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41장
이 장의 자리 · 34–45장 · 무너지는 예루살렘
살아남은 사람들이 떠나려 하는 땅
예루살렘이 무너졌을 때에도 유다 땅에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바벨론은 그달랴를 책임자로 세웠고, 전쟁을 피해 흩어졌던 유다 사람들은 돌아와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왕도 성전도 잃었지만, 그 땅에서 살아갈 가능성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1장은 그 작은 가능성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남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람은 유다 왕족 출신이고, 희생자들은 함께 식사한 사람들, 예배하러 가던 사람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기 백성입니다.
예레미야 41장이 보여 주는 비극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폭력이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과 미래까지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장은 그 과정을 미스바의 식탁에서 시작하여 베들레헴 곁의 길목까지 따라갑니다.
함께 먹던 빵이 배신의 자리가 되다
41장은 이스마엘의 신분을 길게 소개합니다. 그는 엘리사마의 손자이며 느다냐의 아들이고, 왕족 출신이며 왕의 고위 관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다윗 왕조의 통치가 중단된 상황에서, 이스마엘은 옛 왕실과 연결된 인물입니다. 반면 그달랴는 바벨론 왕이 임명한 책임자입니다. 두 사람은 무너진 유다의 정치적 현실에서 서로 다른 위치를 차지합니다.
일곱째 달에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열 사람과 함께 미스바에 있는 아히감의 아들 그달랴를 찾아왔습니다. 이스마엘은 엘리사마의 손자로, 왕족 출신이며 왕의 고위 관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미스바에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예레미야 41:1 · 두루새김
고대 사회에서 함께 음식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한자리에 있다는 뜻을 넘어, 손님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안전을 기대하는 관계와 연결됩니다. 그달랴는 이스마엘을 적으로 대하지 않고 자신의 식탁에 앉혔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이스마엘과 열 사람은 일어나 그달랴를 칼로 칩니다.
그달랴는 개인적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일 뿐 아니라, 바벨론과 유다 주민 사이에서 공동체를 유지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앞 장에서 그는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그 땅에 살며 수확물을 거두라고 권했습니다(40:9–10).
그가 살해되자 유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미스바에 있던 칼데아 군인들까지 죽임당합니다(41:3). 이는 단순한 개인 암살을 넘어 바벨론이 세운 통치 질서를 공격한 사건이 됩니다.
그달랴는 앞서 요하난의 경고를 믿지 않았습니다(40:13–16). 그렇다고 그의 죽음을 순진함에 대한 당연한 대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한 사람은 이스마엘입니다. 그달랴가 사람을 믿었다는 사실과 이스마엘이 그 믿음을 배신했다는 사실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 장에서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첫 행동은 공개적인 전쟁이 아니라, 환대를 이용한 배신입니다.
그리고 그 배신은 한 사람의 죽음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왕족 출신인 이스마엘이 바벨론의 임명에 반감을 품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가 왕위를 되찾으려 했다거나 민족의 독립을 위해 행동했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앞 장에서 요하난은 암몬 왕 바알리스가 이스마엘을 보내 그달랴를 죽이려 한다고 경고했습니다(40:14). 따라서 이 사건이 암몬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단서는 있지만, 이스마엘 자신의 구체적인 동기까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성전으로 가던 사람들을 죽이다
그달랴가 살해된 다음 날, 미스바에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에서 온 여든 명의 남자입니다. 수염을 깎고 옷을 찢었으며 몸에 상처를 낸 채입니다. 손에는 곡식 제물과 유향을 들고 있습니다.
먼저, 이들이 온 곳은 모두 옛 북이스라엘 지역에 속합니다. 세겜은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와 관련된 장소이고, 실로는 예전에 성막이 있던 곳이며, 사마리아는 북왕국의 수도였습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에 멸망한 지 오래되었지만, 이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여전히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야훼의 성전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불탔습니다(예레미야 52:13).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곳으로 향합니다. 성전이 파괴되었다고 해서 여호와야훼께 나아가려는 마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애도하며 예배하러 가는 사람들을 이스마엘이 맞이합니다.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들을 맞으러 미스바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걸어가면서 줄곧 울었습니다. 그들을 만나자 말했습니다. 「아히감의 아들 그달랴에게 오세요.」예레미야 41:6 · 두루새김
방금 그달랴를 죽인 사람이 이제는 슬퍼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눈물은 그들의 경계를 낮추기 위한 행동으로 이해됩니다. 뒤따르는 사건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달랴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용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유인합니다.
첫 번째 살인에서는 함께 먹는 식탁을 이용했고, 두 번째 살인에서는 애도하는 사람들의 신뢰를 이용합니다. 두 사건 사이에서 그의 행동 방식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순례자들이 성읍 안으로 들어오자 이스마엘은 그들을 죽입니다.
본문은 이스마엘이 그들을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고 전합니다. 이어지는 9절은 그 구덩이가 죽은 사람들의 시체로 가득 찼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든 명 가운데 열 명은 살아남습니다.
그들은 들에 숨겨 둔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이 있다고 말하며 살려 달라고 청합니다. 이스마엘은 그들을 죽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여기서는 생명을 살릴지 죽일지를 결정하는 기준에 식량과 재산이 개입합니다.
