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45장
이 장의 자리 · 34–45장 · 무너지는 예루살렘
무너지는 때에 바라는 것
예레미야 45장은 단 다섯 절입니다.
그렇다면 바룩은 무엇을 잃게 되는 것일까요? 그는 무엇을 얻으려 했기에 하나님께서 큰일을 바라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리고 목숨을 건지는 것이 어째서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 됩니까?
앞 장에서 이집트에 정착한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45장은 그 사건을 이어 가지 않고 훨씬 이전으로 돌아갑니다. 예루살렘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던 여호야김 왕 넷째 해, 바룩이 예레미야의 말을 두루마리에 적던 때입니다.
바룩의 개인적인 고통이 나라 전체의 무너짐과 만나면서, 이 짧은 장은 무엇을 바라며 살아야 하는가라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야기가 과거로 돌아간 이유
요시야의 아들인 유다 왕 여호야김 넷째 해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은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이 말씀들을 두루마리에 적었습니다. 다음은 그때 예언자 예레미야가 바룩에게 전한 말입니다.예레미야 45:1 · 두루새김
이 절은 예레미야 36장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호야김 왕 넷째 해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자신이 전해 오신 말씀을 두루마리에 적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36:1–2). 예레미야는 바룩을 불러 그 말씀을 입으로 불러 주었고, 바룩은 그것을 적었습니다(36:4).
이후 바룩은 성전에서 두루마리를 읽었습니다. 관리들은 말씀을 듣고 놀랐지만, 여호야김 왕은 여후디가 읽는 두루마리를 잘라 화로에 던져 불태웠습니다(36:21–23). 왕은 예레미야와 바룩을 붙잡으라고 명령하기까지 했습니다(36:26).
하나님의 말씀을 적는 일은 단순한 문서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바룩은 그 말씀을 받아 적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사람들 앞에서 읽어야 했고, 왕이 적대적으로 반응하는 것까지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가 적은 것은 누구에게나 환영받을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으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셨고, 바룩은 다시 그 말씀을 적었습니다. 이전 두루마리의 말씀뿐 아니라 그와 비슷한 말들도 많이 더해졌습니다(36:32).
45장은 예레미야서의 역사적 사건들이 기록된 긴 부분을 마무리하고, 46장부터 시작되는 여러 민족에 대한 심판 선언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놓여 있습니다. 실제로 다음 장 46:2도 여호야김 넷째 해를 언급합니다. 45장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뒤따르는 여러 민족에 관한 말씀과도 시간적으로 연결됩니다.
독자는 바룩이 적은 말씀의 상당 부분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펼쳐졌는지 이미 읽었습니다. 그달랴의 죽음과 이집트로 떠난 백성의 모습까지 보았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그 말씀을 처음 적던 바룩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게 됩니다.
바룩은 자신이 적은 말씀 바깥에서 안전하게 역사를 관찰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으로 인해 흔들리는 역사 안에서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기록한 사람의 탄식
「너는 이렇게 말했다. 『아, 내 신세야! 여호와야훼께서 내 고통에 슬픔까지 더하셨다. 나는 탄식하다 지쳤고, 쉴 곳을 찾지 못했다.』」예레미야 45:3 · 두루새김
바룩이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직접 호소하는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룩이 했던 말을 그에게 되돌려 들려주시는 장면입니다. 그의 탄식이 정확히 언제, 누구 앞에서 나왔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말을 알고 계십니다.
바룩이 하나님을 향해 정식으로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어도, 그의 탄식은 하나님의 응답 안에 포함됩니다. 이미 고통이 있는데 「슬픔까지」 더해졌습니다. 그는 「탄식하다 지쳤고」, 「쉴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단순히 잠깐 쉬지 못했다는 말보다, 고통에서 벗어나 평온을 얻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무엇이 그의 첫 번째 고통이었고, 거기에 어떤 슬픔이 더해졌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룩이 받아 적은 말씀에는 유다의 죄를 지적하는 말과 앞으로 닥칠 재앙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36:2–3). 그 말씀은 바룩이 속한 공동체의 미래를 어둡게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슬픔을 더하셨다
바룩은 자신의 고통을 단순히 주변 사람들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야훼께서 내 고통에 슬픔까지 더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 때문에 더 괴로워졌다고 느낍니다.
