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9–10장 · 결혼 문제와 고백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다시 무너졌을 때

에스라 9장에는 뜻밖의 특징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심각한 죄가 드러나지만, 이 장에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되지 않습니다. 에스라는 명령을 내리지도, 잘못한 사람들을 불러 조사하지도 않습니다.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고, 오랫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하나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마저 예상과 다르게 끝납니다.

에스라는 용서를 구하는 말로 기도를 마치지 않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이런 기도가 가능할까요? 에스라는 왜 죄를 고백하면서도 용서를 요청하지 않을까요?

에스라 8장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9장에서는 그들이 돌아온 공동체 안에 이미 심각한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외부의 위험에서 구원받은 공동체가 이제 자신들 안에 있는 불신실함과 마주합니다.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89장 본문 읽기 →

가장 먼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앞장섰다

에스라 9:1–2 본문 →

이야기는 지도자들의 보고로 시작합니다.

이 일들이 끝나자 지도자들이 내게 와서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역겨운 행실을 하는 이 땅의 여러 민족에게서 자신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 민족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이집트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입니다.」에스라 9:1 · 두루새김

이 보고는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민족과 접촉하거나 이웃으로 지냈다는 사실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혼인과 그들의 행실을 따른 일이 고발의 핵심입니다.

가나안 사람, 헷 사람, 브리스 사람, 여부스 사람, 아모리 사람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던 시대의 기록에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신명기 7:1). 여기에 암몬, 모압, 이집트가 함께 나옵니다.

이것을 에스라 시대에 예루살렘 주변에 살던 모든 집단에 대한 정확한 민족별 조사 결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 목록은 이스라엘이 오래전부터 경계하도록 명령받았던 여러 민족을 불러오면서, 현재의 문제를 과거의 언약 역사와 연결합니다.

그런데 보고는 곧바로 더 구체적인 문제로 좁혀집니다.

「우리 백성이 그 민족들의 딸들을 자신과 자기 아들들의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자손이 이 땅의 여러 민족과 섞였습니다. 지도자들과 지방 관리들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이 일에 앞장섰습니다.」에스라 9:2 · 두루새김

원문에서 ‘씨’는 후손과 혈통을 가리킬 수 있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공동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다른 인간 집단보다 생물학적으로 우월하거나 순수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도록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서로 연결되면서도 구별해야 할 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삶의 방식이 다른 민족들의 관습에 동화되는 문제입니다. 1절은 그들을 「역겨운 행실을 하는」 민족들이라고 말하고, 11절도 그 행실을 문제 삼습니다.

다른 하나는 혼인 관계 자체가 공동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2절은 바로 그 결혼을 근거로 「거룩한 자손」이 섞였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에만 집중하면 본문이 실제로 혼인 관계를 문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약화하게 됩니다. 반대로 두 번째에만 집중하면 왜 그 혼인이 하나님 앞에서 불신실한 행동으로 여겨졌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본문은 결혼한 외국 출신 여자들이 각각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실제로 어떤 관습을 행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보고는 공동체 전체의 상태를 고발하지만, 각 결혼의 구체적인 사정까지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에스라 6:21에서는 주변 민족들의 부정한 행위에서 떠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돌아온 사람들과 함께 유월절에 참여합니다. 그러므로 에스라서 안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속하는 일과 단순한 출신의 구별은 완전히 동일하지 않습니다.

더 넓게 보면 모압 여인 룻도 자신의 민족적 출신을 버릴 수 없었지만, 나오미의 백성과 하나님을 자신의 백성과 하나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룻기 1:16). 룻기는 그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다윗의 조상이 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룻기 4:13–22).

이러한 본문들을 함께 고려하면, 에스라 9장을 모든 외국 출신 사람이 본질적으로 부정하다는 선언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룻의 이야기를 근거로 에스라가 제기한 혼인 문제를 가볍게 처리할 수도 없습니다.

에스라가 제기한 문제는 혼인과 공동체의 경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날의 민족적 배제나 혈통적 순수성을 위한 명령으로 직접 옮겨서는 안 됩니다. 에스라 9장을 이해하려면 이스라엘의 언약 역사와 그 시대의 혼인 관습을 존중해야 합니다.

백성이 지도자들을 따라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인지, 지도자들이 이미 널리 퍼진 관행에 참여한 것인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사람들이 그 불신실함의 앞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공동체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그 공동체의 불신실함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가

에스라 9:3–5 본문 →

보고를 들은 에스라의 반응은 격렬합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일부 뜯었습니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채 앉아 있었습니다.에스라 9:3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옷을 찢는 행동은 극심한 슬픔과 충격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옷을 찢었고(창세기 37:34), 요시야 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옷을 찢었습니다(열왕기하 22:11).