같은 공동체에 속한다는 사실도, 애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숨겨 둔 식량에 관한 정보는 열 사람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 그 구덩이의 과거가 밝혀집니다.
그 구덩이는 옛날 아사 왕이 이스라엘 왕 바아사의 위협에 대비하여 만들어 둔 것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5:16–22과 역대하 16:1–6에 따르면, 아사와 바아사는 서로 대립했고, 아사는 미스바를 요새화했습니다. 예레미야 41장은 그 시대에 만들어진 시설 가운데 하나를 가리킵니다.
옛 유다 왕이 북이스라엘의 위협에 대비하여 만든 시설이 이제는 북쪽에서 예배하러 온 사람들의 시체로 채워집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는 일찍이 실로의 운명을 들어 예루살렘 성전도 심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고 경고했습니다(7:12–14). 이제 실로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때에 예루살렘 성전은 실제로 파괴된 상태입니다. 그들의 찢어진 옷과 깎인 수염은 애도의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몸에 상처를 내는 행위도 고대의 애도 관습과 관련되지만, 율법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금합니다(레위기 19:28; 신명기 14:1). 본문은 그들이 무엇 때문에 애도하는지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에 대한 슬픔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그들의 정확한 사정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원문에서는 ‘걸어가다’에 해당하는 말이 거듭 쓰이면서 울음이 계속되는 모습을 그립니다. 두루새김이 41:7에서 「죽여」로 옮긴 자리에는 히브리어 동사 샤하트, ‘도살하다’에서 나온 말이 쓰입니다. 이 동사는 짐승을 잡는 데에도 사용됩니다(레위기 1:5). 그들은 여호와야훼께 바칠 제물을 들고 왔지만, 원문에서 도살당한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그들 자신입니다. 이것을 본문이 명시적으로 제의적 희생에 비유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원문에서 제물을 들고 온 사람들이 도살된다는 말의 겹침은 장면을 더욱 참혹하게 만듭니다.
남겨진 사람들이 다시 포로가 되다
이스마엘은 살인만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미스바에 남아 있던 백성을 모두 사로잡아 암몬 사람들의 땅으로 데려가려 합니다.
이스마엘은 왕의 딸들을 비롯해 미스바에 남아 있던 백성을 모두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은 경비대장 느부사라단이 아히감의 아들 그달랴에게 맡긴 사람들이었습니다.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은 그들을 포로로 붙잡아, 암몬 사람들의 땅으로 건너가려고 길을 떠났습니다.예레미야 41:10 · 두루새김
바벨론은 유다를 정복했지만 모든 주민을 끌고 가지 않았습니다. 일부를 땅에 남겨 두었고, 그달랴에게 그들을 맡겼습니다. 이들은 바벨론의 지배 아래 살게 되었지만, 적어도 고향에서 계속 살아갈 여지는 있었습니다.
외국 군대의 침략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기 동족의 손에 다시 포로가 됩니다.
왕실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 왕실에 속한 사람들조차 보호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로잡습니다. 앞 장에서 요하난은 암몬 왕 바알리스가 그달랴 암살의 배후라고 경고했습니다(40:14). 이스마엘이 실제로 암몬 사람들의 땅으로 향했다는 사실은 그 경고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었음을 뒷받침합니다.
예레미야 41장은 그들을 단순히 전쟁에 딸려 생긴 존재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들은 미스바에 남아 살아가던 백성이며, 나라가 무너진 뒤에도 삶을 이어 가려던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이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는 행동으로 인해 그들의 거처와 자유가 다시 빼앗깁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는 이미 유다가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그 백성의 역사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특히 30–33장에는 심판 이후 회복에 관한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예레미야 31:31–34에서 여호와야훼는 자기 율법을 백성의 마음속에 두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새 언약의 약속과 연결하여 읽을 때, 하나님의 회복은 사람들을 다시 모으는 일뿐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서로를 대하는 삶까지 새롭게 하는 일이라는 의미가 드러납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41장의 직접적인 선언이라기보다, 같은 책의 약속과 이 장의 현실을 함께 읽을 때 얻을 수 있는 신학적 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새 언약을 자신의 피와 연결하신 말씀(누가복음 22:20)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 약속을 이어받는 직접적인 신학적 연결이지만, 예레미야 41장의 사건 자체를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이 장을 이해하는 첫 자리는 어디까지나 멸망 이후 유다에 남겨진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구출자들을 보고 기뻐한 사람들
11절부터 이야기의 방향이 바뀝니다.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군 지휘관들이 이스마엘의 악한 일을 듣습니다. 앞에서는 그달랴의 죽음을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41:4), 이제 사건이 알려지고 추격이 시작됩니다.
요하난은 처음부터 이스마엘을 의심하던 인물입니다. 그달랴에게 암살 음모를 경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이미 벌어진 참사를 수습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요하난과 군 지휘관들은 기브온의 큰 못가에서 이스마엘을 찾아냅니다. 대신 이야기는 이스마엘에게 끌려가던 사람들의 반응으로 옮겨 갑니다.
