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7–9장 · 환상과 베델에서의 충돌

무너뜨리시고 다시 심으시는 하나님

아모스의 마지막 장은 무너지는 건물에서 시작하여 사람들이 땅에 심어지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제단 위에 서서 건물을 무너뜨리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도망칠 곳을 찾지만, 하늘 끝이나 바다 밑바닥까지 가더라도 하나님의 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장의 후반부에 이르면 같은 하나님이 무너진 초막을 다시 세우시고, 폐허가 된 성읍을 다시 세우시며, 사람들을 그들의 땅에 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요? 하나님이 심판을 거두신 것일까요? 아니면 심판과 회복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대상을 향하고 있었을까요?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109장 본문 읽기 →

제단 위에 서신 하나님

아모스 9:1 본문 →

아모스에게 마지막 환상이 주어집니다.

나는 제단 위에 서 계신 주를 보았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둥 꼭대기를 쳐서 문지방들이 흔들리게 하여라. 그것들을 부수어 그들 모두의 머리 위에 떨어뜨려라. 그들 가운데 남은 사람들은 내가 칼로 죽이겠다. 아무도 달아나지 못하고,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아모스 9:1 · 두루새김

앞선 환상들에서 아모스는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사물이나 사건을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주께서 직접 등장하십니다.

제단은 본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소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환상에서 그 제단은 보호와 화해의 장소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곳에 서서 파괴를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공동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가 계속 고발해 온 것은 그들이 예배의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모스 5:5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벧엘을 찾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5:4에서는 자신을 찾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과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장소에 의지하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라도,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의 피난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어떤 건물이 무너지는지 본문은 분명히 밝히지 않습니다. 제단이라는 장소 때문에 성소와 관련된 건축물로 이해하기 쉽고, 앞선 7장에서 벧엘의 왕실 성소가 등장했으므로 벧엘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환상이 반드시 벧엘의 특정 건물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파괴를 실행하도록 명령받은 대상도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어디까지 도망쳐도 벗어날 수 없는 손

아모스 9:2–4 본문 →

건물이 무너진 뒤에는 도망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어집니다.

「그들이 스올까지 파고들어도 거기서 내 손이 그들을 붙잡을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서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겠다.」아모스 9:2 · 두루새김

스올은 고대 이스라엘의 언어에서 죽은 사람들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과 가장 높은 곳을 대비시켜, 하나님의 권세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갈멜산 꼭대기에 숨어도 거기서 내가 찾아 붙잡겠다. 내 눈을 피해 바다 밑바닥에 숨어도 거기서 내가 뱀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물게 하겠다.」아모스 9:3 · 두루새김

갈멜산은 이스라엘 북서부의 산지에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숲이나 산속에 숨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가도 그곳 역시 안전하지 않습니다.

「원수들 앞에서 포로로 끌려가도 거기서 내가 칼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죽이게 하겠다. 내가 그들을 지켜보는 것은 좋은 일을 베풀려는 것이 아니라 재앙을 내리려는 것이다.」아모스 9:4 · 두루새김

심판은 이스라엘 땅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로 끌려간다고 해서 하나님의 권세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시편에서는 하늘로 올라가거나 스올에 자리를 펴더라도 하나님의 영을 피할 수 없으며, 바다 끝에 가더라도 하나님의 손이 인도한다고 고백합니다. 아모스 9장도 하늘과 스올과 바다를 이야기하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의 손은 도망치는 사람을 붙잡아 심판합니다.

시편의 기도자에게 하나님의 손은 자신을 놓치지 않는 보호의 손입니다. 아모스가 고발한 죄인들에게는 자신들의 행위를 끝까지 따져 묻는 손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좋은 결과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와 무관하게 안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억압받는 사람의 고통을 보시며, 동시에 그를 억압하는 사람의 행위도 보십니다.

