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코헬렛의 머리말

모든 것이 움직이는데, 무엇이 남는가

해는 매일 뜨고 집니다. 바람은 쉬지 않고 방향을 바꾸며, 시내는 끊임없이 바다로 흘러갑니다. 세상에는 멈추어 있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움직임을 바라보던 코헬렛은 이상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토록 많은 일이 일어나는데도, 정작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이 남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삶에 지친 사람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전도서 1장에서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예루살렘을 다스렸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왕입니다. 그는 수고할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수많은 일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고, 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혜를 많이 쌓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얻은 지식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 섭니다.

전도서 1장의 중심 질문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룰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 모든 수고에서 무엇을 확실히 자기 것으로 남길 수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을 따라가면서 코헬렛의 시선은 세 번 움직입니다. 먼저 인간의 수고를 묻고, 이어 자연과 역사의 끝없는 움직임을 관찰하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지혜를 시험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던 질문이 결국 질문하는 사람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61장 본문 읽기 →

덧없고 덧없다 — 붙잡을 수 없는 삶

전도서 1:1–3 본문 →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이며 예루살렘의 왕인 코헬렛의 말입니다」라는 소개로 시작합니다.

코헬렛(⁨קֹהֶלֶת⁩)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에서 모임이나 회중을 뜻하는 말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모으는 이, 또는 모인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이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정확히 어떤 직책을 뜻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다윗의 아들이며 예루살렘의 왕으로 소개된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솔로몬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말하는 사람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실제 솔로몬의 경험을 전하는 말로 읽을 수도 있고, 솔로몬을 떠올리게 하는 왕의 목소리를 빌려 인간의 삶을 탐구하는 문학적 구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12절의 과거형 표현과 16절의 앞서 다스린 이들에 관한 언급은 두 번째 해석을 검토하게 하지만, 이 장만으로 저자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이 왕의 정체를 결정하는 일보다 그에게 어떤 역할이 주어졌는가입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쉽게 얻을 수 없는 권력과 지혜를 지닌 인물로 등장합니다. 인간이 가진 수단으로 삶의 문제를 풀 수 있다면 그에게는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 주어져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물에게서 나오는 첫 선언은 의외입니다.

코헬렛이 말했습니다. 「덧없고 덧없다. 덧없고 덧없다. 모든 것이 덧없다.」전도서 1:2 · 두루새김

두루새김이 「덧없고 덧없다」로 옮긴 자리에서, 히브리어 헤벨(⁨הֶבֶל⁩)은 본래 입김이나 숨결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원문에서는 입김을 뜻하는 말을 강조를 위해 거듭 사용하여, 입김의 성격을 한껏 드러냅니다.

입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차가운 아침에 입을 열면 하얗게 나타나는 숨은 실제로 눈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손으로 붙잡아 오래 간직할 수는 없습니다. 보이는 순간에도 이미 흩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도 그렇다는 것이 코헬렛의 관찰입니다.

사람이 경험하는 기쁨은 실제 기쁨이고, 이루어 낸 성취도 실제 성취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까지나 같은 모습으로 남으리라고 기대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시간은 그것들을 변화시키고, 사람의 능력은 그 변화를 막지 못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덧없다」를 곧바로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로 이해하면 원문의 비유가 가진 중요한 면을 잃습니다. 코헬렛은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삶에는 아무런 좋은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실제로 있는 것을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간직할 수 없다는 역설을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입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에게 무엇이 남습니까? 3절이 바로 그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온갖 수고를 하는데, 그 모든 수고로 남는 이익이 무엇입니까?전도서 1:3 · 두루새김

여기서 「남는 이익」에 해당하는 원어(⁨יִתְרוֹן⁩)는 이익이나 남는 몫, 수고의 결과로 얻는 유익을 가리킵니다. 이 질문에는 장부를 계산하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렇게 평생의 수고를 모두 계산했을 때, 끝내 자기 손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코헬렛은 수고로 얻을 수 있는 일시적인 보상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묻는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수고가 계속되는 동안 얻은 것 가운데, 수고가 끝난 뒤에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해 아래」라는 표현은 인간이 살아가며 보고 경험하는 세계를 가리키는 전도서의 특징적인 관찰 범위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시는 세계를 가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13절에서 코헬렛은 하나님을 분명히 언급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인간의 눈에 보이는 삶에서 출발하여, 그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성취와 한계를 탐구합니다.

