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룩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지혜를 노래하는 시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바룩서 3장에는 서로 다른 세 목소리가 들립니다.
먼저 포로 공동체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들어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런데 기도가 끝나자 이번에는 이스라엘을 향해 외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스라엘아, 생명을 주는 명령들을 들어라.」
그리고 장의 후반부에는 뜻밖의 존재들이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저희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기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백성입니다. 반면 하늘의 별들은 하나님이 부르시자 즉시 응답합니다.
바룩서 3장은 처음 여덟 절에서 앞서 시작된 포로 공동체의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9절부터 완전히 다른 문학적 세계로 들어갑니다. 이제 시인은 이스라엘에게 지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라고 합니다.
권세 있는 왕들은 지혜를 발견했을까요? 엄청난 재산을 쌓아 둔 사람들은 어떨까요? 먼 나라를 여행하는 상인들과 오래전의 거인들은 그 길을 알았을까요?
이 장은 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나라와 성전을 잃어버린 백성에게 그들이 정말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며, 아직 그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모든 것을 잃어 가는 사람들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부르짖다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고, 우리는 사라져 갑니다
3장은 절박한 기도로 시작합니다.
「전능하신 주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고통받는 저희 영혼과 낙심한 저희 마음이 당신께 부르짖습니다.」바룩서 3:1 · 두루새김
「영혼」과 「마음」은 고난에 짓눌린 사람의 존재 전체를 겹쳐 나타냅니다. 이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영원히 앉아 계시지만, 저희는 영원히 멸망해 갑니다.」바룩서 3:3 · 두루새김
「앉아 계시지만」이라는 표현은 왕이 보좌에 앉아 다스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세월이 흐르고 나라들이 일어서고 무너지는 동안에도 자신의 자리를 잃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포로들이 죽음 이후에도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라는 교리적 선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의 기도는 그들이 자비를 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복된 「영원히」는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계시는 것과 인간이 겪는 파멸 사이의 깊은 간격을 드러내는 간절한 표현입니다.
「죽은 이들」의 기도인가
3:4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표현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주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죽은 이들과 당신 앞에서 죄를 지은 이들의 자손이 드리는 기도를 부디 들어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이신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재앙이 저희에게 달라붙었습니다.」바룩서 3:4 · 두루새김
기도자들은 자신들을 죄를 지은 조상들의 후손으로 이해하며, 그 죄의 결과가 지금 자신들에게도 이어져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과거 세대와 무관한 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기억하지 말아 달라는가
3:5는 짧지만 짜임새 있는 기도입니다.
「저희 조상들이 저지른 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지금 당신의 능력과 이름을 기억해 주십시오.」바룩서 3:5 · 두루새김
이 문장에는 같은 동사를 사용한 부정의 요청과 긍정의 요청이 서로 마주 놓여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흔히 그분의 약속과 성품에 따라 지금 행동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출애굽기 2:24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을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그 기억은 이후 구원의 행동과 연결됩니다.
바룩서의 기도자도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원문에서는 ‘손’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출애굽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손은 백성을 구원하시는 능력과 행동을 나타냅니다(출애굽기 13:3, 9).
자신들의 조상들이 저지른 악을 기준으로만 자신들을 대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나타내신 구원의 능력과 자기 백성에게 이름을 주신 관계에 따라 행동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역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역사의 마지막 말이 인간의 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이기를 구합니다.
포로의 땅에서 이미 시작된 변화
3:7에 이르면 기도는 새로운 사실을 고백합니다.
「바로 이를 위해 당신께서는 저희 마음에 당신을 향한 두려움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게 하셨습니다. 저희는 포로살이 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겠습니다. 당신 앞에서 죄를 지은 조상들의 온갖 악을 저희 마음에서 물리쳤기 때문입니다.」바룩서 3:7 · 두루새김
이 절은 앞 장에서 하나님께서 마음과 듣는 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2:31).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향한 두려움을 백성의 마음에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두려움」은 여기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게 만드는 공포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깊이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바로 그 두려움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찬양하는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포로로 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이미 이전과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이 저지른 죄를 더 이상 자신들의 삶을 이끄는 길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이제 본문은 그들이 앞으로 어떤 길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인지 묻기 시작합니다.
