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5–6장 · 슬픈 노래와 바른 재판

아무 일도 없을 것처럼 사는 사람들

아모스 6장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들은 폭력을 휘두르는 군인도, 거짓말하는 재판관도 아닙니다.

아무 걱정 없이 침상에 누워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안락함을 나라의 안전과 혼동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삶이 평온하다는 이유로 공동체도 평안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아모스 6장은 바로 그 착각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18분소단락 76장 본문 읽기 →

시온과 사마리아의 지도자들은 무엇을 믿고 있었는가

아모스 6:1–3 본문 →

아모스 6장은 시온과 사마리아를 함께 부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모스가 말했습니다. 「아, 시온에서 걱정 없이 지내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안전하다고 믿는 자들아! 민족들 가운데 으뜸인 나라의 이름난 자들, 이스라엘 백성이 찾아오는 자들아!」아모스 6:1 · 두루새김

시온은 유다의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걱정 없이 지내는 태도는 북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백성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두 왕국 모두에 경고가 향합니다.

본문은 그들을 「민족들 가운데 으뜸인 나라의 이름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높은 지위를 가진 지도층 인물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이름난 사람들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그들에게 찾아왔습니다.

지도자가 위험을 보지 못하면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한 준비도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지도자가 공동체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그 아래 있는 사람들도 그 판단의 영향을 받습니다.

아모스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보다 먼저, 그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현실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안전한가

「갈네로 건너가 보아라. 거기서 큰 하맛으로 가고, 블레셋 사람들의 가드로 내려가라. 그 나라들이 너희 나라들보다 더 나으냐? 그들의 땅이 너희 땅보다 더 넓으냐?」아모스 6:2 · 두루새김

갈네, 하맛, 가드는 이스라엘 주변 세계의 정치적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도시들입니다. 하맛은 북쪽의 중요한 도시였고, 가드는 블레셋 사람들의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갈네의 정확한 위치는 논의가 있지만, 이 구절에서는 다른 왕국의 중심지들과 함께 비교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한 가지 읽기는 아모스가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다른 나라들을 살펴보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다른 나라들의 운명을 보면서 자신들도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가 됩니다. 실제로 가드는 열왕기하 12:17에서 아람 왕 하사엘의 공격과 연결되는 도시입니다.

다른 읽기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자랑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왕국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서 이스라엘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모습입니다. 이 경우 질문의 강조점은 땅의 넓이와 나라의 힘에 대한 자부심에 있습니다.

본문은 이 질문이 누구의 생각을 드러내는지 따로 밝히지 않으므로 어느 한쪽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3절을 고려하면, 두 경우 모두 이스라엘의 잘못된 안전감이라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밀어낸 재앙과 가까이 끌어온 폭력

3절은 이들의 행동을 두 개의 반대 방향으로 묘사합니다.

「너희는 재앙의 날이 멀리 있다고 여기면서, 폭력이 바로 곁에 자리 잡게 한다.」아모스 6:3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이 폭력을 자리와 연결하여 말합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폭력이 행사되는 통치의 자리를 가리키는지, 앞으로 닥칠 폭력적인 심판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첫 번째로 읽으면 지도자들은 재앙이 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폭력적인 통치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두 번째로 읽으면 재앙을 멀리 있다고 여기던 행동이 오히려 그 재앙을 가까이 불러왔다는 뜻이 강조됩니다.

그들의 현실 인식과 실제 행동이 서로 모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재앙의 날을 멀리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재앙을 불러올 만한 삶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아모스는 그 태연함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 줍니다.

침상과 식탁, 음악과 포도주 — 풍요로운 삶의 한가운데 빠진 것

아모스 6:4–6 본문 →

4–6절은 마치 한 집의 잔치 장면을 차례로 보여 주는 것처럼 전개됩니다.

상아 침상과 몸을 늘어뜨린 사람들

「너희는 상아로 꾸민 침대에 눕고 침상에서 몸을 쭉 뻗는다. 양 떼의 어린 숫양과 외양간의 송아지 고기를 먹는다.」아모스 6:4 · 두루새김

침대 전체를 상아로 만들었다기보다 상아 장식으로 꾸민 값비싼 가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2:39는 아합이 지은 상아 집을 언급합니다. 아모스 3:15에서도 상아 집들이 심판받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상아는 단순한 재료가 아닙니다. 사마리아의 왕실과 부유층이 누리던 호화로운 생활을 보여 주는 표지입니다.

어린 가축을 고기로 먹는 일은 당시 일반적인 가정에서 매일 쉽게 누릴 수 있는 생활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아모스는 부유한 사람들의 풍성한 식탁을 보여 줍니다.