이제 코헬렛은 자신의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고 주변 세상으로 눈을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었으며 지혜로 이름난 왕이었습니다(열왕기상 3:12; 4:29–34). 이후의 신약에서 로마서 8:20–23은 피조물이 허무함 아래 놓인 현실과 그 회복을 향한 소망을 함께 말합니다. 칠십인역 전도서 1:2와 로마서 8:20에는 허무함을 나타내는 같은 그리스어 계열의 표현이 사용되지만, 로마서가 전도서 1장을 직접 인용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두 본문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한계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되며, 로마서는 그 문제를 새로운 구원의 전망 안에 놓습니다. 그러나 전도서 1장 자체는 아직 그 전망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쉬지 않고 움직이지만 제자리로 돌아오는 세계

전도서 1:4–7 본문 →

한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 있습니다.전도서 1:4 · 두루새김

첫 장면에서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땅입니다.

한 세대가 태어나 자라고 세상을 채우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그러나 땅은 그 모든 사람을 맞이하고 떠나보내면서도 계속 그 자리에 있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세대는 세상의 중심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땅이 오래 이어지는 것과 비교하면 한 세대는 잠시 머무는 방문객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부터는 움직이지 않는 듯했던 세상도 끊임없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해는 떴다가 집니다. 그리고 숨 가쁘게 제자리로 돌아가 그곳에서 다시 뜹니다.전도서 1:5 · 두루새김

「숨 가쁘게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표현은 해를 살아 있는 존재처럼 묘사합니다. 해가 지친 채 다음 출발을 위해 달려가는 듯한 광경입니다. 해마저 수고하는 존재처럼 그려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매일 일터로 나가고 하루의 일을 마친 뒤 돌아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같은 일을 시작합니다. 해의 움직임도 그렇게 보입니다. 온종일 달려갔지만 결국 다시 출발할 자리로 돌아갑니다.

바람은 남쪽으로 불다가 북쪽으로 돌아갑니다. 돌고 돌며 불다가, 돌던 길로 다시 돌아옵니다.전도서 1:6 · 두루새김

「돌고 돌며」, 「돌던 길로 다시 돌아옵니다」라는 표현들이 바람의 움직임을 그대로 흉내 내는 듯합니다. 해에는 적어도 일정한 출발점과 도착점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람은 방향조차 끊임없이 바꿉니다. 그 움직임은 활발하지만 뚜렷한 목적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모든 시내가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가득 차지 않습니다. 시내는 늘 흐르던 그곳으로 거듭 흘러갑니다.전도서 1:7 · 두루새김

오랜 세월 물이 흘러 들어가지만, 바다는 그 흐름으로 끝내 채워지는 장소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내는 다시 흐릅니다. 코헬렛이 주목하는 것은 자연이 움직이는 원리보다 반복되는 흐름과 채워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해는 숨 가쁘게 움직이지만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바람은 움직이지만 계속 맴돕니다. 시내는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바다는 가득 차지 않습니다.

움직임이 많다는 사실이 곧 무언가가 완성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발견은 단순히 자연이 지루하게 반복된다는 감상이 아닙니다. 3절에서 시작된 인간의 수고에 대한 질문을 자연 전체로 넓히는 장치입니다. 자연에는 계속되는 활동이 있고, 사람에게도 계속되는 활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활동이 이어진다는 사실만으로는 무엇이 끝내 남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땅은 영원히 그대로 있습니다」라는 말을 땅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우주에 관한 선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표현은 세대의 짧음과 땅의 오래 지속됨을 대비합니다. 5절의 히브리어 동사는 숨을 몰아쉬거나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며 서두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7절에서 물을 어디로 되돌려 보내는지,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본문에 설명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구절을 현대적인 물의 순환에 관한 과학적 설명으로 볼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한편 창세기 1:14–18에서 해와 달의 역할은 하나님이 창조 세계에 질서와 시간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시편 104:19–23에서도 자연의 규칙적인 움직임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드러냅니다. 전도서는 그 질서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같은 세계를 인간의 수고라는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창세기가 세계의 질서를 보여 준다면, 전도서는 그 질서 속에 사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 줍니다.