그 길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말이 바로 ‘지혜’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라엘의 죽은 이들」이라는 표현은 그리스어 본문에도 실제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바로 앞 장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거나 그분의 의를 인정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2:17). 실제로 죽은 이들을 가리키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죽은 이들의 기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추가로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남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놓인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적으로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던 표현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죽은 이들’로 읽혔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어느 설명이 확실한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구절에서 죽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기도하는지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너는 왜 원수들의 땅에서 늙어 가고 있는가
기도하던 백성이 이제 질문을 듣는다
3:9에서 말하는 이와 글의 말투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아, 생명을 주는 명령들을 들어라. 슬기를 깨닫도록 귀를 기울여라.바룩서 3:9 · 두루새김
기도 속에서 백성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제 시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들으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명령은 삶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이르는 길을 알려 주는 가르침으로 소개됩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 30:15–20을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앞에 생명과 복, 죽음과 재앙이 놓여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붙어 있으라고 명합니다.
바룩서의 시는 그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슬기」를 배우는 일과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일을 연결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정보를 더 많이 아는 것만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 배우는 것입니다.
낯선 땅에서 늙어 버린 이스라엘
시인은 이스라엘에게 질문합니다.
어찌 된 일이냐, 이스라엘아? 왜 네가 원수들의 땅에 있느냐? 너는 낯선 땅에서 늙었고, 죽은 이들과 함께 더럽혀졌으며, 하데스로 내려가는 사람들과 한 무리로 여겨졌다.바룩서 3:10–11 · 두루새김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슬픕니다. 그런데 시인은 거기에 시간의 무게를 더합니다. 이스라엘은 잠시 고향을 떠난 여행자가 아닙니다. 낯선 땅에서 세월을 보내며 늙어 가는 사람처럼 묘사됩니다.
돌아갈 날을 기다리다가 고향에서 살아갈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죽은 이들과 함께 더럽혀지고, 하데스로 내려가는 사람들과 한 무리로 여겨졌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처지가 죽음에 가까울 만큼 비참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율법에서 시체와의 접촉은 정결 문제와 관련됩니다(민수기 19:11–16). 시인은 죽음과 더러움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백성의 파국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곧바로 그 이유를 한 문장으로 밝힙니다.
네가 지혜의 샘을 버렸기 때문이다.바룩서 3:12 · 두루새김
이 말은 앞선 긴 죄 고백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압축합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다른 신들을 섬겼으며,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 이미지에는 예레미야서 2:13과의 연결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물을 담아 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팠다고 책망합니다. 바룩서에서는 그 샘이 「지혜의 샘」으로 표현됩니다.
두 본문 모두 이스라엘의 실패를 단순히 금지된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에게 생명을 주는 근원에서 떠난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스라엘은 지혜를 충분히 얻지 못해서만 길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자신들에게 주어진 지혜의 근원을 버렸기 때문에 길을 잃었습니다.
지혜를 얻으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3:13–14에서 시인은 지혜가 가져오는 삶을 설명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길을 걸었더라면, 영원히 평화롭게 살고 있을 것이다.바룩서 3:13 · 두루새김
그리고 슬기와 함께 힘, 깨달음, 오래 사는 삶, 생명, 눈의 빛, 평화가 등장합니다. 지혜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의 머릿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며, 무엇에 힘을 쓰고, 어떤 길을 택하고, 어떤 평화를 누리는가와 관련됩니다.
특히 「눈의 빛」은 생기와 삶의 기쁨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 13:3에서도 시인은 죽음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의 눈을 밝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앞에서 이스라엘은 죽음의 영역에 가까운 존재처럼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생명과 빛과 평화가 어디에 있는지 배우라고 합니다.
이것을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오래 살고 고난을 겪지 않는다는 보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은 언약에 따른 삶과 평화의 관계를 설명하는 지혜의 언어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회복시키는 지혜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시인은 사람들이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만한 곳들을 찾아 나섭니다.
세상을 지배했던 사람들은 왜 지혜를 찾지 못했는가
지혜의 보물 창고는 어디에 있는가
누가 지혜가 있는 곳을 찾았느냐? 누가 지혜의 보물 창고에 들어갔느냐?바룩서 3:15 · 두루새김
이 질문은 욥기 28장의 지혜 찬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욥기 28장에서 사람들은 땅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은과 금과 보석을 찾아냅니다. 누구도 보지 못한 지하의 길을 발견할 만큼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지혜가 있는 곳은 찾아내지 못합니다.
