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9–10장 · 끊어진 수확의 기쁨
기쁨을 잃은 백성과 처음 발견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은 추수를 마치고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타작마당에는 곡식이 쌓이고, 포도즙을 짜는 틀에서는 새 포도주가 흘러나옵니다. 한 해 동안 수고한 결실을 거두며 축제를 벌일 만한 때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기쁨의 한가운데서 예언자는 뜻밖의 말을 전합니다.
왜 기뻐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수확이 나쁜 것도 아니고, 아직 적군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누리면서도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백성이, 결국 선물뿐 아니라 그것을 누릴 자리까지 잃어버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장을 끝까지 읽으면 더욱 깊고 아픈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이스라엘을 발견하셨던 순간을 직접 되돌아보시는 것입니다.
추수의 기쁨이 몸을 판 대가가 되다
호세아가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다른 민족들처럼 들떠 기뻐하지 마라. 네 하나님을 떠나 음행했기 때문이다. 너는 곡식 타작마당마다 몸을 판 대가를 좋아했다.」호세아 9:1 · 두루새김
타작마당은 곡식의 낟알을 줄기와 겨에서 분리하는 곳입니다. 추수를 마친 사람들이 수확의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는 자리이며, 한 해 동안의 수고가 결실을 맺었다는 기쁨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호세아가 사용하는 음행의 말은 단순히 성적인 부도덕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 관계를 혼인 관계에 빗대어, 다른 신들을 섬기고 의지하는 일을 배우자의 배신처럼 묘사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곡식의 풍요를 하나님께 받은 선물로 여기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긴 대가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호세아 2:5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양식과 물과 의복과 기름을 연인들에게서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8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셨다고 밝히십니다.
이 배경에서 9장의 타작마당은 단순한 경제 활동의 장소가 아닙니다. 누가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지를 놓고 하나님과 백성의 이해가 충돌하는 자리입니다.
바알 숭배가 농경 생활의 풍요와 연결되었다는 점도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9:1 자체는 타작마당마다 어떤 구체적인 의식이 행해졌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실제 음행 행위가 동반되었다고 이 구절만으로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들의 기쁨을 막으십니까?
기쁨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다른 신을 섬긴 대가로 여기는 순간, 그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타작마당과 포도즙을 짜는 틀은 그들을 먹여 살리지 못하고, 새 포도주도 이스라엘의 기대를 저버릴 것이다.」호세아 9:2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풍요가 자신들을 보호하고 미래를 보장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풍요는 스스로를 이어 갈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상실은 곧 곡식과 포도주를 넘어섭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잃을 뿐 아니라, 그것을 먹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던 장소까지 잃게 됩니다.
빵은 남아 있어도 하나님께 가져갈 수 없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땅에서 살지 못할 것이다. 에브라임은 이집트로 돌아가고, 아시리아에서는 부정한 음식을 먹을 것이다.」호세아 9:3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땅을 자신들이 소유한 재산처럼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여호와야훼의 땅」이라고 부르십니다. 레위기 25:23에서도 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하며, 이스라엘은 그분 앞에서 나그네와 머물러 사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시고 백성에게 살도록 허락하신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땅을 잃는 것은 경제적 기반이나 정치적 독립을 잃는 것 이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자리를 잃는 것입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종살이하던 곳이고, 아시리아는 호세아 시대에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강대국입니다. 이집트로 돌아간다는 말은 실제 이집트로의 이동을 포함할 수도 있고, 과거의 억압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두 지명을 반드시 모든 백성이 차례로 옮겨 가는 경로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먹는가도 하나님의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레위기 11장; 신명기 14:3–21).