그는 책임자들을 불러 문책하지도 않고, 어떤 해결 방안을 발표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충격을 받은 채 앉아 있습니다.

그사이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떠는 모든 사람이 내게 모여들었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백성이 하나님을 배신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저녁 제물을 바칠 때까지 충격을 받은 채 앉아 있었습니다.에스라 9:4 · 두루새김

3절과 4절에는 같은 상태가 반복됩니다. 「충격을 받은 채 앉아 있었습니다」라는 표현입니다. 이 반복은 에스라가 받은 충격이 잠깐의 감정적 반응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말씀 앞에서 떤다’는 것은 단순히 두려운 감정을 느낀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행동을 판단하는 권위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 66:2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말에 떠는 사람에게 시선을 두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문맥에서 말씀 앞에 떠는 것은 자신의 힘과 지위를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서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책임 있는 지도자들이 불신실함에 앞장섰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떨던 사람들이 에스라 곁으로 모여듭니다.

저녁 제물을 바칠 때가 되어서야 에스라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저녁 제물을 바칠 때가 되자, 나는 슬퍼하며 몸을 낮추고 있다가 일어났습니다. 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향해 두 손을 펼쳤습니다.에스라 9:5 · 두루새김

저녁 제물은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정기적인 예배와 연결됩니다(출애굽기 29:38–42).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온 목적은 성전과 그 예배를 바르게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배의 시간에 그는 공동체가 하나님께 저지른 불신실함을 안고 무릎을 꿇습니다.

제사의 시간이 그에게 기도의 시간이 됩니다.

그러나 얼굴은 들지 못합니다. 곧이어 나오는 기도의 첫 문장이 그 이유를 알려 줍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가 아닌데 왜 「저희」라고 기도하는가

에스라 9:6–7 본문 →

에스라의 기도는 자신의 수치심을 고백하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저의 하나님, 저는 부끄럽고 수치스럽습니다. 저의 하나님, 주님을 향해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저희의 죄가 머리를 넘도록 쌓였고, 저희가 져야 할 죄의 책임이 하늘에 닿을 만큼 커졌기 때문입니다.」에스라 9:6 · 두루새김

처음에는 「저는」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죄를 말할 때는 「저희의 죄」, 「저희가 져야 할 죄의 책임」이라고 말합니다.

에스라는 자신에게 직접 제기된 혐의를 변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가 이 혼인 문제에 개인적으로 연루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죄를 지은 사람들을 가리켜 ‘그들’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자신이 모든 사람의 잘못을 개인적으로 저질렀다는 고백과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공동체의 운명을 분리하지 않는 고백입니다.

에스라는 공동체의 죄를 외부에서 관찰하는 재판관처럼 서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처한 상태를 자신의 수치로 받아들입니다.

특히 「머리를 넘도록」이라는 표현은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한다는 고백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죄가 머리를 넘도록 쌓였다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그는 공동체의 오랜 역사를 돌아봅니다.

「조상들의 시대부터 오늘까지 저희는 큰 죄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 저희와 저희 왕들과 제사장들은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처럼 칼에 쓰러지고 포로로 잡혀가며, 가진 것을 빼앗기고 수치를 당했습니다.」에스라 9:7 · 두루새김

에스라는 현재의 문제를 과거와 분리하지 않습니다.

열왕기하 17장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열왕기하 24–25장은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파괴를 전합니다. 두 기록 모두 이스라엘과 유다의 불순종을 멸망의 중요한 이유로 설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잘못했다는 소식이 더욱 무겁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과거에도 왕들과 제사장들의 불신실함이 공동체의 재난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있더라도 과거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았는지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기억 때문에 현재의 불순종을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죄에 관한 이야기만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8절에서 갑자기 방향이 바뀝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뚝 하나를 주셨다

에스라 9:8–9 본문 →

「그러나 이제 잠깐이나마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저희 가운데 피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남겨 두시고, 주님의 거룩한 곳에 저희를 위한 말뚝 하나를 주셨습니다. 저희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 생기가 돌게 하시고, 종살이 속에서도 조금이나마 다시 살아갈 힘을 주시려는 것입니다.」에스라 9:8 · 두루새김

에스라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완전히 회복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잠깐이나마」, 「피하여 살아남은 사람들」, 「말뚝 하나」라고 말합니다. 모두 제한된 현실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장막을 세우려면 땅에 단단히 박힌 말뚝이 필요합니다. 말뚝이 없다면 장막이 안정되게 서기 어렵습니다. 에스라가 이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다시 머무를 자리를 주셨다는 뜻을 담습니다.