바룩서는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인간 사회의 다양한 성공한 사람들을 무대에 올립니다. 먼저 민족들을 다스리던 사람들과 들짐승들을 지배하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삶을 꾸리는 정도를 넘어 다른 존재들을 지배하고 다룰 만큼 큰 권세와 능력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이어서 막대한 부를 쌓아 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늘의 새들을 가지고 놀던 사람들, 은을 모으고,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던 금을 쌓아 두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그들의 재산은 끝이 없었다.바룩서 3:17 · 두루새김
여기서 금과 은을 소유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표현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믿고 의지하던」 일입니다. 그들에게 재산은 단순한 생활의 수단을 넘어 안전과 확신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라져 하데스로 내려갔고,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바룩서 3:19 · 두루새김
권세와 재산이 아무리 커도 그 소유자가 영원히 살아남게 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이 대목은 전도서 2:18–19와도 통합니다. 전도서의 화자는 평생 애써 이룬 것을 자기 뒤에 오는 사람에게 남겨야 한다는 사실을 괴로워합니다. 뒤를 이을 사람이 지혜로울지 어리석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바룩서 역시 세대가 바뀌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성취가 지닌 한계를 보여 줍니다.
정교한 물건을 만드는 사람도 지혜의 길을 알지 못한다
3:18에는 은을 다듬으며 애쓰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은을 다듬으며 애쓰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한 일을 알아낼 길이 없다.바룩서 3:18 · 두루새김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물건이나 업적을 이제 찾아낼 수 없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들이 한 일의 규모와 복잡함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어 엑세우레시스(ἐξεύρεσις)는 찾아냄과 알아냄을 함께 나타낼 수 있으므로 어느 하나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 기술만으로 지혜의 길을 알아내지는 못합니다.
바룩서가 문제 삼는 것은 인간의 기술적 능력 자체가 아니라, 그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그것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다음 세대는 왜 더 지혜롭지 않은가
3:20–21에서는 젊은 세대가 등장합니다.
그 뒤를 이은 젊은 세대가 빛을 보며 땅 위에 살았지만, 지식의 길은 알지 못했다.바룩서 3:20 · 두루새김
세대가 바뀌고 경험과 기술이 쌓이는 것만으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저절로 알게 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더 많은 재산과 지식을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살아가는 일은 그 자체로 다시 배워야 합니다.
지혜는 보물 창고 속의 물건처럼 묘사되다가 이제 사람이 걸어야 할 길로 표현됩니다. 지혜를 찾는 일은 무엇을 손에 넣느냐의 문제인 동시에, 어디로 걸어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지혜로 이름난 민족들조차
시인의 시선은 이제 여러 지역으로 옮겨 갑니다.
지혜는 가나안에서도 알려지지 않았고, 데만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바룩서 3:22 · 두루새김
데만은 에돔과 관련된 지역으로, 지혜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49:7에서는 에돔에 더 이상 지혜가 없느냐고 묻고, 욥기의 친구 엘리파즈도 데만 사람으로 소개됩니다(욥기 2:11).
이어서 하갈의 자손들, 메란과 데만의 상인들, 이야기꾼들과 깨달음을 구하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갈의 자손들은 아라비아 쪽 민족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메란은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상인들은 먼 지역을 오가며 사람과 물건과 문화를 접합니다. 이야기꾼들은 다양한 이야기와 전통을 알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구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탐구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들이 지혜의 길을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민족들이 실제로 지적 능력이 낮았다는 역사적 평가가 아닙니다. 바룩서의 시는 여러 민족의 지혜와 기술을 차례로 불러내어, 인간이 스스로 얻을 수 있는 지식만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지혜에 도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스라엘은 강대국에 패배했습니다. 바벨론은 정치적·군사적으로 이스라엘보다 강했습니다. 그 제국은 거대한 도시와 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능력과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며 살아가는 지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힘을 잃은 이스라엘에게 위로가 될 수 있지만, 단순한 민족적 자부심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신도 이미 지혜의 샘을 버린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제 인간 사회의 경계를 벗어나 창조 세계 전체로 시선을 넓힙니다.
거인들도 하늘과 바다를 탐험하는 사람들도 찾지 못한 지혜
하나님의 집은 얼마나 큰가
아, 이스라엘아, 하나님의 집은 얼마나 크냐! 그분이 소유하신 곳은 얼마나 넓게 뻗어 있느냐!바룩서 3:24 · 두루새김
이 「하나님의 집」은 예루살렘 성전 건물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곧바로 그 크기가 끝이 없고 높이를 잴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옛날 거인들이 그 안에서 태어났다고도 말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다스리시는 드넓은 창조 세계를 집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황폐해졌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이름이 불리던 집이었습니다(2:26).
