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22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백향목 집이 무너지는 이유

왕은 궁전을 지었습니다. 넓은 방을 만들고, 창문을 내고, 값비싼 백향목으로 벽을 꾸몄습니다. 눈에 보이는 왕의 집은 점점 화려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집을 바라보시며 전혀 다른 질문을 하십니다.

「백향목으로 집을 짓는 일에서 남들과 겨룬다고 왕 노릇을 하는 것이냐?」 왕이 왕답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웅장한 궁전과 막강한 권력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 권력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가에 달려 있을까요?

이 세 사람은 모두 다윗의 왕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왕좌는 어느 누구도 지켜 주지 못합니다.

이 장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이미지는 ‘집’입니다. 왕이 거처하는 궁전도 집이고, 왕이 속한 가문도 집입니다. 히브리어 바이트(⁨בַּיִת⁩)는 건물뿐 아니라 집안이나 가문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장은 왕의 궁전에서 시작하여 왕조의 운명으로 나아갑니다.

왕의 집이 얼마나 웅장한가보다, 그 집의 권력 아래에서 누가 보호받고 누가 짓밟히는가가 중요합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922장 본문 읽기 →

궁전의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예레미야 22:1–5 본문 →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다 왕궁으로 내려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렇게 말해라. 『다윗의 왕좌에 앉은 유다 왕아, 여호와야훼의 말을 들어라. 너와 네 신하들과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모두 들어라.』」예레미야 22:2 · 두루새김

이 장면에서 궁전은 단순히 왕이 사는 집이 아닙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사람들이 그 권력과 관계를 맺는 장소입니다. 왕의 결정은 궁전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정하고 올바르게 행동해라. 빼앗긴 사람을 억누르는 자의 손에서 구해 내라. 너희 땅에 머무는 외국인과 고아와 남편을 잃은 여자를 괴롭히거나 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마라. 이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죽이지 마라.」예레미야 22:3 · 두루새김

바로 앞 장에서 왕실을 향해 주어졌던 공정하게 다스리라는 요구가 여기서는 더욱 구체적인 사람들의 얼굴을 얻습니다. 그 땅에 머무는 외국인은 자신을 보호해 줄 가족과 친척, 지역 공동체의 기반이 약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고아와 남편을 잃은 여자도 당시 사회에서 경제적·법적 보호를 받기 어려운 처지에 놓일 수 있었습니다.

이 명령에는 두 방향이 있습니다. 왕은 자기 권력으로 약한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이 그들을 해칠 때 그것을 막아야 합니다.

「너희가 이 말을 반드시 실천한다면, 다윗의 뒤를 이어 그의 왕좌에 앉는 왕들이 저마다 자기 신하들과 백성과 함께 전차와 말을 타고 이 왕궁의 문들로 들어올 것이다.」예레미야 22:4 · 두루새김

본문은 처음에 궁전의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부르더니, 이제 그 문으로 들어올 미래의 왕들을 보여 줍니다. 전차와 말은 왕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왕조가 이어지는 일은 왕이 얼마나 많은 권력을 쥐고 있는가보다,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연결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는 정반대의 미래가 제시됩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 말들을 듣지 않는다면, 이 왕궁은 반드시 폐허가 될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두고 맹세한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2:5 · 두루새김

하나님은 「나 자신을 두고 맹세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궁전의 파괴가 얼마나 엄중한 문제인지를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다윗 왕조에 대한 약속은 왕들이 공정함을 버려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보증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신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을 구원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2:21–24에서는 그 땅에 머무는 외국인과 남편을 잃은 여자와 고아를 억누르지 말라고 명령하시며, 그들이 부르짖으면 자신이 듣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공동체는 그분이 구원하신 방식을 사람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드러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억눌린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을 대표하여 다스리는 왕 역시 그 부르짖음을 들어야 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이 땔감이 되다

예레미야 22:6–9 본문 →

여호와야훼께서 유다 왕궁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길르앗 같고 레바논의 꼭대기 같다. 그래도 내가 반드시 너를 광야처럼, 사람이 살지 않는 성읍들처럼 만들겠다.」예레미야 22:6 · 두루새김

길르앗은 요단 동쪽의 산지로, 숲과 목초지로 알려진 지역입니다. 레바논은 웅장한 산과 백향목으로 유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왕궁을 처음부터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왕의 집은 하나님 앞에서도 귀하게 여겨지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파괴는 숲을 베는 장면으로 표현됩니다.