그래서 아모스의 환상에서는 어디에도 숨을 수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정의를 피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바다의 뱀은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이것을 특정한 동물의 종류로 확정하거나, 반드시 사탄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뱀의 역할은 하나님이 바다 깊은 곳까지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땅을 녹이시는 분은 누구인가

아모스 9:5–6 본문 →

하나님의 추적과 심판이 선언된 뒤, 예언의 목소리는 갑자기 웅장한 찬양처럼 바뀝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땅을 건드리시면 땅이 녹고,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이 슬퍼합니다. 온 땅이 나일강처럼 솟아오르고, 이집트의 나일강처럼 가라앉습니다.아모스 9:5 · 두루새김
하늘에 자기 계단을 지으시고, 땅 위에 자기 둥근 지붕의 기초를 놓으시는 분, 바닷물을 부르시고 땅 위에 쏟으시는 분,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야훼입니다.아모스 9:6 · 두루새김

「계단」과 「둥근 지붕」이 정확히 어떤 구조물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하늘과 땅을 거대한 건축물처럼 묘사하지만, 그 건축의 구체적인 형태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는 사람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들을 세우고 움직이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이러한 표현은 아모스 4:13과 5:8에서도 발견됩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이 산을 빚으시고 바람을 창조하시며, 별자리를 만드시고 바닷물을 부르시는 분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왕국과 군사력과 종교적 제도를 통해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들이 의지하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세운 질서를 심판하시는 분은 세상 자체를 세우신 분입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을 뜻하는가

아모스 9:7 본문 →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도 내게는 쿠시 사람들과 같지 않으냐? 내가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냈듯, 블레셋 사람들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들을 기르에서 이끌어 내지 않았느냐?」아모스 9:7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다른 민족과 구별된 백성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고 언약을 맺으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쿠시는 이집트 남쪽의 나일강 상류 지역과 관련된 고대의 나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쿠시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신들에게만 특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흔드는 데 있습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어떤 백성인지를 결정짓는 핵심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사건과 나란히 블레셋 사람들과 아람 사람들의 이동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들의 역사에는 관여하지 않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만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선택 자체를 부정합니까?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아모스 3:2에서 하나님은 땅의 모든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만 특별히 알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얻는 일이 아니라 특별한 언약 관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결론은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벌을 면제받는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모든 죄를 벌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한 관계로 부르셨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달리 심판에서 제외된다는 보증이 아닙니다. 그 관계에는 하나님의 뜻에 응답해야 할 책임이 따릅니다.

아모스 1–2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다마스쿠스, 가자, 두로, 에돔, 암몬, 모압, 유다를 향해서도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민족마다 고발되는 죄는 다르지만, 어느 민족도 하나님의 정의 밖에 있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갑돌은 블레셋의 기원과 연결되는 지역으로, 일반적으로 에게해의 크레타와 관련지어 이해하지만 그 정확한 지리적 범위에는 논의가 있습니다. 기르는 아람 사람들의 이동과 관련된 지역으로, 아모스 1:5에서는 아람이 포로로 끌려갈 장소로도 등장합니다.

무너지는 왕국과 남겨지는 백성

아모스 9:8–10 본문 →

7절의 질문 이후, 하나님의 심판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보아라, 주 여호와야훼의 눈이 죄지은 나라를 향하고 있다. 내가 그 나라를 땅 위에서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야곱 집안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입니다.아모스 9:8 · 두루새김

북이스라엘 왕국의 정치적 질서와 종교적 제도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과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미래가 반드시 그 왕국이 계속 존재하는 데 매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절에서 이 구별은 체를 흔드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명령하여, 체에 담긴 것을 흔들듯 이스라엘 집안을 모든 민족 가운데서 흔들 것이기 때문이다. 조약돌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아모스 9:9 · 두루새김

체는 곡식과 불순물을 구별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본문의 「조약돌」은 히브리어 츠로르(⁨צְרוֹר⁩), ṣərôr로, 작은 돌이나 묶음 등을 가리킬 수 있는 낱말입니다. 여기서는 작은 돌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문맥에 따라 작은 낟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번역도 있습니다.

