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4–24장 · 예루살렘 심판 예고

불에 탄 포도나무가 드러내는 것

포도나무는 성경에서 특별한 나무입니다. 시편 80편은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를 옮겨 와 심으셨다고 노래합니다(시편 80:8–11). 이사야는 하나님이 정성껏 가꾸신 포도원을 통해 이스라엘과 유다를 이야기합니다(이사야 5:1–7). 포도나무는 하나님의 선택과 돌봄을 받은 백성을 떠올리게 하는 친숙한 이미지였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15장에서 여호와야훼는 뜻밖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여호와야훼는 포도가 얼마나 달리는지, 포도주가 얼마나 좋은지 묻지 않으십니다. 오직 포도나무의 목재가 무엇에 쓸 만한지를 물으십니다.

읽는 시간 10분소단락 615장 본문 읽기 →

나무못 하나 만들 수 없는 나무

에스겔 15:1–3 본문 →

「사람의 아들아, 숲의 나무들 사이에 있는 포도나무 가지가 다른 나무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냐?」에스겔 15:2 · 두루새김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포도나무 전체의 풍성한 모습이 아니라, 숲의 다른 나무들 사이에 놓인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목재입니다. 본문은 포도나무의 특별한 지위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다른 나무들과 나란히 세워 비교합니다.

숲의 나무들 가운데에는 집을 짓거나 물건을 만드는 데 사용할 만한 목재가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나무의 가지는 굽고 가늘며, 구조물을 만들 재료로 삼기 어렵습니다.

「그 나무로 물건을 만들 수 있겠느냐? 무엇을 걸어 둘 나무못이라도 만들 수 있겠느냐?」에스겔 15:3 · 두루새김

여기서 나무못은 물건을 걸어 두기 위한 작은 못이나 걸이를 말합니다. 거창한 건축 자재가 아니라 일상에서 사용할 아주 작은 물건입니다. 큰 물건을 만들기 어렵다면 작은 것이라도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조차 어렵습니다.

여호와야훼는 포도나무에 아무 가치가 없다는 선언부터 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다른 나무들과 같은 목재의 기준에서 무엇을 내세울 수 있는지 하나씩 물으십니다. 독자가 스스로 대답하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특별한 이유는 다른 나무보다 좋은 목재를 제공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열매를 위해 가꾸는 식물입니다. 따라서 열매를 제외하고 목재로서의 가치만 따지면 다른 나무보다 내세울 것이 거의 없습니다.

이사야 5:1–7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열매를 떠올릴 것입니다. 이사야의 포도원 노래에서 하나님은 좋은 열매를 기대하셨지만, 기대와 다른 열매를 얻으셨습니다. 이사야 5:7은 하나님이 기대하신 것을 정의와 공의로 설명합니다.

다만 두 본문의 강조점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열매의 질을 직접 문제 삼습니다. 반면 에스겔 15장에는 열매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에스겔은 포도나무의 목재만 남겨 놓음으로써, 그 나무가 특별한 나무라는 사실 자체를 안전의 근거로 삼을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양 끝은 타 버리고 가운데는 그을렸다

에스겔 15:4–5 본문 →

이제 장면이 바뀝니다.

「보아라, 그 가지는 불의 먹이로 내주어졌다. 양 끝은 불에 타 버렸고 가운데도 그을렸다. 이제 무엇을 만드는 데 쓸 수 있겠느냐?」에스겔 15:4 · 두루새김

나무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나무가 쓸 만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멀쩡할 때에도 무엇을 만드는 데 쓰지 못했다. 하물며 불에 타고 그을린 뒤에야 어떻게 무엇을 만드는 데 쓸 수 있겠느냐?」에스겔 15:5 · 두루새김

4절이 불에 탄 나무의 현재 상태를 보여 준다면, 5절은 불타기 전과 후를 비교하여 결론을 내립니다. 나무의 상태를 비교하여, 이미 무너진 것을 의지하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지 보여 줍니다.

불을 통과한 뒤에도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 나무가 안전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이 말은 당시 예루살렘의 형편과 맞닿아 있습니다. 에스겔이 예언하던 때 유다 왕국은 이미 바벨론의 침공과 포로 이주를 겪었지만, 예루살렘은 아직 최종적인 멸망을 맞지 않은 상태였습니다(열왕기하 24:10–17; 에스겔 1:1–3).

도시는 남아 있었습니다. 성전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왕조의 역사와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도 여전히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남아 있는 도시를 불에서 살아남은 포도나무와 같은 모습으로 보게 하십니다.

이 비유의 충격은 예루살렘이 고난을 겪었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고난을 겪고도 살아남은 현실을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멀쩡할 때」라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던 시절을 뜻하지 않습니다.

누가 포도나무를 불에 내주었는가

에스겔 15:6 본문 →

「그러므로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숲의 나무들 가운데 포도나무를 불의 먹이로 내주었듯이,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렇게 내주었다.』」에스겔 15:6 · 두루새김

앞에서는 포도나무가 「불의 먹이로 내주어졌다」고 표현했습니다. 이제 여호와야훼가 직접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닥친 재앙이 단지 바벨론의 군사력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의 예언에서 바벨론은 역사 속에서 행동하는 실제 제국이지만, 여호와야훼는 그 제국의 행동을 통해서도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여호와야훼의 이름과 성전이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여호와야훼의 심판으로부터 도시를 자동으로 보호하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예레미야 7:1–15의 성전 설교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백성은 여호와야훼의 성전이 자신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신뢰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불의를 저지르고 다른 신들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성전이라는 장소에 대한 신뢰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대신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포도나무라는 이름이 목재의 성질을 바꾸지 않듯이, 여호와야훼의 백성이라는 이름만으로 실제 배신의 결과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이 인간의 쓸모에 따라 사랑하시거나 버리신다는 일반 원리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대상은 모든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와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으면서도 그 관계를 배반한 예루살렘 주민들입니다.