그러나 지금 시인은 인간이 무너뜨릴 수 없는 크기의 하나님의 집을 노래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무너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능력은 그 건물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66:1도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고 땅은 그분의 발판이라고 말하며,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지을 수 있는 집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거인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지혜
이 드넓은 세계 안에 옛날의 거인들이 등장합니다.
그곳에서 옛날부터 이름난 거인들이 태어났다. 그들은 몸집이 크고 전쟁에 능했다.바룩서 3:26 · 두루새김
이 거인들은 창세기 6:4에 등장하는 옛날의 용사들, 곧 이름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시 말해 보통 사람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하나님의 판단은 뜻밖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지 않으셨고, 그들에게 지식의 길을 알려 주지도 않으셨다.바룩서 3:27 · 두루새김
이 문장은 강한 존재가 반드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들은 슬기가 없어 멸망했고, 분별없이 행동하여 멸망했다.바룩서 3:28 · 두루새김
힘이 없어서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된 민족들을 다스리던 사람들과 연결됩니다. 강력한 힘을 소유한 사람들이라 해도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할 지혜가 없다면 그 힘은 그들을 지켜 주지 못합니다.
바룩서의 포로 공동체가 이런 이야기를 듣는 상황을 생각하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들은 세계를 지배하던 제국의 힘에 압도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오랜 옛날의 거인들까지 불러내어 힘의 한계를 보여 줍니다.
인간이 아무리 강해져도 자기 생명의 근원과 목적을 저절로 알게 되지는 않습니다.
하늘에 올라가거나 바다를 건너면 찾을 수 있는가
이제 시인은 질문을 두 번 던집니다.
누가 하늘로 올라가 지혜를 얻었느냐? 누가 구름 위에서 지혜를 데려왔느냐?바룩서 3:29 · 두루새김
누가 바다를 건너 지혜를 찾았느냐? 누가 질 좋은 금을 주고 지혜를 가져오겠느냐?바룩서 3:30 · 두루새김
하늘과 바다는 인간이 쉽게 넘을 수 없는 경계를 나타냅니다. 시인은 인간이 스스로 지혜를 얻으려는 시도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상상합니다.
이 질문들은 욥기 28:12–28의 지혜 탐구와 가깝습니다. 욥기에서도 지혜는 땅의 깊은 곳과 바다에서 찾을 수 없고 금으로 살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이 하늘에 있어서 누군가 올라가 가져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바다 건너에 있어서 누군가 건너가 가져와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말씀은 백성에게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바룩서는 반대 방향에서 비슷한 결론에 접근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지혜를 하늘에서 가져오거나 바다 건너에서 사 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에게 지혜가 영원히 닿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 지혜를 주신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3:31에서 시인은 일단 모든 인간적 가능성을 닫습니다.
지혜의 길을 아는 사람도 없고, 그 오솔길을 마음에 두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바룩서 3:31 · 두루새김
그렇다면 지혜는 영원히 숨겨진 채로 남아 있습니까?
32절은 짧은 「그러나」로 모든 것을 바꿉니다.
별들이 대답하는 하나님
지혜를 아는 분은 세상을 지으신 분이다
3:32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으로 소개되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은 지혜를 아시고, 그분의 깨달음으로 지혜를 찾아내셨다. 그분은 땅을 영원히 서 있도록 만드시고, 네 발 달린 짐승들로 가득 채우셨다.바룩서 3:32 · 두루새김
하나님은 세상을 관찰하는 존재 가운데 하나가 아니십니다. 세상을 지으신 분입니다. 인간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관찰하며 그 안의 질서를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세계를 세우시고 생명으로 채우신 분입니다.
욥기 28:23–27에서도 하나님만이 지혜의 길을 아시는 이유가 창조 세계에 대한 그분의 다스림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바룩서의 시인은 철학적 논증을 길게 펼치지 않습니다.
