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44장

이 장의 자리 · 34–45장 · 무너지는 예루살렘

누구의 말이 옳았는가

예루살렘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예레미야는 백성이 다른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집트에 정착한 유다 사람들은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늘의 여왕에게 제물을 바칠 때에는 풍족하게 살았지만, 그 일을 그만둔 뒤로 재앙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양쪽 모두 같은 역사를 기억합니다.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이루어졌던 제사, 과거의 풍요, 전쟁과 굶주림, 그리고 나라의 멸망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에서 끌어낸 결론은 완전히 다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이라고만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겪은 역사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반박한다고 믿습니다.

누구의 말이 이루어질 것인가요?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744장 본문 읽기 →

이집트에 흩어진 사람들에게 다시 들려온 말씀

예레미야 44:1–6 본문 →

43장에서 유다의 남은 사람들은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거부하고 이집트에 들어갔습니다. 44장은 그들이 이집트에 살고 있는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본문은 네 지역을 언급합니다. 믹돌, 타흐판헤스, 노프, 바드로스입니다. 믹돌과 타흐판헤스는 이집트 동부의 지역들과 관련되고, 노프는 멤피스를 가리키며, 바드로스는 일반적으로 이집트 남부의 상이집트를 뜻합니다.

이 지명들의 나열은 유다 사람들이 이집트의 한 도시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43장의 사건 이후 정확히 몇 년이 지났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들에게 먼저 과거의 예루살렘을 보여 주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성읍에 내린 재앙을 모두 보았다. 보아라, 오늘 그곳들은 무너진 채 버려져 있고, 사는 사람이 없다.」예레미야 44:2 · 두루새김

하나님은 그들에게 낯선 사실을 알려 주시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현실을 다시 보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참혹한 현실을 가리키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태워 바치고 그 신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44:3). 유다 사람들은 여호와야훼와 맺은 관계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의지했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는 이러한 행동이 불의와 폭력,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부와 함께 나타났습니다(7:5–11).

따라서 44장이 지적하는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이끌어 오신 하나님을 떠나 다른 존재에게 삶의 안전과 풍요를 맡기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내 종들인 모든 예언자를 너희에게 부지런히 거듭 보내어 말했다. 『제발 내가 미워하는 이 역겨운 일을 하지 마라.』」예레미야 44:4 · 두루새김

히브리어에는 글자 그대로 옮기면 ‘일찍 일어나 보내다’라는 표현이 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직접 일어나셨다는 시간 묘사라기보다, 예언자들을 거듭 부지런히 보내셨음을 나타내는 익숙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그들이 그 일을 멈추기를 바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듭 예언자를 보내셨고,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거듭 주어진 말씀을 거부해 온 역사 끝에 일어난 심판입니다.

그런데 이 기억은 곧 백성 자신의 기억과 충돌하게 됩니다.

왜 살아남은 사람들까지 스스로를 끊어 버리려 하는가?

예레미야 44:7–14 본문 →

이제 하나님은 과거의 예루살렘에서 현재의 이집트로 시선을 돌리십니다.

이제 여호와야훼,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너희는 스스로 자기 목숨에 큰 해를 끼치느냐?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젖먹이까지 유다에서 없어져, 너희 가운데 아무도 남지 않게 하려느냐?」예레미야 44:7 · 두루새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도망쳤지만, 그들이 선택한 길에서 자신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행동을 계속합니다.

특히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뿐 아니라 어린아이와 젖먹이까지 언급하십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죄가 당사자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어른들의 종교적·정치적 선택은 그 선택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어린아이들의 미래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모든 어린아이가 어른들과 똑같이 죄의 책임을 진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공동체 전체가 사라질 수 있을 만큼 심각한 결과가 닥친다는 경고입니다.