이스마엘에게 붙잡혀 있던 모든 백성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온 모든 군 지휘관을 보고 기뻐했습니다.예레미야 41:13 · 두루새김
그들은 발길을 돌려 요하난에게 갑니다. 자기 뜻과 상관없이 끌려가던 사람들이 이스마엘에게서 벗어나 구출자들에게 향하는 행동입니다.
이스마엘은 열 사람을 데리고 미스바에 왔지만, 요하난을 피해 빠져나갈 때는 여덟 사람과 함께합니다. 처음 동행했던 사람들 가운데 나머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암몬 사람들에게 달아나고, 백성은 요하난에게 갑니다.
죽음과 납치로 이어지던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자기 의지에 따라 발길을 돌립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들은 이스마엘에게서 벗어났지만, 그들이 돌아갈 수 있는 안전한 공동체는 이미 무너져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히브리어에는 ‘돌아서다’와 ‘돌아가다’에 해당하는 동사들이 이어집니다. 두루새김은 그 움직임을 「발길을 돌려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 갔습니다」로 옮겼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여호와야훼를 버렸을 뿐 아니라 거짓과 폭력으로 이웃을 해친다고 고발했습니다(예레미야 5:1–9; 7:5–11; 9:2–8). 41장은 이스마엘의 행동을 인간이 저지른 악으로 묘사합니다. 요하난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본문은 이스마엘이 저지른 「온갖 악한 일」이라고 말합니다(41:11).
구출되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다
요하난은 구출한 사람들을 데리고 이동합니다.
본문은 그들 가운데 군인들뿐 아니라 여자들과 아이들과 내시들도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구조된 무리가 단순한 군사 집단이 아니라 전쟁 이후 남아 있던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향하는 곳은 미스바가 아닙니다.
그들은 베들레헴 근처의 게룻김함에 머뭅니다. 이집트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마엘에게서 구출되었는데 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들은 칼데아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이집트로 피하려 했습니다. 바벨론 왕이 그 땅을 맡긴 아히감의 아들 그달랴를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죽였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41:18 · 두루새김
실제로 이스마엘은 바벨론이 임명한 그달랴뿐 아니라 칼데아 군인들까지 죽였습니다. 당시의 정복 제국이 이러한 공격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본문은 바벨론이 실제로 어떤 보복 명령을 내렸다고 기록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왜 두려워했는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달랴는 백성에게 칼데아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땅에서 살아가라고 권했습니다(40:9). 그러나 그달랴가 살해된 뒤 백성은 칼데아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땅을 떠나려 합니다.
그달랴의 죽음은 그의 통치만 끝낸 것이 아니라, 그가 백성에게 제시했던 삶의 가능성까지 위협했습니다.
다만 이 단계에서 백성의 행동을 곧바로 불순종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41장은 그들이 두려워했고 이집트로 가려고 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아직 그 결정에 대한 여호와야훼의 응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장에서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야훼의 뜻을 물을 것이며, 그때 비로소 이집트행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분명하게 제시됩니다(42:1–22).
그렇지만 두려움의 이유가 충분하다는 사실과 두려움이 이끄는 선택이 반드시 옳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바로 이 문제가 다음 장에서 여호와야훼의 말씀 앞에 놓이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라엘에게 이집트는 특별한 기억을 지닌 곳입니다. 그들의 조상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했고, 여호와야훼는 그들을 그곳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출애굽기 20:2). 이제 그 후손들은 약속의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시 이집트로 가려 합니다. 출애굽기의 이야기에서는 이집트를 떠나는 것이 해방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장에서는 이집트로 들어가는 것이 안전을 찾는 선택처럼 보입니다. 열왕기하 25:25–26은 그달랴의 암살과 백성의 이집트 도피를 매우 짧게 전합니다. 반면 예레미야 41장은 그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자세히 보여 줍니다.
기뻐했지만 여전히 두려웠던 사람들
그들은 실제로 구출되었으므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출되었다고 해서 자신들을 둘러싼 모든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여전히 두려워할 수 있었습니다. 성읍이 남아 있고 사람이 살아 있다고 해서 공동체가 회복된 것은 아닙니다. 서로를 신뢰할 수 없고, 예배하러 가는 사람조차 보호받지 못하며, 다른 사람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모든 주민이 도망쳐야 한다면 공동체의 삶은 여전히 무너져 있는 것입니다.
이 장에는 여호와야훼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이 없습니다.
우선 이스마엘의 폭력을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신 심판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서는 유다 멸망이 여호와야훼의 심판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모든 범죄가 하나님의 승인 아래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 시대에도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있습니다. 역사적인 재앙이 발생했다고 해서 그 안에서 벌어진 배신과 살인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마지막에 남은 사람들은 베들레헴 근처의 게룻김함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이 이집트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41장에서는 아직 그 길을 끝까지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때 자신들을 안전하게 하리라고 기대했던 미스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낯선 미래를 앞두고 있습니다. 기브온에서 기뻐했던 사람들이 이제 베들레헴 근처에서 두려움 속에 이집트로 향할 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질문은 더 이상 누가 자신들을 구출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이제 어디에서 살아야 합니까.
그리고 그들은 아직 그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