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룩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죄를 고백하는 기도
심판을 이루신 하나님이 듣는 귀를 주십니다
바룩서 2장에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두 문장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재앙을 내리겠다는 말씀을 지켜 우리에게 그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듣는 귀를 주겠다.」
이 두 문장이 같은 기도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자신의 말씀대로 백성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다시 어떤 일을 하시려는가요?
앞 장에서 시작된 공동체의 죄 고백은 처음 열 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이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경고하신 일이었다고 인정합니다. 11절부터는 기도의 말투가 바뀝니다. 하나님에 관해 말하던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을 직접 부르며 자비를 구합니다.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끔찍한 사실
예루살렘이 무너졌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무너지지 않았다
2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이루셨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재판하던 우리의 재판관들과 왕들과 지도자들,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바룩서 2:1 · 두루새김
유다 왕국은 무너졌습니다. 왕권은 사라졌고,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백성이 오랫동안 안정의 근거라고 여겼던 제도들이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바룩서는 바로 그 사건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고백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도시의 함락은 흔히 그 도시를 보호하는 신의 무능이나 패배와 연결되어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의 파괴를 하나님께서 이미 경고하신 심판으로 선포했습니다(예레미야 7:12–15; 21:3–10).
바룩서의 포로 공동체는 그 예언자들의 해석을 자기들의 고백으로 받아들입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듣지 않았던 하나님의 경고가 이루어졌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역사 속의 모든 전쟁과 파괴를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일반 원칙은 아닙니다. 바룩서는 모세의 언약과 예언자들의 경고라는 특정한 문맥 안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살을 먹는 세상
「주께서 예루살렘에 내리신 것과 같은 재앙은 온 하늘 아래 어디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그대로였습니다.」바룩서 2:2 · 두루새김
「우리가 저마다 자기 아들의 살과 자기 딸의 살을 먹기에 이르렀습니다.」바룩서 2:3 · 두루새김
생명을 보호해야 할 가장 가까운 관계마저 무너지는 상황입니다. 신명기의 언약 저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 그들이 누리던 복이 어떻게 뒤집힐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은 풍요로운 삶을 누릴 장소였지만, 그 땅의 성읍들은 포위되어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곳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뒤집힘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살아갈 미래를 열어 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결과로 닥친 전쟁과 굶주림은 그 미래를 상징하는 자녀들마저 희생시키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위에 있어야 할 백성이 아래로 내려가다
2:4–5는 멸망의 결과를 정치적·사회적인 언어로 설명합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들 위에 서지 못하고 그 아래에 놓였습니다.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그분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바룩서 2:5 · 두루새김
이 말은 신명기 28:13을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으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본문에서 위와 아래를 결정하는 기준은 민족의 타고난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지위가 특별하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대신,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때문에 그 지위를 잃었다고 인정합니다.
재앙을 당하고도 돌아서지 않았다
그런데 2:8에 이르면 죄 고백이 한층 더 깊어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저마다 악한 마음에서 나온 생각을 버리고 돌아서려고 주께 간청하지 않았습니다.」바룩서 2:8 · 두루새김
고난은 사람을 자기 잘못과 마주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반드시 잘못을 인정하거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바룩서의 공동체는 이제 자신들이 당한 재난만큼이나, 그 재난 앞에서 보인 자신들의 고집을 고백합니다.
그런 다음 9절은 다시 하나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주께서는 재앙을 내리겠다는 말씀을 지켜 우리에게 그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에서 주께서는 옳으시기 때문입니다.」바룩서 2:9 · 두루새김
다니엘서 9:14에도 하나님께서 재앙을 지켜보시고 그것을 이루셨다는 매우 가까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두 기도 모두 재앙을 우연한 불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해석합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을 즐기셨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초점은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무관심이 아니라, 경고하신 일을 실제로 이루셨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이루셨고, 백성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기도의 말투가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2:3의 표현은 신명기 28:53–57의 언약 저주와 직접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적군이 성읍을 포위하고 식량이 끊어졌을 때 부모가 자기 자녀의 살을 먹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애가 4:10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면서 자비로운 여인들이 자기 자녀를 삶아 먹었다고 탄식합니다. 열왕기하 6:28–29에는 사마리아가 포위되었을 때 벌어진 비슷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판하신 하나님께 다시 구원을 요청하다
「이제」라는 말과 함께 달라지는 기도
2:11의 첫마디는 「이제」입니다.