이 작은 이미지는 돌아온 공동체의 현실과 잘 어울립니다. 성전은 다시 세워졌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다윗 왕조의 독립된 나라가 회복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돌아왔지만 이전의 모든 것을 되찾은 것은 아닙니다.

눈에 생기가 돌게 한다는 것은 어둠과 절망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다시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이미지입니다. 에스라는 자신들의 형편을 과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종살이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이 긴장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저희는 종입니다. 그러나 저희 하나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페르시아 왕들 앞에서 저희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저희 하나님의 성전과 그 무너진 곳들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다시 살아갈 힘을 주시고,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저희에게 울타리를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에스라 9:9 · 두루새김

그들은 고향에 돌아왔지만 정치적으로 완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여기서 종살이는 돌아온 모든 사람이 개인적으로 노예 신분이었다는 뜻보다, 다른 나라의 통치 아래 놓인 이스라엘의 처지를 나타냅니다. 에스라는 페르시아 왕들이 베푼 호의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일로 이해합니다.

8절에서는 「말뚝」이었고, 9절에서는 「울타리」입니다. 말뚝은 머무를 자리를 붙들어 주는 이미지고, 울타리는 그 자리를 둘러 보호하는 이미지입니다.

이 울타리를 예루살렘의 실제 성벽이 이미 다시 세워졌다는 기록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이 은혜를 말한 직후 다시 죄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은 죄를 가볍게 만들지 않습니다. 에스라에게는 오히려 그 은혜를 받은 뒤에도 하나님을 저버렸다는 사실이 가장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왜 결혼 문제가 언약의 문제로 이어지는가

에스라 9:10–12 본문 →

에스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한 뒤 묻습니다.

「저희 하나님,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이제 저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저희가 주님의 명령들을 저버렸습니다.」에스라 9:10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많은 은혜를 베푸셨는데, 그 명령을 저버린 사람들이 무슨 말로 자신을 변호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어서 에스라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명령하신 내용을 떠올립니다. 그 명령은 땅의 부정함과 여러 민족의 역겨운 행실을 말하고, 그들과 혼인 관계를 맺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신명기 7:1–4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민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도 밝힙니다. 그러한 결합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신들을 따르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4:12–16도 가나안 주민들과 맺는 관계가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레위기 18:24–30에서는 땅이 그곳에 사는 민족들의 부정한 행위로 더럽혀졌다고 말합니다.

에스라 9:11–12는 이러한 말씀들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그 전체가 구약의 특정 한 구절을 그대로 옮긴 직접 인용은 아닙니다. 여러 명령의 내용과 표현이 하나의 기도 속에 결합되어 있습니다.

혼인은 단순히 두 사람 사이의 사적인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혼인은 가문과 가문을 연결하고, 경제적·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며,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 관습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율법은 혼인 관계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흔들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 9장은 신명기 7장의 경고를 그대로 반복하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의 기도에서는 혼인 자체가 언약 공동체의 경계를 훼손하는 행동으로 강하게 표현됩니다. 따라서 이 장을 읽을 때는 우상숭배에 대한 경계와 혼인 관계에 대한 금지가 함께 작동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니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과 결혼시키지 말고, 그들의 딸들을 너희 아들들의 아내로 맞아들이지 마라. 그들이 평안하고 잘살기를 결코 구하지 마라. 이는 너희가 강해지고 그 땅의 좋은 것을 먹으며, 그 땅을 너희 자손에게 영원히 물려주게 하려는 것이다.』」에스라 9:12 · 두루새김

「그들이 평안하고 잘살기를 결코 구하지 마라」라는 표현은 신명기 23:6에 나오는 암몬과 모압에 대한 명령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암몬과 모압이 보인 적대적인 태도를 배경으로 그들의 평안과 번영을 구하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신명기 23:3–6).

에스라는 이 표현을 여러 민족과의 혼인 문제를 다루는 기도 안으로 가져옵니다. 따라서 이것을 모든 시대의 모든 외국인에 대한 보편적인 태도로 곧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예레미야 29:7에서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사는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과 대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을 이용하여 다른 한쪽을 지워 버릴 수는 없습니다.

