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4–8장 · 백성을 향한 고발

하나님을 안다면서 하나님 없이 사는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적이 다가오고 심판이 선포되는 순간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 있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르는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을 안다고 확신하면서도 그분을 삶의 결정에서 제외한 민족이었습니다.

호세아 8장은 이 모순을 정치와 경제, 예배와 국가의 안전이라는 구체적인 영역에서 밝혀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의지하려고 만든 것들이 어떻게 도리어 그들을 무너뜨리는지를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15분소단락 78장 본문 읽기 →

뿔나팔이 울릴 때, 하나님을 안다는 고백이 들린다

호세아 8:1–3 본문 →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뿔나팔을 입에 대어라.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야훼의 집을 덮친다.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고 내 가르침을 거역했기 때문이다.」호세아 8:1 · 두루새김

뿔나팔은 전쟁의 위험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그런데 적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여호와야훼의 집」입니다. 하나님께 속했다고 여겨지는 곳이 공격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안전의 근거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관계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문제 삼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으면서 언약을 어겼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았으면서 그것을 거역했습니다.

그런데 이 급박한 순간 이스라엘이 외치는 말이 뜻밖입니다.

「그들은 내게 부르짖는다. 『저의 하나님, 저희 이스라엘은 주님을 압니다!』」호세아 8:2 · 두루새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정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동을 한 문장으로 판정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좋은 것을 버렸다. 원수가 그를 뒤쫓을 것이다.」호세아 8:3 · 두루새김

원수가 먼저 좋은 것을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로 원수가 들어옵니다.

호세아가 말하는 멸망은 단순히 강대국보다 힘이 부족해서 패배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지키도록 주어진 관계와 삶의 질서를 스스로 저버린 결과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호와야훼의 집」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특정 건물만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또는 그들이 사는 땅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독수리의 이미지는 신명기 28:49–51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을 향해 멀리서 독수리처럼 날아오는 민족이 등장하며, 그 민족은 땅에서 거둔 곡식까지 먹어 치웁니다. 호세아 8장에서도 독수리의 등장에 이어 적에게 쫓기는 백성과 외국인에게 먹히는 곡식이 나옵니다. 직접 인용이라기보다 언약의 경고가 다시 울리는 것으로 읽을 만합니다. 여기서 「좋은 것」이 정확히 무엇 하나를 가리키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언약과 가르침을 가리킬 수도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던 참된 선을 두루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앞선 문맥을 고려하면 둘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삶의 길을 버렸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을 세우고 송아지를 만든 사람들

호세아 8:4–6 본문 →

「그들은 왕들을 세웠지만 내가 시킨 일이 아니었다. 지도자들도 세웠지만 내가 인정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은과 금으로 자기들을 위한 우상을 만들었으니, 결국 멸망할 것이다.」호세아 8:4 · 두루새김

이 말씀은 2절의 고백과 맞부딪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저희 이스라엘은 주님을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세운 지도자들을 두고 「내가 인정한 일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대의 북이스라엘에서는 왕위를 둘러싼 폭력과 정변이 잇따랐습니다. 열왕기하 15:8–30을 읽으면 스가랴가 살룸에게 살해되고, 살룸은 므나헴에게 살해되며, 브가히야는 베가에게 살해되고, 다시 베가는 호세아에게 살해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권을 유지하거나 차지하는 일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보다 정치적 힘에 좌우되던 시대였습니다.

왕을 세우는 일과 우상을 만드는 일은 서로 다른 영역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나의 행동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자기 손에 있는 자원과 권력을 사용하여 자신들을 지켜 줄 존재를 마련한다는 점입니다.

열왕기상 12:26–33에서 여로보암은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가면 마음이 유다 왕에게 돌아갈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금송아지 둘을 만들고 벧엘과 단에 두었습니다. 그의 출발점은 종교적 필요만이 아니라 정치적 불안이었습니다. 왕권의 안정을 위해 예배의 장소와 상징까지 새로 마련한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금송아지는 단순히 이스라엘과 무관한 외국 신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열왕기상 12:28에서 여로보암은 그것을 출애굽과 연결했습니다. 송아지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상징한다고 이해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에게 그 차이는 결정적인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고 출애굽의 역사를 이야기하더라도, 사람들이 만든 형상을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상으로 세우는 순간 이미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에서 나온 것이다. 기술자가 만든 것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사마리아의 송아지 우상은 반드시 산산조각이 될 것이다.」호세아 8:6 · 두루새김

