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오기 하권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4–5장 · 대제사장 자리 다툼
성전이 무너져도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5장은 하늘을 가득 메운 군대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금으로 수놓은 옷을 입은 기병들이 하늘을 달리고, 창과 방패가 움직이며, 칼과 갑옷이 번쩍입니다. 거의 사십 일 동안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이 광경이 좋은 일을 예고하는 것이기를 빕니다.
그런데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정반대입니다.
예루살렘은 같은 민족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피를 흘리고, 외국 군대에 함락되며,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노예로 팔려 갑니다. 성전의 거룩한 물건들은 약탈당하고, 안식일에 군사 행진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마저 학살됩니다.
하늘에는 무장한 군대가 나타났지만, 정작 땅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무참하게 짓밟힙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약탈당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이 패배하셨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일까요?
하늘에서 보인 전쟁과 땅에서 시작된 전쟁
5장은 안티오코스의 두 번째 이집트 원정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안티오코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입니다. 그의 이집트 원정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전쟁에 속하며, 이 장의 사건들은 대체로 기원전 168년 무렵의 위기와 관련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집트 전쟁이 군사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부터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예루살렘 하늘에서 나타났다는 이상한 광경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거의 40일 동안 예루살렘 곳곳에서 하늘을 가로질러 달리는 기병들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금으로 수놓은 옷을 입고 창으로 무장한 채 부대별로 움직였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2 · 두루새김
이어지는 3절은 칼과 방패, 돌격하는 기병대와 날아가는 화살, 번쩍이는 금 장식과 갑옷을 하나씩 늘어놓습니다. 하늘에서 실제 전쟁이 벌어지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는 이 광경이 무슨 뜻인지 곧바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을 바라본 사람들의 반응을 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이 광경이 좋은 일을 예고하는 것이기를 빌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4 · 두루새김
사람들은 이것이 좋은 징조라고 확신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을 예고하는 것이기를 빌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무엇인가를 보았지만, 그것이 앞으로 자신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3장에서는 하늘의 권세가 나타나 성전의 약탈을 즉시 막았습니다. 반면 5장에서는 하늘에 무장한 군대가 나타났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참혹한 재난입니다. 본문은 그 광경을 직접적인 구원 행위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놀라운 현상을 자신의 기대에 맞추어 해석하는 일이 아닙니다.
본문은 하늘의 광경에 대한 분명한 해석을 미룬 채, 이제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행동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면이 역사적으로 어떤 사건이었는지는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본문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거의 사십 일 동안 그러한 광경을 보았다고 전하지만, 그 현상을 별도의 자료로 확인하거나 물리적으로 설명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기 겨레를 죽이면서 승리했다고 생각한 사람
안티오코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는 이 소문이 더없이 좋은 기회처럼 보였습니다. 야손입니다.
앞 장에서 야손은 형 오니아스의 대제사장직을 빼앗았지만, 나중에는 메넬라오스에게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이제 그는 왕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권력을 되찾으려 합니다.
안티오코스가 죽었다는 거짓 소문이 돌자, 야손은 적어도 천 명을 모아 갑자기 도시를 공격했습니다. 성벽을 지키던 사람들이 밀려나고 도시가 점령되어 가자, 메넬라오스는 성채로 달아났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5 · 두루새김
그의 공격은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메넬라오스가 차지한 권력을 되찾기 위한 것입니다.
야손은 도시 안에서 자기 겨레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그는 같은 겨레를 이기는 일이 가장 큰 불행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같은 겨레가 아니라 적을 물리치고 승리의 기념물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6 · 두루새김
승리라는 말의 의미가 뒤집히다
야손은 무엇을 승리라고 부를 수 있는지 판단하는 기준을 잃었습니다.
그는 자기편이 권력을 차지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성공을 위해 같은 도시의 주민들이 죽어 간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승리의 기념물은 본래 적군을 무찌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손은 자기 겨레를 죽이고도 마치 적을 물리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전쟁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권력 투쟁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누가 이겼는가만 묻고, 그 승리로 무엇이 파괴되었는지를 묻지 않을 때 사람은 자기 공동체의 파멸마저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전쟁 자체를 무조건 부정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유다와 그의 동료들이 무기를 들고 싸우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따라서 여기서 야손이 비판받는 이유는 단순히 무력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보호해야 할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그가 세우려 한 것은 공동체의 회복이 아니라 자신의 지배였습니다.
