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21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하나님이 성읍을 지키지 않으실 때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되었습니다. 유다의 왕 시드기야는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행하셨던 놀라운 일을 다시 행하셔서 적군을 물리쳐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위해 싸우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직접 예루살렘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백성에게 살고 싶다면 성읍을 떠나 적군에게 항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데, 왜 하나님은 그들의 적이 되겠다고 하시는가?

예레미야 21장은 왕의 요청에 대한 답변으로 시작하여 왕의 책임을 묻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사이에 하나님은 전쟁의 방향을 뒤집으시고, 생명과 죽음의 위치를 뒤바꾸십니다.

읽는 시간 15분소단락 621장 본문 읽기 →

왕이 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이었을까?

예레미야 21:1–2 본문 →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냅니다.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말했습니다. 「부디 우리를 위해 여호와야훼께 물어봐 주십시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여호와야훼께서 전에 하셨던 놀라운 일들을 우리에게도 행하셔서, 그 왕이 우리에게서 물러갈지도 모릅니다.」예레미야 21:2 · 두루새김

특히 히스기야 시대의 사건이 떠오릅니다. 아시리아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위협했을 때, 히스기야는 예언자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내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지키겠다고 말씀하셨고, 아시리아 군대는 물러갔습니다(열왕기하 19:1–7, 32–36).

시드기야가 사절들을 보낸 일은 그 사건과 닮았습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이렇게 서술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두 왕이 위기 속에서 예언자에게 사람을 보내는 장면은 분명한 비교를 가능하게 합니다.

시드기야가 기대한 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구원이 지금도 반복되는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묻지 않습니다. 이 전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자신들이 돌이켜야 할 잘못이 있는지 묻지도 않습니다. 그가 전달한 질문의 초점은 적군이 물러갈 가능성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한마디만으로 시드기야의 기도가 불성실했다거나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의 속마음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왕이 예상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왕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물리치실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를 상대로 싸우실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바로 앞 장에서는 예레미야가 제사장 바스훌에게 맞고 차꼬에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그 바스훌은 임멜의 아들이고, 이 장의 바스훌은 말기야의 아들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본문에 제시된 아버지가 다르므로 서로 다른 인물로 보아야 합니다. 또한 21장은 앞 장에서 시간이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다스리던 시기, 바벨론의 예루살렘 포위가 배경입니다. 예레미야 37–39장과 열왕기하 25장을 함께 읽으면 이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손이 이제 예루살렘을 향한다

예레미야 21:3–7 본문 →

하나님의 응답은 전쟁의 상황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바벨론 왕과 칼데아 사람들은 성벽 밖에서 너희를 포위하고 있고, 너희는 그들에게 맞서 싸우고 있다. 내가 너희 손에 있는 그 전쟁 무기들을 돌려세우겠다. 그리고 너희를 포위한 군대를 이 성읍 안으로 모아들이겠다.』」예레미야 21:4 · 두루새김

예루살렘의 무기는 더 이상 성읍을 지키는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직접 너희와 싸우겠다. 뻗은 손과 힘센 팔로, 노여움과 불타는 분노와 거센 분노로 싸우겠다.』」예레미야 21:5 · 두루새김

출애굽기의 구원 이야기를 기억하는 독자에게 이 표현은 낯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강한 손과 뻗은 팔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분입니다. 신명기 4:34와 5:15는 바로 이 능력을 돌아봅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억압에서 구원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이 이제 이스라엘 자신을 심판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언제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 관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요구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포함됩니다.

이 점은 예레미야가 이미 성전 설교에서 강조했던 내용과 이어집니다. 예레미야 7:4–7에서 그는 성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전을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삶과 행동을 바로잡고 이웃 사이에서 정의를 행하라고 촉구했습니다.

21:6–7에서는 그 결과가 구체적으로 선언됩니다. 전염병이 사람과 짐승을 치고, 전염병과 칼과 굶주림에서 살아남은 이들마저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집니다.

특히 7절은 시드기야 왕을 가장 먼저 언급합니다. 왕이라고 해서 이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백성과 함께 그 결과를 맞아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바벨론 왕을 의롭다고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은 자비로운 구원자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전쟁을 실행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통해 심판하신다는 사실이 바벨론의 잔혹함 자체를 선한 행동으로 바꾸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원문에서는 모아들이는 대상을 ‘그들’이라고 가리키는데, 이것이 누구를 뜻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앞에 나온 바벨론 군대와 칼데아 사람들을 가리킨다면 하나님이 적군을 성읍 안으로 들이신다는 뜻입니다. 두루새김은 이 이해를 따라 옮겼습니다. 반면 앞에 언급된 무기 또는 그 무기를 든 수비군을 가리킨다면, 방어하던 이들이 성읍 안으로 거두어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가능성 중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예레미야 21:5에서는 손과 팔을 꾸미는 말의 배열이 흔히 쓰이는 출애굽 표현과 다르지만, 두 표현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뚜렷하게 연결됩니다.