조약돌로 읽으면 체가 흔들리는 동안 돌들이 걸러져 남고 땅으로 빠져나가지 않는 모습이 됩니다. 이것을 아무 죄인도 심판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작은 낟알로 읽으면 귀중한 곡식이 하나도 잃어버려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강조됩니다. 이 경우에는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이 지키실 사람들을 놓치지 않으신다는 뜻이 됩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이 비유의 중심에는 마구잡이의 파괴가 아니라 구별하는 심판이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조약돌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밝히지 않으므로, 비유의 모든 요소를 특정 집단에 하나씩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1–4절은 심판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어떤 곳으로도 도망쳐 빠져나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반면 8–9절은 하나님께서 그 심판 중에도 백성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재앙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도 않고 우리를 덮치지도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는 내 백성의 모든 죄인이 칼에 죽을 것이다.」아모스 9:10 · 두루새김

어쩌면 그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나 당시 왕국의 번영을 안전의 근거로 삼았을 것입니다. 아모스 6:1에서 경고받는, 시온과 사마리아에서 걱정 없이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9:10은 이들이 정확히 무엇을 근거로 그런 자신감을 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경고보다 자신들이 품은 안전에 대한 확신을 더 신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권리를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모스의 예언은 뜻밖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지금까지 무너지는 나라와 죽음과 심판을 선언하시던 하나님이, 다음 절부터는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궁전이 아니라 쓰러진 초막을 세우신다

아모스 9:11–12 본문 →

「그날에 내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다시 세우겠다. 터진 곳들을 막고 무너진 곳들을 일으켜 세워, 옛날처럼 다시 짓겠다.」아모스 9:11 · 두루새김

아모스에서 그날은 심판이 일어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같은 표현이 회복의 약속을 여는 말이 됩니다.

다윗의 궁전이 아니라 다윗의 초막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권의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과 그의 왕권에 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눈에 이미 실패하고 허물어진 것으로 보이는 다윗의 통치를 다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절에서는 하나님이 건물을 무너뜨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1절에서는 하나님이 무너진 초막을 다시 세우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처음 건물은 사람들이 안전을 기대했을 종교적 장소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마지막 초막은 다윗에게 주어졌던 약속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낡은 구조물을 지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무너진 뒤에도 자신의 약속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 회복의 범위는 다음 절에서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넓어집니다.

「내 백성이 에돔의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민족을 차지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일을 이루시는 여호와야훼의 말입니다.아모스 9:12 · 두루새김

에돔은 이스라엘과 오래된 친족 관계를 지닌 민족이지만, 갈등의 역사도 깊었습니다. 아모스 1:11–12에서도 에돔은 형제에게 잔혹하게 행동한 죄로 심판을 선고받았습니다.

여기서 「차지하게」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야라쉬(⁨יָרַשׁ⁩), yāraš 계열의 말로, 소유하거나 물려받는다는 의미뿐 아니라 적의 영토를 차지하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본문은 회복된 다윗의 통치가 주변 민족들에게까지 넓어질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확장이 구체적으로 군사적 정복을 뜻하는지, 다윗 왕권 아래 민족들이 새롭게 들어오는 더 넓은 통치를 뜻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민족」입니다. 이 표현은 그 민족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권위와 소유에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단순히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된 통치가 민족들 가운데까지 미친다는 전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표현만으로 모든 민족이 구원받거나 모두 동일한 정치적 지위를 갖게 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칠십인역에서 달라지는 회복의 모습

히브리어 본문은 「에돔의 남은 사람들」을 차지하는 내용이지만, 칠십인역은 「남은 사람들이 찾도록」이라는 방향으로 읽습니다. 신약 사도행전 15:16–18에서는 이 그리스어 전승과 가까운 형태로 아모스의 말씀을 인용하며, 남은 사람들이 주를 찾는다는 의미를 분명히 합니다.

