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즐거움과 수고의 실험
모든 것을 가졌지만 자기 것으로 남길 수 없었던 왕
코헬렛은 왕궁과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포도밭을 가꾸고, 온갖 과일나무를 심고, 못을 만들어 숲에 물을 댔습니다. 은과 금을 모으고, 수많은 가축과 종들을 거느렸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즐거움을 누렸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모든 일을 돌아본 뒤 삶을 미워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즐거웠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수고에서 기쁨을 얻었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기쁨과 성취를 확인한 다음, 모든 것이 덧없다고 선언합니다.
코헬렛은 즐거움이 없어서 절망한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실제로 누리고도 그것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앞 장에서 그는 지혜로 세상을 탐구했지만 인간의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이제는 다른 길을 시험합니다. 즐거움을 누리고, 거대한 일을 이루고, 누구보다 많이 소유하면 어떨까요? 그다음에는 지혜로운 삶 자체가 어리석은 삶보다 얼마나 나은지 다시 따져 봅니다.
이 실험은 예상보다 깊은 곳까지 나아갑니다. 즐거움의 한계를 확인한 왕은 죽음 앞에서 지혜의 한계를 발견하고, 마침내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사실과 마주합니다.
그러나 장의 마지막에서 뜻밖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왕은 다시 먹고 마시는 기쁨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스스로 얻어 내려고 했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같은 즐거움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즐거움도 시험해 보았다 — 기쁨은 무엇을 이루는가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자, 즐거움으로 나 자신을 시험해 보자. 좋은 것을 누려 보자.」 하지만 이것도 덧없었습니다.전도서 2:1 · 두루새김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단순히 충동에 따라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즐거움으로 자신을 시험하겠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 본 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그의 목적은 3절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나는 지혜를 길잡이로 삼으면서도, 포도주로 몸을 즐겁게 하고 어리석은 일에도 손을 대 보며 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사람이 하늘 아래에서 한평생 무엇을 하며 사는 것이 좋은지 알아낼 때까지 그렇게 살펴보았습니다.전도서 2:3 · 두루새김
그가 찾는 것은 단순히 기분 좋은 경험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한평생 무엇을 하며 사는 것이 좋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코헬렛은 즐거움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인간에게 참으로 좋은 삶을 가져다주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여기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가지 행동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는 포도주와 즐거움을 추구하면서도 「지혜를 길잡이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즉 즐거움에 완전히 휩쓸려 판단력을 잃어버리려 했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지혜를 유지한 채 즐거움과 어리석음의 영역까지 탐색하려 했습니다.
2절에서는 웃음과 즐거움을 구별하여 평가합니다.
웃음을 두고는 「미친 짓이다」 하고 말했고, 즐거움을 두고는 「이것이 무엇을 이루는가?」 하고 말했습니다.전도서 2:2 · 두루새김
웃음을 「미친 짓」이라고 부르는 말은 모든 웃음이 잘못되었다는 도덕적 판단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 장 전체에서 코헬렛은 웃음과 즐거움을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삼을 수 있는지 시험하고 있습니다.
웃음은 순간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잠시 잊게 하거나 사람을 즐겁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삶의 문제 자체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즐거움을 향한 그의 질문은 「이것이 무엇을 이루는가?」입니다.
이것은 즐거움이 아무 효과도 없다는 말과 다릅니다. 즐거움은 분명히 기쁨을 줍니다. 코헬렛은 그 기쁨이 인간의 수고와 삶에 어떤 궁극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묻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은 삶인지 시험하기 위해 왕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무엇일까요? 그의 지위와 재산입니다. 코헬렛은 이제 자신의 삶 전체를 거대한 실험장으로 만듭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의 히브리어 표현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포도주를 즐겼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문맥상 분명한 것은 그가 몸의 즐거움과 지적인 탐구를 함께 진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왕이 만든 작은 세계 — 모든 것을 나를 위해
4절부터 코헬렛의 말은 거대한 건축 기록처럼 펼쳐집니다.