에스라가 인용하는 명령의 목적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 목적은 이스라엘이 강해지고, 땅의 좋은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속 살아가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레위기 18장은 땅에서 일어나는 역겨운 행위 때문에 그 땅이 주민들을 토해 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레위기 18:24–28). 이스라엘은 이미 그 경고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땅을 잃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제 돌아온 사람들이 다시 같은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 에스라의 두려움입니다.

마땅한 벌보다 적게 받았다는 고백

에스라 9:13–14 본문 →

에스라의 기도는 다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를 나란히 놓습니다.

「저희의 악한 행실과 큰 죄의 책임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저희에게 닥쳤습니다. 그런데 저희 하나님이신 주님께서는 저희 죄에 마땅한 벌보다 적게 벌하시고, 이처럼 피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남겨 주셨습니다.」에스라 9:13 · 두루새김

이것은 고통을 겪은 모든 사람에게 그 고통이 자신의 죄보다 가볍다고 말할 수 있다는 일반 원칙이 아닙니다. 에스라가 이스라엘의 언약에 대한 불순종과 포로 생활의 역사를 이해하며 드리는 고백입니다.

그 근거는 여전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멸망을 겪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잃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앞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다시 삶의 자리를 마련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벌을 제한하신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에스라는 더욱 두려워합니다.

「그런데도 저희가 또다시 주님의 명령들을 어기고, 이런 역겨운 행실을 하는 민족들과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저희에게 분노하셔서 저희를 모두 없애고, 남은 사람도 피하여 살아남은 사람도 없게 하시지 않겠습니까?」에스라 9:14 · 두루새김

에스라는 현재의 죄를 따로 떨어진 한 번의 실수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심판을 받고도 반복되는 불순종으로 바라봅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피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남겨 두셨다고 말했습니다. 13절에서도 하나님께서 「피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남겨 주셨다고 말합니다. 14절에서는 「남은 사람도 피하여 살아남은 사람도 없게」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사람들의 존재가 이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다시 위태로워집니다.

그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존재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이 지금 예루살렘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으나 설 수 없는 사람들

에스라 9:15 본문 →

마침내 에스라의 기도가 마지막 절에 이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 주님은 의로우십니다. 저희가 오늘처럼 피하여 살아남은 사람들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저희는 죄의 책임을 진 채 주님 앞에 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아무도 주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에스라 9:15 · 두루새김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사람들이고, 하나님께서 다시 예배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의 책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받아 주셔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마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바로 이 상태를 하나님 앞에 그대로 내놓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미 그 자비를 길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용서를 당연하게 요청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에스라가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분명하게 알고 있기에, 그 은혜를 다시 받을 자격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변명을 내려놓습니다. 공동체가 겪은 고통을 자신들의 불순종을 정당화하는 이유로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용서받은 사람들이니 이번에도 용서받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자신들은 죄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만을 고백합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의 히브리어 접속사 키(⁨כִּי⁩)는 앞의 고백에 대한 이유를 나타낼 수도 있고, 앞말에 이어 현재 상황을 제시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읽으면,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이유를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서 찾습니다. 두 번째로 읽으면,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고백 뒤에 자신들이 지금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두 읽기 모두 본문의 흐름에 어울립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에스라는 하나님께 불의를 돌리지 않고, 자신들의 생존을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합니다. 원문에서는 하나님 앞에 있는 것과 그 앞에 설 수 없는 것이 나란히 놓여 언뜻 모순처럼 들립니다. 두루새김은 뒤의 말을 「떳떳이 설 수」 없다고 풀어 옮겼습니다. 이 점에서 에스라의 기도는 다니엘 9:4–19와 닮았습니다. 다니엘 역시 이스라엘의 죄를 자기 공동체의 죄로 고백하고, 하나님께 의로움과 자비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두 기도의 결말은 다릅니다. 다니엘은 분명하게 용서와 회복을 간구합니다(다니엘 9:17–19). 반면 에스라 9장은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없다는 고백에서 멈춥니다.

은혜가 죄의 무게를 더 크게 만드는 순간

에스라 9:1–15 본문 →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먼저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기억할수록 현재의 불순종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습니다. 에스라의 기도에서 죄는 추상적인 도덕적 결함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신 하나님께 저지른 불신실함입니다.

이 장에는 아직 해결책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선언도 없습니다.

성전에서는 저녁 제물을 바치는 시간이 되었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떨며 모여들었습니다. 에스라는 찢어진 옷을 입은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하나님께 펼쳤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감추지 않은 채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은 사람이, 그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는 사실을 가장 깊이 깨닫는 자리. 에스라 9장은 바로 그 자리에서 기도를 멈춥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