「이제 주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당신은 강한 손과 높이 드신 팔로, 표징과 놀라운 일과 큰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렇게 당신의 이름을 떨치셨고, 그 이름은 오늘까지 알려져 있습니다.」바룩서 2:11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에 관해 말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을 직접 「당신」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시편 77편과 80편에서 볼 수 있는 탄원의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현재의 고통 가운데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며, 그 하나님께 지금도 자신들을 돌보아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이집트의 권력 아래 있던 사람들을 건져 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벨론의 권력 아래 있는 사람들도 그분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 하나님, 저희는 당신의 모든 올바른 규정을 거슬렀습니다. 죄를 짓고, 당신을 공경하지 않는 행동을 하고, 옳지 않은 일을 저질렀습니다.」바룩서 2:12 · 두루새김
과거의 구원은 현재의 죄를 덮기 위한 핑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어떤 하나님을 거역했는지 더욱 분명하게 만드는 기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부당하다고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바로 그 하나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2:13–15에서 공동체는 하나님의 거센 분노를 거두어 주시기를 구하고, 남아 있는 자신들을 구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주님, 저희의 기도와 간청을 들어 주십시오. 당신 자신을 위해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저희를 사로잡아 끌고 간 사람들이 저희에게 호의를 베풀게 해 주십시오.」바룩서 2:14 · 두루새김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야 할 이유를 자신들의 선한 행실에서 찾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15절이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당신께서 주 저희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과 그 후손이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임을 알게 해 주십시오.」바룩서 2:15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어떤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그 백성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관계를 나타냅니다. 신명기 28:10은 땅의 모든 백성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실패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처지가 여러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알려질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심판하신 하나님께서도 여전히 자신들의 하나님이심을 근거로 자비를 구합니다.
이러한 호소는 출애굽기 32:11–14에서 모세가 금송아지 사건 뒤 이스라엘을 위해 중재하던 기도와 연결됩니다. 모세도 이스라엘의 잘못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역사와 약속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찬양하지 못한다
2:16–18에는 매우 절박한 간청이 등장합니다.
「눈을 뜨고 보아 주십시오. 하데스에 있는 죽은 사람들, 곧 몸에서 숨이 거두어진 이들은 주께 영광을 돌리거나 주께서 옳으시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바룩서 2:17 · 두루새김
그들은 자신들이 심판을 받을 만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말고, 아직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기도는 시편 6:5와 88:10–12, 이사야 38:18–19에 나타나는 탄원의 전통과 가깝습니다. 시편에서는 죽음의 영역에 내려간 사람이 더 이상 살아 있는 회중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호소합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죽음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살아 있는 사람이 그분의 신실하심을 알린다고 말합니다.
바룩서의 「하데스」도 먼저 그러한 구약의 죽음의 영역이라는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죽음 이후 인간의 의식이나 찬양 가능성에 대한 완결된 교리적 진술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큰 슬픔에 잠겨 허리를 굽히고 힘없이 걷는 사람들, 눈이 흐려지고 굶주린 사람들이 당신께 영광을 돌리며 당신께서 옳으시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주님.」바룩서 2:18 · 두루새김
죽은 사람과 아직 살아 있는 사람, 더 이상 찬양할 수 없는 사람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 서로 대비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간청하면서도 자신들이 받은 심판이 부당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옳으시다고 인정하는 살아 있는 증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자비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근거
2:19는 이러한 간청의 근거를 분명하게 제한합니다.
「주님, 저희 하나님, 저희는 조상들과 왕들이 바르게 산 행실을 내세워 당신 앞에서 자비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바룩서 2:19 · 두루새김
이스라엘에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처럼 중요한 신앙의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맺으신 약속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하는 전통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룩서의 기도는 조상들이 바르게 산 행실 자체를 자신들의 자격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함을 주장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말씀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는 심판뿐 아니라 회복의 약속도 들어 있습니다.
