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6장 · 때와 하나님의 일
모든 것의 때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시간
사람은 때를 맞추려고 애씁니다. 씨를 뿌릴 때를 고르고, 일을 시작할 때를 결정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할 순간과 침묵해야 할 순간을 분별하려 합니다. 때를 잘 선택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삶에는 사람이 선택할 수 없는 때도 있습니다. 태어나는 때를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죽음이 찾아오는 시간을 모두 알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떠나보내야 할 것이 있고, 아무리 기다려도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있습니다.
전도서 3장은 바로 이 간격에서 시작합니다.
모든 것에는 정해진 시간이 있고,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전도서 3:1 · 두루새김
이 말씀은 흔히 모든 일이 결국 좋은 때에 이루어진다는 위로로 읽힙니다. 그러나 코헬렛이 나열하는 시간에는 기쁨과 회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과 파괴, 미움과 전쟁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 때가 있다고 말한 뒤, 그는 곧바로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낼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사실과 사람이 그때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단순히 아는 것의 한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옳고 그름을 바로잡아야 할 때에도 악이 자리 잡고 있으며, 사람은 자신의 생명이 언제 끝날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알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사람은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아이를 낳을 때와 죽을 때 — 인간의 삶을 가로지르는 열네 쌍의 시간
전도서 3장의 첫 여덟 절은 성경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간의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1절이 모든 것에 때가 있다고 선언한 뒤, 2–8절은 서로 대조되는 열네 쌍의 행동과 사건을 나열합니다.
아이를 낳을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습니다.전도서 3:2 · 두루새김
시의 시작부터 코헬렛은 삶의 가장 큰 경계를 제시합니다. 출생과 죽음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활동은 이 두 사건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경계는 대체로 사람이 자기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것은 심고 뽑는 일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입니다. 농부는 계절을 살피고 땅의 상태를 고려해 씨를 뿌리거나 식물을 뽑습니다.
첫 번째 대조는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생명의 경계를 보여 주고, 두 번째 대조는 그 안에서 사람이 분별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시는 모든 일이 미리 결정되어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선언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시에는 사람의 선택을 넘어서는 사건과, 사람이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일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죽일 때가 있고 낫게 할 때가 있습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습니다.전도서 3:3 · 두루새김
이 구절이 모든 살인과 파괴를 정당화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코헬렛은 여기서 무엇을 죽여도 되는지, 어떤 전쟁이 정당한지 판단하는 도덕적 규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의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서로 반대되는 행동들을 묘사합니다.
어떤 때에는 생명이 파괴되고 어떤 때에는 상처가 치료됩니다. 어떤 건물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이 세워집니다. 두 행동은 단순히 반대일 뿐 아니라, 한때 알맞았던 행동이 다른 때에는 알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집을 세우는 일이 언제나 옳고 허무는 일이 언제나 잘못인 것은 아닙니다. 무너질 위험이 있는 집은 허물어야 할 수 있고, 무너진 집은 다시 세워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에 관한 지혜는 무엇이 좋은 행동인지 아는 것뿐 아니라, 그 행동을 언제 해야 하는지 분별하는 일과도 관계됩니다.
4절에서는 시선이 사람의 감정과 공동체의 삶으로 옮겨 갑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습니다. 슬퍼하며 울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습니다.전도서 3:4 · 두루새김
코헬렛은 울음을 반드시 웃음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울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삶에는 웃음만으로 응답할 수 없는 사건이 있습니다. 슬픔과 상실 앞에서는 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기쁨의 시간에는 웃고 춤추는 것이 알맞은 반응이 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죽음을 슬퍼할 때 옷을 찢는 행동이 자주 등장합니다. 사무엘하 1:11에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듣고 옷을 찢습니다. 반면 출애굽기 15:20–21에서 미리암과 여자들은 구원을 기뻐하며 소고를 치고 춤춥니다. 이러한 장면은 기쁨과 슬픔이 단순한 개인의 감정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습니다. 끌어안을 때가 있고 끌어안기를 멀리할 때가 있습니다.전도서 3:5 · 두루새김
돌을 던지고 모으는 일이 정확히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끌어안을 때」와 「끌어안기를 멀리할 때」도 다양한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가까이해야 할 때가 있고 거리를 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가까워짐과 멀어짐이 모두 일어날 수 있다는 넓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6절과 7절에서는 찾고 잃는 일, 간직하고 내던지는 일, 찢고 꿰매는 일, 잠잠하고 말하는 일이 이어집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습니다.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전도서 3:7 · 두루새김
침묵과 말하기는 모두 그 자체로 항상 옳거나 그른 행동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성급하게 말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편이 지혜롭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억울하게 고통받는 상황에서는 침묵이 책임을 피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잠언 26:4–5에는 어리석은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말라는 교훈과 대답하라는 교훈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두 교훈은 서로 다른 위험을 경고합니다. 사람에게는 어떤 행동이든 무조건 반복하는 능력보다, 상황이 달라졌음을 알아차리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아직 그러한 지혜로 모든 때를 알아낼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습니다.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습니다.전도서 3:8 · 두루새김
시가 끝나는 지점은 개인의 감정과 나라와 공동체의 현실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사랑과 미움은 사람의 관계를 바꾸고, 전쟁과 평화는 사회 전체의 삶을 바꿉니다.