「너희는 살려고 들어온 이집트 땅에서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태워 바치며, 너희 손으로 하는 일로 나를 화나게 한다. 그렇게 너희 자신을 망하게 하고,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저주와 모욕을 받으려느냐?」예레미야 44:8 · 두루새김

그들은 유다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유다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것으로 지적된 행동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어 그들의 조상과 왕들, 왕들의 아내들, 그리고 현재 백성과 그 아내들이 저지른 악한 일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44:9). 이 나열은 왕실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우상숭배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특히 왕들의 아내들과 백성의 아내들까지 분명하게 언급되는 점은 뒤이어 여성들이 논쟁의 중요한 당사자로 등장할 것을 준비합니다.

「그들은 오늘까지도 마음을 낮추지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가르침과 규정도 따르지 않았다.」예레미야 44:10 · 두루새김

여기서 「마음을 낮추지 않았고」라는 표현은 고난을 당하고도 교만을 버리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멸망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멸망을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게 된 것은 아닙니다.

고통을 겪는 일과 그 고통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큰 재앙을 경험하고도 그 원인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심판을 경험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심판이 드러내는 문제를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

11–14절에서 하나님은 이집트에 들어간 남은 백성에게 다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이집트 땅에 들어가 살기로 마음먹은 유다의 남은 사람들을 내가 붙잡겠다. 그들은 모두 이집트 땅에서 죽을 것이다. 칼에 쓰러지고 굶주림으로 죽을 것이다.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칼과 굶주림으로 죽을 것이다. 사람들은 저주의 맹세를 할 때 그들을 본보기로 들고, 그들을 보고 몸서리치며, 그들을 저주하고 모욕할 것이다.」예레미야 44:12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그들이 이집트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11절에서 하나님은 「너희를 향해 얼굴을 돌려 재앙을 내리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집트를 향해 자신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선택을 향해 심판의 얼굴을 돌리십니다.

「이집트 땅에 들어와 살고 있는 유다의 남은 사람들은 유다 땅으로 돌아가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도망쳐 나오는 이들 말고는, 그들 가운데 아무도 살아남거나 빠져나가 유다 땅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예레미야 44:14 · 두루새김

그들은 유다에서 안전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집트로 왔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에 도착한 뒤에도 마음속에는 유다로 돌아가려는 소망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고향을 영원히 버리려 했던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우선 위험을 피하고 언젠가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바라는 귀환이 그들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여기서 심판 선언에는 작은 예외가 남겨집니다. 「도망쳐 나오는 이들 말고는」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예외는 뒤의 28절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칼을 피해 살아남아 유다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그 수는 매우 적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12–14절에서 모두 죽을 것이라고 한 말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죽는다는 수의 계산으로 단순하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공동체 전체에 닥칠 파괴적인 심판을 강조하면서도 소수의 사람이 살아남을 가능성을 남겨 둡니다.

그런데 이 경고를 들은 사람들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다른 신들을 섬겨야 하는지, 자신들의 경험을 근거로 반박하기 시작합니다.

하늘의 여왕을 섬길 때에는 풍족했다는 주장

예레미야 44:15–19 본문 →

15절에서 예레미야에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자기 아내들이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태워 바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남자들, 큰 무리를 이루어 서 있던 여자들, 그리고 바드로스에 사는 백성입니다. 우상숭배의 중심에 여성들이 등장하지만, 그 행위는 여성들만의 은밀한 종교 활동이 아니었습니다. 남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공동체 전체가 그 관습에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전한 말은 듣지 않겠습니다.」예레미야 44:16 · 두루새김

이것은 앞 장에서 예레미야의 말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던 태도보다 더욱 노골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입으로 약속한 것을 모두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들, 우리 왕들과 관리들이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했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제물을 태워 바치고 술 제물을 부어 바치겠습니다. 그때 우리는 먹을 것이 넉넉했고 잘 살았으며 재앙을 겪지 않았습니다.」예레미야 44:17 · 두루새김

그들은 하늘의 여왕을 섬기는 행위를 부끄러워하거나 변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상들과 왕들이 해 왔던 전통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래전부터 해 왔던 일이고, 왕들과 관리들까지 참여했으므로 계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의 관점에서는 바로 그 오랜 관습이 문제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행했다는 사실이 그 일이 옳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늘의 여왕은 누구인가?

