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20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말씀을 멈출 수 없는 사람의 절망
예레미야 20장에는 쉽게 함께 놓기 어려운 두 고백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다른 하나는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탄식입니다. 두 고백 사이에는 긴 설명도, 시간이 흘렀다는 표시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구해 주셨다고 찬양한 바로 다음에 예레미야는 자신의 출생을 저주합니다.
무엇이 이 사람을 이토록 흔들고 있습니까?
이 장에서 예레미야는 처음으로 자신의 예언 때문에 실제로 매를 맞고 공개적으로 갇힌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했지만, 그 대가로 조롱과 위협을 받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자신을 속이셨다고 항의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말씀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못합니다.
예레미야 20장은 흔들림 없는 예언자의 영웅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릴 수 없지만, 그 말씀 때문에 살아가는 일조차 고통스러워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성전에서 예언자를 때리다 — 하나님의 집에서 일어난 일
앞 장의 마지막에서 예레미야는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야훼의 성전 뜰에 서서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20장은 바로 그 말씀을 들은 한 사람의 행동으로 시작합니다.
임멜의 아들인 제사장 바스훌은 예레미야가 이 말을 예언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야훼의 성전 일을 감독하는 책임자였습니다.예레미야 20:1 · 두루새김
「성전 일을 감독하는 책임자」라는 표현은 그가 성전 운영과 질서에 관해 상당한 권한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예레미야는 성전 바깥에서 성전의 적으로 활동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에 따라 여호와야훼의 성전 뜰에서 예언했습니다.
바스훌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때렸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야훼의 성전에 있는 위쪽 베냐민 문에서 그에게 차꼬를 채웠습니다.예레미야 20:2 · 두루새김
성전과 관련된 출입 공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가 공개적인 처벌을 받는 것입니다. 성전은 여호와야훼께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할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곳의 관리자가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를 처벌합니다.
이 사실을 근거로 당시 모든 제사장이 예레미야를 반대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직접 보여 주는 것은 바스훌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직책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르게 응답하고 있다는 것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옳은지는 직책이나 권위의 높낮이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에 어떻게 응답하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자신이 선포해 온 폭력과 억압을 자신의 몸으로 경험합니다.
「사방의 공포」 — 예언자를 위협한 사람에게 돌아온 이름
이튿날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차꼬에서 풀어 줍니다.
이튿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차꼬에서 풀어 주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네게 붙이신 이름은 바스훌이 아니라 사방의 공포다.」예레미야 20:3 · 두루새김
「사방의 공포」는 단순히 무서운 사람이라는 별명이 아닙니다. 사방에서 공포가 밀려오는 상황, 어느 방향에서도 안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를 나타냅니다. 예레미야 6:25에서도 이 표현은 전쟁과 원수의 칼을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과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보아라, 내가 너를 너 자신에게도, 너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공포가 되게 하겠다. 그들은 원수들의 칼에 쓰러지고, 너는 그것을 직접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겠다. 그는 그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가고 칼로 죽일 것이다.』」예레미야 20:4 · 두루새김
그가 다른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권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운명 때문에 공포를 경험하는 인물이 된다는 뜻입니다. 바스훌은 성전 관리자로서 예레미야를 때리고 차꼬에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바스훌에게는 다가오는 재앙을 막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가 예언자를 가둘 수는 있어도 하나님이 선언하신 심판까지 가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앞선 심판의 말씀들에서는 북쪽에서 오는 재앙과 원수의 공격이 반복해서 언급되었습니다. 이제 이 장에서는 바벨론 왕이 그 심판을 실행할 존재로 분명하게 지목됩니다.
5절에서는 성읍의 재산과 사람들이 수고해서 얻은 것, 귀중품과 왕들의 보물이 모두 약탈당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오랫동안 일했고, 재산을 모았으며, 왕궁에는 보물을 쌓아 두었습니다. 그러나 전쟁과 정복 앞에서 그것들이 더 이상 자신의 소유로 남지 못합니다.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너는 바벨론으로 갈 것이다. 너와 너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 곧 네가 거짓 예언을 전해 준 사람들이 거기서 죽고 거기서 묻힐 것이다.』」예레미야 20:6 · 두루새김
본문은 바스훌이 실제로 어떤 내용을 예언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하나님의 참된 말씀과 어긋나는 말을 전했다는 것이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심판의 내용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이 옳다면 바스훌 자신이 전해 온 말은 거짓으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예언은 바스훌의 개인적인 체면을 넘어 그의 종교적 권위까지 위협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렇게 매를 맞고 갇히고도 정말 아무런 두려움 없이 말씀을 전했습니까?
