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40장
이 장의 자리 · 40–48장 · 새 성전 환상
폐허에서 다시 경계를 긋다
에스겔 40장에는 이상할 만큼 많은 숫자가 등장합니다.
여섯 규빗, 다섯 규빗, 스물다섯 규빗, 쉰 규빗, 백 규빗. 문지방과 기둥의 너비를 재고, 방의 길이를 재고, 계단의 수를 셉니다. 같은 구조를 동쪽에서도 재고, 북쪽에서도 재고, 남쪽에서도 반복해서 잽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누구에게 주어졌는지를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예언자입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갔고, 성전도 파괴되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알고 있던 예루살렘의 모습은 무너진 성벽과 불타 버린 성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성전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곧장 성전의 중심으로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먼저 바깥 담을 보여 주시고, 문지방을 재게 하시고, 여러 뜰을 지나가게 하십니다.
왜 이처럼 느리고 세밀한 과정이 필요했을까요?
에스겔 8–11장에서 예언자는 예루살렘 성전 안의 우상 숭배와 부정함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이라고 여겨졌던 성전이 오히려 하나님을 거스르는 행위로 가득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났습니다(10:18–19; 11:22–23).
그때 성전은 건물로서 존재했지만,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는 이미 심각하게 무너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자기 백성 가운데 머무신다면, 그 거처는 어떤 곳이어야 하며 사람들은 그곳에 어떻게 나아가야 합니까?
에스겔 40장의 치수와 문과 뜰은 이 질문에 응답하는 새로운 질서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무너진 지 십사 년, 다시 그곳으로 데려가시다
우리가 포로로 끌려온 지 스물다섯째 해, 한 해가 시작되는 달의 열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적의 손에 넘어간 지 열넷째 해인 바로 그날, 여호와야훼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았고 그분께서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셨습니다.에스겔 40:1 · 두루새김
에스겔은 자신의 시간을 두 사건으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포로로 끌려온 일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이 적의 손에 넘어간 일입니다.
그에게 시간은 고향을 잃은 역사와 함께 흘러왔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어제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그 사이 포로들은 새로운 땅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예루살렘의 성전은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에스겔을 사로잡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그를 「그곳으로」 데려가셨다고 합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다음 절에서 밝혀집니다. 이스라엘 땅입니다.
예언자가 돌아갈 수 없었던 곳으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십니다.
아주 높은 산과 도시의 건물들처럼 보이는 것
하나님께서는 환상 속에서 나를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 아주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셨습니다. 그 산 위 남쪽에는 도시의 건물들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에스겔 40:2 · 두루새김
예언자는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멀리서 보았을 때 하나의 도시처럼 보이는 큰 건축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곳은 작은 제단이나 방 하나가 아니라, 담과 문과 뜰과 여러 건물이 있는 거대한 공간입니다.
또한 높은 산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거처와 특별히 연결되는 이미지입니다. 이사야 2장 2절에서는 하나님의 집이 있는 산이 굳게 서는 미래가 선포됩니다. 에스겔 20장 40절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산에서 이스라엘의 섬김을 받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청동처럼 보이는 사람
그분께서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거기에는 청동처럼 보이는 사람이 문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손에 아마실로 꼰 줄과 길이를 재는 장대를 들고 있었습니다.에스겔 40:3 · 두루새김
그가 천사인지, 다른 종류의 하늘 존재인지는 이 절에서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에스겔을 안내하며 환상 속 공간의 치수를 잰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줄은 비교적 긴 거리를 재는 데, 장대는 보다 구체적인 구조물의 길이를 재는 데 적합한 도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물이 에스겔에게 처음 하는 말은 길이를 재는 방법을 가르치는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네 눈으로 보고 네 귀로 들어라. 내가 네게 보여 주는 모든 것에 마음을 기울여라. 너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네게 이것들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네가 보는 모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라.」에스겔 40:4 · 두루새김
이것은 단순한 건축 현장 견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예언자의 행동입니다. 특히 「마음을 기울여라」(שׂוּם)는 표현은 히브리어에서 마음을 어떤 대상에 두어 집중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건물의 형태만 기억하면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보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전은 아직 실제로 재건되지 않았지만, 포로로 살아가는 백성은 하나님이 보여 주신 새로운 거처의 모습을 들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25장 9절에서는 일곱째 달 열흘째 날, 곧 속죄일에 희년을 선포하도록 규정합니다. 희년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지로 돌아가고 자유가 선포됩니다(레위기 25:10). 그러므로 에스겔 40장의 날짜를 희년과 연결하여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반면 출애굽기 12장 2–3절에서는 첫째 달이 한 해의 시작으로 규정되고, 그 달 열흘째 날에 유월절 양을 준비하게 됩니다. 에스겔 40장 1절은 어느 달을 가리키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문만으로 희년의 시작일이나 유월절 준비일 가운데 하나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전보다 먼저 등장하는 담과 문
성전 바깥을 둘러싼 담이 보였습니다. 그 사람이 손에 든 장대는 여섯 규빗 길이였습니다. 이때 한 규빗은 보통 한 규빗보다 한 손너비 더 길게 잰 것이었습니다. 그가 담을 재니 두께가 한 장대, 높이가 한 장대였습니다.에스겔 40:5 · 두루새김
하나님의 거처에 관한 환상이 건물 바깥의 경계에서 시작됩니다.
