩니다.

엘아자르는 이렇게 죽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젊은이들뿐 아니라 민족의 대다수 사람들에게도 용기의 본보기이자 훌륭한 삶을 기억하게 하는 표로 남겼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6:31 · 두루새김

엘아자르는 자신이 죽은 뒤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 이미 말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본보기를 남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 의미가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민족의 대다수 사람들에게까지 미쳤다고 평가합니다.

엘아자르가 자신의 삶을 통해 남기려 했던 의미가 저자의 기록 안에서 더 넓은 공동체의 기억이 됩니다.

맺으며 — 억지로 벌려진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

마카베오기 하권 6:1–31 본문 →

박해자들은 그의 입으로 왕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만들어 내려고 했습니다. 엘아자르는 바로 그 입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태도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떤 본보기를 남길 것인가 하는 책임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는 고문대에서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끝내 그가 자신의 신앙을 버린 것처럼 행동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아흔 살의 엘아자르는 자신의 남은 삶을 조금 더 얻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끝난 뒤에도 다른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깊이 신음하며 마지막 말을 남겼고, 그렇게 죽었습니다.

본문은 그가 남긴 본보기를 기억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