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4–8장 · 백성을 향한 고발

흰머리가 나도 깨닫지 못하는 나라

호세아 7장에는 이상한 나라가 등장합니다.

도둑들이 들끓고, 왕궁에서는 거짓말과 음모가 오갑니다. 왕들이 잇따라 쓰러지고, 외국 세력은 나라의 힘을 빼앗아 갑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나라가 가만히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왕궁에서는 권력을 차지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외교적으로는 이집트와 아시리아를 오가며 살아남을 길을 찾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정작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고치려 하셨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는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권유와 실제 삶의 불성실함 사이의 간격이 드러났습니다. 이제 7장에서는 그 간격이 정치적 혼란과 외교적 판단, 일상적인 욕망 속에서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 줍니다.

그 과정에서 호세아는 화덕, 뒤집지 않고 구운 둥근 빵, 비둘기, 그물, 믿고 쓸 수 없는 활이라는 이미지를 차례로 사용합니다. 이 이미지들은 서로 다른 잘못을 고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입니다.

이스라엘은 왜 그렇게 열심히 길을 찾으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합니까?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77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이 고치려 하실 때, 감추어졌던 병이 드러나다

호세아 7:1–2 본문 →

「내가 이스라엘을 고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행이 드러났다. 그들이 속이는 짓을 했기 때문이다. 도둑이 들어왔고, 밖에서는 강도 떼가 덮쳤다.」호세아 7:1 · 두루새김

이 장의 첫 문장은 앞 장의 고백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고치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고치려 하실 때 그들의 죄가 드러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치료를 병이 사라지는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치료하려면 먼저 무엇이 병들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이 모르셨던 사실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외면하고 있던 자기들의 상태입니다.

사마리아의 병은 왕궁 안에만 있지 않았다

에브라임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이름이며, 사마리아는 북왕국의 수도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말하면서 정치적 중심지인 사마리아의 악행을 특별히 지목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범죄의 묘사는 성 안팎을 가로지릅니다. 이는 한두 사람의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공동체의 안전 자체가 무너진 상황을 보여 줍니다. 집 안과 거리, 개인의 생활과 사람들이 함께 쓰는 공간이 모두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특히 1절의 「속이는 짓」은 뒤에 왕을 기쁘게 하는 「거짓말」(3절), 하나님을 두고 하는 「거짓말」(13절)과 이어집니다. 호세아 7장에서 거짓은 단순한 개인의 언어 습관이 아닙니다. 사회와 정치와 하나님과의 관계 전체를 무너뜨리는 문제입니다.

자기 행위에 둘러싸인 사람들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모든 악을 기억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이 저지른 일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내 눈앞에 놓여 있다.」호세아 7:2 · 두루새김

앞에서는 도둑과 강도 떼가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이제는 그들 자신의 행동이 그들을 에워쌉니다. 바깥의 위협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들이 그들의 삶을 둘러싼 현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감추려 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행동도 하나님 앞에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기억」은 정보를 저장한다는 뜻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무시되거나 잊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병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전에, 자신이 병들게 만든 세상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병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궁에서 더욱 심각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왕을 기쁘게 하는 악 — 권력의 중심이 병들다

호세아 7:3–7 본문 →

「그들은 악한 짓으로 왕을 기쁘게 하고, 거짓말로 지도자들을 기쁘게 한다.」호세아 7:3 · 두루새김

이 구절에는 이상한 기쁨이 있습니다.

보통 통치자에게 기대되는 역할은 불의를 막고 거짓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가 묘사하는 왕궁에서는 오히려 악과 거짓이 권력자들을 기쁘게 합니다. 왕의 마음에 드는 말이 진실한 말보다 중요해지는 곳에서는 올바른 판단이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갑자기 빵을 굽는 화덕을 등장시킵니다.

불붙은 화덕은 왜 잠시 조용해지는가?

「그들은 모두 간음하는 자들이며, 빵 굽는 사람이 달군 화덕과 같다. 그는 반죽을 치댈 때부터 그것이 부풀 때까지 불을 더 지피지 않는다.」호세아 7:4 · 두루새김

여기서 「간음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은 호세아서에서 반복되는,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저버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에는 왕과 지도자, 숨어 기다리는 사람들, 쓰러지는 왕들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간음의 이미지는 종교적 배반뿐 아니라 정치적 음모와도 연결되어 읽힙니다.