그런데 포로 생활에서는 그러한 구별을 온전히 지키기 어려워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정함을 외국인이나 외국 땅이 본래 악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과 예배의 질서에서 떨어져 나간 이스라엘의 처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께 포도주를 부어 바치지 못하고, 그들의 제물도 그분을 기쁘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 제물은 초상집에서 먹는 빵과 같아서, 먹는 사람은 누구나 부정해질 것이다. 그 빵은 자기들이 먹고 사는 데 쓰일 뿐, 여호와야훼의 집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호세아 9:4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죽은 사람과의 접촉은 예배와 관련된 규정에서 부정함을 가져왔습니다(민수기 19:11–16). 또한 신명기 26:14에서는 거룩하게 구별된 것을 애도 중에 먹지 않았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따라서 「초상집에서 먹는 빵」은 단순히 슬픔 속에서 먹는 음식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과 관련된 부정함 때문에 거룩한 용도로 사용할 수 없는 음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먹는 행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먹는 행위에 담겨 있던 관계가 사라집니다.
「정해진 모임의 날에, 여호와야훼의 축제 날에 너희는 무엇을 하겠느냐?」호세아 9:5 · 두루새김
이스라엘에게 절기는 한 해의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수확과 계절의 변화는 정해진 축제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돌보심을 기억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포로가 된 이스라엘에게도 달력은 계속 흘러갈 것입니다. 축제일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고향을 떠났고, 예배의 자리를 잃었고, 바칠 제물도 없습니다. 시간은 돌아왔지만, 그 시간을 함께 기뻐할 삶의 질서는 무너져 있습니다.
「보아라. 그들은 파괴를 피해 떠났다. 이집트가 그들을 모으고, 멤비스가 그들을 묻을 것이다. 그들이 아끼던 은붙이는 쐐기풀이 차지하고, 그들의 천막에는 가시덤불이 자랄 것이다.」호세아 9:6 · 두루새김
원래 사람이 소유하고 지키던 자리를 이제는 식물이 차지합니다. 사람들이 떠난 곳에서 잡초는 자랍니다. 은붙이는 남아 있어도 그것을 소중히 여기던 사람들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풍성한 수확으로 들떠 있던 땅이, 이제는 그 수확을 기뻐할 사람이 사라진 땅으로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멤비스는 고대 이집트의 주요 도시이자 장례와 매장 문화에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명의 등장은 단순한 지리 정보가 아니라, 피난처라고 생각했던 장소가 죽음의 장소가 되는 반전을 강화합니다.
위험을 알리는 사람이 적으로 취급되다
「벌을 받을 날이 왔다. 저지른 대로 갚음을 받을 날이 왔다. 이스라엘은 알게 될 것이다. 너희는 『예언자는 어리석다. 영의 사람은 미쳤다』라고 말한다. 너희 죄가 크고 미움이 심하기 때문이다.」호세아 9:7 · 두루새김
여기서 호세아의 말투가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앞으로 벌어질 상실을 예고했습니다. 이제는 그날들이 이미 도착한 것처럼 선언합니다. 「왔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되면서, 미래의 경고가 피할 수 없는 현재의 현실처럼 다가옵니다.
이 구절에는 두 가지 주요한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백성이 참된 예언자를 비웃는 말로 읽는 것입니다. 다른 읽기는 하나님께서 거짓 예언자들을 비판하시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8절의 위험을 알리는 사람도 다르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내 하나님과 함께 에브라임을 지키며 위험을 알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가는 길마다 새잡이의 덫이 있고, 그의 하나님의 집에는 그를 향한 미움이 있다.」호세아 9:8 · 두루새김
위험을 알리는 사람은 적의 접근을 살펴 백성에게 경고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경고를 들어야 할 백성이 도리어 그를 위험한 존재로 취급합니다.
백성을 지키는 사람이 백성에게 공격받는 것입니다.