채워지지 않는 눈과 귀, 그리고 사라지는 기억

전도서 1:8–11 본문 →

자연을 바라보던 시선은 이제 사람에게 돌아옵니다.

모든 일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고단합니다. 눈은 보고 또 보아도 만족하지 않고, 귀는 듣고 또 들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전도서 1:8 · 두루새김

이 구절의 첫 표현은 해석이 갈리는 자리입니다. 히브리어 드바림(⁨דָּבָר⁩)은 문맥에 따라 「일들」이나 「말들」을 뜻할 수 있습니다. 「일들」로 읽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이 지칠 만큼 끊임없다는 뜻이 됩니다. 「말들」로 읽으면 사람이 아무리 말해도 세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 강조되며, 칠십인역은 말에 가까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어느 쪽이든 이어지는 문장들과 연결됩니다. 말로 다 할 수 없고, 눈은 만족하지 않으며, 귀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바다가 가득 차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사람의 귀가 채워지지 않습니다.

자연의 시내들이 바다로 흘러가듯, 세상의 수많은 광경과 소식도 인간의 감각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사람은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경험이 쌓여도 그것으로 모든 갈망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코헬렛은 인간의 감각이 쓸모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감각이 그 활동을 끝낼 만큼 충분히 채워지는 순간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후반부에서 지혜를 탐구하는 코헬렛 자신의 경험을 미리 비추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다음 코헬렛은 인간이 흔히 품는 또 하나의 기대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전에 있던 일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고, 전에 했던 일이 앞으로도 되풀이될 것입니다. 해 아래에는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전도서 1:9 · 두루새김

이 말은 인간의 역사에서 새로운 물건이나 제도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읽으면 본문이 실제보다 지나치게 넓은 주장을 하는 셈입니다. 10절에서 그는 실제로 사람들이 어떤 것을 가리키며 「봐, 이것은 새것이야!」 하고 말하는 상황을 인정합니다. 문제는 그 새로움의 깊이입니다.

겉으로는 처음 나타난 것처럼 보여도, 인간의 행동과 욕망, 성공과 실패에는 과거의 일이 다시 나타나는 측면이 있습니다. 새로운 성취를 얻어도 만족을 향한 갈망은 반복되고, 이전 세대가 겪었던 문제를 다음 세대가 다른 모습으로 겪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9절은 모든 역사적 차이가 사라진다는 말보다는, 인간이 새로운 사건을 통해 자신의 근본적인 한계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하기 어렵다는 관찰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11절에 이르면 이 말은 더욱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앞서 살던 사람들은 기억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올 사람들도 그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전도서 1:11 · 두루새김

여기서도 원문의 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앞서 살던 사람들」과 「앞으로 올 사람들」로 옮겼지만, 앞서 일어난 일과 뒤에 일어날 일을 뜻한다고 볼 여지도 있습니다. 사람들로 읽으면 4절의 세대 이야기가 완성됩니다. 일들로 읽으면 9–10절의 새로움에 관한 논의가 직접 이어집니다. 두 읽기는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갖지만, 공통으로 기억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사람은 자신이 이루어 낸 일이 오래 남기를 바랍니다. 설령 재산이나 지위를 영원히 보존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이름이나 업적은 후대에 기억되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기억마저 영원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시대에 크게 주목받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를 알던 세대가 사라지고 다음 세대가 등장하면 기억은 희미해집니다. 그다음 세대에는 더 많은 것이 잊힙니다.

재산을 남길 수 없더라도 이름은 남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코헬렛은 그 이름조차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고 관찰합니다.