사람이 만든 것은 아무리 거룩한 의미를 부여해도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 만든 대상이 정작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형상과 제도 안에 넣으려 했던 시도 전체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백성의 「압니다」(⁨יָדַע⁩)와 하나님의 「알지 못했다」가 맞부딪힙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알지 못하심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내가 인정한 일이 아니었다」로 옮겨, 그들의 정치적 결정이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이루어졌다는 책망을 드러냅니다. 5절에서 두루새김은 「네 송아지 우상은 버림받았다」고 옮깁니다. 이 자리의 원문은 주어가 분명하지 않아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6절은 그 송아지 우상의 운명을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바람을 뿌렸는데 왜 폭풍을 거두는가

호세아 8:7–8 본문 →

「그들은 바람을 뿌리니 폭풍을 거둘 것이다. 거둘 곡식이 없고, 싹이 나도 가루를 낼 수 없다. 혹시 가루를 내더라도 외국인들이 먹어 치울 것이다.」호세아 8:7 · 두루새김

농부는 씨앗을 뿌리고 곡식을 거둡니다. 뿌린 것과 거두는 것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처음부터 이상합니다. 이스라엘이 뿌린 것은 씨앗이 아니라 바람입니다.

바람은 손으로 붙잡을 수도, 땅속에 심을 수도 없습니다. 아무런 열매를 낼 수 없는 것을 마치 씨앗인 것처럼 뿌린 셈입니다.

그런데 거두는 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폭풍입니다.

본문은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합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아무런 결실도 만들어 내지 못하며, 그 선택의 결과는 처음보다 훨씬 파괴적인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점점 더 깊어지는 상실이 있습니다. 생산 자체가 실패하고, 생산에 성공하더라도 그 결실을 누리지 못합니다.

앞 단락에서 이스라엘은 은과 금으로 자신을 지켜 줄 대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수고의 끝에 남은 것은 자신들이 먹을 양식조차 확보하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8절은 농작물에 적용했던 이미지를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합니다.

「이스라엘은 삼켜졌다. 이제 그들은 여러 나라 사이에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릇처럼 되었다.」호세아 8:8 · 두루새김

7절에서는 외국인들이 곡식을 「먹어 치울 것」이라고 합니다. 8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체가 「삼켜졌다」고 합니다. 원문에서는 곡식과 이스라엘이 먹히는 모습을 같은 동사로 연결합니다.

먹히는 대상이 곡식에서 민족으로 바뀌면서 심판의 범위가 드러납니다. 잃어버린 것은 재산이나 수확물만이 아니라 나라가 존속할 기반과 존엄입니다.

그릇은 원래 무엇을 담거나 사용하는 데 필요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릇이 되었다는 것은, 여러 나라 사이에서 이스라엘의 가치와 지위가 철저하게 낮아졌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강하고 중요한 나라로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의 도움으로 지위를 얻으려 할수록, 도리어 그들 사이에서 하찮게 취급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자유를 지키려고 돈을 내고, 자유를 잃는다

호세아 8:9–10 본문 →

「그들이 아시리아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은 홀로 다니는 들나귀와 같다. 그들은 돈을 주고 애인들을 얻었다.」호세아 8:9 · 두루새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는 서아시아 여러 나라를 압박하던 강대국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도 그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열왕기하 15:19–20에는 므나헴 왕이 아시리아 왕 불에게 은 천 달란트를 주고 자신의 왕권을 지지받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돈은 이스라엘의 부유한 사람들에게 부담시켜 마련했습니다. 호세아 8장이 바로 이 사건 하나만을 가리키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정치적 보호를 위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던 현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입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이러한 외교를 단순히 조공이나 동맹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호세아 2장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필요한 양식과 생활의 풍요를 애인들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을 먹이고 돌보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2:5–8). 8장에서는 관계가 더욱 기묘해집니다. 이스라엘은 애인의 사랑을 받는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애인들을 얻습니다.

사랑이 거래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동맹의 상대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들이 여러 나라에 값을 치르더라도, 이제 내가 그들을 모으겠다. 그들은 지도자들 위에 선 왕이 지운 짐 때문에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호세아 8:10 · 두루새김

이스라엘이 돈을 지불해 얻으려 했던 정치적 보호가, 결국 이스라엘의 힘을 소모시키는 짐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여러 나라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돈을 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들을 모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 미래는 여전히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홀로 다니는 들나귀」를 담은 히브리어 문장은 압축적이어서 이 이미지의 정확한 연결 방식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에브라임은 홀로 다니는 들나귀와 같다」고 옮겨 에브라임의 처지를 묘사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홀로 움직이는 들나귀와 여러 애인을 돈 주고 구하는 행동이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내가 그들을 모으겠다」는 말은 다른 예언서에서는 회복의 약속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곧바로 무거운 짐과 쇠약해지는 상황이 이어지므로, 심판을 위해 모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여지가 큽니다. 이 구절만으로 회복의 약속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지막 문장의 히브리어도 해석이 갈립니다. 두루새김은 「지도자들 위에 선 왕」으로 옮겨 강력한 지배자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습니다. 원문은 왕과 지도자들을 나란히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에 해당하는 표현도 쇠약해짐이나 고통의 시작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제단은 많아졌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낯설어졌다

호세아 8:11–13 본문 →

「에브라임은 제단을 많이 세워 죄를 지었다. 그 제단들이 에브라임에게 죄짓는 곳이 되었다.」호세아 8:11 · 두루새김

호세아는 다시 종교의 영역으로 돌아옵니다.