「하늘의 여왕」은 예레미야 7:18에도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아이들이 나무를 모으고, 아버지들이 불을 피우고, 여자들이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에게 바칠 과자를 만드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이 장면을 44장과 함께 읽으면 우상숭배가 가정 전체의 활동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의 여왕은 고대 근동에서 섬기던 여신과 관련된 칭호로 이해됩니다. 아스타르테나 이슈타르와의 관련성이 거론되지만, 예레미야의 본문만으로 어느 특정 여신과 정확히 같은 존재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에게 하늘의 여왕 숭배는 단순히 조상들이 물려준 종교 관습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삶에 실제로 도움이 되었던 행위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여왕에게 제물을 태워 바치고 술 제물을 부어 바치는 일을 그만둔 뒤로, 우리는 모든 것이 부족해졌고 칼과 굶주림으로 망했습니다.」예레미야 44:18 · 두루새김

그들이 한때 풍족하게 살았다는 기억은 실제 경험에 근거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풍요가 하늘의 여왕에게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 주어졌다는 결론은 별개의 주장입니다. 또한 제사를 중단한 뒤 재앙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제사를 중단한 것이 재앙의 원인이라고 증명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백성은 시간적으로 이어진 두 사건을 원인과 결과로 연결합니다.

바로 이 해석이 예레미야의 말씀과 충돌합니다.

남편들의 동의 없이 했겠는가?

19절에서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자들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제물을 태워 바치고 술 제물을 부어 바칠 때, 남편들이 모르게 했겠습니까? 그 여왕의 모습을 본떠 과자를 만들고 술 제물을 부어 바치는 일을 남편들의 동의 없이 했겠습니까?」예레미야 44:19 · 두루새김

이것은 자신들의 행동이 가정 안에서 알려지고 받아들여졌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장의 우상숭배를 여성들만 따로 벌인 잘못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한 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중단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부모와 조상들이 믿어 온 삶의 방식, 과거의 풍요를 이해하던 방식, 가정 안에서 함께 행했던 관습까지 다시 판단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백성의 반응은 이처럼 뿌리 깊은 확신에서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하 23장에 따르면 요시야 왕은 유다의 종교를 개혁하면서 여러 우상숭배 관습을 없앴습니다. 그 이후 유다는 정치적 격변과 전쟁을 거쳐 멸망했습니다. 따라서 백성의 주장이 요시야의 개혁과 그 이후의 재앙을 연결하고 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44장은 그들이 정확히 언제 하늘의 여왕 숭배를 중단했는지 밝히지 않으므로, 이 해석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과자를 어떻게 만들었는지에는 번역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만 과자 자체를 그 모습으로 빚었는지, 과자 표면에 모습을 새겼는지는 원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도 그때의 제사를 기억하고 계셨다

예레미야 44:20–23 본문 →

예레미야는 백성의 말을 들은 뒤, 그들이 제시한 과거의 기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같은 기억을 다시 꺼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조상들, 여러분의 왕들과 관리들과 그 땅의 백성은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제물을 태워 바쳤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바로 그 일을 기억하시고 마음에 두신 것이 아닙니까?」예레미야 44:21 · 두루새김

양쪽이 기억하는 사건은 같습니다. 차이는 그 사건에 대한 평가입니다. 백성에게 그 제사는 풍요를 가져온 좋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그 제사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악한 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하는 동안에도 삶이 평온했다는 사실은 그 행동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즉시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 행동을 승인하셨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여러분이 저지른 악하고 역겨운 일들을 더는 참을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땅은 오늘처럼 무너져 사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보고 몸서리치고 저주합니다.」예레미야 44:22 · 두루새김

백성은 하늘의 여왕에게 바치는 제사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재앙이 왔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그 제사를 바쳤기 때문에 재앙이 왔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기 훨씬 전부터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를 통해 백성의 우상숭배와 불순종을 지적하셨습니다. 특히 예레미야 7장은 성전과 예루살렘이 안전할 것이라는 기대를 경고하면서, 하늘의 여왕에게 바치는 제사도 문제 삼았습니다(7:18–20).