이처럼 열네 쌍의 시간은 출생과 죽음에서 시작해 노동과 감정, 소유와 관계, 공동체의 갈등까지 폭넓게 다룹니다. 이는 서로 반대되는 두 극단을 제시하여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상황까지 떠올리게 하는 시적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 시를 읽고 나면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언제나 알 수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때를 선택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에 때가 있다면, 수고하는 사람에게 무엇이 남는가
일하는 사람에게 그 모든 수고로 남는 이익이 무엇입니까?전도서 3:9 · 두루새김
아름답게 반복되던 시간의 시가 끝나자 코헬렛은 갑자기 수고의 이익을 묻습니다.
앞의 시가 사람의 삶에 다양한 때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면, 9절은 그 시간의 변화 속에서 사람이 무엇을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농부가 아무리 열심히 씨를 뿌려도 수확의 모든 조건을 자기 뜻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건축가는 집을 세울 수 있지만 그 집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결정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모든 관계를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지킬 수는 없습니다.
노동과 선택은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그 결과를 둘러싼 모든 시간은 사람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수고해도 때가 계속 변한다면, 그 수고에서 끝내 무엇을 자기 것으로 얻을 수 있습니까?
10절에서 코헬렛은 그 질문을 하나님과 연결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맡겨 힘쓰게 하신 일을 보았습니다.전도서 3:10 · 두루새김
코헬렛은 사람의 삶에 주어진 활동과 수고가 하나님의 다스림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을 맡기셨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이 그 일의 전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11절은 전도서 3장의 중심에 놓인 역설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사람에게 영원을 생각하는 마음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낼 수 없습니다.전도서 3:11 · 두루새김
「아름답게」(יָפֶ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아름답다거나 좋다는 뜻을 지닙니다. 이 구절에서는 「제때에」라는 표현과 결합하여 어떤 일이 그 시간에 알맞게 이루어진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과 고통이 그 자체로 아름답고 선하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코헬렛은 곧 16절에서 재판하는 자리에도 악이 있다고 고발합니다. 따라서 11절이 하나님께서 모든 불의를 도덕적으로 옳다고 인정하신다는 뜻이라고 해석하면 바로 이어지는 내용과 충돌합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알맞은 때와 질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사건의 의미를 즉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영원을 생각하는 마음」과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표현이 그 반대를 강조합니다.
히브리어 하올람(עוֹלָם)은 문맥에 따라 영원, 오래 지속되는 시간, 사람이 내다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시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영원을 생각하는 마음」을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마음으로만 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바로 뒤에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표현이 이어지므로, 코헬렛이 말하는 영원은 자신이 경험하는 현재의 순간을 넘어 과거와 미래까지 이해하려는 사람의 시간 의식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현재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지나간 일을 돌아보고, 미래를 예상하며, 자신이 겪는 사건들이 전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지 궁금해하고, 지금의 고통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낼 수 없습니다.
여기에 11절의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눈앞의 순간을 넘어 시간을 바라보는 마음을 주셨지만, 시간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까지 주셨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원인을 알거나 모든 결과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어떤 더 큰 흐름 안에 놓여 있는지 끝까지 확인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단순히 지식의 양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가로질러 일하시는 분이고, 사람은 그 시간의 일부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어떤 삶이 가능합니까?