코헬렛은 이제 질문을 다른 사람이나 자연에만 맡겨 두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조사 대상으로 삼습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을 일들로 읽으면, 우리가 어떤 것을 완전히 새로운 일로 여기는 까닭은 이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시편 90:3–6도 인간 세대가 빠르게 지나간다는 사실을 풀처럼 자라다가 시드는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다만 시편은 그 짧은 생명을 하나님의 영원하심 앞에 놓고 바라보는 반면, 전도서 1장은 세대의 잊힘이 인간의 수고에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집중해서 살핍니다.

왕의 실험 — 지혜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가

전도서 1:12–15 본문 →

나 코헬렛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었습니다.전도서 1:12 · 두루새김

12절부터 말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앞부분에서는 코헬렛에 관한 소개와 세상 전체를 향한 관찰이 이어졌습니다. 이제 「나 코헬렛」이라는 일인칭 목소리가 앞에 나섭니다. 독자는 세상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을 검토한 한 사람의 경험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가 선택한 첫 번째 탐구 수단은 지혜입니다.

나는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깊이 살펴보는 데 마음을 쏟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맡겨 씨름하게 하신 이 일은 괴로운 일입니다.전도서 1:13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지혜는 단순히 지식을 많이 쌓는 능력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잠언에서 지혜는 삶의 질서를 알아보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능력과 연결됩니다. 코헬렛은 모든 일을 깊이 살펴보는 데 「마음을 쏟았습니다」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마음」은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뜻을 정하는 인간 내면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탐구를 시작하면서 그는 뜻밖의 말을 덧붙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직접 언급되시는 대목에서 코헬렛은 하나님을 모든 질문의 답을 설명해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감당하는 어려운 일을 맡기신 분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 왜 괴로운 일입니까?

본문은 하나님이 인간을 괴롭히시는 일을 즐기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코헬렛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려 애쓰는 경험 자체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놓고 있습니다. 인간은 알고 싶어 하며, 실제로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큼 충분하지 않습니다.

코헬렛은 이처럼 탐구하도록 맡겨졌으면서도 끝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을 「괴로운 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한 절을 넘어 하나님의 뜻 전체를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코헬렛은 하나님이 왜 그러한 한계를 허락하셨는지 완전하게 설명하지 않고, 자신이 경험한 한계를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나는 해 아래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보았습니다. 보니, 모든 것이 덧없고 바람을 뒤쫓는 일입니다.전도서 1:14 · 두루새김

앞에서 등장한 입김의 비유가 되풀이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새로운 모습이 덧붙습니다. 「바람을 뒤쫓는 일」입니다.

바람은 실제로 붑니다. 나뭇가지를 흔들고, 먼지를 날리고, 사람의 얼굴에 닿습니다. 그러나 바람을 향해 달려간다고 그것을 손에 붙잡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붙잡으려는 노력과 붙잡을 수 없는 대상이 어긋난다는 데 있습니다.

15절은 그가 부딪힌 한계를 짧은 격언으로 표현합니다.

굽은 것은 곧게 펼 수 없고, 없는 것은 셀 수 없습니다.전도서 1:15 · 두루새김

이 문장을 세상에서 굽은 것을 결코 바로잡을 수 없으며 부족한 것은 영원히 채울 수 없다는 절대적인 선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코헬렛이 말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닿는 범위 밖에 있는 현실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고, 무엇이 부족한지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린다는 사실만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 비유는 특히 날카롭습니다.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셈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 코헬렛은 인간의 수고에서 남는 이익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이제 그는 계산하려 해도 셀 수 없는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지혜는 현실을 더 정확하게 보여 줄 수 있지만, 현실을 언제나 바꿀 수 있는 힘을 주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괴로운 일」은 창세기 3:17–19의 수고에 관한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사람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수고해야 하며,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 수고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모든 지적 탐구가 타락의 결과라거나 하나님이 지혜를 싫어하신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이 태도는 구약의 다른 지혜 본문과 나란히 놓고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잠언 1:7은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욥기 28장은 인간이 땅속 깊은 곳에서 귀한 광물을 찾아내는 능력을 묘사하지만, 지혜가 어디에 있는지 묻고 나서는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신다고 말합니다(욥기 28:20–28). 잠언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길을 가르친다면, 욥기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지혜가 어디에 있는지 묻고, 전도서는 지혜를 최대한 사용했음에도 끝내 남는 한계를 살핍니다. 세 책은 지혜를 똑같은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지혜가 늘어날수록 고통도 늘어나는 까닭