결국 그의 공격은 실패합니다.
야손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자신이 원했던 권력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의 공격은 아무것도 회복하지 못한 채 도시의 상처만 깊게 만들었습니다.
남을 쫓아낸 사람은 고향 없이 죽다
야손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도 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권력 탈환에 실패했고 다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앞으로의 사건으로 넘어가기 전에 야손의 마지막 생애를 먼저 들려줍니다.
그는 아라비아 사람들의 통치자 아레타에게 갇히고, 여러 도시를 떠돌며 쫓기다가 이집트로 내몰립니다. 이어 라케다이몬 사람들에게서 보호를 받으려고 바다를 건너갑니다. 라케다이몬은 스파르타를 가리킵니다.
많은 사람을 조국에서 쫓아냈던 그는 낯선 땅에서 죽었습니다. 라케다이몬 사람들과 친족이라는 이유로 보호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들에게 배를 타고 갔던 것입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9 · 두루새김
자기 겨레를 죽였던 사람이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서 친족이라는 이유로 보호를 구합니다.
야손은 자신에게 유리할 때는 친족관계를 보호의 근거로 삼으면서, 권력을 얻을 때는 같은 겨레의 생명을 조금도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더욱 비참합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의 시신을 묻지도 않고 내버렸지만, 정작 자신이 죽었을 때에는 슬퍼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떤 장례도 치르지 못했고, 조상 때부터 내려온 관습에 따른 예우도 받지 못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10 · 두루새김
그는 사람들을 조국에서 쫓아냈습니다. 이제 자신이 낯선 땅에서 죽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의 시신을 묻지 않은 채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제 자신도 장례를 치르지 못합니다.
그는 같은 겨레를 죽이면서 승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죽음에는 함께 슬퍼할 공동체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장면을 근거로 낯선 곳에서 죽거나 장례를 치르지 못한 모든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저자는 야손의 구체적인 악행과 그의 마지막 처지를 대조하여 한 인물의 비극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고난과 죽음을 설명하는 보편적 공식이 아닙니다.
그는 끝까지 살아남을 장소를 찾아 떠돌았지만, 자신을 기억하고 슬퍼해 줄 공동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야손이 남긴 상처는 그의 몰락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공격했다는 소식은 이제 왕에게 전달됩니다.
조금 더 깊이
마카베오기 상권 12:20–23에 실린 외교 서신에서도 스파르타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형제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등장합니다. 그러한 친족관계가 실제 역사적 혈통을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외교적 우호 관계를 설명하는 전승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본문에서 확인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장례는 단순히 시신을 처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조상의 무덤에 묻힌다는 것은 가족과 조상의 계보에 속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행위였습니다. 창세기 49:29–33에서 야곱이 조상들과 함께 묻히기를 요청하는 장면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반란이라는 판단 아래 도시 전체가 처벌받다
이 사건들의 소식을 들은 왕은 유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짐승처럼 사나운 마음으로 이집트에서 군대를 돌려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점령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11 · 두루새김
야손은 대제사장직을 되찾으려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안티오코스는 그 소식을 유대 전체가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사건 자체와 왕의 해석을 구별합니다.
왕의 감정은 짐승의 사나움에 비유됩니다. 안티오코스는 잔혹한 성품 때문에 짐승처럼 묘사됩니다. 반면 유다는 박해를 피해 정상적인 인간 생활을 잃어버린 처지 때문에 들짐승처럼 묘사됩니다.
왕은 병사들에게 마주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어서 저자는 희생자들을 한꺼번에 주민이라고 부르지 않고, 여러 부류로 나누어 기록합니다.
젊은이들과 노인들이 살해되었습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소년들과 여자들과 아이들도 목숨을 잃었고, 처녀들과 아기들까지 학살당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13 · 두루새김
왕은 유대 전체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죽어 간 사람들 가운데는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 어린아이와 아기들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란이라는 정치적 판단이 도시 전체의 무차별 학살로 바뀐 것입니다.