바로 다음 절이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나님께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속이셨고」 — 예언자가 하나님께 항의하다
7절에서 본문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바뀝니다.
지금까지 예레미야는 바스훌에게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신에게 말씀을 맡기신 여호와야훼를 향해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야훼께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 주님께서 저를 속이셨고 저는 속았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힘으로 누르고 이기셨습니다. 저는 온종일 웃음거리가 되었고, 모두 저를 비웃습니다.」예레미야 20:7 · 두루새김
예레미야는 단순히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 고통의 책임을 묻는 말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실제로 하나님께 속았다고 성경이 객관적으로 판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예상하거나 감당할 수 있었던 것과 지금 자신이 겪는 현실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예레미야 1:6에서 그는 자신이 아직 어려서 말할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에게 자신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고 명령하시는 말을 모두 전하라고 하셨습니다(1:7). 그리고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여 구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8).
그런데 지금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매를 맞았고, 차꼬에 채워졌으며,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 묻고 있는 셈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이 길로 이끄셨는데, 왜 저는 이런 일을 겪어야 합니까?
예레미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저항할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예레미야에게 단순한 직업 선택이나 개인적인 종교적 관심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말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폭력이다! 파괴다!』라고 외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 때문에 저는 온종일 모욕과 조롱을 당합니다.」예레미야 20:8 · 두루새김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으며, 그 길의 끝에 재앙이 있다고 외쳐야 합니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사명의 근거이지만, 동시에 그의 고통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겪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적대에 부딪혔습니다.
조금 더 깊이
「속이셨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피티타니는 파타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문맥에 따라 설득하다, 유혹하다, 속이다라는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설득하셨다는 고백으로도, 자신을 속이셨다는 격렬한 항의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뼛속에 갇힌 불 — 말할 수도, 침묵할 수도 없는 사람
9절은 예레미야의 마음속 갈등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저는 『그분을 입에 올리지 않겠다. 더는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제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불 같고, 제 뼛속에 갇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억누르느라 지쳤고, 더는 억누를 수 없습니다.」예레미야 20:9 · 두루새김
침묵은 그에게 현실적인 탈출구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더 이상 심판을 외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적대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예언자의 역할을 내려놓는다면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불은 단순히 말씀을 전하고 싶은 뜨거운 열정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기쁨에 넘쳐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침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그의 안에서 타오릅니다.
불이 「제 뼛속에 갇혀 있습니다」라는 표현은 그 고통이 얼마나 깊이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마음에 잠시 떠오른 생각이 아니라, 몸 깊숙한 곳에서 견딜 수 없이 타오르는 무엇으로 묘사됩니다.
예레미야가 지친 이유는 말씀을 전하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도 그를 지치게 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에게 고통받습니다.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 안의 말씀 때문에 고통받습니다.
어느 쪽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을 오늘의 모든 신앙인이 느끼는 강한 종교적 열정과 곧바로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는 특별한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예언자입니다. 본문의 불은 그런 예언자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어떤 생각이나 충동이 마음에서 강렬하게 일어난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이 장에서 그 불의 정체는 분명하게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앞에서부터 예레미야에게 주어졌고, 그가 백성에게 전해야 했던 말씀입니다.
「사방의 공포」가 예레미야를 둘러싸다 — 적대자들의 말과 하나님의 힘
10절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나는 기도를 이어 갔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이 저를 헐뜯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방의 공포다! 고발해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자!』 저와 평화롭게 지내던 사람들은 모두 제가 넘어질 때를 노립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그가 속아 넘어갈지도 몰라. 그러면 그를 이기고 복수하자.』」예레미야 20:10 · 두루새김
사람들이 외치는 「사방의 공포다!」는 3절에서 바스훌에게 붙여진 이름과 같은 표현입니다. 예레미야는 바스훌에게 공포의 심판을 선포했지만, 정작 자신 역시 사방에서 적대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저와 평화롭게 지내던 사람들」(שָׁלוֹ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말 그대로 그의 평안에 속한 사람들, 곧 가깝거나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예레미야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가 넘어지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피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바로 그 말씀을 전하는 그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두려운 용사처럼 나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뒤쫓는 자들은 넘어지고, 나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해 크게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그 영원한 치욕은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예레미야 20:11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의 힘이 자신의 삶을 압도하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이제는 그 힘이 자신을 뒤쫓는 사람들에 맞서는 보호의 근거가 됩니다.