왜 바벨론 왕을 섬기라는 말씀도 거역했는가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정복자에게 굴복해야 했던 상황
2:21–23에서 기도자는 예언자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어깨를 굽혀 바벨론 왕을 섬기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아라.』」바룩서 2:21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자기 하나님으로 섬겨야 하는 백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을 섬기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핵심은 바벨론 왕에게 종교적인 충성을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이고, 무모한 저항으로 더 큰 파괴를 자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멍에를 메는 상징 행동을 통해 유다와 주변 나라들에게 바벨론 왕의 지배를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예레미야 27:11–12에서는 바벨론 왕의 멍에 아래 목을 굽히는 것이 그 땅에서 살아남는 길이라고 설명합니다.
예레미야서 25:12와 50–51장은 바벨론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제국의 폭력을 무조건 승인하는 정치 철학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닥친 특정한 역사적 위기 속에서 주어진 예언적 명령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다의 일부 지도자들은 바벨론의 지배가 곧 끝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레미야서 28장에서 하나냐는 바벨론의 멍에가 짧은 시간 안에 꺾일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예레미야는 그 희망을 거짓된 예언으로 판단합니다.
그들이 듣지 않았던 것은 단지 우상숭배를 멈추라는 명령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장은 굴욕적으로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이라는 명령도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의 구원만을 기다리다가, 실제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민족적 자존심이 언제나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한 시대의 정치적 선택을 모든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복종 명령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평가하는 것은 예레미야를 통해 주어진 특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유다가 거절한 사건입니다.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가 사라진 땅
그다음 경고는 전쟁의 참혹함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보여 줍니다.
「『내가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 바깥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그치게 하겠다. 온 땅에 사는 사람이 없어 발길이 끊길 것이다.』」바룩서 2:23 · 두루새김
결혼식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쁨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신랑과 신부의 소리는 한 가정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이면서, 공동체에 새로운 삶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2장 앞부분에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굶주림 속에서 파괴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결혼식의 기쁨이 사라집니다. 하나는 이미 존재하는 가족의 파괴이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이루어질 가족의 시작이 중단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왕궁과 성전이라는 공적인 장소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밥상과 가정과 거리에서 들리던 목소리까지 사라지는 재난으로 나타났습니다.
왕들의 뼈마저 제자리를 잃다
2:24–25는 더 끔찍한 광경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도 저희는 바벨론 왕을 섬기라는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종인 예언자들을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저희 왕들과 조상들의 뼈가 무덤 밖으로 끌려 나왔습니다.」바룩서 2:24 · 두루새김
「보십시오. 그 뼈들은 낮의 뜨거운 햇볕과 밤의 서리 속에 내던져져 있습니다. 그들은 굶주림과 칼과 전염병으로 혹독한 고통 속에서 죽었습니다.」바룩서 2:25 · 두루새김
살아 있는 왕은 나라를 지키지 못했고, 죽은 왕의 유해조차 보호받지 못합니다.
고대 유다 사회에서 죽은 사람을 장사하고 조상들의 무덤을 존중하는 일은 중요한 가족적·사회적 관습이었습니다. 특히 왕들의 무덤은 죽은 통치자에 대한 기억과 왕조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장소였습니다.
왕들의 권력도, 조상들의 명예도, 과거의 영광도 재난을 막아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방어선처럼 여겨졌던 왕조의 기억마저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불린 집마저
2:26은 마지막으로 성전을 언급합니다.
「또 당신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전을 오늘과 같은 처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이 저지른 악 때문입니다.」바룩서 2:26 · 두루새김
앞에서 기도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집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2:16). 그런데 여기서는 바로 그 이름으로 불리는 성전이 황폐해졌다고 고백합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속한 집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성전을 파괴되지 않는 건물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예레미야서 7:4–15에서 예언자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이름만을 믿고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판단하시는지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성전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악을 외면하셔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속한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살아가는 백성의 책임은 더욱 무겁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도는 뜻밖의 방향으로 돌아섭니다.