「내가 저마다 연장을 든 파괴자들을 따로 세워 너를 치게 하겠다. 그들이 너의 가장 좋은 백향목들을 베어 불에 던질 것이다.」예레미야 22:7 · 두루새김

사람들이 공들여 다듬고 높이 평가했던 것이 파괴의 순간에는 단지 불에 탈 나무가 됩니다. 이 장면은 뒤에 나오는 여호야김의 궁전 이야기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왕은 백향목으로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려 하지만, 하나님은 백향목이 왕권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고 선언하십니다.

8–9절에서는 폐허가 된 성읍을 지나가는 여러 민족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많은 민족이 이 성읍 곁을 지나가며 서로 물을 것이다. 『여호와야훼께서 어째서 이 큰 성읍에 이런 일을 하셨을까?』」예레미야 22:8 · 두루새김

이 질문은 단순히 성읍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이 사는 큰 성읍에 이런 일을 하셨는지를 묻습니다.

그 대답은 군사력이나 국제 정세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대답할 것이다. 『이 성읍 사람들이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와 맺은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며 그들을 섬겼기 때문이야.』」예레미야 22:9 · 두루새김

이 문답은 신명기 29:24–26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사람들이 땅이 황폐해진 이유를 묻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듣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언약의 경고가 이제 예루살렘의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3절에서는 공정하고 올바른 행동, 약자에 대한 보호가 강조되었고, 9절에서는 다른 신들을 섬긴 일이 심판의 이유로 제시됩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과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는 일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삶은 예배의 대상만 바뀌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언약을 저버린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궁전 전체에 대한 경고에서 개별 왕들의 운명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히브리어 동사 키다쉬티(⁨קָדַשׁ⁩)는 어떤 목적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본문에서는 파괴자들을 하나님이 정하신 심판의 일을 수행하도록 구별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파괴자들의 모든 행동이 도덕적으로 거룩하거나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서 특정한 역할을 맡는다는 뜻입니다. 왕에게 백향목은 귀한 건축 재료였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용했고(열왕기상 5–6장), 왕궁 건축에도 많은 백향목이 사용되었습니다(열왕기상 7:2–12).

죽은 왕보다 떠나는 왕을 위해 울어라

예레미야 22:10–12 본문 →

예레미야가 말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 울거나 슬퍼하지 마라. 떠나가는 사람을 위해 울고 또 울어라. 그는 다시 돌아와 자기가 태어난 땅을 보지 못할 것이다.」예레미야 22:10 · 두루새김

바로 다음 절에서 떠나는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집니다. 요시야의 아들 살룸입니다. 살룸은 열왕기하 23:30–34에 등장하는 여호아하스와 동일한 왕으로 이해됩니다.

여호아하스는 아버지 요시야가 죽은 뒤 왕이 되었지만, 석 달 만에 이집트 왕 파라오 느고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는 이집트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10절의 「죽은 사람」은 문맥상 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요시야는 죽었지만 자기 땅에 묻혔습니다(열왕기하 23:29–30). 반면 살룸은 살아서 끌려갔지만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을 위해 울지 말라는 명령을 일반적으로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은 두 왕의 처지를 강하게 대조하여, 이제 유다에게 닥쳐온 새로운 비극을 부각합니다.

한 왕의 죽음도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왕이 자기 나라에서 쫓겨나 다시는 고향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나라 자체의 운명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살룸은 왕이었지만 자기가 돌아갈 일조차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왕은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집을 잃게 됩니다.

백향목으로 왕 노릇을 할 수 있는가?

예레미야 22:13–17 본문 →

13절은 갑자기 한 사람의 건축 현장을 보여 줍니다.

「불의를 저지르며 자기 집을 짓고, 공정하지 않게 위층 방들을 짓는 자에게 화가 있다! 그는 이웃에게 일을 시키고도 일한 대가를 주지 않는다.」예레미야 22:13 · 두루새김

아직 왕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18절은 이 말씀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을 향한다는 것을 밝혀 줍니다. 여호야김은 살룸의 형제입니다. 이집트 왕 느고가 살룸을 왕위에서 쫓아낸 뒤 그를 왕으로 세웠습니다(열왕기하 23:34).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의 궁전을 자세히 묘사하기 전에, 그 집을 짓는 데 사용된 노동부터 보여 줍니다.