화덕이 잠시 조용하다고 해서 그 안의 열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불은 남아 있고, 빵을 굽는 일이 진행될 때 다시 강하게 타오를 수 있습니다.

왕의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호세아가 말했습니다. 「우리 왕의 잔칫날에 지도자들은 포도주를 마시고 탈이 났다. 왕은 조롱하는 자들과 손을 잡았다.」호세아 7:5 · 두루새김

술에 취해 판단력을 잃은 왕궁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왕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밤새 잠들어 있던 불이 아침에 타오르다

「그들이 숨어 기다리며 마음을 화덕처럼 달구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빵 굽는 사람은 밤새 잠을 자고, 아침이면 그 화덕이 불길처럼 타오른다.」호세아 7:6 · 두루새김

4절에서는 불을 더 지피지 않고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6절에서는 그 기다림 뒤에 불이 강하게 타오릅니다.

이 두 장면을 연결하면 정치적 음모가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잠시 조용하지만, 그 조용함은 평화가 아닙니다. 어떤 행동을 실행하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한 분노 조절의 비유로만 읽으면 본문의 정치적 긴장을 놓칩니다. 곧 이어지는 7절에서 왕들과 재판관들이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왕들을 삼키는 화덕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화덕처럼 달아올라 자기들의 재판관들을 삼켰다. 그들의 왕들은 모두 쓰러졌다. 그들 가운데 내게 부르짖는 자는 하나도 없다.」호세아 7:7 · 두루새김

앞에서 왕을 기쁘게 하던 악과 거짓은 이제 권력 자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정치적 위기는 계속되고, 왕권은 무너지지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왕을 바꾸는 일은 계속되었지만, 나라가 가야 할 방향을 다시 묻는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왕을 무너뜨릴 만큼 격렬하게 움직였지만, 자신들을 무너뜨리는 더 깊은 문제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제 호세아의 시선은 왕궁 밖으로 옮겨 갑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의 「우리 왕의 잔칫날」은 원문에서 왕과 관련된 특별한 날을 가리킵니다. 왕의 즉위 기념일이나 왕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 또는 왕실에서 열리는 특별한 잔치로 이해할 수 있지만, 어떤 행사였는지는 원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포도주와 지도자들, 왕이 함께 등장한다는 점에서 왕궁의 잔치와 관련된 장면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동사는 지도자들이 병들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지만, 지도자들이 누군가를 병들게 했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조롱하는 자들과 손을 잡았다」는 원문에서는 손을 뻗는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어울리는 행동인지, 조롱하는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6절의 마음을 화덕처럼 가까이 가져왔다는 표현에서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가까이 가져왔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마음을 화덕처럼 달구었기 때문이다」로 풀어 옮겼습니다. 열왕기하 15:8–30에는 왕위가 암살과 반란으로 여러 차례 바뀌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호세아 7:5–7이 이 사건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정확히 묘사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언자는 왕들의 이름을 제시하지 않고, 왕궁의 잔치와 음모와 왕들의 몰락을 하나의 강렬한 장면으로 그립니다.

뒤집지 않은 빵 — 다른 나라들과 뒤섞여 자기 모습을 잃다

호세아 7:8–10 본문 →

에브라임은 여러 민족 사이에 스스로 뒤섞입니다. 에브라임은 뒤집지 않고 구운 둥근 빵이 되었습니다.호세아 7:8 · 두루새김

앞에서는 화덕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그 화덕에서 구워지는 빵이 등장합니다.

납작한 빵을 뜨거운 돌이나 화덕의 표면에서 구울 때에는 열이 한쪽에만 지나치게 가해지지 않도록 뒤집어야 합니다. 그런데 빵을 뒤집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한쪽은 지나치게 익거나 타고, 다른 쪽은 충분히 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빵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제대로 먹기 어려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왜 다른 민족들과 뒤섞이는 일이 문제인가?