반면 예언자 자체가 새잡이의 덫이 되었다는 읽기에서는, 잘못된 종교 지도자가 백성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는 비판이 됩니다. 어느 경우든 7–8절은 단순한 개인적 다툼을 넘어선 문제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분별해야 할 공동체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브아 때처럼 깊이 썩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고 그들의 죄를 벌하실 것이다.」호세아 9:9 · 두루새김
사사기 19장에서 기브아 사람들은 한 여성을 집단으로 성폭행했고, 그는 결국 죽었습니다. 이후 이 사건은 베냐민 지파와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의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공동체 내부의 폭력과 정의의 붕괴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과거의 깊은 부패 속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기브아 사건의 핵심에는 힘없는 사람을 보호하지 못하고, 악행을 바로잡기보다 공동체 전체가 폭력에 빠져드는 현실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경고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호세아의 비판은 종교적 의식의 실패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는 일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의 붕괴와도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백성이 참된 예언자를 비웃는 읽기의 경우 뒤에 나오는 「너희 죄가 크고 미움이 심하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은 그들이 예언자를 적대하는 이유가 됩니다. 예레미야 23:16–22와 에스겔 13:1–10에는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전하는 예언자들에 대한 비판이 나옵니다. 히브리어 문장에서는 주어와 문장의 연결 방식이 압축되어 있어 두 방향의 해석이 모두 제시될 수 있습니다. 호세아가 기브아를 언급할 때 바로 이 사건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기브아가 사울과도 연결되는 장소이므로(사무엘상 10:26), 호세아가 염두에 둔 역사적 사건을 완전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광야에서 포도를 발견하셨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포도를 찾은 것처럼 이스라엘을 만났다. 무화과 철에 맨 먼저 익은 열매를 보듯 너희 조상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바알브올에 가서 그 부끄러운 우상에게 자신을 바쳤고, 자기들이 사랑한 우상처럼 역겨운 존재가 되었다.」호세아 9:10 · 두루새김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처음 보셨을 때를 되돌아보십니다.
광야는 포도나무가 풍성하게 자랄 것으로 기대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포도를 찾는다면 얼마나 뜻밖의 기쁨이겠습니까. 무화과 철에 맨 먼저 익은 열매는 기다리던 사람이 특별히 반길 만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보셨고, 만나셨고, 기뻐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7:7–8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시고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기 위해서였다고 설명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제공했기 때문에 사랑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특별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기억이 등장한 직후, 문장은 날카롭게 꺾입니다.
바알브올 사건은 민수기 25:1–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압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며 바알브올을 섬긴 사건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끌어 오신 백성이, 바로 그 여정의 중요한 순간에 다른 신에게 자신을 내맡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바알브올의 의식에 참여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를 나타내는 행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고 숭배하는 대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어떤 대상을 가장 귀하게 여길 때, 그 대상이 삶의 가치와 행동을 형성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백성이었지만, 자신들이 사랑한 우상과 닮은 존재가 되어 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에 「몸을 판 대가」를 좋아했다고 비판받았습니다. 이제 그들이 과거부터 무엇을 사랑해 왔는지가 밝혀집니다. 원문에서는 두 자리 모두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연결됩니다. 그들의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에서 그것을 준다고 믿는 다른 대상으로 옮겨 갔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모습까지 변했습니다.
그래서 10절의 회상은 뒤따르는 심판을 더욱 아프게 만듭니다.
잃어버리는 대상은 처음부터 아무 의미 없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포도처럼 기뻐하셨던 백성입니다.
포도와 무화과의 기쁨이, 자녀 없는 미래로 바뀌다
「에브라임의 영광은 새처럼 날아갈 것이다. 그들은 아이를 낳지도, 배 속에 품지도, 아이를 갖지도 못할 것이다.」호세아 9:11 · 두루새김
여기서 호세아는 풍요의 상실을 농작물에서 자녀와 후손의 문제로 옮깁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자녀는 단순히 개인적인 행복의 대상만이 아니었습니다. 가문과 공동체의 미래를 이어 가는 존재였습니다. 자녀가 자라고 새로운 세대를 이루는 것은 땅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새는 순식간에 날아가 붙잡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자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렇게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생명의 시간은 아이를 갖는 데서 시작하여 배 속에 품는 때를 거쳐 아이를 낳는 때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 순서를 거꾸로 말합니다.