이 고백은 예레미야 1:19의 부르심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는 사람들이 예레미야와 싸우겠지만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그와 함께하여 구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고백은 어떤 공격도 자신에게 닿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적대자들이 끝내 자신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신뢰를 나타냅니다.
나는 기도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주님은 의로운 사람을 시험하시고 속생각과 마음을 보십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시는 것을 제가 보게 해 주십시오. 제 억울한 일을 주님께 털어놓았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20:12 · 두루새김
두루새김의 「속생각과 마음」은 원문에서 콩팥과 마음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깊은 내면을 몸의 기관으로 나타내는 히브리어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고발하려고 합니다. 반면 예레미야는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맡기지만, 그 기도에는 자신을 해치는 사람들에게 보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어 있습니다.
본문은 그 보복이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그것을 보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10절의 「사방의 공포다!」를 예레미야를 헐뜯는 사람들의 말로 옮겼습니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가 자신의 처지를 묘사하는 말로 읽을 수도 있지만, 뒤에 이어지는 고발하자는 외침과 묶어 적대자들의 말로 읽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7절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자신을 「속이셨고」라고 항의했습니다. 10절에서는 적대자들이 예레미야가 「속아 넘어갈지도 몰라」라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같은 동사가 전혀 다른 두 관계에서 사용됩니다. 7절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신을 「이기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10절에서 적대자들은 자신들이 예레미야를 「이기고」 복수하려 합니다. 11절에서는 예레미야가 적대자들이 자신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다 — 그러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13절은 앞의 고통스러운 기도와 전혀 다른 분위기로 시작합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 노래해라. 여호와야훼를 찬양해라. 그분께서 가난한 사람의 목숨을 악한 자들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예레미야 20:13 · 두루새김
11절에서는 적대자들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고, 12절에서는 하나님이 보복하시는 것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이미 구해 내셨다는 형태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킬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힘이 없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이 구절에서 예레미야가 자신을 가난한 사람의 처지와 연결하여 고백한다고 읽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바스훌처럼 성전의 권한을 행사할 수도 없고, 자신을 고발하려는 사람들의 계획을 직접 막을 수도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찬양은 자신이 더 이상 약하지 않다는 선언이 아니라, 약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찬양은 장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는 예레미야가 실제로 경험한 구원을 찬양하는 것으로 읽는 것입니다. 그는 적어도 바스훌의 차꼬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13절이 특별히 그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모든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찬양하는 것으로 읽는 것입니다. 시편의 여러 탄식시에서도 간구에서 찬양으로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읽기 모두 가능하지만, 본문은 이를 확정할 만큼 충분히 시간의 흐름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받기를 바랍니다」 — 찬양 뒤에 이어지는 가장 어두운 탄식
14절은 충격적인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받기를 바랍니다. 내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이 복을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예레미야 20:14 · 두루새김
이것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보다 더 근본적인 탄식입니다. 그는 아예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의 신앙은 찬양으로 모든 고통이 정리된 이야기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존재 자체가 괴롭게 느껴지는 깊은 절망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한쪽을 지우지 않습니다.
탄생의 기쁜 소식이 저주의 이유가 되다
예레미야의 저주는 더욱 뜻밖의 대상으로 향합니다.
내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한 그 사람이 저주받기를 바랍니다. 그는 「아들이 태어났어요!」 하고 전하여 아버지를 몹시 기쁘게 했습니다.예레미야 20:15 · 두루새김
그가 예레미야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한 가정에 기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지금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그 생애의 시작을 알린 기쁜 소식까지 견딜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여호와야훼께서 뒤엎고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신 성읍들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아침에는 비명을, 한낮에는 전쟁의 함성을 듣기를 바랍니다.예레미야 20:16 · 두루새김
15절에서는 아들의 출생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 들립니다. 16절에서는 아침의 비명과 한낮의 전쟁 함성이 들립니다. 기쁜 소식을 전했던 사람에게 이제는 고통과 파괴의 소리가 들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읽는 우리는 이 저주를 모든 독자가 따라야 할 기도의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예레미야가 이렇게 탄식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소식을 전한 사람이 실제로 악한 행동을 했다고 판정하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그 사람을 저주한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죄를 보여 주기보다, 예레미야의 절망이 얼마나 깊은지를 드러냅니다.
어머니의 모태가 무덤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
17절에서는 탄식이 더욱 깊어집니다.