불과 사흘 동안 8만 명이 목숨이나 자유를 잃었습니다. 4만 명이 무력으로 죽임을 당했고, 죽임을 당한 사람들 못지않게 많은 사람이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14 · 두루새김
본문은 죽은 사람뿐 아니라 살아서 끌려간 사람들도 재난을 당한 사람들로 계산합니다. 자유를 빼앗기고 가족과 고향에서 강제로 떨어져 나가는 일 역시 공동체를 파괴하는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끌려가며, 공동체 자체가 무너지는 도시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수치는 본문 자체에서 확인되는 숫자입니다. 다만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 규모와 정확한 피해 인원을 별도로 검증할 자료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이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확인된 인구 통계로 제시해서는 안 됩니다. 고대의 전쟁 서술에서는 피해의 엄청난 규모를 강조하기 위해 큰 숫자가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본문의 숫자가 반드시 과장되었다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가장 거룩한 곳에 들어간 가장 부정한 손
안티오코스의 폭력은 도시 주민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왕은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조국을 배신한 메넬라오스를 길잡이로 삼아, 온 땅에서 가장 거룩한 성전에 감히 들어갔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15 · 두루새김
안티오코스는 외국의 왕이고, 메넬라오스는 유대의 대제사장직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저자는 그를 단순히 대제사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율법과 조국을 배신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앞 장에서 메넬라오스는 성전의 금으로 된 물건을 훔쳐 권력자에게 바쳤습니다. 이제 그는 성전의 거룩함을 침범하려는 왕의 길잡이가 됩니다. 성전의 물건을 몰래 빼돌리는 일에서 성전 자체를 약탈하도록 안내하는 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는 더러운 손으로 거룩한 물건들을 집어 들었습니다. 많은 왕이 그곳을 더욱 훌륭하고 영광스럽고 존귀하게 하려고 바친 것들을, 거룩함을 더럽히는 손으로 쓸어 갔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16 · 두루새김
「더러운 손」과 「거룩함을 더럽히는 손」이 「거룩한 물건들」과 대조됩니다. 이는 신체의 위생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불경한 행동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안티오코스는 거룩한 물건들을 왕실의 전리품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저자의 관점에서 이 물건들은 단순한 귀금속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려져 구별된 물건들입니다.
과거의 왕들은 성전을 더욱 훌륭하고 영광스럽고 존귀하게 하려고 선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왕은 앞선 왕들이 바친 것까지 모두 빼앗아 갑니다.
3장에서 헬리오도로스가 성전의 보물 창고를 빼앗으려 했을 때는 하나님이 그를 쓰러뜨리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안티오코스가 거룩한 물건들을 실제로 가져갑니다.
왜 하나님은 그를 막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은 성전인가, 백성인가?
이 네 절은 마카베오기 하권 5장의 신학적 중심입니다.
안티오코스는 마음이 우쭐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시 사람들의 죄 때문에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잠시 노하셨고, 그래서 성전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17 · 두루새김
안티오코스는 자신의 성공을 자신의 힘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왕이 상황을 잘못 이해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으셔서 성전이 약탈당한 것이 아니라, 도시 사람들의 죄 때문에 잠시 노하셔서 성전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왕이 마음대로 도시와 성전을 처분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저자는 그보다 높은 주인이 계시다고 선언합니다. 안티오코스는 성전을 차지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 성전이 여전히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고 봅니다.
3장과 5장을 이어 주는 헬리오도로스
도시 사람들이 많은 죄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안티오코스도 감히 나섰다가 곧바로 채찍을 맞고 뻔뻔한 기세가 꺾였을 것입니다. 셀레우코스 왕의 명령으로 보물 창고를 조사하러 왔던 헬리오도로스처럼 말입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18 · 두루새김
헬리오도로스도 왕의 명령을 가지고 성전의 재물을 빼앗으러 왔습니다. 안티오코스도 성전의 재물을 가져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헬리오도로스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했고, 안티오코스는 성전의 물건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저자는 그 차이를 하나님의 능력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공동체 사이의 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마카베오기 하권 저자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안티오코스가 실제로 학살을 명령한 역사적 책임과 별개로, 저자는 그 재난을 공동체의 죄와 하나님의 분노라는 언약의 틀 안에서 이해합니다.
특히 5:13에서 아기와 어린아이까지 희생되었다고 기록한 사실을 생각하면, 이 설명을 모든 희생자가 각자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주장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개별 희생자들의 죄를 조사하거나 판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저자가 공동체의 죄를 언급한다고 해서 안티오코스의 잔혹한 행동이 정당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는 안티오코스와 메넬라오스가 저지른 폭력과 배신에 대한 도덕적 평가입니다. 다른 하나는 왜 하나님이 이 재난을 막지 않으셨는가에 대한 저자의 언약적 해석입니다. 이 둘을 혼동하면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책임을 돌리는 잘못된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백성을 위해 선택된 장소
거룩한 장소가 백성보다 먼저인가?