심판의 기억에서 자비의 약속으로
재앙을 말하다가 하나님의 자비를 고백하다
「주님, 저희 하나님, 당신께서는 온전한 너그러움과 크나큰 자비로 저희를 대해 주셨습니다.」바룩서 2:27 · 두루새김
지금까지 그들은 굶주림, 학살, 유배, 무덤의 훼손, 성전의 황폐함을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자비가 등장하는가요?
2:28부터 기도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내용을 떠올립니다. 그 말씀에는 백성이 불순종하여 흩어질 것이라는 경고뿐 아니라, 포로지에서 마음을 돌이키고 다시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는 약속도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27절의 자비는 재앙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을 받을 만큼 불순종했던 백성에게도 하나님께서 돌아올 미래를 말씀해 두셨다는 사실에서 발견됩니다.
모세의 말씀인가, 예언자들의 말씀인가
2:28은 이어지는 약속을 모세를 통해 주어진 말씀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2:29–35의 문장 전체가 모세오경의 어느 한 구절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내용은 신명기 30:1–10과 레위기 26:40–45의 약속을 바탕으로 하면서, 예레미야서에 나타나는 회복과 언약의 언어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30장은 이스라엘이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진 뒤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모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서 24:7은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자신을 알 수 있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예레미야서 32:37–41은 흩어진 백성을 모으고 영원한 언약을 맺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바룩서의 이 부분은 모세를 통해 전해진 언약과 예언자들의 회복 약속을 하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엮어 들려주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이미 받은 말씀 안에서 희망의 근거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큰 무리가 작은 웅성거림으로 바뀌다
2:29의 약속은 처음에는 여전히 심판을 말합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이 크고 요란한 웅성거림은 내가 그들을 흩어 놓을 여러 민족 사이에서 반드시 작아질 것이다.』」바룩서 2:29 · 두루새김
「웅성거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봄베시스(βόμβησις)는 웅웅거리는 소리나 북적이는 소란을 나타냅니다. 여기서는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아가는 공동체의 소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표현은 앞서 신랑과 신부의 소리가 그친다는 경고와도 어울립니다. 백성의 삶을 가득 채우던 소리들이 작아지고, 결국 성읍은 적막해집니다.
그러나 그 회복은 인구가 늘어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먼저 일어나야 할 변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듣지 않을 것을 알고 계셨다
「『그들이 결코 내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들은 고집 센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포로로 끌려간 땅에서 마음을 돌이킬 것이다.』」바룩서 2:30 · 두루새김
여기서 「고집 센 백성」(σκληροτράχηλος)이라고 옮긴 자리는 원문에서는 목이 뻣뻣하다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 32:9와 신명기 9:6–13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특징입니다. 멍에를 지고 방향을 바꾸어야 할 동물이 목을 굳게 세우고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모습에서 나온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고집을 아시는 하나님은 말씀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 그분의 회복 약속이 주어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집을 아시면서도, 그들이 돌아올 미래를 이미 말씀하십니다.
듣지 않던 백성에게 듣는 귀를 주시다
귀를 주시겠다는 약속
2:31은 이 장의 중심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내가 주 그들의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듣는 귀를 주겠다.』」바룩서 2:31 · 두루새김
이미 귀가 있는 사람들에게 듣는 능력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2:5, 10). 예언자들을 통해 주신 말씀을 거절했고(2:24),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순종을 알고 계셨습니다(2:30).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듣는 귀를 주십니다.
그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해도 이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다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회복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 말씀에 응답할 수 있는 마음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바룩서의 약속은 불순종한 백성에게 다시 한번 순종을 명령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에게 순종할 수 있는 마음과 귀를 주시겠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돌아가기 전에 먼저 일어나는 일
2:32는 회복의 장소에 관해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간 땅에서 나를 찬양하고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바룩서 2:32 · 두루새김
이것은 아직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이 점은 바룩서 1장의 첫 장면과도 이어집니다. 바벨론의 수드 강가에서 말씀을 듣고 울며 기도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그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을 잃고 나라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시면, 그들은 여전히 그분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시편 137편은 바벨론 강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던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이방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바룩서 2:32는 그 질문과 같은 고통의 자리에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시편 137편의 슬픔을 취소하는 대답이 아닙니다. 고향을 잃은 고통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뻣뻣하던 목이 돌아서다
2:33은 앞의 고집 센 백성이라는 표현을 다시 가져옵니다.