그 사람이 나를 어머니의 태에서 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랬다면 어머니가 내 무덤이 되고, 어머니의 태는 영원히 나를 밴 채로 있었을 것입니다.예레미야 20:17 · 두루새김
어머니의 태는 생명이 시작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곳이 자신이 묻히는 장소가 되었어야 한다고 탄식합니다.
출생의 장소와 죽음의 장소를 하나로 합쳐 버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5에서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어머니의 태에서 그를 빚으시기 전부터 그를 아셨고,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20장에서 예레미야는 바로 그 어머니의 태에서 자신이 죽었더라면 좋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부르심이 잘못되었다는 객관적인 선언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그 부르심의 길에서 얼마나 깊은 고통을 겪고 있는지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마지막 18절은 그 모든 탄식을 하나의 질문으로 모읍니다.
나는 왜 어머니의 태에서 나와 고통과 슬픔을 겪습니까? 왜 내 날들이 수치 속에서 다해 갑니까?예레미야 20:18 · 두루새김
이 질문은 단순히 왜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는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왜 자신이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고통과 슬픔」과 「수치」는 그가 앞에서 경험한 일들과 연결됩니다. 사람들에게 조롱당했고, 매를 맞았으며, 차꼬에 채워졌고, 가까웠던 사람들의 배신까지 경험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 모든 일을 자신의 삶 전체를 덮는 고통으로 표현합니다.
욥도 자신의 출생일을 저주하며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탄식합니다(욥기 3:1–11). 욥은 설명되지 않는 재앙 속에서 자신의 출생을 저주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 때문에 겪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출생을 저주합니다.
모세도 자신에게 맡겨진 백성을 감당하기 어려워했습니다. 민수기 11:14–15에서 그는 혼자 이 백성을 감당할 수 없다며, 이렇게 괴롭게 하실 바에는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호소합니다. 엘리야 역시 열왕기상 19:4에서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세 사람과 예레미야의 상황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고통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모든 말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단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고통받는 사람들이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를 들려줍니다.
히브리서 5:7–8은 예수님께서 고난 가운데 간구하셨으며,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레미야 20장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순종과 고난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통과 원망을 털어놓는 예언자이고, 그 고백은 이 책 안에서 먼저 그 자체의 의미를 가집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에는 두 구절 사이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려 주는 말이 없습니다. 또한 이 두 고백이 실제로 어떤 순서로 나왔는지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찬양한 직후 갑자기 믿음을 잃었다고 설명할 근거는 없습니다. 반대로 14–18절이 이전에 있었던 탄식이며 예레미야는 이미 그 고통을 완전히 이겨 냈다고 단정하는 것도 본문을 넘어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뒤엎고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신 성읍들」이라는 표현은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예레미야 20장은 그 성읍들의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구절에서 예레미야를 죽이지 않은 주체를 「그 사람」으로 옮겼습니다. 앞에서 출생 소식을 전한 사람을 계속 가리키는 것으로 읽은 것입니다. 그 경우 예레미야의 저주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행동까지 요구하는 극단적인 표현이 됩니다. 다만 히브리어 문장에서는 누가 예레미야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주어가 여호와야훼로 바뀌었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원문은 이를 명시하지 않으므로 어느 한쪽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찬양과 저주 사이 — 이 장이 보여 주는 믿음의 실제 모습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사실과 삶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는 사실이 한 사람 안에 함께 존재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릴 수 없었고, 동시에 그 말씀 때문에 겪는 고통을 하나님께 숨기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 20장은 그런 고통을 가벼운 감정이나 부족한 믿음의 증거로 단순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장을 고통 자체가 거룩하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예레미야는 고통을 원해서 예언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고, 하나님의 구원을 구했습니다.
물론 모든 고통이 하나님의 사명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고통이 크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적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에 관해 올바른 설명을 만들어 내는 일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을 하나님께 그대로 가져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마음대로 판단하거나 모든 분노를 정당화하는 것과 다릅니다. 오히려 자신이 알지 못하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태어난 날까지 거슬러 올라가 질문하는 한 사람이 남습니다.
「나는 왜 어머니의 태에서 나와 고통과 슬픔을 겪습니까? 왜 내 날들이 수치 속에서 다해 갑니까?」
예레미야 20장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고 끝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말씀은 여전히 그의 안에서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겪는 고통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했고, 같은 입술로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
그 두 목소리를 모두 남겨 둔 채, 이 장은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