자신들의 삶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누워 있고 먹고 즐깁니다.

다윗처럼 악기를 고안한 사람들

「수금 가락에 맞추어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윗처럼 너희를 위해 악기를 만들어 낸다.」아모스 6:5 · 두루새김

다윗이 악기를 연주했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무엘상 16:23에서 다윗은 수금을 연주하는 사람으로 등장하고, 역대상 23:5에서는 다윗이 찬양을 위해 마련한 악기들이 언급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다윗처럼」이라는 비교와 「너희를 위해」라는 말입니다. 다윗처럼 악기를 만들어 냈다는 표현은 그들의 음악적 자부심을 보여 주면서, 그 활동이 어떤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질문하게 합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연주했는가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음악이 울려 퍼지는 동안 그들이 무엇을 외면하고 있었는가입니다.

좋은 기름은 몸에 바르지만, 공동체의 상처에는 아파하지 않는다

6절에서 잔치의 모습은 절정에 이릅니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고 가장 좋은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무너지는 것은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아모스 6:6 · 두루새김

그들은 자기 몸을 좋은 기름으로 돌보면서, 자기 공동체가 무너져 가는 현실에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누구인가

「요셉 집안」은 북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요셉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런데 「요셉 집안이 무너지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두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진행되고 있던 무너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닥칠 군사적 멸망입니다.

이 두 해석은 서로 배제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회가 무너지는 현실과 앞으로 닥칠 멸망은 아모스의 메시지 안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모스가 고발하는 안일함은 위험을 전혀 모르는 상태만이 아닙니다. 위험과 고통이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생활을 바꾸지 않는 무감각입니다.

조금 더 깊이

「노래를 흥얼거리고」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의 정확한 의미에는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현악기를 뜯거나 연주한다는 뜻으로도, 가락을 즉흥적으로 만들어 부른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대접」은 일반적인 작은 잔보다 큰 용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제사용 그릇을 사용했다는 뜻인지, 단지 큰 대접에 담아 마셨다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기름은 피부를 관리하거나 몸에 향기를 더하고, 축제와 기쁨을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는 원문에서는 병들거나 아프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요셉 집안이 무너지는 것」을 이미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진행되고 있던 무너짐으로 읽으면, 가난한 사람들이 억압받고, 성문에서는 정의가 무너졌으며,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만 늘리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닥칠 군사적 멸망으로 읽으면,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을 거듭 선언하고 있었고, 6장 마지막에서도 다른 민족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편안했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끌려가다

아모스 6:7–8 본문 →

7절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맨 먼저 끌려갈 것이다. 몸을 쭉 뻗고 흥청대던 자들의 잔치도 끝날 것이다.」아모스 6:7 · 두루새김

그들은 사회의 앞자리에 있었습니다. 이름난 사람들이었고, 부유했으며, 다른 사람보다 풍족한 생활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행렬의 맨 앞에 서게 됩니다.

그들이 누렸던 높은 위치가 심판의 장면에서 뒤집힙니다.

여기서 「흥청대던 자들의 잔치」는 연회와 떠들썩한 즐거움을 나타냅니다. 앞의 음악과 포도주, 호화로운 식탁의 장면이 이 한 문장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걸고 맹세하신다

주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을 걸고 맹세하셨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말입니다. 「나는 야곱의 자랑을 역겨워하고, 그의 성채들을 미워한다. 내가 성읍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적에게 넘겨주겠다.」아모스 6:8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자신의 생명을 건다는 표현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뒤따르는 심판 선언이 얼마나 엄숙한지를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가 묘사되었습니다. 이제는 여호와야훼께서 그 안전을 어떻게 판단하시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들이 사랑하던 성채를 여호와야훼는 미워하십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영광을 여호와야훼는 역겨워하십니다.

그 성채에 의지하며 폭력과 불의를 외면하는 삶이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여호와야훼는 한 나라의 겉으로 드러나는 성공을 그 나라가 올바르다는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지켜 줄 것이라고 믿었던 성채는 더 이상 그들을 지키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야곱의 자랑」은 여러 의미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번영에 대한 교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그들이 자랑하는 왕국의 영광이나 종교적 특권을 포함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이 그것을 하나로 특정하지는 않지만, 바로 뒤에 성채들이 언급되므로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나라의 힘과 안전을 자랑했다는 뜻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성채는 적의 공격에서 성읍을 보호하는 건물입니다. 이 점에서 아모스 6장은 잠언 18:11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부자의 재물이 견고한 성처럼 여겨지고, 그가 스스로 그것을 높은 성벽처럼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집 안쪽에서 들려오는 「쉿」

아모스 6:9–11 본문 →

아모스 6장은 9절에서 갑자기 장면을 바꿉니다.