전도서 1:16–18 본문 →

여기서 코헬렛은 자신의 탐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을 다스린 누구보다도 지혜를 더 많이 쌓았다. 나는 많은 지혜와 지식을 몸소 익혔다.」전도서 1:16 · 두루새김

이러한 자기소개는 솔로몬의 지혜를 떠올리게 합니다. 열왕기상 4:29–34에는 솔로몬이 폭넓은 지혜를 지녔으며 많은 주제를 다루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지혜와 지식을 단순히 소유했다고 말하지 않고, 「몸소 익혔다」고 표현합니다. 원문에서는 자신의 마음이 그것들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코헬렛에게 지혜는 머릿속에 쌓아 두는 정보만이 아닙니다. 관찰하고 비교하고 판단하면서 실제 삶을 이해하려는 활동입니다.

나는 지혜가 무엇인지, 미친 짓과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마음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바람을 뒤쫓는 일임을 알았습니다.전도서 1:17 · 두루새김

왜 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음을 연구했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그가 직접 어리석은 행동을 모두 실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혜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어리석음이 무엇인지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 왜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지, 왜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지 알아야 지혜의 실제 역할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탐구 역시 충분한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코헬렛은 지혜와 어리석음이 완전히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나은 점도 인정합니다(2:13–14).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낫다고 해도, 지혜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더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이 모든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혜가 많아질수록 괴로움도 많아지고, 아는 것이 늘어날수록 고통도 커지기 때문입니다.전도서 1:18 · 두루새김

일반적으로 사람은 지식을 얻으면 불확실한 것이 줄어들고, 지혜로워지면 고통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지혜가 많아질수록 괴로움도 많아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도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늘어나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문제들이 드러납니다. 어떤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결정을 바꿀 힘이 없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불균형과 모순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모두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코헬렛의 15절과 18절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만납니다. 굽은 것을 알아보는 눈은 더 밝아졌지만, 그것을 곧게 펼 능력이 그만큼 늘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늘어나는 일은 때때로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능력의 경계가 어디인지 발견하는 과정이 됩니다.

이 문장은 지혜를 얻지 말라는 권고가 아닙니다. 코헬렛 자신이 지혜를 진지하게 탐구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그는 무지한 상태가 더 행복하다고 단정하지도 않습니다.

지혜는 귀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귀하다는 사실과 지혜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맺음말 — 다시 떠오르는 해

전도서 1:1–18 본문 →

전도서 1장은 왕의 지혜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왕의 고통으로 끝냅니다. 그는 더 많이 알고자 했고, 실제로 많은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지혜가 삶의 모든 굽은 것을 바로잡아 주지는 못했습니다. 처음에 코헬렛이 물은 「그 모든 수고로 남는 이익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가 흔드는 것은 수고와 지혜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삶을 완전히 붙잡을 수 있다는 기대입니다. 코헬렛은 수고를 멈추라고 하지 않으며, 지혜를 버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 장에는 아직 한계 안에서 어떤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에 관한 충분한 답이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이어질 탐구의 과제입니다.

어떤 것이 영원히 남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것이 지금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판단은 같지 않습니다.

해는 오늘도 떠오르고 저녁이면 집니다. 바람은 남쪽으로 불다가 북쪽으로 돌아가며, 시내는 쉬지 않고 바다로 흐릅니다.

그 사이 사람은 하루를 살아갑니다. 보고, 듣고, 배우고, 일하고, 무엇인가를 남기려 합니다. 그러나 하루를 마친 해가 다음 날 다시 떠오를 자리로 숨 가쁘게 돌아가듯, 사람도 수고를 마치고 나면 또 다른 수고가 기다리는 자리로 돌아옵니다.

세상은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이 사람에게 무엇을 남기는지는 여전히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해는 다시 떠오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