나는 큰일들을 벌였습니다. 나를 위해 집들을 짓고 포도밭들을 일구었습니다.전도서 2:4 · 두루새김
왕은 자연의 일부를 자신의 뜻에 따라 새롭게 만듭니다. 땅을 선택하고, 건물을 세우고, 나무를 심고, 물길을 마련합니다. 황량한 곳을 아름답고 풍요로운 공간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정원과 동산을 만들고, 그 안에 온갖 과일나무를 심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숲에 물을 대려고 나를 위해 못들을 만들었습니다.전도서 2:5–6 · 두루새김
이 풍경은 창세기 2:8–10의 에덴동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동산을 마련하시고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을 자라게 하십니다. 강은 동산을 적시기 위해 흘러갑니다. 전도서에서는 왕이 직접 정원을 만들고 나무를 심으며 물을 공급합니다.
창세기에서 사람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동산에 들어가 그것을 가꾸고 지키도록 부름받습니다(창세기 2:15). 전도서에서 왕은 자신의 능력으로 정원과 동산을 만듭니다.
그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정원을 가꾸고 물을 공급하는 것은 창조 세계를 돌보는 활동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전도서에서는 이 모든 것이 왕의 행복을 위한 실험의 일부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
왕은 자신을 위해 집을 짓고, 포도밭을 일구고, 정원을 가꾸고, 못을 마련합니다. 7–8절에서도 재산과 즐거움을 누릴 수단들을 계속해서 모으며, 8절에는 다시 「나를 위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만들어 그 중심에 자신을 세웁니다.
나는 남자 종들과 여자 종들을 샀고, 내 집에서 태어난 종들도 거느렸습니다. 소와 양 떼도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누구보다 많이 가졌습니다.전도서 2:7 · 두루새김
고대 왕실에서 많은 종과 가축을 거느리는 것은 경제력과 통치 규모를 보여 주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특히 종들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왕실의 생산과 운영을 뒷받침하는 노동력이었습니다. 왕의 즐거움이 오직 자기 혼자만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노동과 사회적 권력에 기대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8절에서는 은과 금, 왕들과 여러 지방의 보물,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이 등장합니다. 그가 모은 것들은 경제적인 부뿐 아니라 문화적인 즐거움까지 포함합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시다와 시도트」는 의미를 확정하기 어려운 히브리어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목록 전체가 보여 주는 왕의 삶은 분명합니다. 그에게는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는 자원과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수단이 있었습니다.
나는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누구보다도 더 크게 되고 더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도 내 지혜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전도서 2:9 · 두루새김
그는 부와 즐거움을 얻었으며, 동시에 지혜도 유지했다고 말합니다. 지혜를 잃어버린 채 무분별하게 살아서 실패했다는 설명이 들어설 자리가 줄어듭니다.
내 눈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얻었고, 내 마음이 원하는 즐거움은 하나도 막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이 내가 애써 한 모든 일에서 기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이 모든 수고에서 얻은 내 몫이었습니다.전도서 2:10 · 두루새김
그가 누린 즐거움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성취는 실제 성취였고, 그로부터 얻은 만족도 실제 만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기쁨을 「내 몫」이라고 부릅니다.
「몫」은 나누어 받은 부분, 곧 어떤 전체 가운데 자기에게 돌아오는 부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바로 이어지는 11절과 대비를 이룹니다.
그러나 내 손으로 이루어 놓은 모든 일과 그 일을 하려고 애쓴 수고를 돌아보니, 모든 것이 덧없고 바람을 뒤쫓는 일이었습니다. 해 아래에는 남는 이익이 없었습니다.전도서 2:11 · 두루새김
10절에서는 수고에서 얻은 「몫」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1절에서는 「남는 이익」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 몫」은 수고하는 동안 그에게 실제로 돌아온 기쁨입니다. 반면 「남는 이익」은 모든 수고를 계산한 뒤에도 확실하게 남길 수 있는 것을 묻는 표현입니다.
코헬렛에게는 수고에서 얻은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영원히 남는 이익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전도서는 모든 기쁨을 가짜라고 폭로하는 책이 아닙니다. 기쁨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 기쁨이 감당할 수 없는 기대를 부여받았을 때 드러나는 한계를 탐구합니다.