14절에서는 왕의 시선으로 장면이 바뀝니다.

「그는 『나를 위해 큰 집을 짓고, 위층에는 널찍한 방들을 만들어야겠다.』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창문을 내고, 집 안을 백향목으로 덮고, 붉은 물감을 칠한다.」예레미야 22:14 · 두루새김

당시의 왕궁은 통치자의 권위와 국력을 드러내는 건물이기도 했습니다. 궁전 안에 있는 사람은 백향목과 붉은 벽면을 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 건물에 들어간 노동과 불의를 봅니다.

왕에게 궁전은 자신의 위엄을 증명하는 건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 궁전은 그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백향목으로 집을 짓는 일에서 남들과 겨룬다고 왕 노릇을 하는 것이냐? 네 아버지도 먹고 마시며 살지 않았느냐? 그는 공정하고 올바르게 행동했고, 그때는 그가 잘되었다.」예레미야 22:15 · 두루새김

「백향목으로 집을 짓는 일에서 남들과 겨룬다」는 표현은 귀한 건축 재료를 사용하여 남보다 뛰어난 모습을 드러내려는 경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요시야입니다. 이 말은 요시야가 아무것도 누리지 않고 가난하게 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도 먹고 마시며 왕으로 살아갔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문제 삼으시는 것은 왕이 좋은 음식을 먹거나 아름다운 집에 사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얻는 방식입니다.

요시야는 먹고 마시면서도 공정하고 올바르게 행동했습니다. 왕으로서의 생활과 공정한 통치를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여호야김이 왕이기 때문에 백성의 노동을 착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억압이 필요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는 다르게 다스렸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억울한 일을 공정하게 판결했다. 그때는 일이 잘되었다.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냐?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2:16 · 두루새김

하나님을 아는 일이 그분의 성품과 뜻을 따르는 삶에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왕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가난한 사람의 억울함을 외면한다면, 그가 주장하는 앎은 본문이 말하는 앎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왕의 집은 왕이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아는지 말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 내려지는 판결은 그것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네 눈과 마음은 부당하게 이익을 챙기는 데,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데, 사람들을 억누르고 짓밟는 데만 쏠려 있다.」예레미야 22:17 · 두루새김

「네 눈과 마음」이라는 표현은 그가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드러냅니다. 앞에서는 왕의 건축물을 묘사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건축물을 만들어 낸 욕망을 드러내십니다.

왕의 죽음에 아무도 애곡하지 않는다

예레미야 22:18–19 본문 →

그러므로 여호와야훼께서 요시야의 아들인 유다 왕 여호야김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아이고, 내 형제야! 아이고, 내 자매야!』 하며 슬피 울지 않을 것이다. 『아이고, 임금님! 아이고, 임금님의 위엄이여!』 하며 슬피 울지도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22:18 · 두루새김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의 죽음 자체보다 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먼저 말합니다.

앞부분에 나오는 형제와 자매를 부르며 슬피 우는 말은 가까운 사람을 잃었을 때의 슬픔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어지는 「임금님」과 「임금님의 위엄」을 부르며 슬피 우는 말은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을 향한 애도를 연상시킵니다.

두 가지 애곡이 모두 부정됩니다.

「그는 죽은 나귀처럼 묻힐 것이다. 끌려가 예루살렘 성문 밖에 내던져질 것이다.」예레미야 22:19 · 두루새김

「죽은 나귀처럼 묻힐 것이다」라는 말은 존엄한 장례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장의 처음에는 다윗의 왕좌에 앉을 왕들이 궁전의 문으로 들어오는 미래가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김의 마지막에는 그가 예루살렘의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가는 장면이 놓입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보여 주기 위해 큰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 집에 머무를 자리도 보장받지 못합니다.