방금 전까지 포도주와 음악이 있었던 집 안에 이제 죽음이 들어와 있습니다.

아모스가 말했습니다.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더라도 모두 죽을 것이다.」아모스 6:9 · 두루새김

한 집에 상당한 수의 사람이 남아 있더라도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철저한 파괴의 이미지입니다. 10절에서는 한 사람의 시신을 치우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죽은 사람의 삼촌과 시신을 태우는 사람이 유해를 집 밖으로 옮기려고 들어 올릴 것이다. 옮기던 사람이 집 안쪽에 있는 사람에게 물을 것이다. 『같이 있는 사람이 또 있나요?』 안에 있는 사람이 대답할 것이다. 『없어요.』 그러면 묻던 사람이 말할 것이다. 『쉿!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안 돼요.』」아모스 6:10 · 두루새김

조금 전까지 사람이 살던 공간이 이제는 죽음과 침묵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이유

한 가지는 심판을 겪는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여호와야훼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움을 구하거나 축복을 말하는 것이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고 여기는 상황입니다. 또한 이 표현을 자신들이 겪는 참상 때문에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거부하는 말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본문은 침묵의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심리를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시끄러운 잔치가 침묵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안전을 확신하며 만들어 낸 소리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죽음과 두려움 속에서 겨우 내뱉는 짧은 말만 남습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그 파괴의 범위가 한 집을 넘어 확대됩니다.

「여호와야훼가 명령하여 큰 집은 산산조각 내고 작은 집은 갈라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아모스 6:11 · 두루새김

여기서 큰 집과 작은 집을 반드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집으로 일대일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건물의 크기와 파괴의 규모를 대비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라 전체의 질서가 무너지면 그 파괴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미칩니다.

그들이 현실을 외면한 결과는 그들 자신에게만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책임져야 했던 공동체 전체가 파괴를 경험합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은 히브리어 문장 자체가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은 「죽은 사람의 삼촌과 시신을 태우는 사람」이라고 옮겼습니다. 다만 원문에서는 이들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인지, 아니면 한 사람의 서로 다른 역할을 나타내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두루새김은 시신을 태우는 일로 옮겼지만, 원문에서 불태운다는 행위가 시신의 화장을 뜻하는지, 장례에 쓰이는 향품을 태우는 일인지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일반적인 장례 방식은 매장이었으므로, 이 구절을 특별히 시신을 태워 처리하는 장면으로 읽는다면 왜 그런 예외적인 행동이 필요한지 질문하게 됩니다. 대규모의 죽음 때문에 정상적인 장례를 치르기 어려운 상황을 떠올릴 수 있지만, 본문은 그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같이 있는 사람이 또 있나요?」는 집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이 더 있는지를 묻는 것인지, 치워야 할 시신이 더 있는지를 묻는 것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이유를 두려움으로 읽으면, 여호와야훼의 심판이 너무 두려워 그분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마저 피하려는 모습입니다. 도움이나 축복을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읽으면, 이미 심판이 내려진 집에서 익숙한 종교적 표현을 입에 올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위 위를 달리는 말과 공의가 독이 된 사회

아모스 6:12 본문 →

12절에서 아모스는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아모스가 말했습니다. 「말들이 바위 위를 달리겠느냐? 누가 소로 그 바위를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정의를 독으로 바꾸고, 올바름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었다.」아모스 6:12 · 두루새김

말이 험한 바위 위를 달리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닙니다. 소로 그런 바위를 갈아엎으려는 일도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다만 둘째 질문에는 번역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문자적으로 소를 이용해 갈겠느냐는 표현으로 되어 있으며, 그 장소가 명시되지 않습니다. 앞의 바위를 이어받아 그곳을 갈겠느냐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읽기는 히브리어의 자음 구분을 달리하여 바다를 소로 갈 수 있겠느냐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말이 바위 위를 달리는 것과 소가 바다를 가는 것이 나란히 놓입니다.

어느 쪽이든 질문이 예상하는 대답은 같습니다.

그런 일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왜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하는가

바위 위를 달리는 말과 바위를 가는 소는 사물의 성격과 그것에 요구되는 행동이 서로 맞지 않는 경우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을 했습니다.

정의가 본래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억울함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올바름의 열매는 올바른 관계와 행동에서 나와야 할 좋은 결과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그 결과가 독과 쓴 쑥이 되었습니다.