왕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거의 모두 얻었습니다. 하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을 많이 얻는 일과 그것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보존하는 일은 다릅니다. 그는 자기 손으로 만든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발견합니다.
조금 더 깊이
전도서 2장과 창세기 2장 사이에 뚜렷한 인용 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원과 나무와 물이라는 공통된 이미지 때문에 두 장면을 나란히 읽을 수 있습니다. 7절의 종들에 대해 본문은 그들의 생활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그들의 처지를 직접 평가하지 않으므로, 이 왕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대우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8절의 「시다와 시도트」는 왕실의 여성들, 후궁, 또는 다른 종류의 사치품이나 즐거움을 누릴 대상을 뜻한다는 해석들이 있지만,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묘사는 열왕기상 7:1–12에 나오는 솔로몬의 궁전 건축과 10:14–29에 나오는 막대한 재물과 왕실의 풍요를 떠올리게 합니다. 전도서의 왕은 그러한 왕권의 이상적인 풍요를 실험에 활용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죽는다
코헬렛은 다시 지혜와 어리석음을 살펴봅니다.
나는 이제 지혜와 미친 짓과 어리석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왕의 뒤에 오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사람들이 해 놓은 일뿐입니다.전도서 2:12 · 두루새김
12절 후반은 문장 구조가 어려운 구절입니다. 두루새김은 왕의 뒤에 오는 사람이 이미 이루어진 일 이상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으로 읽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왕은 자신의 경험이 다른 사람의 경험도 대표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셈입니다. 다만 히브리어 원문의 후반부는 누가 무엇을 이미 행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지혜와 어리석음의 비교는 분명합니다.
나는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더 이롭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빛이 어둠보다 더 이로운 것과 같습니다.전도서 2:13 · 두루새김
코헬렛은 지혜와 어리석음 사이의 차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혜에는 분명한 유익이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덧없다고 말하는 코헬렛도 모든 선택이 똑같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앞을 보며 걷고, 어리석은 사람은 어둠 속을 걷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같은 일이 닥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전도서 2:14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의 눈이 머리에 있다고 표현합니다. 두루새김의 「앞을 보며 걷고」는 지혜로운 사람이 자기 앞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고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을 풀어 줍니다.
어둠 속을 걷는 사람은 발을 헛디디기 쉽습니다. 앞에 장애물이 있는지 알기 어렵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러한 위험을 더 잘 분별합니다.
그런데 14절 후반에서 갑자기 다른 사실이 등장합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은 살아가는 방식에서 다릅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모든 결과에까지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15–16절은 그들에게 공통으로 닥치는 일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죽음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닥치는 일이 나에게도 닥칠 텐데, 그렇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더 지혜로워졌는가?」 그러고는 이것도 덧없다고 생각했습니다.전도서 2:15 · 두루새김
이 질문은 지혜를 얻는 과정에서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 던진다는 점에서 더욱 날카롭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으로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죽음이라는 공통의 운명을 없애 주지는 못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도 영원히 기억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모두 잊히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과 똑같이 죽는단 말입니까!전도서 2:16 · 두루새김
여기에서 코헬렛이 느끼는 고통은 단순히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닙니다. 그는 지혜롭게 살아온 노력과 그 노력의 결과가 죽음 앞에서 어떻게 평가되는지 묻습니다.
지혜가 빛과 같다면, 왜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과 같은 끝을 맞습니까?
코헬렛은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혜가 유익하다는 자신의 판단을 취소하지 않으면서도, 지혜의 유익이 죽음이라는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지혜는 살아가는 길을 밝혀 줄 수 있지만, 그 길 자체를 끝없이 연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나는 삶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덧없고 바람을 뒤쫓는 일이어서, 해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이 내게 괴로웠기 때문입니다.전도서 2:17 · 두루새김
「삶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은 그의 괴로움이 얼마나 깊었는지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말만으로 코헬렛이 생명을 끝내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삶의 조건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괴로웠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특별히 괴로워하는 까닭은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가 완전히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차이가 실제로 존재하는데도 죽음과 잊힘이라는 공통의 한계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죽기 전에 자신이 이룬 것을 후대에 남기는 일은 어떨까요? 왕이라면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것을 남길 수 있습니다. 궁전과 정원, 재산과 제도, 자신이 이룬 업적을 다음 세대에 넘겨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가능성을 생각하는 순간, 코헬렛은 또 다른 문제에 부딪힙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에서 칠십인역에는 「왕」 대신 「조언」 또는 「계획」과 관계되는 표현이 나타나며, 문장 전체를 왕의 후계자에 대한 질문과 다르게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확정적인 왕위 계승 이야기로만 제한하기는 어렵습니다. 16절은 시편 49:10의 관찰과도 연결됩니다. 그 시편에서도 지혜 있는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함께 죽고 자기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남겨 두는 현실이 등장합니다.