이제 예언의 시선은 특정한 왕을 떠나 예루살렘 전체로 넓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이 예언이 실제 장례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열왕기하 24:6은 여호야김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하지만, 장례의 구체적인 모습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문이 선포한 불명예스러운 죽음과 매장을 역사적으로 어떤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지까지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백향목에 둥지를 튼 사람의 착각

예레미야 22:20–23 본문 →

「예루살렘아, 레바논으로 올라가 외쳐라. 바산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아바림에서 외쳐라. 너의 연인들이 모두 무너졌기 때문이다.」예레미야 22:20 · 두루새김

레바논, 바산, 아바림은 서로 다른 지역입니다. 레바논은 북쪽의 산악 지역이고, 바산은 요단 동쪽의 고원 지대이며, 아바림은 요단 동쪽 산지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연인들은 문자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예루살렘이 의지했던 대상들을 가리키는 비유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정치적 문맥에서는 외교적 동맹국이나 도와주던 세력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특정 나라들을 이름으로 밝히지는 않으므로 어느 세력을 가리키는지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네가 평안할 때 내가 네게 말했지만, 너는 『듣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네가 젊을 때부터 해 온 일이다.」예레미야 22:21 · 두루새김

나라가 안전하다고 느껴질 때에는 경고를 들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지금의 질서가 계속 유지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던 사람들이 위기가 닥치자 의지하던 세력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람이 네 목자들을 모두 몰아가고, 네 연인들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그때 너는 네가 저지른 모든 악한 일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수치를 당할 것이다.」예레미야 22:22 · 두루새김

목자는 일반적으로 양 떼를 이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목자들이 도리어 바람에 몰려갑니다. 백성을 돌보고 인도해야 할 사람들이 자신들의 운명조차 다스리지 못하게 됩니다.

23절은 앞에서 등장했던 백향목 이미지로 돌아옵니다.

「레바논에 살며 백향목들 사이에 둥지를 튼 너야, 아이를 낳는 여자처럼 고통이 닥칠 때, 네가 얼마나 가엾게 되겠느냐!」예레미야 22:23 · 두루새김

높은 나무에 둥지를 튼 새는 주변을 내려다보며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가 쓰러지면 둥지도 함께 떨어집니다. 앞에서 왕실은 백향목으로 지어진 집에 비유되었습니다. 이제 그 집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백향목들 사이에 둥지를 튼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백향목들 사이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다가옵니다.

조금 더 깊이

‘목자’는 왕이나 지도자를 가리키는 비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의 히브리어는 목자와 연인을 가리키는 표현의 관계 때문에 읽기가 갈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문맥에서는 예루살렘이 의지했던 지도자나 도와주던 세력이 더 이상 버팀목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 중심에 있습니다. 「네가 얼마나 가엾게 되겠느냐」라는 말은 실제 연민의 표현일 수도 있고, 심판받는 사람의 처지를 비꼬는 표현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고대 그리스어 번역 전통에는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모습을 강조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문맥만으로 그 어조를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뒤따르는 아이를 낳는 여자의 고통이라는 비유가 나타내는 아픔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빼내지는 인장 반지

예레미야 22:24–27 본문 →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한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여호야김의 아들인 유다 왕 고니야야, 네가 내 오른손에 낀 인장 반지라 해도 내가 너를 거기서 빼내겠다.」예레미야 22:24 · 두루새김

고니야는 여호야긴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입니다. 그는 여호야김의 아들로 왕이 되었지만, 석 달 남짓 다스린 뒤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열왕기하 24:8–15).

고대의 인장 반지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습니다. 소유자의 인장을 찍어 문서의 권위와 진정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창세기 41:42에서 파라오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 반지를 주며 권한을 부여합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고니야가 실제로 하나님의 인장 반지였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장 반지라 해도」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설령 그가 그만큼 귀하고 권위 있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빼내실 것입니다.

왕권의 존엄함이 심판을 막아 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백향목은 왕이 자신의 부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재료였습니다. 그러나 인장 반지는 왕이 누구의 권위를 대표하는가 하는 문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왕은 자신의 집을 꾸밀 수는 있지만, 그 왕권을 궁극적으로 보증하는 분은 자신이 아닙니다.

고니야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칼데아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도 함께 낯선 땅으로 쫓겨날 것입니다. 이 예언은 열왕기하 24:12–15에 기록된 여호야긴과 왕의 어머니, 왕실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건과 연결됩니다.

살룸은 고향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고니야와 그의 어머니도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왕에게 땅은 단순한 재산이 아닙니다. 그가 다스리던 나라이고, 그의 조상들이 살아온 곳이며, 다윗 왕조의 역사가 이어진 장소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땅으로 돌아올 권한조차 잃습니다.