따라서 44장의 심판 해석은 멸망이 일어난 뒤에 급히 만들어 낸 설명이 아닙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전해졌던 예언과 이어져 있습니다.

누가 재앙의 원인을 올바르게 읽고 있는가?

어떤 사건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 사건의 의미가 저절로 밝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현실을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 기억을 어떤 틀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같은 경험에서 정반대의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이 본문은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그 고난이 반드시 개인의 죄 때문이라고 말할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44장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특정한 죄와 그 결과를 분명하게 연결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모든 재난에 대해 그와 똑같은 권위로 원인을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문제는 단순히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앞으로도 자신들의 해석을 따라 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논쟁은 이제 누구의 말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문제로 옮겨 갑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그 일이 여호와야훼의 마음에 ‘올라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잊지 않으셨으며, 심판의 대상으로 기억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두 개의 맹세가 맞서다

예레미야 44:24–28 본문 →

이 대목에서 예레미야는 다시 한번 모든 백성과 모든 여자에게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들으라고 요청합니다.

특히 여성들이 따로 언급되는 것은 앞서 그들이 하늘의 여왕에게 바치는 제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 행위가 옳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스스로 선언한 말을 되받아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와 너희 아내들은 입으로 약속하고 손으로 실행했다. 너희는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제물을 태워 바치고 술 제물을 부어 바치겠다고 약속했으니,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다』라고 했다. 너희 여자들아, 그래, 너희가 한 약속을 굳게 지키고 그대로 실행해 보아라.」예레미야 44:25 · 두루새김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행동을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지켜야 할 약속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신에게 무엇을 행하겠다고 하는 약속을 서원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에서도 여호와야훼께 약속한 것은 가볍게 여기지 말고 지켜야 한다고 명령합니다(민수기 30:2; 신명기 23:21–23).

그들이 말하는 약속은 여호와야훼께 드린 것이 아니라 하늘의 여왕에게 드린 것입니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까지 정당화해 주지는 않습니다.

언뜻 읽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약속을 승인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뒤따르는 심판 선언을 보면 이것은 허락이나 격려가 아니라, 겉으로 한 말과 반대되는 뜻을 담은 응답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너희가 그토록 고집하는 약속이라면 끝까지 실행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집트 땅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아, 여호와야훼의 말을 들어라. 보아라, 내가 나의 위대한 이름을 두고 맹세한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이집트 온 땅에서 유다 사람은 누구도 다시는 『주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며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할 것이다.」예레미야 44:26 · 두루새김

이제 인간의 약속과 하나님의 맹세가 서로 마주 섭니다.

「주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는 말은 여호와야훼의 생명과 권위를 근거로 자신의 말이 참되다고 밝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실제로는 하늘의 여왕에게 약속하면서, 여호와야훼의 이름도 자기 입에 올리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만으로 여호와야훼께 신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름을 맹세에 사용하면서도 삶에서는 다른 신에게 충성을 바친다면, 그 맹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합니다.

특히 이 선언은 이집트에 정착한 불순종하는 유다 공동체를 향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후 역사에서 이집트의 모든 유다 사람이 영원히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는 일반적인 금지 명령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지켜보고 계신다

「보아라, 내가 그들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 재앙을 내리려고 지켜보고 있다. 이집트 땅의 모든 유다 사람은 칼과 굶주림으로 죽어 없어질 것이다.」예레미야 44:27 · 두루새김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지켜보아 이루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집트에 있는 유다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 재앙을 내리려고」 지켜보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 경고를 들었고, 스스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이 거부한 자신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소수는 돌아온다

그런데 28절에는 뜻밖의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칼을 피해 살아남아 이집트 땅에서 유다 땅으로 돌아올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을 것이다. 이집트에 들어와 살고 있는 유다의 남은 사람들은 내 말과 자기들의 말 가운데 어느 쪽이 이루어지는지 모두 알게 될 것이다.」예레미야 44:28 · 두루새김

이것은 14절에 남겨졌던 예외를 다시 명확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이 소수의 생존자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돌아올 것인지, 그들이 특별히 다른 사람들보다 의로웠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이제 시간이 흐르면 어느 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지 드러날 것입니다.