그런데 이것을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과 교류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구약에는 외국인에 대한 보호 규정도 있고(레위기 19:33–34), 다른 민족 출신의 사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룻기는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앞뒤 문맥에서 이스라엘은 외국 세력에 의지하고, 그들의 영향 아래 자기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11절에서는 이집트와 아시리아를 찾아가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8절에서 여러 민족 사이에 뒤섞이는 모습은 단순한 문화적 교류보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과 맺은 정치적·종교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방향을 잃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뒤집지 않고 구운 빵의 핵심은 제대로 완성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 나라 사이에서 살아남으려고 움직이지만, 그 결과는 온전한 생존이 아니라 자신을 망가뜨리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앞에서는 화덕의 열기가 왕들을 삼켰습니다. 이제는 나라 자체가 제대로 구워지지 않은 빵이 되었습니다.

나라의 힘을 빼앗기면서도 깨닫지 못하다

9절은 빵의 이미지에서 사람의 몸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외국인들이 에브라임의 힘을 먹어 치웠지만,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흰머리가 여기저기 났지만,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호세아 7:9 · 두루새김

첫 번째 이미지는 나라의 자원이 외국 세력에게 소모되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열왕기하 15:19–20에 따르면 므나헴 왕은 아시리아 왕에게 거액의 은을 주어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 돈은 이스라엘의 부유한 사람들에게서 거두었습니다.

왕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대가가 결국 나라의 자원을 외국에 넘겨주는 결과로 이어진 것입니다. 호세아 7:9가 반드시 이 사건 하나만을 지목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외국의 힘에 의존하는 동안 이스라엘의 자원이 소모되는 현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외국의 힘을 빌려 자신을 보호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실제로는 자기 힘이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흰머리는 왜 중요한가?

흰머리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흰머리는 오히려 존경과 영예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잠언 16:31은 흰머리를 영광의 관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흰머리가 의미하는 것은 자신의 상태가 변하고 있다는 눈에 보이는 징후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도 스스로는 예전과 같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에는 이미 시간의 흔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나라의 힘이 줄어들고 있고, 외국 세력에 의존하는 정도가 커지고 있으며, 정치적 혼란도 반복됩니다. 그러나 자신은 여전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은 약해졌다는 사실보다,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알지 못했습니다」라는 표현은 단지 국제 정세를 잘못 판단했다는 뜻으로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호세아서에서 ‘알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도 반복해서 사용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자기 나라의 상태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일과 자신을 알지 못하는 일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거만함이 그들의 잘못을 증언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을 겪고도 그분을 찾지 않았습니다.호세아 7:10 · 두루새김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경고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왕들이 쓰러졌습니다. 외국 세력이 힘을 빼앗았습니다. 나라가 쇠약해지는 징후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방향을 근본적으로 다시 묻지 않았습니다. 거만함은 여기서 자기 능력에 대한 자부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실패와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을 필요를 깨닫지 못하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다음 절에서 호세아는 에브라임을 한 마리 새에 비유합니다.

어수룩한 비둘기와 하나님의 그물

호세아 7:11–12 본문 →

에브라임은 잘 속고 분별없는 비둘기처럼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 도움을 청하고 아시리아로 갔습니다.호세아 7:11 · 두루새김

이 비유는 앞의 흰머리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이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살아남기 위해 계속 움직입니다.

비둘기의 문제는 날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분별없는」은 직역하면 ‘마음이 없는’ 비둘기입니다. 물론 비둘기에게 실제로 마음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약에서 마음은 생각과 판단의 중심을 나타내므로, 여기서는 분별하지 못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비둘기는 날 수 있습니다. 빠르게 움직이고, 위험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디로 날아가야 하는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면, 날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새입니다.

여기서 이집트와 아시리아는 당시 국제 정세에서 이스라엘이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강대국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들 사이에서 생존의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

열왕기하 17:3–4에서는 북왕국의 마지막 왕 호세아가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다가 이집트와 관계를 맺으려 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집트와 아시리아 사이에서 생존하려 했던 북왕국의 외교적 처지를 보여 줍니다. 다만 호세아 7:11이 반드시 그 마지막 왕의 외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 전반에 걸쳐 외국의 힘에 의존한 일을 고발하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께 가지 않는가?