자손이 있는데도 자식 없는 사람으로 기록하라

예레미야 22:28–30 본문 →

고니야를 향한 마지막 말씀은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고니야라는 이 사람은 멸시받는 깨진 그릇입니까?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릇입니까? 어째서 그와 그의 자손이 내던져져, 알지도 못하던 땅으로 쫓겨났습니까?예레미야 22:28 · 두루새김

여기서는 인장 반지의 이미지가 깨진 그릇의 이미지로 바뀝니다. 인장 반지는 귀한 물건입니다. 소유자의 권위를 나타내며 특별히 보관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깨진 그릇은 더 이상 본래의 용도로 사용할 수 없거나 버려진 물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이미지 사이의 간격이 왕의 몰락을 드러냅니다.

본문은 28절의 질문을 하나님의 직접 발언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예언자 또는 그 사건을 바라보는 이들의 놀라움을 담은 질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 뒤에 세 번의 부름이 이어집니다.

예레미야가 외쳤습니다. 「땅아, 땅아, 땅아! 여호와야훼의 말을 들어라.」예레미야 22:29 · 두루새김

특정 지역의 주민들을 향한 부름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세 번의 반복은 왕조를 향한 선언의 중대함을 널리 알리는 효과를 냅니다. 이 장에서는 떠나는 왕이 고향 땅을 다시 보지 못하고, 또 다른 왕이 낯선 땅으로 끌려가는 장면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잃어버리는 땅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을 자식 없는 사람으로, 평생 일이 잘 풀리지 않을 사람으로 기록해라. 그의 자손 가운데 누구도 다윗의 왕좌에 앉아 다시 유다를 다스리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예레미야 22:30 · 두루새김

고니야에게 자손이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바로 앞의 28절과 충돌합니다. 28절은 고니야와 그의 자손이 함께 쫓겨났다고 말했습니다. 역대상 3:17–18에도 여고냐, 곧 고니야의 자손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자손의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왕위를 이어받는 후계자의 문제입니다. 고니야에게 자손은 있지만, 그에게서 왕권을 이어받아 유다를 다스릴 후손은 없으리라는 선언입니다.

왕에게 자손은 개인적인 기쁨의 대상인 동시에 왕조의 미래를 의미했습니다. 왕이 죽더라도 아들이 왕이 되고, 다시 그 아들이 왕이 되는 방식으로 왕실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니야에게 그 기대를 거두십니다.

조금 더 깊이

바로 다음 장인 예레미야 23:5–6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왕은 지혜롭게 다스리고 공정하고 올바르게 행동할 것입니다. 22장에서 공정함을 버린 왕조에 내려진 심판과 23장에서 공정하게 다스릴 왕에 대한 약속이 나란히 놓이는 것입니다. 훗날 학개 2:23에서는 하나님이 스룹바벨을 인장 반지처럼 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룹바벨은 역대상 3:17–19의 계보에서 고니야의 후손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22:24에서 빼낸 인장 반지와 학개 2:23에서 다시 등장하는 인장 반지는 함께 읽을 만한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학개의 말씀을 고니야의 후손이 다시 유다의 왕좌에 앉았다는 역사적 기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스룹바벨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다의 총독으로 등장합니다(학개 1:1). 다윗의 왕좌가 이전 형태 그대로 회복되었다고 본문이 말하지는 않습니다. 신약의 마태복음 1:11–12는 예수님의 계보에 여고냐를 포함하여 이 왕조의 역사를 이어 읽습니다. 이것은 후대의 성경에서 이루어지는 연결이며, 예레미야 22장이 직접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는 본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맺음말 — 궁전을 지은 사람의 이름보다 그 손에 남은 것이 중요하다

예레미야 22:1–30 본문 →

왕의 손은 궁전을 짓도록 명령할 수도 있고, 억눌린 사람을 구해 낼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22장은 그 두 손이 같은 왕의 손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손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었는지에 따라 왕의 집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은 달라집니다.

여호야김은 백향목으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를 기억하시는 이유는 백향목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이미지는 화려한 왕궁이 아닙니다.

왕궁의 백향목이 베어져 불 속에 던져지는 장면과, 가난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 주던 한 왕의 판결이 나란히 떠오릅니다.

백향목으로 세운 집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집에서 공정한 일이 이루어졌는지를 잊지 않으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