성읍 밖에 놓인 생명의 길

예레미야 21:8–10 본문 →

8절부터 말씀의 대상이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시드기야에게 답변을 전달하도록 하셨지만, 이제는 백성 전체에게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전해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놓는다.』」예레미야 21:8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신명기 30:15–20을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앞에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가 놓여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선택하라고 권했습니다.

신명기에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곳에서 살아갈 백성이 생명을 선택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예레미야에서는 그 땅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이 성읍에 머무는 사람은 칼과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을 것이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 너희를 포위한 칼데아 사람들에게 항복하는 사람은 살 것이다. 자기 목숨만은 건질 것이다.』」예레미야 21:9 · 두루새김

성읍에 머무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충성스러운 행동입니다. 자기 도시를 버리지 않고, 적군에 맞서 끝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반면 성읍을 나가 적군에게 항복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수치스럽고 위험한 행동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자유와 재산을 잃거나 포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길에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는 모든 시대의 모든 전쟁에서 항복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의 공격을 이미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그 심판을 인정하고 살아남으라고 선포합니다.

성읍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이전에 누리던 것을 지킬 수 있다고 보장받지 못합니다. 그에게 약속된 것은 부나 지위의 회복이 아니라 생존입니다.

그 길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이 바라던 방식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남습니다.

「『내가 이 성읍에 좋은 일이 아니라 재앙을 내리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이 성읍은 바벨론 왕의 손에 넘어가고, 그는 이 성읍을 불태울 것이다.』」예레미야 21:10 · 두루새김

백성은 성읍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개입하시기를 바랐는데, 바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성읍의 무너짐을 선언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하신 성읍을 이토록 엄중하게 대하시는 것일까요?

본문은 마지막 단락에서 그 이유를 왕의 집안이 져야 할 책임과 연결합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원문에서는 레샬랄(전리품으로)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가 빼앗아 얻는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 여기서는 자신의 목숨에 적용됩니다. 보통 전리품은 승리자가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패배를 인정하고 나가는 사람이 전리품을 얻습니다. 예레미야 38:2에서는 백성에게 같은 내용이 선포되고, 45:5에서는 바룩에게 자기 목숨을 전리품으로 얻으리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39:18에서도 에벳멜렉에게 이 이미지가 사용됩니다. 10절의 원문에서는 하나님이 얼굴을 그 성읍을 향해 돌리셨다고 말합니다. 두루새김은 그 뜻을 「이 성읍에 좋은 일이 아니라 재앙을 내리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예레미야 38:17–18에서 하나님은 시드기야에게 바벨론의 관리들에게 나가면 왕과 가족이 살고 성읍도 불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나가지 않으면 성읍이 불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21:10의 단호한 선언을 읽으면서도, 예레미야서의 다른 장면에 남아 있는 조건에 따른 경고를 지워서는 안 됩니다. 두 말씀이 정확히 어떤 시간적 순서로 전달되었는지까지 21장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왕이 날마다 해야 했던 일

예레미야 21:11–12 본문 →

11절에서 다시 말씀의 대상이 바뀝니다.

앞에서는 백성 전체가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선택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왕의 집안을 부르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왕의 집안에 전할 말을 이렇게 일러 주셨습니다. 「다윗의 집안아, 아침마다 공정하게 재판해라. 빼앗긴 사람을 억누르는 자의 손에서 구해 내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의 악한 행동 때문에 내 분노가 불처럼 터져 나와, 아무도 끄지 못한 채 타오를 것이다.」예레미야 21:12 · 두루새김

왕이 정의를 행해야 하는 때는 특별한 종교 의식의 날도, 국가적 위기 때도 아닙니다. 날마다입니다. 왕에게 공정한 재판은 곁다리로 맡는 일이 아닙니다. 다스리는 권한을 받은 사람이 계속해서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여기서 왕의 역할은 단순히 잘잘못을 판정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힘없는 사람이 강한 사람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도록 구해 내는 것입니다.

왕이 가진 권력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삶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권력이 강한 사람의 편에 서거나 약한 사람의 억울함을 외면한다면, 왕은 자신이 맡은 본래 역할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2:3에서는 이 요구가 더 자세해집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말고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고 합니다. 22:15–16에서는 요시야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의 재판을 공정하게 처리한 일을 평가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연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능력이나 이름에 대한 지식을 갖추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사람이 다스리는 일 속에 실제로 나타나는 일과 관련됩니다.