이미 기대하던 출산이 사라지고, 그 이전의 임신도 사라지고, 마침내 생명이 시작되는 가능성까지 사라지는 식으로 상실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설령 그들이 자녀들을 길러도, 내가 그 자녀들을 빼앗아 한 사람도 남지 않게 하겠다. 내가 그들을 떠날 때 그들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호세아 9:12 · 두루새김
이것은 단순히 출생률의 감소가 아닙니다. 전쟁과 재난 속에서 다음 세대가 사라지는 공동체의 파멸을 묘사합니다. 땅을 빼앗겨도 후손이 남아 있다면 돌아갈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손마저 사라진다면 그 미래 자체가 끊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먹이시고, 돌보시고, 기뻐하신 분이라고 말씀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지키시는 관계가 심판 가운데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내가 본 에브라임은 좋은 터에 심긴 두로와 같았다. 그러나 에브라임은 제 자녀들을 죽일 자 앞에 데리고 나가게 될 것이다.」호세아 9:13 · 두루새김
본문은 그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 국가적 파멸의 일부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자녀들이 개인적으로 부모의 죄에 합당한 벌을 받았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의 죄와 파멸은 그것을 결정한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가장 보호받아야 할 자녀들의 생명까지 파괴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개인이 겪는 난임이나 유산, 자녀의 죽음을 하나님의 특별한 벌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의 역사적 붕괴를 집단적인 심판의 말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언자는 이 끔찍한 전망 앞에서 직접 하나님께 말을 건넵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첫 부분은 번역이 어려운 구절입니다. 히브리어의 초르(ṣôr)를 도시 두로로 읽으면, 바닷가의 번영한 도시처럼 에브라임의 풍요로운 모습을 나타내는 비교가 됩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바위 또는 나무와 관련된 이미지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좋은 터에 심긴」이라는 표현과 16절의 마른 뿌리 이미지를 함께 생각하면, 생명이 자라기에 좋은 환경에 놓인 에브라임의 모습과 앞으로 닥칠 파멸을 대조한다는 큰 흐름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가 차마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
호세아가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야훼, 그들에게 주십시오.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그들에게 유산하는 태와 젖이 마른 젖가슴을 주십시오.」호세아 9:14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어지던 내용이 갑자기 하나님을 향한 간청으로 바뀝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자녀와 관련하여 구하는 것은 생명과 번영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미래가 이미 파멸로 향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언자는 정반대의 것을 구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유산이나 불임이 바람직하다는 일반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장에서 예언자는 자녀들이 죽임당할 미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는 축복을 구하는 평범한 말조차 사용할 수 없을 만큼 깊은 파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의 해석은 이것을 심판에 대한 동의와 간청으로 읽습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너무 깊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후손을 끊는 심판을 내리시기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해석에서는 예언자의 깊은 슬픔이 드러난다고 봅니다. 앞으로 태어날 자녀들이 죽임당할 것을 생각할 때, 차라리 그런 죽음을 겪지 않도록 출생 자체가 중단되는 것이 낫겠다는 탄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만을 본문이 명확히 확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호세아가 기도했습니다」로 화자를 밝혔지만, 원문에서는 예언자의 말이라는 판단도 문장 흐름에 따른 해석이며, 명시적인 화자 표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호와야훼」를 직접 부르며 간청하는 형식은 앞뒤의 심판 선언과 뚜렷한 차이를 이룹니다.
길갈에서 사랑이 거절로 바뀌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온갖 악은 길갈에 있다. 바로 거기서 나는 그들을 미워했다. 그들이 저지른 악한 짓 때문에 내 집에서 그들을 쫓아내겠다. 다시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겠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모두 나를 거역한다.」호세아 9:15 · 두루새김
길갈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특별한 기억을 지닌 장소입니다.
여호수아 4:19–24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온 뒤 길갈에 진을 쳤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요단강에서 가져온 돌 열두 개를 세워 하나님의 인도를 기억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시대의 길갈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호세아 4:15에서 하나님께서는 길갈로 가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12:11에서도 길갈의 제단들이 비판받습니다. 아모스 4:4와 5:5 역시 길갈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예배와 연결합니다.