조금 더 깊이
이 구절의 히브리어 연결 표현은 하나님이 영원을 마음에 넣으셨음에도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알아낼 수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그런데도」라고 옮겨 이 관계를 드러냅니다. 반면 하나님이 시간을 인식하게 하신 일과 사람의 이해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목적이나 결과의 관계로 더 강하게 연결하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어느 쪽이든 핵심적인 사실은 같습니다. 사람에게 시간 전체를 향한 인식이 있지만, 하나님의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밝혀낼 능력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기 38–41장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창조 세계의 다양한 질서에 관해 질문하십니다. 욥은 자신이 경험한 고통을 설명하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 전체를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영원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오늘 누리는 선물
나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기뻐하고 좋은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전도서 3:12 · 두루새김
코헬렛은 하나님의 일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사람의 삶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즐기라는 권고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아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의 차이를 인정한 뒤,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도덕적 행동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히브리어의 문맥상 좋은 것을 누린다는 의미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뒤따르는 13절에서는 먹고 마시며 수고에서 좋은 것을 누리는 일이 등장하므로 두 번째 읽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첫 번째 가능성을 제외할 수는 없습니다.
두 해석 모두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알 수 없는 시간 전체를 소유하려 하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애 안에서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방향입니다.
누구든 먹고 마시며 자기가 애써 하는 모든 일에서 좋은 것을 누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전도서 3:13 · 두루새김
「누구든」이라고 말하는 코헬렛은 특별한 왕이나 지혜로운 사람만을 대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며 자신의 수고에서 좋은 것을 누리는 경험을 사람의 일반적인 삶으로 넓혀 말합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단지 수고의 결과라고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은 수고하여 먹을 것을 마련할 수 있지만, 그 수고의 모든 조건을 자기 힘으로 마련하는 것은 아닙니다. 땅과 계절, 생명과 건강, 다른 사람들의 노동 등 사람의 삶에는 자신이 만들어 내지 않은 것들이 함께 작용합니다. 코헬렛은 그 모든 조건을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누리는 좋은 것이 자기 능력의 결과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세상의 모든 시간을 자기 뜻대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이 반드시 지금 주어진 기쁨을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를 모두 알 수 없어도 오늘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수고가 영원히 남지 않더라도 그 수고에서 실제로 좋은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이러한 사람의 삶을 곧바로 하나님의 일과 구별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거기에 무엇을 더할 수도 없고, 거기서 무엇을 덜어 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두려워하도록 그렇게 하셨습니다.전도서 3:14 · 두루새김
앞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영원히 남는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오래 남으며 온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거기에 무엇을 더할 수도 없고」, 「거기서 무엇을 덜어 낼 수도 없습니다」라는 표현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자기 뜻대로 고치거나 완성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코헬렛은 「사람들이 자기를 두려워하도록」이라고 하여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목적을 말합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단순히 위험한 존재 앞에서 느끼는 공포로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는 경외의 태도와 연결됩니다.
사람은 자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 더하거나 덜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자기 뜻대로 다루려는 사람의 자리를 내려놓고, 자신보다 크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는 태도와 관계됩니다.
다만 전도서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분의 모든 계획을 알게 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이해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경외의 근거가 됩니다.
지금 있는 것은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 있을 것도 이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쫓기는 것을 찾으십니다.전도서 3:15 · 두루새김
앞부분은 사람의 역사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는 관찰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지막에 하나님이 주어로 등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쫓기는 것을 찾으십니다」라는 표현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니르다프(רָדַף)는 쫓기거나 추적당하는 대상을 가리킵니다. 시간의 흐름에 초점을 맞추면 하나님이 지나간 것을 다시 찾으시거나 되돌아오게 하신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앞서 있었던 것이 다시 나타나는 시간의 반복과 연결되는 해석입니다.
반면 쫓기는 대상을 사람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이 박해받거나 밀려난 사람을 찾으신다는 뜻이 됩니다. 이어지는 16절에서 재판하는 자리와 옳고 그름을 바로잡는 자리에 악이 있다고 말하므로 이 읽기도 문맥상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해석이 옳은지 이 구절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는 공통으로 하나님을 시간과 사건의 흐름 속에서 일하시는 분으로 나타냅니다. 사람에게 지나가 버린 것으로 보이는 일도 하나님의 다스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세상에서 정의는 제때에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코헬렛은 그 질문을 피하지 않습니다.
정의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악이 있다
나는 해 아래에서 이런 일도 보았습니다. 재판하는 자리에 악이 있었고, 옳고 그름을 바로잡는 자리에도 악이 있었습니다.전도서 3:16 · 두루새김
여기서 전도서 3장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앞부분에서는 출생과 죽음, 심고 뽑는 일, 웃음과 울음처럼 사람의 삶에 나타나는 다양한 시간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코헬렛은 사회 안의 특정한 장소를 가리킵니다. 이곳은 본래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불의를 바로잡아야 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바로 그곳에 악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세상 어딘가에서 악한 일이 발생한다는 관찰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불의를 바로잡아야 할 제도 안에 불의가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재판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활동이었습니다. 신명기 16:18–20은 재판관들이 공정하게 판결해야 하며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명령합니다. 또한 신명기 10:17–18은 하나님이 뇌물을 받지 않으시며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코헬렛의 관찰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와 사람 사는 사회의 실제 모습 사이의 간격을 드러냅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게 만드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자리에서 악이 행해집니까?