모든 것이 내 것이었지만, 결국 다른 사람의 것이 된다
나는 해 아래에서 수고하여 이룬 모든 것이 미워졌습니다. 그것을 내 뒤에 올 사람에게 남겨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전도서 2:18 · 두루새김
코헬렛은 자신을 위해 집을 짓고 포도밭을 일구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정원을 가꾸고 재물을 모았습니다. 모든 일을 자기 뜻에 따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남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토록 많은 일을 「나를 위해」 행했지만, 그 결과를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나」는 없습니다.
왕은 자신이 이룬 것을 지켜 줄 후계자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계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 사람이 지혜로울지 어리석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내가 해 아래에서 지혜를 써 가며 애써 이룬 모든 것이 그 사람 손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도 덧없습니다.전도서 2:19 · 두루새김
자신이 지혜롭게 쌓아 올린 것을 후계자가 잘 관리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어리석은 판단으로 망가뜨릴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이 세운 것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코헬렛의 절망은 죽음에 관한 생각을 넘어 자기 뜻대로 다스릴 권한을 잃는 데까지 확대됩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떠난 뒤에 그 재산과 성취가 어떻게 될지는 결정할 수 없습니다.
왕권이나 재산은 물려줄 수 있지만 지혜로운 판단 자체를 강제로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21절에서는 문제를 더욱 넓혀 일반적인 인간의 노동으로 옮겨 갑니다.
어떤 사람은 지혜와 지식과 솜씨를 다해 일하고도, 그 일을 위해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기가 얻은 몫을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덧없고 큰 불행입니다.전도서 2:21 · 두루새김
이제 왕의 후계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오랜 시간 기술을 익히고, 지식을 쌓고, 정성을 다해 무엇인가를 만듭니다. 그의 성취에는 다른 사람이 쉽게 대신할 수 없는 노력과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그것을 만드는 데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솜씨」는 앞에 등장한 지혜와 지식을 실제 작업에서 발휘하는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코헬렛은 단순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지혜와 전문성을 발휘해 훌륭한 결과를 이루는 사람까지 염두에 둡니다. 그럼에도 그 결과가 누구에게 돌아갈지는 반드시 수고한 사람의 능력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코헬렛은 그것을 단순히 아쉽다고 하지 않습니다. 「큰 불행」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시선에서 보면 수고한 사람과 그 결과를 누리는 사람이 분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쏟아 얻은 것이 정작 그 사람의 통제 밖으로 넘어갑니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그토록 애써 일하며 마음을 쏟아도, 무엇이 남겠습니까?전도서 2:22 · 두루새김
처음에는 인간의 수고에서 무엇이 남는지 물었습니다. 지금은 애써 일하는 것에 「마음을 쏟아도」라는 말까지 더해집니다.
사람은 몸만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도 계속 일을 합니다. 더 나은 결과를 얻으려 계획하고, 실패할 가능성을 걱정하며,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잃을까 두려워합니다. 그 수고는 하루의 노동이 끝났다고 함께 끝나지 않습니다.
사는 내내 고통을 겪고, 하는 일마다 괴로움이 따릅니다. 밤에도 마음이 쉬지 못합니다. 이것도 덧없습니다.전도서 2:23 · 두루새김
이 장면은 앞에서 등장한 왕궁과 정원보다 훨씬 작고 개인적입니다.
하루가 끝났습니다. 사람은 누워서 잠을 청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깨어 있습니다.
