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40장
이 장의 자리 · 34–45장 · 무너지는 예루살렘
무너진 나라에 다시 모인 사람들
예루살렘은 무너졌습니다. 왕은 끌려갔고, 성벽은 허물어졌으며, 많은 백성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0장에는 뜻밖의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흩어져 있던 군인들이 모이고, 이웃 나라로 피신했던 사람들이 돌아오며, 포도주와 여름 과일이 풍성하게 거두어집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땅에서는 다시 삶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래도록 안전해 보이지 않습니다. 가까스로 모인 사람들 사이에 암살 음모에 관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전에는 성벽을 지키고 왕국을 보존하는 일이 중심이었습니다. 이제는 어디에서 살 것인지, 무엇을 먹고 살아갈 것인지, 누구와 함께할 것인지, 서로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가 중요해집니다.
수갑에 묶인 예언자에게 주어진 자유
40장은 예레미야가 라마에서 풀려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끌려가던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포로 가운데 수갑에 묶여 있었습니다. 경비대장 느부사라단이 라마에서 그를 데려다가 풀어 준 뒤, 여호와야훼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이 왔습니다.예레미야 40:1 · 두루새김
라마는 예루살렘 북쪽 베냐민 지역의 성읍으로, 이 장에서는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포로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등장합니다. 예레미야는 오랫동안 바벨론에 의한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자신이 자동으로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역시 패배한 백성과 함께 수갑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경비대장이 예레미야를 데려다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이곳에 이런 재앙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셨어요.」예레미야 40:2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재앙을 내리셨어요. 여러분이 여호와야훼께 죄를 짓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예요.」예레미야 40:3 · 두루새김
유다의 지도자들은 예레미야의 경고를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정복한 외국 군대의 지휘관은 그 경고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일치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언자를 조롱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정복자가 예언의 성취를 인정하는 역설적인 장면입니다.
특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라는 표현에는 거리감이 남아 있습니다. 느부사라단은 여호와야훼를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고 예레미야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이 발언을 바벨론 지휘관의 신앙 고백으로 확대하기보다, 유다가 듣지 않았던 경고가 얼마나 분명하게 현실이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증언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후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의 수갑을 풀어 줍니다.
「이제 보세요. 오늘 저는 당신 손에 채워진 수갑을 풀어 드렸어요. 저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고 싶으면 오세요. 제가 잘 돌봐 드릴게요. 함께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돼요. 온 땅이 당신 앞에 있어요. 좋고 알맞다고 여기는 곳으로 가세요.」예레미야 40:4 · 두루새김
유다가 독립 왕국이었을 때 예레미야는 여러 차례 갇혔고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제 유다는 바벨론의 지배 아래 들어갔지만, 예레미야에게는 적어도 어디에서 살 것인지 선택할 자유가 주어집니다. 다른 수많은 유다 사람은 포로로 끌려가고 있으며,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선택은 예외적인 대우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어디로 갈까요?
느부사라단은 그달랴에게 가서 백성 가운데 살거나 원하는 다른 곳으로 가라고 말합니다. 먹을 것과 선물도 줍니다.
예레미야는 미스바에 있는 아히감의 아들 그달랴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남은 백성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살았습니다.예레미야 40:6 · 두루새김
예레미야에게는 정복자의 보호를 받으며 바벨론으로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다에 남은 백성 가운데 살기로 합니다. 그 선택의 모든 동기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의 자유는 백성으로부터 멀어지는 데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고난 이후에도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길로 이어졌습니다.
조금 더 깊이
39:11~14에서는 바벨론 왕이 예레미야를 보호하라고 명령하고, 관리들이 그를 경비대 뜰에서 데려와 그달랴에게 맡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40장에서는 예레미야가 다른 포로들과 함께 수갑에 묶여 라마까지 끌려온 것으로 나타납니다. 두 기록 사이의 정확한 경위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한 차례 풀려난 뒤 다시 포로들과 함께 붙잡혔을 가능성도 있고, 40장이 풀려나는 과정을 다른 관점에서 보충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동 과정을 하나로 확정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2절은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에게 말했다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따라서 2~5절의 발언은 경비대장의 말입니다. 1절의 예언을 소개하는 문구는 이 사건을 포함한 더 넓은 이야기의 시작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장에는 그 문구에 대응하는 별도의 직접적인 하나님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왕이 없는 유다에 새로운 중심이 생기다
이제 이야기의 중심은 예레미야에서 그달랴에게 옮겨 갑니다.