「『그들은 고집을 꺾고 악한 행동에서 돌아설 것이다. 주 앞에서 죄를 지은 조상들이 걸었던 길을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바룩서 2:33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고집을 단순히 마음속에 있는 생각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몸의 자세로 표현합니다. 목과 등을 굳게 세우고 돌아서기를 거부하던 사람이 방향을 바꿉니다.
회개는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머리로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걸어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과 듣는 귀를 주십니다. 그다음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이름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악한 행동에서 돌아섭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신다는 사실이 인간의 응답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응답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일이 과거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를 올바르게 기억하면서 같은 길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행하신 구원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시에 자신들이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실패했는지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두 가지 기억이 함께 있을 때, 백성은 자신의 역사를 진실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다
2:34는 마침내 백성의 귀환을 약속합니다.
「『내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돌아오게 하겠다.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수를 늘려 주겠고, 그들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바룩서 2:34 · 두루새김
창세기 12:7과 15:18, 17:7–8에는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나옵니다. 이삭과 야곱에게도 그 약속이 이어집니다(창세기 26:3–4; 28:13–15). 바룩서는 이 약속이 포로 공동체의 미래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그들의 크고 요란한 웅성거림은 작아졌습니다. 흩어진 백성은 자신들의 수가 줄어들고 공동체가 사라져 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그 반대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줄어들던 백성이 늘어나고, 사라질 것 같았던 공동체가 다시 살아갑니다. 이러한 회복의 언어는 처음의 아브라함 약속과도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15:5; 22:17).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시작하신 약속의 역사를 포로 생활의 파국 속에서도 끝내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언약
마지막 절에서 약속은 절정에 이릅니다.
「『내가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시는 쫓아내지 않겠다.』」바룩서 2:35 · 두루새김
여기서 땅의 회복과 언약의 회복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왕국의 멸망은 한 번의 정치적 실패로만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던 오랜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정치적 독립을 다시 얻는 것만으로 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바룩서는 회복의 근거를 더 깊은 곳에 둡니다. 하나님께서 마음과 귀를 주시고, 자기 백성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다시는 쫓아내지 않겠다」는 약속은 그렇게 회복된 관계가 계속 이어질 것임을 표현합니다. 다만 이 구절을 특정한 역사적 귀환 사건 하나가 이 약속을 완전히 이루었다는 진술로 볼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하고 있으며, 실제 역사에서 그 약속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로 살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2:31의 그리스어 원문은 카르디안 카이 오타 아쿠온타, 곧 ‘마음과 듣는 귀’라고 말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깨닫는 마음과 듣는 귀」라고 옮겼습니다. 이 약속은 신명기 30:6과 깊이 연결됩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백성과 그 후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레미야서 24:7에서는 자신을 알 수 있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에스겔 36:26–27에서는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셔서 하나님의 규정을 따라 살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35의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표현은 레위기 26:12와 예레미야서 31:33 등에 나타나는 언약 관계의 핵심입니다. 특히 예레미야서 32:40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영원한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서 돌아서지 않으시며,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심판의 말씀과 자비의 약속은 서로 다른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은 그분의 자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이 이전의 죄를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분은 불순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불순종한 백성의 미래를 심판으로만 끝내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이 마음을 주시고, 귀를 주시며, 백성을 돌아오게 하시고, 언약을 맺으십니다.
바룩서 2장의 마지막을 읽는 독자는 여전히 바벨론에 있는 공동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거리에서는 한때 신랑과 신부의 소리가 그쳤습니다. 그들이 살던 땅은 황폐해졌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회복의 약속은 먼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 길이 열리기 전, 바로 포로의 땅에서 하나님을 다시 알아듣는 일부터 시작됩니다.
크고 요란한 웅성거림이 작은 소리로 줄어든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공동체가 다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찬양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룩서 2장은 바로 그 약속을 남기며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