4–8절에서 왕은 수많은 일을 자기 뜻대로 움직였습니다. 집을 세우고, 나무를 심고, 물을 공급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신의 마음조차 쉬게 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통제하려는 노력은 그에게 쉼을 보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모든 노동을 그만두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수고의 결과를 전부 확보하려 하면서도 자신의 미래를 끝까지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제까지의 흐름을 보면 코헬렛이 다시 즐거움에 관해 말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24절에서 그는 다시 먹고 마시는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이번에는 시작점이 다릅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장면은 솔로몬 이후의 왕국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열왕기상 12장에서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원로들의 조언을 버리고 젊은 사람들의 조언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북쪽 지파들이 다윗 왕조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왕국은 분열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전도서 2장의 직접적인 집필 배경이라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왕이 남긴 큰 성취가 후계자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성경 안의 사례로 읽을 수 있습니다. 23절의 모습은 시편 127:1–2와도 연결됩니다. 그 시편은 사람이 집을 세우고 성읍을 지키려고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의 일하심과 분리된 수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또한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빵을 먹는 사람과 하나님이 주시는 잠을 대비합니다.
빼앗길 수 없는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기쁨
사람에게는 먹고 마시며 자기 수고에서 좋은 것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나는 이것도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것임을 보았습니다.전도서 2:24 · 두루새김
그는 이미 즐거움을 시험했습니다. 포도주를 즐기고,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음악을 듣고, 원하는 것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을 돌아보고 덧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제 다시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말합니까?
여기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즐거움의 종류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1–11절의 왕은 즐거움을 자신의 능력으로 얻으려 했습니다. 원하는 것을 제한하지 않고, 더 많은 자원을 모으고, 더 큰 일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24절의 코헬렛은 먹고 마시며 자기 수고에서 좋은 것을 누리는 일조차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재산을 가질 수 있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기쁘게 누리는 능력까지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24절에서 말하는 기쁨은 반드시 왕궁의 사치스러운 잔치를 뜻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은 일상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입니다. 자신이 수고한 가운데 좋은 것을 누리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음식과 쉼이 보장되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인간의 실제 노동 조건이 언제나 공정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즐거움에 관한 두 가지 해석
24절의 첫 문장은 원문상 해석이 갈리는 자리입니다. 두루새김은 「먹고 마시며 자기 수고에서 좋은 것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옮겼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문장에는 「~보다」에 해당하는 비교 표현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좋은 일도 그 사람 자신의 능력 안에 있지 않다」는 방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읽기는 현재의 삶에서 좋은 것을 누리는 일이 가장 합당한 몫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두 번째 읽기는 그 기쁨을 누릴 능력조차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두 해석은 문장의 초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마지막의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것」이라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어느 쪽을 따르든 이 구절을 무조건 많이 먹고 마시라는 명령이나, 삶의 모든 문제를 일시적인 즐거움으로 잊으라는 권고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앞부분의 왕은 이미 그러한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25절에서도 해석상 어려움이 등장합니다.
나 말고 누가 먹을 수 있고, 누가 즐길 수 있겠습니까?전도서 2:25 · 두루새김
히브리어 본문의 「나 말고」를 유지하면 왕 자신의 경험을, 칠십인역이 반영하는 「그분 없이는」으로 읽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강조합니다. 이 장의 원문 증거만으로 두 읽기 가운데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26절에서 코헬렛은 기쁨의 문제를 분명히 하나님의 행동과 연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좋게 여기시는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십니다. 그러나 죄짓는 사람에게는 모으고 쌓는 일을 맡겨,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사람에게 넘겨주게 하십니다. 이것도 덧없고 바람을 뒤쫓는 일입니다.전도서 2:26 · 두루새김
앞에서 코헬렛은 지혜와 지식을 얻으려고 애썼습니다. 실제로 풍부한 지혜와 지식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즐거움도 자신의 힘으로 최대한 누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지혜와 지식과 기쁨이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처음에 그는 자기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시험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변화는 지혜와 지식과 기쁨이 인간의 노력과 무관하게 생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노력만으로 좋은 결과와 그것을 누리는 능력까지 모두 보장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26절 후반은 단순한 위로로 끝나지 않습니다.