예루살렘은 무너졌고 다윗 왕조의 통치도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땅에서 모든 행정과 공동체 생활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달랴는 다윗 왕가의 왕이 아닙니다. 바벨론이 임명한 유다의 통치 책임자입니다. 이전에는 예루살렘 왕궁을 중심으로 나라가 운영되었다면, 이제 미스바가 남은 백성을 위한 새로운 행정 중심지로 등장합니다.
미스바는 베냐민 지파의 땅에 속한 성읍으로, 사사기 20:1~3과 사무엘상 7:5~6에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등장합니다. 이곳의 이름은 유다 역사에서 낯선 것이 아니지만, 이제 그 역할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전쟁에서 패한 뒤 남은 사람들의 삶을 정리하는 중심지가 됩니다.
그달랴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레미야가 죽을 위험에 놓였을 때 그를 보호했던 사람입니다(26:24). 할아버지 사반은 요시야 시대 율법책의 발견과 전달에 참여했던 서기관입니다(열왕기하 22:3~10). 이 집안은 여러 세대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이 유다의 정치와 충돌하는 중요한 순간에 등장합니다.
들에 있던 유다의 모든 군 지휘관과 그 부하들은 이런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벨론 왕이 아히감의 아들 그달랴에게 그 땅을 맡겼으며, 바벨론으로 끌려가지 않은 남자들과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그 땅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를 그에게 맡겼다는 것이었습니다.예레미야 40:7 · 두루새김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다 군대가 패배했지만, 모든 병사가 죽거나 붙잡힌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방에 흩어져 있거나 아직 무장 집단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8절은 그들이 미스바로 왔다고 기록합니다. 여러 지휘관의 이름이 나열되는데, 그 가운데 특별히 기억해야 할 인물은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입니다.
두 사람은 지금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모두 그달랴에게 찾아온 군 지휘관들의 무리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요하난은 이스마엘이 그달랴를 죽이려 한다고 고발합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공동체 내부의 신뢰가 자동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외부의 적에 맞서야 했던 사람들이 이제 같은 땅에서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각자가 전쟁 중 어떤 입장을 취했고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모두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달랴는 이들을 맞이하면서 맹세합니다.
사반의 손자이며 아히감의 아들인 그달랴가 그들과 그 부하들에게 맹세하며 말했습니다. 「칼데아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겨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예레미야 40:9 · 두루새김
바벨론은 이미 유다를 정복했습니다. 왕은 끌려갔고 성읍은 무너졌습니다. 그 상황에서 다시 독립전쟁을 시작하겠다는 희망에 매달리기보다, 남은 땅에서 살아갈 길을 찾자는 것입니다.
그달랴의 권고는 예레미야가 이전에 전했던 말씀과 같은 방향에 있습니다. 예레미야 27:11에서 하나님은 바벨론 왕의 멍에 아래 머물며 그를 섬기는 민족은 자기 땅에 남아 농사를 지으며 살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왕국을 지키기 위한 기회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전쟁에서 패한 뒤 남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중요해졌습니다.
그달랴는 바벨론을 종교적으로 숭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벨론 왕의 지배를 인정하고 그 아래에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것이 바벨론의 정복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그 폭력을 칭찬하는 말도 아닙니다.
본문은 바벨론이 유다를 정복하고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달랴는 바로 그 현실 속에서 남은 사람들이 살아갈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의 지도력은 승리의 약속이 아니라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새로운 통치의 중심에 놓인 포도주와 과일
그달랴는 군 지휘관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구분해 말합니다.
「나는 미스바에 머물며 우리에게 오는 칼데아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을 맡겠다. 너희는 포도주와 여름 과일과 기름을 모아 그릇에 담아 두고, 너희가 차지한 성읍들에서 살아라.」예레미야 40:10 · 두루새김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생활을 이어 갈 수 있도록 자신이 통치 당국을 상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군 지휘관들에게 성벽을 수리하거나 병력을 다시 모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앞서 37~39장의 주요 사물은 무기와 족쇄, 진흙 구덩이, 성벽과 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은 포도주, 여름 과일, 기름, 그릇입니다.
죽음과 파괴에 사용되는 것들에서 생존과 생활에 필요한 것들로 관심이 옮겨 갑니다.