담은 어떤 공간이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담을 사이에 두고 안쪽과 바깥쪽이 구분됩니다. 앞으로 42장 20절에서는 성전 둘레를 재는 목적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일과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40장의 바깥 담은 그 구분을 처음 눈에 보이게 하는 구조물입니다.
성전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길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공간은 구별되어 있으며, 동시에 정해진 길을 통해 다가갈 수 있습니다.
특별한 측량 장대
이 장면에서 길이를 재는 기준이 먼저 제시되는 것은 뒤따르는 수많은 숫자를 이해하는 데 필요합니다. 독자는 이제 이 공간의 치수를 일정한 기준에 따라 재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에스겔이 제시하는 모든 수치를 사용하면 누구나 하나의 완벽한 현대식 설계도를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는 일부 치수가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8–9절의 문 현관 치수, 14절의 예순 규빗이 가리키는 정확한 구조, 48절의 문 양쪽 부분에 관한 설명이 그런 사례입니다.
따라서 숫자 하나하나에 임의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부족한 정보를 추정하여 완벽한 평면도를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본문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동쪽 문에 들어서다
6절부터 길이를 재는 사람은 동쪽을 향한 문으로 갑니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 문지방을 잽니다. 이어 문 건물 안의 방과 기둥, 현관과 입구를 잽니다. 10절에서는 방이 양쪽에 세 개씩 있다고 말합니다. 각 방의 크기도 같고, 양쪽의 돌출 기둥도 같은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 안쪽의 공간은 대칭을 이루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13절에서는 한쪽 방의 지붕에서 맞은편 방의 지붕까지 스물다섯 규빗이라고 하고, 15절에서는 문 입구 앞에서 안쪽에 있는 문 현관 앞까지 쉰 규빗이라고 합니다. 이 치수들은 문이 단순히 담에 뚫린 출입구 하나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그 문을 통과하려면 일정한 길이의 구조물 안을 지나가야 합니다.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바깥에서 안으로 단번에 뛰어드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진 통로를 거치는 일입니다.
문에 새겨진 종려나무
16절에서 숫자와 치수 사이로 뜻밖의 장식이 등장합니다.
문 안의 방들과 돌출 기둥들에는 안쪽을 향한 좁은 창들이 둘레에 나 있었습니다. 현관들도 같았습니다. 안쪽을 향해 창들이 사방에 나 있었고, 돌출 기둥에는 종려나무 무늬가 있었습니다.에스겔 40:16 · 두루새김
열왕기상 6장 29절에서는 솔로몬 성전의 벽에 그룹들과 종려나무와 꽃들이 새겨졌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새로운 성전 문에 새겨진 종려나무는 과거 성전의 장식 전통과 연결됩니다. 더욱이 에스겔 41장에 이르면 종려나무와 그룹의 형상이 성전 내부에도 등장합니다.
치수를 잰 구조와 생명을 떠올리게 하는 장식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5장 9절과 40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과 기구들을 보여 주신 모양에 따라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막은 사람이 마음대로 설계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 주신 모형을 따라 만들어지는 장소였습니다. 에스겔 40장도 비슷한 특징을 보입니다. 예언자가 마음대로 공간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구조를 보고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 본문을 완전히 같은 건축 계획으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에스겔의 성전은 성막과도, 솔로몬의 성전과도 구조와 치수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세 방향의 문이 같은 치수를 가진 이유
그가 나를 바깥뜰로 데려갔습니다. 뜰 사방을 따라 방들이 있고, 바닥을 단단하게 깔아 놓은 구역이 있었습니다. 그 바닥에 방 서른 칸이 있었습니다.에스겔 40:17 · 두루새김
이 방들이 정확히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는지는 17절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깥뜰에도 일정한 구조와 딸린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길이를 재는 사람은 이어 바깥쪽 문에서 안뜰의 바깥 가장자리까지의 거리를 잽니다. 동쪽과 북쪽에서 백 규빗입니다. 바깥 문을 지나면 바깥뜰이 있고, 그 안쪽에 다시 문이 있으며, 더 안쪽에 안뜰이 있습니다.