백성이 누구에게 삶을 맡겼으며, 누구의 약속을 신뢰했는지가 역사 속에서 밝혀진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입으로 약속한 말을 반드시 실행하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인간의 맹세와 하나님의 맹세가 맞선 자리에서, 결론은 말의 강도가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지는 결과에 달려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1:11–12에서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 가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살구나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샤케드와 ‘지켜보다’를 뜻하는 쇼케드의 소리가 비슷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자신이 말씀을 지켜보고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28절의 원문에서는 누구의 ‘말’이 설 것인지, 곧 어느 말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인지를 묻습니다.

이집트 왕에게 일어날 일이 표징이 되다

예레미야 44:29–30 본문 →

마지막 두 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 줄 표징을 제시하십니다.

그 표징은 유다의 남은 사람들에게 직접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집트 왕에게 일어날 일입니다.

「나 여호와야훼가 말한다. 보아라, 내가 이집트 왕 파라오 호프라를 그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의 손에 넘기겠다. 유다 왕 시드기야를 그의 목숨을 노리던 원수인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긴 것처럼 하겠다.」예레미야 44:30 · 두루새김

그들이 의지하는 나라의 왕조차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바벨론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들어왔습니다. 이집트 왕의 권력과 군사력은 그들에게 안전을 제공할 수 있는 힘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37장과도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 이집트에서 군대가 출동하자 갈대아 군대가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물러났습니다(37:5).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이집트 군대가 다시 자기 땅으로 돌아가고, 갈대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불태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7:7–10).

실제로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시드기야는 바벨론 군대에 붙잡혔습니다(39:5–7). 이제 하나님은 이집트 왕 호프라의 운명을 시드기야의 운명에 비추어 설명하십니다.

왜 이것이 표징인가?

29절에서 하나님은 호프라에게 일어날 일이 표징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표징은 하나님께서 앞서 하신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호프라가 원수들의 손에 넘겨지는 일이 일어나면,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믿었던 이집트의 권력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43장에서 예레미야는 파라오의 집 입구에 큰 돌들을 숨겼습니다. 하나님은 그 돌들 위에 바벨론 왕의 왕좌가 놓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4장에서는 이집트 왕 자신이 원수들에게 넘겨질 것이라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앞에서는 파라오의 집이 안전한 공간이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파라오 자신도 안전한 존재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호프라는 고대 이집트의 왕으로, 그리스어 역사 전승에서 아프리에스라고 불리는 인물과 같은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본문은 시드기야를 넘겨받은 사람이 느부갓네살이라고 분명히 밝히지만, 호프라를 넘겨받을 원수가 반드시 느부갓네살 개인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집트의 호프라는 이후 왕의 권력을 둘러싼 내부 갈등 속에서 몰락한 것으로 고대 기록에 전해집니다. 다만 예레미야 44장은 그 과정의 연대나 세부 사건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맺음 — 두 왕의 운명 앞에 선 사람들

예레미야 44:1–30 본문 →

예레미야 44장은 예루살렘의 무너진 땅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집트 왕 호프라의 운명을 선언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예언자들은 백성이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을 그만두도록 오랫동안 경고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미 선언된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과거의 의미를 바로잡으시고, 앞으로 어느 말이 이루어지는지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직 호프라가 원수들에게 넘겨지는 사건은 본문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남은 사람들이 그 표징을 보고 어떻게 반응할지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다만 두 왕의 운명이 나란히 놓였습니다.

하나는 이미 바벨론 왕에게 붙잡힌 유다 왕 시드기야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지만, 원수들에게 넘겨질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파라오 호프라입니다.

그 사이에 이집트에 정착한 유다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너진 유다를 떠나 새로운 안전을 찾았고, 자신들의 과거가 그 선택을 옳다고 증명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앞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의 사건을 놓으십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왕의 운명이 드러날 때, 그들은 자신의 말과 여호와야훼의 말씀 가운데 어느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44장은 그 표징을 선언하고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