포도주와 기름 역시 고대 유다의 중요한 농산물이었습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사치품이 아니라 일상생활과 식량 저장, 교역을 위해 중요한 물품이었습니다. 그달랴는 사람들이 그릇에 담아 보관하도록 합니다. 이는 당장의 한 끼를 마련하는 것을 넘어 수확물을 저장하며 앞으로의 생활을 준비하는 행동입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허물어졌지만 포도나무는 남아 있습니다. 왕궁은 불탔지만 땅은 여전히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유다의 정치 체제는 무너졌어도 그 땅에서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때 성경은 회복을 화려한 왕궁의 재건이나 즉각적인 정치적 독립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포도주를 모으고 과일을 거두며 기름을 저장하는 일상적인 노동 속에서 사람들이 다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회복의 시작은 때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는 일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으로 다시 살아가기 시작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레미야가 이전에 바벨론 포로들에게 전한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예레미야 29:5~7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집을 짓고 살며, 밭을 일구고 열매를 먹고, 자신들이 끌려간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9장은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이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말합니다. 반면 40장은 유다에 남은 사람들이 정복당한 자기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반드시 당장 원래의 정치적 질서를 되찾아야만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삶은 심판의 현실을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계속 살아가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누구 앞에 서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표현은 단순히 그 사람과 마주 서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문맥에 따라 그 앞에서 일하거나 섬기는 관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두루새김은 이 구절을 칼데아 사람들이 찾아올 때 그달랴가 그들을 상대하는 일을 맡겠다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정 업무를 맡았는지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미스바에 머물고 다른 사람들은 성읍들에서 살아가라고 구분한 것을 보면, 바벨론 당국과 접촉하는 역할을 스스로 맡으려 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흩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오다
그달랴가 미스바에서 통치를 시작했다는 소식은 유다 땅 안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모압 땅과 암몬 사람들의 땅과 에돔과 다른 모든 땅에 있던 유다 사람들도 모두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벨론 왕이 유다에 백성을 남겨 두고, 사반의 손자이며 아히감의 아들인 그달랴에게 그들을 맡겼다는 소식이었습니다.예레미야 40:11 · 두루새김
모압, 암몬, 에돔은 유다 주변에 있던 나라들입니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일부 유다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피신해 있었음을 이 구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백성을 남겨 두고」입니다. 원문에서 쓰인 히브리어 셰에리트(שְׁאֵרִית)는 살아남은 사람들, 남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언서에서는 이 표현이 심판 속에서도 보존되는 백성을 가리키는 신학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우선 바벨론으로 끌려가지 않고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들이 모두 신앙적으로 충실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표현이 중요한 것은 유다의 역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그 유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쫓겨 갔던 곳에서 돌아와, 유다 땅 미스바에 있는 그달랴에게 왔습니다. 그들은 포도주와 여름 과일을 아주 많이 모았습니다.예레미야 40:12 · 두루새김
여기서 「돌아와」는 단순한 이동 이상의 정서적 의미를 가집니다. 전쟁 때문에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자기 땅으로 돌아옵니다. 흩어진 가족과 공동체가 다시 모일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것을 바벨론 포로 생활 전체가 끝나는 귀환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유다 주변 지역으로 피신했던 사람들이며,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이 대규모로 돌아왔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서 그달랴가 명령했던 일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달랴가 약속한 안정이 적어도 일정 기간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제 그달랴에게는 더 큰 책임이 생깁니다.
그는 소수의 생존자만 관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흩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조금씩 커져 가는 공동체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사실만으로 공동체가 안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30~31장에서 하나님은 흩어진 백성을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특히 31:15에는 라마에서 자녀를 잃고 우는 라헬의 모습이 나오고, 31:16~17에는 자녀들이 다시 자기 땅으로 돌아올 희망이 선포됩니다. 40장 역시 라마에서 시작했습니다. 그곳에는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장에서 사람들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유다 땅으로 돌아옵니다. 이를 예레미야 31장의 회복 예언이 완전히 성취된 사건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 회복의 범위와 규모는 훨씬 큽니다. 다만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들과 다시 땅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한 장에 함께 배치한 이야기는 상실과 회복이 동시에 존재하는 유다의 현실을 보여 줍니다.
다시 모인 공동체 안에서 들려온 암살 경고
40장 마지막 부분은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돌아오고 수확물이 풍성하게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하난과 군 지휘관들이 그달랴에게 찾아와 심각한 소식을 전합니다.