코헬렛은 이 질문에 대해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서 한 가지 판단을 내립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옳게 사는 사람과 악하게 사는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다. 모든 일과 모든 행동을 심판하실 때가 있기 때문이다.」전도서 3:17 · 두루새김
모든 일에 때가 있다면 심판에도 때가 있습니다.
지금 악하게 사는 사람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정의가 당장 실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17절은 심판이 정확히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언이 아니라 코헬렛의 마음속 판단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라는 표현은 코헬렛이 현실에서 발견한 불의에 대해 신앙 안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재판하는 자리에서 악을 발견하고도 모든 판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옳게 사는 사람과 악하게 사는 사람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지만, 그 기대 때문에 현재의 불의를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이 현재의 불의를 즉시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코헬렛은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 뒤에도 사람의 처지에 대한 더 근본적인 질문을 이어 갑니다. 그는 이제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지위를 얼마나 확신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 원문에서 「거기」에 해당하는 표현이 가리키는 장소나 상황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대목을 「모든 일과 모든 행동을 심판하실 때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옮깁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심판의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구체적인 장소를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비슷한 긴장을 경험했습니다. 하박국 1:2–4에서 예언자는 악과 폭력이 계속되는데도 정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믿음 때문에 불의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전도서도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현실에 대한 정직한 관찰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사람도 짐승도 흙먼지로 돌아간다
나는 사람들에 관해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시험하셔서, 그들 자신도 짐승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게 하시려는 것이다.」전도서 3:18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앞의 재판 장면과 연결하여 읽을 때 더욱 날카롭습니다.
사람은 재판관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누가 옳고 그른지 판결하며, 누군가의 재산과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권력을 가진 사람도 결국 죽습니다.
「시험하셔서」라는 표현에는 사람의 실제 모습을 드러내거나 가려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본래 처지를 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처지를 설명하는 말, 「그들 자신도 짐승과 다르지 않다」는 충격적입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 지혜나 도덕적 책임이 없으며 짐승과 모든 면에서 같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읽으면 전도서의 다른 부분뿐 아니라 창세기의 인간 이해와도 차이가 생깁니다. 창세기 1:26–28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다른 생물들을 다스리는 역할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코헬렛의 비교는 다른 문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는 사람과 짐승의 모든 특성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함께 겪는 죽음의 현실을 바라봅니다.
「사람과 짐승에게 닥치는 일이 같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듯 짐승도 죽고, 모두에게 같은 숨이 있다. 사람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다. 모두 덧없기 때문이다.」전도서 3:19 · 두루새김
여기에는 사람의 교만을 흔드는 관찰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이룬 문명과 지식, 권력과 재산을 통해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에게는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여러 능력과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그 능력들이 사람을 특별히 제외해 주지 않습니다.
사람도 죽고 짐승도 죽습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같은 숨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 영적인 차원이 없다는 선언으로 곧바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생명에 끝이 있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비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구절의 「나을 것」은 사람과 짐승 사이의 모든 가치 차이가 없다는 뜻이라기보다, 죽음 앞에서 사람에게 특별한 이익이 없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전도서는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분명히 낫다고 말하면서도 둘 모두 죽는다고 했습니다(2:13–16). 이제 그 비교가 사람과 짐승 사이로 넓어집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은 서로 다르지만 죽음에서는 같은 운명을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짐승도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생명에 끝이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현실을 함께 겪습니다.
「모두 한곳으로 간다. 모두 흙먼지에서 나왔고, 모두 흙먼지로 돌아간다.」전도서 3:20 · 두루새김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이름과 지위와 업적을 통해 다른 사람과 구별됩니다. 그러나 죽음 뒤 몸은 흙먼지로 돌아갑니다.
사람이 그토록 확실하다고 여겼던 구별들이 죽음 앞에서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유지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21절은 이러한 관찰에서 더욱 어려운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의 숨이 위로 올라가는지, 짐승의 숨이 땅으로 내려가는지 누가 알겠는가?」전도서 3:21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누가 아는가라는 질문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 뒤에 사람의 숨이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숨이 아래로 내려가는지에 관한 표현이 이어집니다.