주께서는 성전을 위해 백성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 성전을 선택하셨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19 · 두루새김
두루새김은 이 장소를 「성전」으로 옮겼습니다. 본문은 먼저 「성전을 위해 백성을」이라고 말한 뒤, 그것을 부정하고 「백성을 위해 성전을」이라고 순서를 뒤집습니다. 이러한 문장 구조는 선택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을 예배하며 언약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주어진 장소입니다. 따라서 성전은 백성에게 주어진 선물이지, 백성이 성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기 훨씬 전에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셨습니다. 출애굽기 19:4–6에서 하나님은 백성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무엘하 7:6–7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뒤에도 일정한 성전 건물을 요구하지 않으셨음을 일깨우십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성전 자체를 하나님의 보호를 자동으로 보장하는 대상으로 생각할 위험이 생겼습니다. 예레미야 7:4–15에서 예언자는 성전을 의지하면서도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이름을 반복한다고 해서 그곳이 무조건 안전한 것은 아니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전이 하나님께서 백성과 맺으신 관계를 떠나 따로 보호받는 것은 아닙니다. 성전이 거룩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곳을 자신의 백성을 위한 예배의 장소로 선택하셨기 때문이지, 건물 자체가 하나님을 붙잡아 둘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백성이 고난받을 때 성전도 고난받는다
그러므로 성전도 백성과 함께 재난을 겪었고, 나중에는 복도 함께 누렸습니다. 전능하신 분의 분노를 겪었던 성전은 위대한 주인께서 다시 백성과 화해하시자 온갖 영광 속에서 회복되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20 · 두루새김
여기서 5:20의 서술은 앞으로 일어날 회복을 미리 내다봅니다. 지금의 이야기에서는 성전이 약탈당했지만, 저자는 독자가 결국 성전이 다시 회복될 것임을 알고 읽게 합니다.
본문은 성전의 회복을 인간의 군사적 성공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는 일과 연결합니다. 성전의 회복은 하나님의 자비 아래 백성이 다시 그분을 예배하는 삶으로 돌아오는 일과 관련됩니다.
성전의 미래는 왕이 얼마나 많은 금을 가져갔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어떻게 대하실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땅을 바다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왕
신학적 설명을 마친 저자는 다시 안티오코스의 행동으로 돌아옵니다.
안티오코스는 성전에서 1,800탈란톤을 가져가 서둘러 안디옥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교만에 빠져 마음이 한껏 부풀었습니다. 땅에서는 배를 타고 다니게 하고 바다에서는 걸어 다니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21 · 두루새김
땅에서는 배를 타고 다니게 하고 바다에서는 걸어 다니게 할 수 있다는 표현은, 실제로 안티오코스가 그런 공사를 계획했다는 뜻으로 읽기 어렵습니다. 땅과 바다의 본래 성질까지 자기 뜻대로 바꿀 수 있다고 여길 만큼 교만했다는 과장된 문학적 표현입니다.
왕은 자신이 세상의 질서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그보다 높은 다스림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실제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의 재물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성공을 무제한적인 능력의 증거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의 성공은 그가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왕은 예루살렘과 그리짐에 감독관들을 남겨 백성을 괴롭히게 합니다.
그리짐에는 안드로니고를 두었습니다. 이들뿐 아니라 메넬라오스도 다른 누구보다 지독하게 시민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왕은 유대 시민들에게 적대감을 품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23 · 두루새김
그의 권력은 성전을 지키는 직무와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성전의 약탈을 안내했고, 이제 백성을 억압하는 통치 질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위해 성전을 선택하셨지만, 성전을 맡은 메넬라오스는 백성보다 자신의 권력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성전의 거룩함을 지켜야 할 사람의 관심이 정작 성전이 존재하는 목적과 어긋나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가장하고 안식일을 기다리다
안티오코스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아폴로니오스를 보냅니다.