그들은 정치적 위기를 경험했고, 외교적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무너져 있다는 사실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호세아가 비판하는 것은 모든 외교적 관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저버린 상태에서 외국의 힘을 마지막 해결책처럼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이스라엘은 도움을 찾을 만큼 자신의 위기를 느꼈지만,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지 판단할 만큼 자신의 위기를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비둘기는 계속 날아가지만, 그 비행의 끝에는 뜻밖의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날아가는 새 위에 펼쳐지는 그물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갈 때 내가 그들 위에 그물을 펼쳐, 하늘의 새처럼 끌어내리겠다. 그 백성에게 들려준 경고대로 그들을 벌하겠다.」호세아 7:12 · 두루새김

비둘기는 하늘을 날지만, 그물에 걸리면 날개가 소용없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외교적 움직임이 실제로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나라가 움직일 수 있는 곳은 많아 보입니다. 이집트로 갈 수도 있고 아시리아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움직임이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게 하지는 못합니다.

앞서 호세아 5:1에서는 백성을 잘못 이끈 지도자들이 덫과 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직접 그물을 펼치십니다. 앞에서는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유인하는 도구였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무분별한 움직임을 붙잡으시는 심판의 도구입니다.

이스라엘을 붙잡는 것은 단지 적국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길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마지막 표현은 원문에서 무엇을 들었는지 명시하지 않아 해석에 여지가 있습니다. 공동체가 이미 들었던 경고대로 하나님이 벌하신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들에게 전해진 어떤 소식과 관련된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고나 소식의 정확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을 구해 주려 하지만」 — 서로를 향하지 않는 두 마음

호세아 7:13–15 본문 →

「그들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내게서 달아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멸망할 것이다. 나를 거역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구해 주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두고 거짓말을 했다.」호세아 7:13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와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앞에서는 그물을 펼쳐 이스라엘을 끌어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자신이 그들을 구해 주려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하나님이 심판과 구원을 함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속량을 말씀하시면서도 심판하시는가?

그들은 본래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구해 내신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백성이 다시 다른 힘에 의존하며, 자신들을 구해 내신 하나님에게서 달아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거짓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나 신실함을 부정한 말일 수도 있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그분을 배반하는 태도와 관련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스라엘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가지신 뜻과 충돌합니다.

이 때문에 호세아 7장의 심판을 하나님이 애초부터 그들을 구원할 뜻이 없으셨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오히려 하나님이 구해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반역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백성이 아니라, 자신을 구해 주시는 하나님에게서 달아나는 백성입니다.

울부짖지만 하나님께 부르짖지는 않는다

「그들은 진심으로 내게 부르짖지 않는다. 자기 잠자리에서 울부짖고, 곡식과 새 포도주 때문에 모여들면서도 나를 등진다.」호세아 7:14 · 두루새김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체감하고 있고, 잃어버린 것을 다시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울음이 하나님께 돌아서는 행동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לֵב⁩)는 원문에서는 ‘마음으로’라는 말이 쓰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눈물이나 감정이 진실한지만 판단하는 말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약에서 마음은 생각과 의지와 판단의 중심입니다.

곡식과 포도주를 위해 소리치는 사람들

농경사회에서 곡식과 포도주는 생존과 풍요를 나타내는 중요한 생산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것들을 얻기 위해 간절히 움직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이 겪는 고통 자체를 비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곡식과 포도주를 필요로 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열망과 하나님을 향한 관계가 분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7절에서는 그들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는 실제로 울부짖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소리를 내어 울부짖는 것과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그들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를 문제 삼으십니다.

튼튼한 팔은 누구에게서 왔는가?

「나는 그들을 훈련하고 그들의 팔을 튼튼하게 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거슬러 악한 일을 꾸민다.」호세아 7:15 · 두루새김

여기서 「팔」은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신체 이미지입니다. 시편 18:34에서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팔을 강하게 만드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나라를 유지하고 살아남는 데 필요한 힘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폭넓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힘을 하나님께 맞서는 데 사용합니다.