독은 생명을 해치고, 쓴 쑥은 괴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따라서 아모스가 고발하는 것은 정의가 단순히 부족하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정의가 있어야 할 자리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곳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모스 5:7에서는 이스라엘이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6:12에서는 정의 자체가 독이 되고, 올바름의 열매마저 쓴 쑥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정의라는 이름을 가진 제도가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 제도는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과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군사적 성공까지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차지하지 않았느냐?」

아모스 6:13–14 본문 →

13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자랑이 직접적인 말로 등장합니다.

「너희는 로다바르 때문에 기뻐하며, 『우리가 우리 힘으로 가르나임을 차지하지 않았느냐?』 하고 말한다.」아모스 6:13 · 두루새김

로다바르와 가르나임은 요단강 동쪽 지역과 연결되는 지명으로 이해됩니다. 두 지명의 정확한 위치와 아모스 시대의 사건을 확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

로다바르는 히브리어로 「아무것도 아닌 것」 또는 「별것 아닌 것」을 연상시킬 수 있습니다. 지명 자체의 역사적 의미가 반드시 그것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아모스는 이 이름의 말소리를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자랑을 풍자하는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땅을 차지한 일을 위대한 성취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성취가 여호와야훼 앞에서 과연 무엇을 보장해 줄 수 있습니까?

가르나임의 두 뿔

가르나임(⁨קֶרֶן⁩)은 히브리어로 두 뿔을 연상시키는 이름입니다. 구약에서 뿔은 힘과 권세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33:17은 요셉의 힘을 들소의 뿔에 비유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군사적 성취를 자기 능력의 증거로 삼습니다. 열왕기하 14:25–27은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이스라엘이 영토를 회복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한 역사적 상황은 아모스가 전하는 이스라엘의 자부심을 이해하는 배경이 됩니다.

문제는 승리의 사실보다, 그 승리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강하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이미 그 사회의 정의가 독으로 변했다고 고발했습니다. 그렇다면 군사적으로 성공한 나라라고 해서 반드시 올바른 나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영토의 자랑이 영토 전체에 대한 심판으로 바뀌다

마지막 14절은 이스라엘의 자랑에 대한 여호와야훼의 응답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이스라엘 집안아. 내가 한 민족을 일으켜 너희를 치게 하겠다.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짓누를 것이다.」아모스 6:14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우리 힘으로」라고 말하고, 여호와야훼는 「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군사적 성공을 자랑하는 순간, 여호와야훼는 그보다 더 큰 권세가 누구에게 있는지를 밝히십니다.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시내까지

하맛 어귀는 북쪽 경계를, 아라바 시내는 남쪽 경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정확한 남쪽 물줄기가 어디인지에는 불확실성이 있지만, 북쪽과 남쪽을 함께 언급하여 이스라엘의 땅 전체를 가리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되찾은 땅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바로 그 땅 전체에 적이 들어올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이 가장 확실한 성공이라고 생각한 것이, 마지막에는 가장 큰 상실의 범위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하 14:25는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의 경계를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회복했다고 기록합니다. 아모스 6:14에서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시내까지 적이 이스라엘을 짓누를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두 구절의 남쪽 지리 표현이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는 아라바 바다이고 다른 하나는 아라바 시내입니다. 그러나 하맛 어귀에서 남쪽 아라바 지역에 이르는 넓은 범위가 서로 대응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역사적으로 북이스라엘은 훗날 아시리아의 침공과 정복을 경험합니다(열왕기하 17:3–6). 따라서 그 사건을 아모스의 선언과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6:14 자체는 아시리아를 명시하지 않습니다.

결론 — 침상의 안락함에서 영토 전체의 상실까지

아모스 6:1–14 본문 →

그들이 자신의 힘이라고 자랑한 것이 그들을 지켜 주지 못합니다. 그들이 안심할 근거라고 여긴 것이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한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외면하며 누리는 평안은, 그 공동체가 참으로 평안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아모스 6장이 직접 고발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역사적 대상을 지워 버린 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책임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모든 고통을 자기 혼자 책임지거나, 삶의 모든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모스는 편안한 침상에 누워 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라고 요구합니다. 자신의 식탁과 성채와 땅이 아니라, 무너져 가는 요셉 집안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자신들의 힘을 자랑했습니다.

그렇게 6장은 한 민족이 일어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스라엘이 일으킨 민족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치게 하려고 일으키시는 민족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안전하다고 여겼던 땅의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심판이 닥쳐올 것이라고 선언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