히브리어의 「에돔」과 「사람」에 해당하는 낱말의 형태가 가깝고, 「차지하다」와 「찾다」에 해당하는 동사도 서로 다른 읽기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차이가 정확히 어떤 베껴 쓰기 과정이나 번역 과정에서 비롯되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는 이 말씀을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현실과 연결합니다. 이는 신약에서 아모스의 회복 약속을 읽는 중요한 사례이지만, 그 읽기를 히브리어 본문 9:12에 직접 쓰인 내용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본문은 왕권과 민족의 문제에서 땅과 일상의 문제로 옮겨 갑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뉜 이후 약해진 다윗 왕권을 묘사하는 것인지, 앞으로 다윗 왕조가 겪게 될 파괴를 내다보는 것인지, 혹은 후대의 파괴와 회복을 배경으로 생겨난 표현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유다의 다윗 왕조가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무너진」이라는 표현을 당시 왕조가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는 역사적 설명으로 곧바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추수가 끝나기도 전에 다시 밭을 갈다

아모스 9:13 본문 →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이런 날이 오고 있다. 밭을 가는 사람이 곡식을 거두는 사람을 따라잡고, 포도를 밟는 사람이 씨를 뿌리는 사람을 따라잡을 것이다. 산에서는 단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이 녹아내릴 것이다.」아모스 9:13 · 두루새김

이것은 단순히 풍년이 든다는 표현보다 훨씬 과감한 그림입니다.

농사를 짓는 데에는 일정한 계절의 순서가 있습니다. 씨를 뿌리고 기다려야 거둘 수 있습니다. 곡식을 거둔 다음에야 다음 농사를 준비하고, 포도를 거둔 뒤에는 그것을 밟아 포도주를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날에는 그 순서가 겹칩니다.

수확이 너무 풍성하고 오래 이어져 밭을 갈 때가 되어도 아직 거두는 사람이 일을 마치지 못합니다. 포도를 밟는 작업도 길어져 새로 씨를 뿌리는 시기와 맞닿습니다. 땅이 풍성하게 열매를 내어 수고의 결실이 끊이지 않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5절에서 하나님이 땅을 건드리시면 땅이 녹고,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이 슬퍼합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언덕이 녹아내리는 모습이 포도주의 풍요와 함께 등장합니다. 히브리어에서도 두 구절은 모두 「녹다」(⁨מוּג⁩) 계열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같은 땅이 하나님 앞에서 녹아내리지만, 앞에서는 심판의 두려움을 나타내고 뒤에서는 가득한 풍요를 나타냅니다.

아모스가 앞서 고발한 사회에서는 풍부한 자원이 있어도 가난한 사람들이 그 결실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좋은 집과 포도밭을 소유했지만, 그 풍요는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4절은 회복된 백성이 자신의 노동으로 얻은 결실을 직접 누리는 모습을 그립니다.

집을 지은 사람이 거기 살고, 심은 사람이 그 열매를 먹는다

아모스 9:14 본문 →

「끌려갔던 내 백성 이스라엘을 내가 돌아오게 하겠다. 그들은 폐허가 된 성읍들을 다시 세워 그곳에서 살 것이다. 포도밭을 가꾸어 그 포도주를 마시고, 동산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다.」아모스 9:14 · 두루새김

아모스 5:11에서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자들을 향해 그들이 잘 다듬은 돌로 집을 지어도 거기 살지 못하고, 아름다운 포도밭을 심어도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난한 사람에게서 부당한 이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9:14는 바로 그 심판의 모습을 뒤집습니다.

| 아모스 5:11의 심판 | 아모스 9:14의 회복 | | --- | --- | | 집을 지어도 거기 살지 못함 | 성읍을 다시 세워 그곳에서 삶 | | 포도밭을 심어도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함 | 포도밭을 가꾸어 그 포도주를 마심 | | 노동의 결실을 잃음 | 가꾼 동산의 열매를 직접 먹음 |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미래는 단순히 이스라엘이 다시 부자가 되는 미래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살 공간을 갖고, 자신의 노동이 만들어 낸 결실을 누리는 미래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28:30의 저주와도 대비됩니다. 그곳에서는 집을 지어도 살지 못하고 포도밭을 심어도 열매를 누리지 못하는 일이 언약을 어긴 백성에게 닥칠 재앙으로 선포됩니다.