9절에서는 외국인들이 에브라임의 힘을 먹어 치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은 처음부터 자신들만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힘을 주신 하나님을 거스르고, 외국 세력에 의지하다가 그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분리하여 사용한 결과입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에서 구해 내는 일을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앞뒤 문맥에 따라 하나님의 구원 의향이나 앞으로 이루어질 행동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미 구해 내신 일을 떠올리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본문이 그 구원의 구체적인 사건이나 시기를 명시하지 않으므로, 이 한 문장만으로 하나님이 어떤 구원 행동을 실행하시려 했으나 실패하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14절의 「모여들면서도」로 옮긴 히브리어 이트고라루는 뜻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몸을 움직이거나 함께 모여 격렬하게 행동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글자를 달리 읽어 몸을 베거나 상처 내는 행위로 이해하는 전통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열왕기상 18:28에서 바알의 예언자들이 자신들의 몸에 상처를 내며 부르짖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호세아 7:14의 원문만으로 여기서 정확히 그런 종교 의식이 이루어졌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방향을 바꾸지만 목표에 이르지 못하는 활

호세아 7:16 본문 →

「그들은 돌아서지만 내게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믿고 쓸 수 없는 활처럼 되었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내뱉은 분노에 찬 말 때문에 칼에 죽을 것이다. 이 일로 그들은 이집트 땅에서 조롱을 받을 것이다.」호세아 7:16 · 두루새김

호세아 7장의 마지막에는 ‘돌아섬’이 등장합니다.

「내게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무슨 뜻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움직임의 존재가 아니라 그 움직임의 방향입니다. 사람이 방향을 바꾸었다는 사실만으로 올바른 곳으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속이는 활이란 무엇인가?

활은 화살을 목표물에 보내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화살을 쏘는 사람은 목표를 향해 시위를 당겼지만, 화살은 예상했던 방향으로 가지 않습니다.

여기서 「믿고 쓸 수 없는 활」은 원문에서 속이는 활로 표현됩니다. 의도한 대로 작동하지 않는 활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위나 활 자체가 잘못되어 화살을 정확히 보내지 못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 78:57에도 이스라엘이 믿을 수 없는 활처럼 빗나갔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 비유와 호세아 7:16의 이미지는 주제적으로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일이 목표를 벗어나는 활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일을 하면서도 가야 할 곳을 잘못 판단했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고관들의 말이 칼이 되어 돌아오다

처음에는 왕과 지도자들이 악과 거짓을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내뱉은 분노에 찬 말 때문에 칼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말과 죽음이 연결됩니다.

왕궁에서 거짓과 악을 즐기던 일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라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말과 판단이 결국 나라의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스라엘은 도움을 얻으려고 이집트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집트 땅에서 조롱을 받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나라 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선택한 길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기대한 결과와 반대되는 곳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내게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원문에서는 이를 문자적으로 ‘위로는 향하지 않는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위’를 하나님이 계신 높은 자리와 연결하여 ‘지극히 높으신 분께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 수도 있습니다. 다른 읽기는 이 표현을 ‘높지 않은 것’, 곧 하나님이 아닌 대상을 향한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정확한 문법적 해석에는 여지가 있지만, 이 장의 흐름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10절에서 이미 같은 사실을 직접 말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뜻을 「내게로는 돌아오지 않는다」로 풀어 옮겼습니다. 여기서 「분노에 찬 말」은 원문에서 혀의 격노로 표현됩니다. 분노에 찬 말이나 오만한 발언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 말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인지, 다른 나라를 향한 위협인지, 정치적 음모 속에서 사용된 말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신다

호세아 7:1–16 본문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아시고, 보지 못하는 것들을 드러내십니다. 그 잘못된 판단의 중심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분이 바라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저 더 많은 방법을 찾아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누구에게서 멀어졌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오늘날 모든 국가의 정치적 불안이나 사회적 쇠퇴가 곧바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특별한 심판이라는 공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호세아는 특정한 역사적 공동체인 북왕국 이스라엘과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약속에 따른 책임을 다루고 있습니다.

호세아 7장의 마지막에서 이스라엘은 믿고 쓸 수 없는 활에 비유됩니다.

활은 분명히 움직입니다. 시위가 당겨지고, 화살이 날아갑니다.

그러나 화살은 목표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 장의 이스라엘도 그렇게 움직였습니다. 왕을 바꾸고, 이집트에 도움을 청하고, 아시리아로 가며,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가지 움직임이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었지만, 정작 돌아가야 할 곳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호세아 7장은 그 빗나간 화살이 날아가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화살은 이미 활을 떠났고, 그 화살을 쏜 사람은 자신이 제대로 겨누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 활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믿고 쓸 수 없는 활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