이를 사람의 영은 실제로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아래로 내려간다는 확정적인 진술로 읽을 수도 있는 문장 형태가 있지만, 앞의 질문과 연결하면 그 차이를 사람이 확인할 수 있는지 묻는 질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칠십인역도 올라가고 내려가는지 그 여부를 묻는 형식으로 읽습니다.
그가 묻는 것은 사람과 짐승에게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확정하려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죽음이라는 공통의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숨 쉬던 사람이 더 이상 숨 쉬지 않고, 살아 있던 짐승도 죽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모든 일을 자기 경험과 관찰만으로 밝혀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절을 사람이 죽음 이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정적인 부정으로 사용해서도 안 되고, 사람의 영이 어디로 가는지에 관한 완결된 교리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전도서 12:7에는 흙이 땅으로 돌아가고 영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3:21에 곧바로 대입하여 이 질문 자체를 지워 버리면, 여기서 코헬렛이 드러내는 사람의 지식의 한계를 충분히 듣지 못하게 됩니다.
코헬렛은 사람들이 자신에 관해 확실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제한적인지 보여 줍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현재 살아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숨」으로 옮긴 히브리어 낱말은 바람이나 숨, 생명의 기운, 영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람과 짐승이 함께 살아 숨 쉬는 존재이며 함께 죽는다는 문맥이 중요합니다. 20절의 흙먼지는 창세기 3:19와 주제 면에서 직접 연결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흙먼지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전도서는 그 사실을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에게까지 넓혀 생각합니다. 창세기 2:7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하며, 2:19에서는 들짐승과 새들도 땅에서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코헬렛은 이처럼 창조된 존재들이 같은 재료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죽음의 장면에서 바라봅니다.
누가 미래를 보여 줄 수 있는가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떠난 뒤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전도서 3:22 · 두루새김
3장의 마지막 구절은 앞서 등장한 즐거움의 주제를 다시 불러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기쁨을 누려야 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자기 뒤에 일어날 일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가 떠난 뒤에 일어날 일」은 사람이 떠난 뒤의 미래를 포함해 자신이 경험할 수 없는 시간의 영역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죽음 이후의 특정한 상태에 관한 설명으로 옮길 필요는 없습니다. 코헬렛의 관심은 사람이 미래의 일을 자기 앞에 가져다 놓고 확인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미래에 대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애가 끝난 뒤에 일어날 일을 직접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자신을 미래로 데려가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코헬렛은 그럴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수고에서 기쁨을 누리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몫은 자신에게 돌아온 부분입니다. 다른 사람의 몫이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몫까지 모두 자기 것으로 확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살아가는 동안 실제로 주어진 것이 있습니다. 일하고, 먹고, 마시고, 관계를 맺고, 좋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소유하거나 미래 전체를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코헬렛은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에 모든 기쁨을 맡겨 두지 말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것은 미래를 준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미래의 결과를 책임지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미래를 완전히 자기 뜻대로 다룰 수 있다는 기대입니다. 사람은 내일을 위해 오늘 수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의 모든 결과를 확인한 뒤에야 오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기쁨은 끝없이 미루어질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내일 앞에서 주어진 오늘
전도서 3장은 수많은 시간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심은 것을 뽑을 때, 울 때와 웃을 때, 잠잠할 때와 말할 때.
어떤 시간은 사람이 선택하고, 어떤 시간은 원하지 않아도 맞이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기쁨을 가져오고, 어떤 때는 깊은 슬픔을 남깁니다.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사람에게 주어진 도덕적 책임까지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전도서 3장을 모든 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일어나니 어떤 일이든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읽는 것은 본문 전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좋은 것을 분별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며,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까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 앞에서 그분을 경외할 수 있습니다.
울 때에는 울 수 있고, 웃을 때에는 웃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보고 악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정의가 바로 세워지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일할 때에는 힘써 일하고, 좋은 것을 누릴 때에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코헬렛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게 만드신다고 말하면서도, 사람이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낼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옳게 사는 사람과 악하게 사는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옳고 그름을 바로잡아야 할 자리에 악이 있는 현실을 바라봅니다. 그는 시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시간을 다 알 수 없는 사람을 함께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가 떠난 뒤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갈 모든 날을 한꺼번에 펼쳐 놓고 볼 수 없습니다. 앞으로 누가 태어날지, 무엇이 무너지고 무엇이 세워질지, 언제 웃고 언제 울게 될지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볼 수 없다고 해서 지금 살아가는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일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수고하고, 기뻐하고,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시간은 사람이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삶의 일부입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때를 아는 것이 사람의 몫은 아닙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수고와 그 속에서 발견하는 작은 기쁨은 이미 사람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이 코헬렛이 긴 시간의 노래 끝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자리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