그들의 심판은 경제적 생산성이나 인간적 능력이 부족해서 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8절이 밝히듯, 문제의 핵심은 배신입니다.

불에서 빠져나왔지만 다시 불이 그들을 삼킨다

에스겔 15:7 본문 →

「『내가 그들에게 맞서겠다. 그들은 불에서 빠져나왔지만, 불이 그들을 삼킬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맞설 때, 너희는 내가 여호와야훼임을 알 것이다.』」에스겔 15:7 · 두루새김

「그들은 불에서 빠져나왔지만」은 이미 벌어진 일을 가리킵니다. 「불이 그들을 삼킬 것이다」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가리킵니다.

본문의 불은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는 의미를 넘어, 이미 시작된 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여호와야훼의 성전과 여호와야훼의 도시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이름과 제도와 역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했는지는 그들의 행동이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단지 예루살렘의 안녕을 보장하는 신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배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임을 알리십니다.

여호와야훼를 안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 편이라고 믿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이 우리의 행동을 판단하실 권위를 가지신 분임을 인정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 주민들을 「그들」이라고 말씀하시다가, 곧바로 「너희는 내가 여호와야훼임을 알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심판받는 주민들을 이야기하시다가 이제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직접 향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언을 듣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운명을 멀리서 구경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들에게도 여호와야훼가 어떤 분인지 깨달아야 할 책임이 주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여호와야훼가 그들에게 자기 얼굴을 맞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등을 돌리고 떠나신다는 뜻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상대하여 심판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에스겔 14:8에서 여호와야훼는 우상을 마음에 품은 채 하나님께 묻는 사람을 향해 자기 얼굴을 맞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4장에서는 한 사람을 향한 심판의 표현이었습니다. 15장에서는 그 선언이 예루살렘 주민들 전체를 향합니다. 이 불이 역사적으로 어떤 재난을 가리키는지는 조심스럽게 판단해야 합니다. 기원전 597년의 바벨론 침공과 포로 이주는 중요한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표현 자체가 반드시 그 사건 하나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때까지 겪어 온 여러 재난을 함께 떠올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심판의 이유

에스겔 15:8 본문 →

「『내가 그 땅을 황무지로 만들겠다. 그들이 나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에스겔 15:8 · 두루새김

15장은 놀라울 정도로 짧은 이유 설명으로 끝납니다.

앞에서는 포도나무의 쓸모에 관해 여러 질문을 던졌습니다. 불에 탄 나무의 모습도 자세히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심판받는 이유를 분명히 밝히는 말은 마지막 절에 이르러서야 나옵니다.

포도나무의 목재가 약하다는 사실은 심판을 설명하는 비유의 재료일 뿐입니다. 심판의 실제 이유는 마지막 절에서 밝히는 배신입니다.

예레미야 2:21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좋은 포도나무로 심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80:8–11에서도 하나님이 포도나무를 옮겨 심고 자라게 하신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심고 돌보셨습니다. 그 관계 안에서 이스라엘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관계를 저버렸습니다.

신명기 7:6–8은 이 문제를 분명하게 다룹니다.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거나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선택은 여호와야훼의 사랑과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에 기초했습니다.

호세아 10:1–2는 또 다른 문제를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은 열매가 풍성해질수록 우상을 위한 제단을 늘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가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그 땅」도 중요합니다.

비유는 포도나무 한 가지에서 시작했지만, 심판은 땅 전체를 황무지로 만드는 데까지 이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받은 땅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독립된 소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신명기 29:22–28에서도 땅이 황폐해진 이유를 백성이 여호와야훼의 언약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에스겔 15장의 마지막 문장은 그 오래된 언약의 경고를 예루살렘 앞에 다시 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나를 배신했기 때문이다」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마알루 마알(⁨מָעַל⁩)입니다. 원문에서는 같은 어근의 동사와 명사를 함께 사용하여 배신 행위를 강조합니다. 단순한 실수나 능력 부족보다는 마땅히 지켜야 할 신뢰와 관계를 저버린 행위를 표현합니다. 에스겔 14:13에서 여호와야훼는 어떤 땅이 자신을 배신하여 죄를 지으면 그 땅에 심판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서도 원문은 같은 어근을 반복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14장에서 제시되었던 심판의 원리가 15장 마지막에서 예루살렘의 현실에 적용됩니다.

불길이 지나간 자리

에스겔 15:1–8 본문 →

포도나무는 자기 목재의 단단함으로 특별해진 적이 없습니다. 그 특별함은 처음부터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15장의 가장 무거운 질문은 포도나무가 얼마나 쓸모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심고 돌보신 나무가 그분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숲의 나무들 사이에서 포도나무 가지 하나가 불에 내주어졌습니다.

양쪽 끝은 이미 타 버렸고, 가운데도 검게 그을렸습니다. 나무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야훼는 그 나무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고 안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가지는 예루살렘입니다.

여호와야훼는 포도나무의 이름도, 그 이름에 얽힌 과거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이름만으로 현재의 배신을 가릴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불에 탄 가지 앞에서 그 사실이 드러납니다. 나무는 아직 남아 있지만, 여호와야훼는 그 남아 있는 나무까지 불에 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