왕은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이 무엇을 해 주실지 묻지만, 하나님은 왕이 평소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문제는 단순히 군사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고 다윗의 집안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을 저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21:12가 왕의 집안이 저지른 구체적인 범죄를 모두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기준으로 그들의 행동을 평가하시는지는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규모나 성벽의 단단함이 아니라, 억눌린 사람이 실제로 보호받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제 마지막 두 절은 그 책임을 외면하면서도 안전을 확신하는 성읍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부분은 왕의 집안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말씀의 시작입니다. 뒤따르는 22장도 왕의 집안을 향한 정의의 요구를 이어갑니다. 따라서 11–14절은 앞의 전쟁 선포와 하나님에 대한 이해로 연결되면서도, 왕조를 향한 예언들을 묶어 놓은 글의 시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시드기야의 사절들이 방문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모든 말씀이 연속적으로 전달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고 믿었던 바위

예레미야 21:13–14 본문 →

「골짜기에 자리 잡은 성읍아, 평지의 바위 같은 성읍아, 보아라, 내가 너를 대적한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너희는 『누가 우리를 치러 내려오겠어? 누가 우리가 사는 곳에 쳐들어오겠어?』 하고 말한다.」예레미야 21:13 · 두루새김

예루살렘은 언덕과 골짜기로 둘러싸인 지형 위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형은 고대에 적을 막아 내는 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안전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사는 곳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를 행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안전은 당연하다고 믿는 태도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에 들어올 수 있는지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어떻게 대하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너희가 저지른 일에 따라 너희를 벌하겠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그 성읍의 숲에 불을 놓겠다. 불이 그 둘레의 모든 것을 삼킬 것이다.」예레미야 21:14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행위의 열매에 따라 벌하겠다고 말합니다. 열매는 나무와 무관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떤 나무에서 무엇이 자라는지 드러내는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의 삶과 무관하게 내려지는 변덕스러운 결정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살아온 방식이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불은 숲 한가운데서 시작하여 주위를 삼킵니다. 단단한 바위 위에 세워졌다고 자부하던 성읍도 그 불 앞에서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은 바벨론 왕이 성읍을 불태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의 분노가 끌 수 없는 불처럼 터져 나올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그 성읍의 숲에 불을 놓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세 장면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하나의 사건을 비춥니다.

역사 속에서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불태웁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 사건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그 심판의 근거는 왕과 백성의 행동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골짜기에 자리 잡은 성읍」과 「평지의 바위 같은 성읍」이 정확히 어떤 지형이나 시설을 가리키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전체를 묘사한 표현으로 볼 수도 있고, 왕궁이 자리한 곳을 특별히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두 표현만으로 구체적인 위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14절의 숲에 대한 한 가지 가능한 이해는 왕궁과 관련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7:2에는 솔로몬이 지은 「레바논 숲의 집」이 등장합니다. 그 건물에는 백향목 기둥과 목재가 대량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 21:14의 숲은 왕궁 또는 왕의 집안이 사용하는 건축물을 가리키는 이미지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왕의 집안을 향해 말씀하셨다는 점도 이러한 해석에 힘을 보탭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가 이 숲을 특정 건물로 밝히지는 않습니다. 성읍의 숲을 보다 넓은 이미지로 읽을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왕궁이 불탄다는 뜻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맺음말 — 성벽 안의 죽음, 성벽 밖의 생명

예레미야 21:1–14 본문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스라엘의 불의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성읍의 정치적 질서와 왕조의 권력이 무너지는 것은 이 장에서 선언된 심판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질서를 무너뜨리시는 가운데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백성에게 알려 주십니다.

물론 이것을 모든 개인적 실패나 사회적 재난이 하나님이 직접 내리신 형벌이라는 뜻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는 특정한 역사적 위기에 대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독자가 이 말씀에서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에게 그 이유를 함부로 단정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벽 안에는 왕이 있습니다. 왕궁이 있고, 성전이 있으며, 오랫동안 지켜 온 삶의 터전이 있습니다. 백성은 그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습니다.

성벽 밖에는 바벨론 군대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죽이고 성읍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적군입니다.

누구라도 성벽 안이 안전하고 성벽 밖이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반대였습니다.

성벽 안에 머무르면 죽고, 성벽 밖으로 나가면 살 것입니다.

그들이 믿었던 성벽이 갑자기 약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성벽을 둘러싼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판단과 달랐던 것입니다.

그 말씀 앞에서 백성은 자신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안전의 기준을 다시 생각해야 했습니다. 왕 역시 성읍을 지킬 방법만 묻는 자리에서 자신이 어떻게 백성을 다스렸는지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예레미야 21장은 불타는 성읍을 향한 선언으로 끝납니다. 골짜기에 자리하고 단단한 바위를 의지했던 성읍, 누구도 자기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성읍을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가 저지른 일에 따라 너희를 벌하겠다.」

성벽이 무너지기 전에 먼저 무너진 것은, 자기들이 안전하다고 믿었던 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벽 밖에는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생명의 길이 놓여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