이러한 본문들을 고려하면, 9:15의 길갈 역시 당시 그곳에서 행해지던 잘못된 예배와 깊이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9:15가 반드시 특정한 한 사건, 예컨대 사무엘상 13장이나 15장에 나오는 사울의 불순종을 직접 지목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내 집」은 반드시 특정 성전 건물만을 가리킬 필요가 없습니다. 3절의 「여호와야훼의 땅」과 연결하면,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서 그분의 보호와 돌보심 아래 살아가는 자리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가족과 집의 말로 표현된 관계의 단절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리고 자신들이 선택한 대상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처음 발견하셨을 때의 기쁨을 기억하시지만, 그들이 계속 자신을 거역한 데 대해 이제 거절을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미워했다」와 「다시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겠다」는 말씀의 강도를 줄여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본문은 하나님의 엄중한 거절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성품 전체를 부정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의 악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호세아서 전체에서는 심판과 회복의 말씀이 함께 나타나지만, 지금은 그 심판의 무게를 충분히 들어야 할 자리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이 모두 자신을 거역한다고 지적하십니다. 공동체의 파멸이 단지 일반 백성의 개인적 잘못 때문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백성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을 앞장서서 걸었습니다.
16절에서는 다시 나무의 이미지가 돌아옵니다.
「에브라임은 얻어맞았다. 뿌리가 말랐으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설령 그들이 자녀를 낳더라도, 내가 그들이 낳은 귀한 자녀들을 죽이겠다.」호세아 9:16 · 두루새김
나무에 잠시 열매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생명을 공급하는 뿌리 자체가 말라 버렸습니다.
11절부터 계속되어 온 후손의 상실이 이제 가장 극단적인 표현에 이릅니다.
실제로 전쟁과 강제 이주에서는 부모의 선택에 책임이 없는 자녀들도 비극을 겪습니다. 호세아는 그러한 파멸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틀 안에서 묘사합니다.
독자는 이 말씀 앞에서 쉽게 위안을 말할 수 없습니다. 본문 역시 여기서 성급하게 위로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41:52에서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난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을 담아 둘째 아들에게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이름은 열매 맺음과 번성함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어근과 연결됩니다. 번성을 기념하는 이름을 지닌 백성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 하나님」과 집을 잃은 백성
호세아가 말했습니다. 「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실 것이다. 그들이 그분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러 나라 사이를 떠돌게 될 것이다.」호세아 9:17 · 두루새김
마지막 절에서는 다시 예언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1절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네 하나님」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마지막 절에서는 예언자가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 하나님께서 백성을 버리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것만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영원히 끝났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9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관계가 얼마나 심각하게 무너졌는지는 선명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가 부족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삶에 요구하시는 것을 듣고도 따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자기 땅에서 추수를 기뻐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여러 나라 사이를 떠도는 사람들이 됩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어도, 그 정체성을 지탱하던 땅과 예배와 공동체의 삶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8:64–65에서도 언약을 어긴 백성이 여러 민족 사이에 흩어지고, 그곳에서도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옵니다. 호세아의 마지막 선언은 이러한 언약의 경고와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신 기쁨은 무엇이었는가
호세아 9장을 관통하는 문제는 기쁨과 생명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이 장의 비극은 이스라엘이 좋은 것을 원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떼어 내어, 그것들 자체를 삶의 보증으로 삼았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의 이스라엘은 풍요로운 타작마당에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수확물을 거두고, 포도주를 마시며, 다가올 축제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들이 맞이할 다음 축제를 묻습니다. 「정해진 모임의 날에, 여호와야훼의 축제 날에 너희는 무엇을 하겠느냐?」
그날이 오면 곡식이 쌓였던 타작마당에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아끼던 은붙이는 쐐기풀에 덮이고, 사람들이 머물던 천막에는 가시덤불이 자랄 것입니다.
그들은 한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광야의 포도처럼 기뻐하셨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이 그토록 기뻐하던 축제를 누릴 자리마저 잃어버렸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