공간이 단계적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반복되는 치수는 무엇을 보여 주는가?
20절부터 길이를 재는 사람은 북쪽 문을 잽니다.
길이는 쉰 규빗, 너비는 스물다섯 규빗입니다. 동쪽 문과 같은 치수입니다. 22절에서는 창과 현관과 종려나무 무늬도 동쪽 문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남쪽 문으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도 같은 치수가 반복됩니다. 길이 쉰 규빗, 너비 스물다섯 규빗입니다. 종려나무 장식도 있고, 올라가는 계단도 있습니다.
독자는 동쪽 문을 자세히 본 뒤 북쪽에서도 같은 구조를 확인하고, 남쪽에서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은 공간 전체에 하나의 질서가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도시가 파괴되면 건물은 본래의 형태를 잃습니다. 담은 무너지고, 길은 막히며, 각 공간의 구분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지금 에스겔이 보는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일정한 질서 안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처는 폐허의 무질서와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문과 문 사이의 백 규빗
23절과 27절은 안뜰의 문이 바깥뜰의 문과 서로 마주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문 사이의 거리는 백 규빗입니다. 바깥 문을 통과한 사람은 그 안쪽에 있는 또 다른 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배치는 바깥에서 안쪽으로 향하는 이동의 방향을 분명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아직 중심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계단이 하나 더 많아지다
이제 에스겔은 바깥뜰에서 안뜰로 들어갑니다.
길이를 재는 사람은 남쪽 문을 재고, 이어 동쪽 문과 북쪽 문을 잽니다. 안뜰의 문들도 바깥뜰의 문들과 거의 같은 치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문의 길이는 쉰 규빗이고, 너비는 스물다섯 규빗입니다. 방과 기둥과 현관도 비슷한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일곱 계단과 여덟 계단
바깥뜰의 북쪽 문과 남쪽 문에는 일곱 단의 계단이 있습니다(40:22, 26). 반면 안뜰의 남쪽, 동쪽, 북쪽 문에는 여덟 단의 계단이 있습니다(40:31, 34, 37).
안뜰은 바깥뜰보다 더 높은 곳에 놓인 공간으로 묘사됩니다. 사람은 바깥에서 문을 통과해 올라가고, 다시 안쪽 문을 통과하면서 더 올라갑니다. 성전의 중심으로 가까워질수록 공간적인 높낮이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공로나 영적 수준이 높아져야 하나님께 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전이라는 공간이 하나님께 속한 장소로 구별되어 있다는 사실을 건축 구조를 통해 보여 줍니다.
현관의 방향이 달라지다
안뜰 문에는 또 하나의 차이가 있습니다.
31절과 34절에서는 현관들이 바깥뜰을 향한다고 말합니다. 바깥쪽 문에서는 현관이 성전 쪽에 있었지만, 안뜰 문에서는 현관이 바깥뜰을 향합니다. 이는 두 종류의 문이 단순히 같은 건물을 반복해서 세운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 보는 관계 속에 배치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문과 문이 서로를 향하며, 그 사이에 바깥뜰이 놓입니다. 이것은 성전의 여러 공간이 따로 흩어져 있지 않고 하나의 전체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종려나무는 안쪽 문에도 있다
안뜰의 문에도 종려나무 무늬가 등장합니다.
바깥 문에서 처음 보았던 장식이 안쪽 문에도 반복됩니다. 이러한 반복은 성전 전체가 같은 방식의 장식을 함께 사용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성전의 구조는 매우 자세하게 묘사되지만, 그 안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설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실제 행동은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38절부터 달라집니다.
성전의 문 옆에 제물을 씻는 방이 있다
지금까지 에스겔은 문을 지나고 뜰을 바라보았습니다.