대신 창조 세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빛이 명령을 듣고 나아가다
그분께서 빛을 보내시면 빛이 나아가고, 그분께서 빛을 부르시자 빛은 떨며 순종했다.바룩서 3:33 · 두루새김
이 장면은 창세기 1:3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바룩서에서는 빛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움직이는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떨며」라는 표현까지 더해져 빛이 창조주의 권위 앞에 순종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존재하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사람의 모습에 빗댄 시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한다는 점에서, 사람이 아닌 빛이 오히려 이스라엘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저희가 여기 있습니다」
별들은 저마다 지키는 자리에서 빛나며 기뻐했다.바룩서 3:34 · 두루새김
그분께서 별들을 부르시자 별들은 「저희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별들은 자기들을 만드신 분을 위해 기뻐하며 빛났다.바룩서 3:35 · 두루새김
여기서 창조 세계는 침묵하는 배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창조 세계가 응답하는 관계 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지혜를 찾아 헤매던 사람들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그들은 지혜의 길이 어디 있는지 몰랐습니다. 반면 별들은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려집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이 기쁨과 연결된 것입니다.
바룩서 3장이 찾고 있던 지혜의 삶은 단순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소극적인 태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그분의 뜻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이분께서 우리 하나님이시다
시인은 이 장면을 보고 선언합니다.
이분께서 우리 하나님이시다. 다른 누구도 그분과 같은 분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바룩서 3:36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그들을 정복한 제국의 왕은 눈에 보이는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왕의 권력을 바라보지 않고, 빛과 별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패배가 하나님의 무능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 선언에서도 분명해집니다.
하지만 시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토록 크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밝힙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서 40:26도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들을 수대로 이끌어 내시고 각각 이름을 부르신다고 말합니다. 별 하나도 빠지지 않는 것은 그분의 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룩서에는 이사야서의 표현에 더해 특별한 장면이 나타납니다. 별들이 직접 대답합니다.
하늘에서도 찾지 못한 지혜가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찾아내어 주셨다
그분은 지식의 모든 길을 찾아내셨고, 그 지식을 그분의 종 야곱에게, 그분께서 사랑하신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바룩서 3:37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지혜를 정복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막대한 돈을 주고 산 것도 아니고, 다른 민족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스스로 발견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을 「그분의 종 야곱」, 「그분께서 사랑하신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지혜를 주신 이유가 이스라엘 자신의 위대함보다는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신명기 7:7–8의 말씀과도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시고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이미 그 지혜의 샘을 버렸다는 책망을 받았습니다(3:12).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다면, 이스라엘은 그 지혜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누가 땅 위에 나타났는가
그 뒤에 땅 위에 나타나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바룩서 3:38 · 두루새김
문제는 「나타나」와 「함께 지냈다」의 주어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첫째는 지혜가 땅 위에 나타나 사람들 가운데 머물렀다는 읽기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자신이 땅 위에 나타나 사람들 가운데 함께 지내셨다는 읽기입니다.
지혜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에 영원히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것을 주셨고, 그 지혜는 인간이 살아가는 땅 위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지혜의 나타남으로 읽는 해석은 이어지는 4:1에서 지혜가 하나님의 율법과 연결된다는 점에서도 지지를 얻습니다. 36절에서는 「이분께서 우리 하나님이시다」라고 선언하고, 37절에서도 하나님이 주어의 역할을 하십니다. 따라서 38절의 생략된 주어가 계속 하나님이라고 이해할 문법적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시고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어느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문맥상 지혜의 나타남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문법만으로 하나님의 나타남이라는 읽기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후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 구절을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 가운데 오신 사건과 연결해 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룩서 3장 자체는 예수님이라는 인물이나 특정한 성육신 사건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적 해석은 이 본문을 토대로 발전한 후대의 신학적 읽기와 구별해야 합니다.
지혜의 길을 잃어버린 백성이 다시 살아갈 길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이미 지혜를 주셨습니다. 백성은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포로살이 속에서도 다시 그 지혜를 들으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고통받고 마음이 낙심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들이 들었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들의 시선을 하늘로 이끕니다.
하늘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있습니다. 그 별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며 빛납니다. 하나님께서 그 별들을 부르십니다. 그러자 별들이 대답합니다. 「저희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별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이 지혜를 자기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하늘의 별들은 하나님이 부르시자 자기 자리를 지키며 빛났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에게도 생명을 주는 명령들을 들으라는 부름이 들려옵니다.
그들은 여전히 낯선 땅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땅 위에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룩서 3장이 포로 공동체 앞에 펼쳐 보이는 지혜의 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