일반적으로 제단이 많아지고 제사가 활발해지면 종교적인 열심이 커졌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제단들이 죄짓는 곳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제단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를 스스로 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어떻게 나아오라고 말씀하셨는지는 외면했습니다.

「내가 그에게 내 가르침을 수없이 많이 써 주어도, 그는 그것을 낯선 것으로 여긴다.」호세아 8:12 · 두루새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받은 가르침을 낯선 것으로 취급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자기 삶에 속하지 않는 낯선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간 끝에 실제 외국인들에게 자신의 곡식과 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

자신의 것이어야 할 말씀은 낯선 것이 되고, 낯선 민족들은 자신의 땅에서 주인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그들은 내게 바치는 제물로 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먹는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고 그들의 죄를 벌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이집트로 돌아갈 것입니다.호세아 8:13 · 두루새김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는 행위 자체가 언제나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에는 제물의 일부를 먹는 절차도 있었습니다(신명기 12:27).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고 고기를 먹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호세아 6:6에서 하나님께서 제사보다 한결같은 사랑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제사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언약 관계의 표현이어야 했습니다. 그 관계를 무시하면서 제사의 행위만 지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 단순한 외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신 곳입니다. 따라서 이집트로 돌아간다는 말은 출애굽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하신 백성이 다시 속박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무엇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는지는 제물과 제사를 드린 사람들 사이에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본문은 제사를 드리는 겉모습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얻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실제 이집트로의 이동이나 피난을 가리킬 가능성과 함께, 출애굽 이전의 종속 상태로 돌아간다는 상징적 의미도 고려해야 합니다. 호세아 11:5에서는 아시리아의 지배를 말하기 때문에 두 본문을 모두 단순한 이주 경로로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자기를 만든 이를 잊고, 자기가 만든 것들 속에 숨다

호세아 8:14 본문 →

호세아 8장은 마지막에 뜻밖의 장소로 시선을 옮깁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만든 이를 잊고 궁전들을 지었으며, 유다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들을 늘렸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 성읍들에 불을 보내겠다. 그 불이 궁전들을 삼킬 것이다.」호세아 8:14 · 두루새김

이 장의 대부분은 북이스라엘의 왕권과 송아지 우상, 아시리아를 향한 외교를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남유다도 심판의 시야 안으로 들어옵니다.

유다는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정치적 실패를 바라보며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들을 늘린 일 역시 살피십니다.

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송아지 우상을 두고 기술자가 만든 것이니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자기를 만든 이를 잊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것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자신들을 만드신 분을 잊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을 하나님처럼 섬긴 것은 단순한 종교적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에게서 빼앗아 자기 손으로 옮겨 놓으려는 태도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궁전을 지어 왕권의 위엄을 드러내고, 성벽을 쌓아 적의 침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성읍들을 불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벽이 높아도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의 결과까지 막아 낼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이 「궁전들」로 옮긴 히브리어 헤칼로트(hêkālôt)는 왕의 궁전과 신전 양쪽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이 자리를 테메네(teménē), 곧 신성한 구역이나 성소들을 가리키는 말로 옮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왕권을 과시하는 궁전들을 지었다는 의미와, 잘못된 예배를 위한 종교 시설을 늘렸다는 의미가 모두 가능합니다. 원문의 대명사가 이스라엘과 유다 중 어느 쪽에 각각 연결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이 성읍과 궁전들을 삼킨다는 심판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호세아 8:1–14 본문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구원과 성품을 기억하며, 정치적 선택과 일상의 삶에서도 그분의 뜻을 신뢰하는 관계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분의 말씀을 낯선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호세아는 모든 정치적 제도나 경제적 수단, 인간의 노력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삶을 끝까지 보장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합니다.

호세아 8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스라엘의 궁전과 유다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이 서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시간과 자원을 들여 완성했을 건물들입니다. 그 안에는 왕의 권위와 국가의 재산과 백성의 안전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 건물들의 크기나 견고함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앞에 한 문장을 놓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만든 이를 잊고 궁전들을 지었으며, 유다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들을 늘렸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지었는가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누구를 잊었는가였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끝나자, 성읍들을 향해 불이 다가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