문들의 돌출 기둥들 곁에 출입구가 딸린 방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번제물을 씻게 되어 있었습니다.에스겔 40:38 · 두루새김
이어 문 현관에 상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 상에서는 번제물과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을 잡게 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은 성전의 회복이 단지 아름다운 건물을 다시 얻는 일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다시 이루어집니다.
왜 제물을 씻고 잡는 자리를 이렇게 자세히 설명할까?
39절에서는 문 현관 양쪽에 상이 두 개씩 있다고 합니다. 40절에서는 북쪽 문 입구와 현관 옆에도 상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41절은 제물을 잡는 상이 모두 여덟 개라고 정리합니다.
42절에서는 다듬은 돌로 만든 상 네 개가 등장합니다. 그 상에는 제물을 잡는 데 쓰는 도구들을 놓습니다.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제사는 그때그때 마음대로 처리하는 일이 아닙니다. 제물을 준비하는 장소가 있고, 필요한 도구를 놓는 장소가 있으며, 실제로 제물을 잡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는 정해진 절차와 준비가 있습니다.
번제물과 속죄제물과 속건제물
번제물은 레위기 1장에 자세히 설명됩니다. 제물을 제단에서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물은 레위기 4장과 연결되며, 죄와 부정함을 다루는 제사입니다. 히브리어 핫타트(חַטָּאָה)는 문맥에 따라 죄를 가리키기도 하고 그 죄나 부정함을 처리하기 위한 제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따라서 깨끗하게 하기 위한 제물이라는 의미를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속건제물은 레위기 5–7장에 등장하며, 특정한 잘못과 그에 대한 배상 또는 책임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 세 종류의 제사가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은 성전이 단순한 기념 공간이나 상징적인 건물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죄와 부정함의 문제를 다루며,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에스겔이 보고 있는 성전이 미래에 실제로 세워질 건물의 자세한 설계인지,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하나님을 섬기게 될 미래를 보여 주는 환상의 표현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이해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40장의 제사 시설을 단순한 장식으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깨끗하게 되는 문제를 실제 공간의 중심적인 기능으로 놓고 있습니다.
상 위에 놓인 제물의 고기
43절에서는 상 위에 제물의 고기가 놓여 있다고 합니다.
에스겔이 보고 있는 성전은 사람의 행동이 전혀 없는 추상적인 건축물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제물이 준비되고, 도구가 쓰이며, 제사장들이 일하게 됩니다.
이제 예언의 시선은 그러한 제사 시설에서 그 일을 담당할 사람들에게 옮겨갑니다.
조금 더 깊이
실제 설계로 읽는 쪽은 구체적인 치수와 제사장들이 맡은 일, 제사 시설에 주목합니다. 환상과 상징의 표현으로 읽는 쪽은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이상적인 질서와 이후 47장에 등장하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강 같은 요소에 주목합니다. 그런데 43절의 「갈고리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뜻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성전을 지키는 사람들과 제단을 섬기는 사람들
제물을 준비하는 장소가 소개된 뒤, 사람들을 위한 방들이 등장합니다.
안쪽 문 바깥의 안뜰에는 노래하는 사람들을 위한 방들이 있었습니다. 북쪽 문 곁에는 남쪽을 향한 방들이 있었고, 동쪽 문 곁에는 북쪽을 향한 방 하나가 있었습니다.에스겔 40:44 · 두루새김
구약에서 성전의 노래는 레위 사람들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역대상 25장에는 다윗 시대에 성전의 음악과 찬양을 담당하도록 따로 세운 사람들의 조직이 소개됩니다. 그러므로 노래하는 사람들을 위한 방이라는 표현은 성전의 예배가 제사뿐 아니라 찬양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성전의 직무와 제단의 직무
45절에서는 남쪽을 향한 방이 「성전 일을 맡아 돌보는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46절에서는 북쪽을 향한 방이 「제단 일을 맡아 돌보는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같은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에게도 서로 다른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원문에 쓰인 히브리어 샤마르(שָׁמַר)는 지키다, 보존하다, 주의 깊게 맡아 수행하다는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 일을 맡아 돌본다는 것은 단순히 외부 침입자를 감시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거룩한 일을 올바르게 수행하고 관리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성전은 정해진 기준에 따라 치수가 재어져 있지만, 건물이 질서정연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가 올바르게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건축의 질서가 사람의 책임과 연결됩니다.
왜 사독의 자손인가?
46절은 제단의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특별히 지목합니다.