그들이 그달랴에게 말했습니다. 「암몬 사람들의 왕 바알리스가 당신을 죽이려고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러나 아히감의 아들 그달랴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예레미야 40:14 · 두루새김
암몬은 유다 동쪽의 이웃 나라였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암몬에 피신했던 유다 사람들이 돌아오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암몬 사람들의 왕이 유다의 새로운 지도자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14절은 이스마엘이 실제로 암살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직접 확인해 주는 문장이 아닙니다. 요하난과 군 지휘관들이 그달랴에게 전달한 주장입니다.
그런데 요하난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미스바에서 그달랴에게 몰래 말했습니다. 「제가 가서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죽이게 해 주십시오.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가 당신을 죽이면, 당신께 모여든 모든 유다 사람이 흩어지고 유다에 남은 백성도 멸망할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어야 합니까?」예레미야 40:15 · 두루새김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모여든」과 「흩어지고」의 대조입니다. 12절에는 사람들이 유다 땅으로 돌아와 모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15절에서 요하난은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흩어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왕국의 정치적 영광이 아닙니다. 살아남은 백성들의 공동체 자체가 다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하난의 경고를 단지 권력 다툼의 한 장면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안한 해결책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살해 의도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고 해서, 그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몰래 그 사람을 죽이는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하난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이스마엘을 죽이자고 하지만, 그 제안 자체가 또 다른 불법적인 살인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달랴는 이제 단순한 선택 앞에 서 있지 않습니다.
경고를 무시하면 공동체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경고를 사실로 확정하고 이스마엘을 죽이도록 허락하면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바알리스가 왜 그달랴를 죽이려 했다는 것인지, 실제로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이 장에서 설명되지 않습니다. 원문에서는 「알고 계십니까?」에 해당하는 동사 야다가(יָדַע) 강조된 형태로 반복됩니다. 원문에서는 단순히 아는지 묻는 것보다 강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확신에 차서 말한다는 사실과 그 주장이 실제로 참이라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거짓이라고 단정하는 지도자
그달랴는 요하난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아히감의 아들 그달랴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일은 하지 마라. 네가 이스마엘에 관해 하는 말은 거짓이다.」예레미야 40:16 · 두루새김
이 말에는 구별해야 할 두 판단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그달랴는 이스마엘을 몰래 죽이는 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둘째, 그달랴는 요하난이 전한 암살 음모 자체를 거짓이라고 판단합니다.
이 두 판단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살해 제안을 거절하는 일은 그 경고가 사실인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정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암살 음모가 실제로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달랴는 요하난의 말이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가 어떤 근거로 그렇게 판단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조사했는지, 이스마엘에게 해명을 요구했는지, 다른 증언을 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그달랴를 순진한 지도자라고 평가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그의 판단이 옳았다고 확정해서도 안 됩니다. 38장에서는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고, 그에게는 자신을 보호해 줄 에벳멜렉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읽고 온 독자에게 요하난의 경고는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40장 자체는 암살 음모가 사실인지 아직 밝혀 주지 않습니다.
그달랴는 새롭게 모인 사람들을 믿고 함께 살아가도록 해야 하는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려 한다는 고발을 듣습니다.
이때 필요한 신뢰는 모든 주장을 무조건 믿어 주는 태도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필요한 경계심도 의심받는 사람을 제거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달랴가 지도자로서 직면한 어려움은 그 둘 사이에서 공동체를 보호할 수 있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풍성한 수확 뒤에 남은 한마디
예루살렘의 멸망은 분명한 사건이었습니다. 성벽이 무너지고 왕이 끌려갔다는 사실은 누구나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공동체가 마주한 위험은 눈에 보이는 적군만이 아닙니다. 서로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누구를 신뢰하고 어떤 행동을 허락해야 하는지 판단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40장은 그 위기를 해결하지 않은 채 끝납니다.
미스바에는 돌아온 사람들이 있고, 그릇에는 포도주와 여름 과일이 담겨 있습니다. 그달랴는 새롭게 모인 공동체의 지도자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삶을 다시 시작한 사람들 사이에서, 한 사람은 살해 음모를 경고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말이 거짓이라고 단언합니다.
유다 땅에는 다시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함께 누릴 수 있을 만큼 사람들 사이의 신뢰가 자라났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