왕은 미시아 용병 대장 아폴로니오스를 군사 2만 2천 명과 함께 보냈습니다. 다 자란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들과 어린 남자들은 팔아 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24 · 두루새김
이 명령은 군사적 진압을 넘어 공동체 자체를 파괴하려는 성격을 띱니다. 다 자란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과 어린 남자들은 팔아 버리게 한다는 것은 도시의 인구와 가족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아폴로니오스는 처음부터 무력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폴로니오스는 예루살렘에 와서 평화를 바라는 사람인 척하며 거룩한 안식일까지 기다렸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일을 쉬는 틈을 잡아, 부하들에게 무기를 갖추고 군사 행진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25 · 두루새김
안식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쉼의 날입니다.
그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을 모두 찔러 죽였습니다. 이어 무기를 들고 도시로 뛰어 들어가 많은 병력을 배치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26 · 두루새김
여기에는 두 가지 신뢰의 파괴가 겹쳐 있습니다. 첫째, 평화를 바라는 척한 정치적 속임수입니다. 둘째, 거룩한 안식일을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기회로 이용한 행위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쉬는 시간을, 그는 사람들을 죽이기 가장 좋은 시간으로 계산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제 외부의 군대가 장악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요?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0:8–11에서는 창조와 연결되고, 신명기 5:12–15에서는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기억과 연결됩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일을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쉼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5:25–26에서 아폴로니오스는 안식일을 이용해 기습했고,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여기서 본문은 희생자들이 안식일에는 스스로를 지켜서는 안 된다는 율법상의 판단을 내렸다고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이 문제는 마카베오기 상권 2:32–41에서 더 직접적으로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공격받고도 저항하지 않아 죽임을 당합니다. 이후 마타디아와 동료들은 생존을 위해 안식일에 공격받으면 싸우기로 결정합니다. 이 구별을 지키면 본문의 비극을 피해자들의 율법 준수 방식에 대한 문제로 돌리지 않고, 속임수와 학살을 실행한 사람들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읽을 수 있습니다.
금으로 장식된 성전에서 풀을 먹는 산으로
마카베오기 하권 5장의 마지막은 뜻밖에도 매우 짧고 조용한 장면입니다.
한편 마카베오라고도 불리는 유다는 동료들과 함께 모두 열 명쯤 되는 무리를 이루어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산에서 들짐승처럼 살며,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려고 줄곧 풀을 먹고 지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5:27 · 두루새김
도시에는 집이 있고 식량을 마련할 수 있는 사회적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산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정상적인 생활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왜 풀을 먹었을까?
그들은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려고 극도로 궁핍한 생활을 감수했습니다.
산으로 물러나는 것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은 아니다
유다는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가 하나님께 받은 율법과 거룩함을 버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산으로 물러났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거룩한 장소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거룩함을 지키려는 선택은 계속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은 아닙니다. 성전을 떠나 산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께 충실하려 애쓰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전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주장이 아닙니다. 유다가 앞으로 싸우는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예배를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율법에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해야 할 사람들을 위한 일이어야 합니다. 이 점을 잊으면 성전을 되찾기 위한 싸움조차 야손의 권력 투쟁과 구별되지 않을 위험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마카베오기 상권 1:41–63에서는 안티오코스의 명령으로 유대인들이 조상의 율법을 버리도록 강요받았으며, 부정한 음식을 먹는 문제까지 등장합니다. 따라서 유다와 동료들이 풀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율법에 어긋나는 음식이나 박해 체제와 관련된 종교적 더러움을 피하려 했다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절만으로 그들이 정확히 어떤 음식의 공급을 거부했는지, 풀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산과 광야에서 사는 유다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오래된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는 하나님이 광야의 백성에게 만나를 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마카베오기 하권 5:27은 유다와 그의 동료들에게 만나가 내려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두 이야기의 관계는 주제상 이어지는 데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안정된 삶의 터전을 잃고 광야에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맺으며 — 금으로 수놓은 옷과 산에서 먹는 풀
한쪽에는 하늘을 가득 메운 금빛 군대가 있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산에서 풀을 먹는 열 사람가량의 무리가 있습니다. 저자는 그 두 장면 사이에 예루살렘의 몰락을 놓았습니다. 성전은 빼앗겼지만, 하나님께 충실하려는 삶까지 빼앗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은 성전에서 천팔백 탈란톤을 가져갔습니다.
유다와 그의 동료들은 산에서 풀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5장의 마지막 문장은 그들에게 머뭅니다. 성전을 되찾았다는 선언도, 원수들이 패배했다는 소식도 아직 없습니다.
다만 폐허가 된 도시 밖의 산에서, 들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려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