고대 사회에서 전쟁과 약탈, 다른 나라로 끌려가는 일과 강제노동은 사람들이 자기 노동의 결과를 누릴 기회를 빼앗았습니다. 집을 짓는 사람과 그 집에 사는 사람이 다르고, 밭을 가꾸는 사람과 그 열매를 먹는 사람이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 9:14에서는 일하는 사람과 그 결실을 누리는 사람이 다시 연결됩니다.

아모스 2장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죄는 가난한 사람을 상품처럼 취급하고 약한 사람의 권리를 빼앗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이웃의 노동은 다른 사람의 부를 위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물론 14절은 미래 사회의 경제제도나 재산을 나누는 방식을 자세하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특정한 현대 경제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지지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백성의 삶이 실제로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백성을 심으신다

아모스 9:15 본문 →

아모스서 전체의 마지막 말씀은 농사의 그림으로 끝납니다.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겠다. 그들은 내가 준 그 땅에서 다시는 뽑히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아모스 9:15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14절에서 사람들이 포도밭을 심는다고 말한 뒤, 15절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심으신다고 말합니다. 심는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사람이 식물을 심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심으십니다.

식물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듯, 백성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땅에 자리 잡고 살아가게 됩니다. 백성이 땅에서 뽑혀 나가고 흩어지는 것이 심판의 모습이었다면, 그들이 다시 땅에 심겨 뽑히지 않는 것이 회복의 모습입니다.

아모스 7:17에서는 이스라엘이 자기 땅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심판이 선언되었습니다. 9:9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집안을 모든 민족 가운데서 흔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1:28도 하나님이 뽑고 무너뜨리셨던 백성을 다시 세우고 심으시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두 본문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심판하실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신다는 구약의 중요한 주제를 함께 보여 줍니다.

14절에서 사람들은 집을 짓고 포도밭과 동산을 가꿉니다. 그들은 회복된 삶 안에서 실제로 일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삶의 바탕을 마지막으로 마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심으시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땅에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10절의 사람들은 재앙이 자신들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15절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이 직접 뽑히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겉보기에는 둘 다 안전에 관한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경고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자기 확신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 이후에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약속입니다.

참된 안전은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고, 심판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 절에 이르러 본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관계의 언어로 끝납니다.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으셨던 하나님이 그 관계의 미래를 다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아모스서는 이스라엘이 그 관계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말씀에서는 그 관계가 심판 이후에도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새롭게 이어질 것이라는 약속이 들립니다.

마지막 장면 — 뽑히지 않는 사람들

아모스 9:1–15 본문 →

아모스 9장은 심판에서 희망으로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엇이 무너져야 하고 무엇이 남아야 하는지를 구별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두 가지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은 실제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심판이 하나님이 백성에게 하시는 마지막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도망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집을 짓고 그곳에 삽니다. 포도밭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십니다. 동산을 가꾸고 그 열매를 먹습니다.

아모스는 이 회복을 화려한 왕궁이나 위대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가꾼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평범한 장면으로 끝냅니다. 그런데 그 평범한 삶이야말로 앞서 아모스가 고발한 사회에서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이 누리지 못했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겠다. 그들은 내가 준 그 땅에서 다시는 뽑히지 않을 것이다.」

아모스서는 그렇게 끝납니다.

무너진 제단도, 도망치는 사람도, 쓰러진 왕국도 더 이상 마지막 장면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심으신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갈 땅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