18–21절에서 코헬렛은 자신이 수고한 것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쌓은 것을 누군가가 넘겨받는 상황이 하나님의 다스림과 연결되어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재산을 넘겨받는 사람이 지혜로운지 어리석은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사람과 죄짓는 사람이 구별됩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현실의 모든 재산 이동을 설명하는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부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사람이고, 재산을 잃는 사람은 반드시 죄인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본문은 누가 하나님의 눈에 좋은 사람인지 구체적인 판별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코헬렛은 인간의 재산이 자기 능력만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만일 코헬렛이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사람은 언제나 부자가 되고 죄인은 언제나 실패한다는 단순한 결론에 도달했다면, 26절 끝에서 「이것도 덧없고 바람을 뒤쫓는 일입니다」라고 다시 덧없음을 말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26절의 마지막 선언은 특히 죄인이 모으고 쌓아도 그 결과를 자기 것으로 누리지 못하는 수고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재물을 쌓고 나누는 불안정한 현실 전체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범위까지 「이것」이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코헬렛이 삶의 복잡한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한 뒤에도 인간의 수고에서 나타나는 덧없는 현실을 계속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의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는 실제로 「나 말고」에 해당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를 그대로 읽으면 코헬렛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자신처럼 먹고 즐기는 일을 경험한 사람이 누구겠느냐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그는 즐거움을 철저히 시험했다고 주장했으므로 문맥상 가능한 읽기입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그분을 떠나서」 또는 「그분 없이는」이라는 의미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경우 하나님 없이 누가 먹고 즐거워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 되어 24절과 26절의 하나님에 관한 진술에 직접 연결됩니다. 26절과 관련하여 잠언 13:22에도 죄인이 모은 재물이 의인에게 돌아간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두 본문은 악인이 쌓은 재산이 마지막에는 그의 뜻과 달리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이 대목은 신명기 8:17–18의 경고와도 연결됩니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이 풍요를 누리게 될 때 자기 능력과 손의 힘으로 그 재물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재물을 얻을 능력조차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전도서에서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3:12–13에서는 사람이 자기 수고에서 좋은 것을 누리는 일이 다시 하나님의 선물로 등장합니다. 5:18–19에서는 재물과 재산을 받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누릴 수 있는 능력까지 하나님의 선물로 표현됩니다.
왕궁의 정원에서 식탁으로
전도서 2장이 드러내는 문제는 많이 소유하는 일 자체보다, 소유를 통해 삶의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기대입니다. 코헬렛이 발견한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삶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삶 안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코헬렛은 실제로 기쁨을 누렸고, 실제로 괴로워했습니다. 지혜의 유익을 인정하면서 그 한계를 말했고, 하나님이 기쁨을 주신다고 고백하면서도 덧없다는 선언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가난이나 고통을 미화하는 말이 아닙니다. 더 많은 것을 이루려는 노력을 무조건 부정하는 말도 아닙니다.
전도서 2장에는 두 장면이 남습니다.
하나는 왕이 만든 거대한 정원입니다.
집과 포도밭이 있고, 온갖 과일나무가 자랍니다. 못에서는 숲으로 물이 흘러갑니다. 왕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 모든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다른 사람이 그 정원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며, 정원을 어떻게 관리할지 왕은 알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먹고 마시는 자리입니다.
사람은 수고한 뒤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십니다. 자신의 수고에서 좋은 것을 발견하고 잠시 즐거워합니다.
이 두 장면 사이에서 코헬렛의 시선은 달라집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시험했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자신이 누리는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지 바라봅니다.
왕궁을 짓고 정원을 가꾸는 데에는 막대한 재산과 권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끝내 발견한 것은 많은 것을 쌓아 두는 능력과 그것을 기쁘게 누리는 능력이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왕이 모은 재물도, 그가 지혜롭게 이룬 성취도 그의 뜻대로 영원히 보존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자신이 수고한 가운데 좋은 것을 누리는 순간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코헬렛은 그 기쁨을 자신의 위대한 성취를 증명하는 마지막 소유물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것임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왕이 평생 쌓아 올린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는, 한 사람이 먹고 마시며 자기 수고에서 좋은 것을 누리는 장면으로 돌아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