「북쪽을 향한 방은 제단 일을 맡아 돌보는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다. 이들은 사독의 자손으로, 레위 자손 가운데 여호와야훼께 가까이 나아가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이다.」에스겔 40:46 · 두루새김
사독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활동한 제사장입니다. 사무엘하 8장 17절에서 사독의 이름이 등장하며, 열왕기상 2장 35절에서는 솔로몬이 아비아달 대신 사독을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그러나 에스겔서에서 사독의 자손이 특별히 강조되는 이유는 단순히 유명한 제사장의 후손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에스겔 44장 15절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사독의 자손들이 성소에서 맡은 일을 지켰다는 이유가 제시됩니다. 40장에서는 아직 그 설명이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이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섬기는 사람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앞에서는 성전의 공간이 바깥에서 안쪽으로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공간 안에서 누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섬길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공간의 질서와 섬김의 질서가 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에는 노래하는 사람들의 방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이어지는 45–46절에서는 이 방들이 제사장들이 맡은 일과 연결됩니다. 또한 북쪽을 향한 방의 위치를 동쪽 문 옆으로 읽는 전승과 남쪽 문 옆으로 읽는 전승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방들이 정확히 어떻게 놓여 있었고, 노래하는 사람들의 방과 제사장의 방이 어떤 관계였는지를 하나의 확정적인 구조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정사각형 뜰과 성전 앞의 제단
그가 뜰을 재니 길이가 백 규빗, 너비가 백 규빗인 정사각형이었습니다. 제단은 성전 앞에 있었습니다.에스겔 40:47 · 두루새김
바깥 문의 복잡한 구조와 여러 딸린 공간을 지나온 독자는 이제 매우 단순하고 질서정연한 공간을 마주합니다. 길이와 너비가 같은 공간은 균형과 대칭을 이루는 구조입니다. 앞에서 반복된 문들의 같은 치수와 함께, 성전 전체가 정돈된 질서 안에 놓여 있다는 인상을 강화합니다.
또한 제단이 성전 앞에 놓인다는 사실은 성소로 향하는 길의 중심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머무실 공간에 들어서기 전에,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질 자리를 봅니다.
이 장의 이동은 바깥 담에서 시작하여 여러 문과 뜰을 거친 뒤 제단을 지나 성전 현관으로 향합니다. 그 과정에서 성전은 점점 가까워집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에스겔은 뜻밖에도 멈춥니다.
성전 문 앞에서 멈춘 예언자
이제 길이를 재는 사람은 에스겔을 성전 현관으로 데려갑니다.
오랫동안 바깥 담과 문과 뜰을 지나온 뒤, 마침내 성전 건물의 입구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길이를 재는 일은 계속됩니다. 현관의 양쪽 돌출 기둥을 재고, 문 양쪽 부분의 너비를 재며, 현관의 길이와 너비를 잽니다.
현관의 길이는 스무 규빗, 너비는 열한 규빗이었습니다. 그곳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돌출 기둥들 곁에는 기둥이 양쪽에 하나씩 있었습니다.에스겔 40:49 · 두루새김
그리고 장이 끝납니다.
아직 성전의 안쪽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성전의 가장 거룩한 공간도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으로 들어오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성전이라는 건물과 하나님이 그곳에 머무신다는 사실이 서로 같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루살렘에는 이전에도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떠났습니다. 이제 에스겔은 새 성전의 구조를 보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는 장면은 아직 기다려야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모시기 위한 장소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이 만든 공간에 갇히시거나 그 공간에 의해 통제되시는 분은 아닙니다. 열왕기상 8장 27절에서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며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도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처로 구별되지만, 하나님을 인간의 소유로 만드는 장소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의 요한복음 2장 19–2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성전에 비유하시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에스겔 40장의 모든 치수가 곧바로 예수님의 몸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에스겔 40장은 먼저 포로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거처를 다시 보여 주시는 환상입니다. 그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이후 성전 주제의 발전을 읽는 출발점입니다.
맺으며 — 문 앞에 선 예언자
하나님의 거처를 향해 들어가는 길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고, 질서가 있으며, 맡겨진 일과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회복은 단순히 건물을 다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건물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구조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다시 머무실 것입니까?
에스겔 40장은 그 답을 서둘러 말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현관 앞에 서 있고, 길이를 재는 사람은 마지막 치수를 잽니다.
무너진 성전을 기억하던 예언자가 이제 새로운 성전의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아직 문 안에서 일어날 일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보여 주신 모든 것을 보았고, 이제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야 합니다.
폐허의 기억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거처의 문을 보여 주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