예레미야서에서는 예언자 자신도 비슷한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자신에게 수치와 조롱을 가져온다고 탄식했습니다(20:7–9).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 말씀을 직접 전해야 하는 고통을 말했고, 바룩의 탄식은 훨씬 짧아서 그 구체적인 사정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반드시 마음의 평온이나 삶의 안정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이 사랑하는 공동체의 멸망을 선포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말씀을 전하고 적는 일 자체가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룩에게 먼저 더 열심히 일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탄식을 금지하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가 자기 고통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금 자신이 온 땅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를 말씀하십니다.
그 응답은 뜻밖에도 바룩 개인의 문제보다 훨씬 큽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을 하나님이 허무신다
여호와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바룩에게 이렇게 전해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내가 세운 것을 내가 허물고, 내가 심은 것을 내가 뽑아 버린다. 이 온 땅을 그렇게 하겠다.』」예레미야 45:4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바룩의 탄식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설명하시거나 곧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고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자신이 하고 계신 일을 말씀하십니다.
세우고 심는다는 말의 무게
「세우다」와 「심다」, 「허물다」와 「뽑다」는 예레미야서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중요한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처음 예언자로 부름받았을 때, 하나님은 그를 민족들과 나라들 위에 세워 뽑고 허물며 또한 세우고 심게 하셨습니다(1:10).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민족과 나라의 역사를 심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일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것을 하나님께서 허무십니다.
친히 심으신 것을 친히 뽑으십니다.
이스라엘은 우연히 형성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고, 언약을 맺으셨으며, 약속의 땅에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시편 80:8–9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가져와 심으신 포도나무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백성과 그들의 땅에 심판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으셨다는 사실이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영원히 안전하다는 보증은 아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심판을 바룩의 개인적인 고통에 대한 응답으로 제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온 땅을 그렇게 하겠다」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 온 땅」이 유다의 온 땅을 가리키는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더 넓은 세계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본문의 중심은 심판의 정확한 경계보다 그 심판을 행하시는 분에게 있습니다.
지금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의 통제에서 벗어나 우연히 무너지는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고 심으신 것까지 심판하시는 때가 왔습니다.
조금 더 깊이
바룩은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에 예레미야의 말씀을 적고 있고, 앞서 세우고 심는다는 표현도 유다의 운명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반면 더 넓은 세계를 생각할 근거도 있습니다. 다음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에게 재앙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시고, 바로 다음 장부터 여러 민족에 관한 예언이 이어집니다. 두 읽기는 서로 하나를 배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다에서 시작하여 여러 민족으로 넓어지는 심판의 관점 속에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원문의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 구조만으로 특정한 지리적 범위를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너 자신을 위해 큰 것들을 구하느냐?
「『그런데 너는 너 자신을 위해 큰일을 바라느냐? 그런 것을 바라지 마라. 보아라, 내가 모든 생명에게 재앙을 내리려 한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그러나 네가 어디로 가든, 전쟁에서 전리품을 얻듯 네 목숨을 건져 살아남게 해 주겠다.』」예레미야 45:5 · 두루새김
두 문장을 연결하는 「그런데 너는」이라는 전환은 대조를 만듭니다. 하나님은 세우신 것을 허물고 계십니다. 그런데 바룩은 자신을 위해 큰일을 바라고 있습니까?
바룩이 원했던 큰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본문은 그 큰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문맥을 고려하면 바룩이 자신에게 돌아올 특별한 성취나 안정된 미래를 기대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는 일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삶에도 그에 걸맞은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랐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가 정확히 어떤 형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바룩을 야심 많은 출세주의자로 단정하는 것은 본문을 지나치게 좁히는 해석입니다.
그는 이미 탄식으로 지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큰일을 바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명령은 그가 무엇을 얼마나 탐욕스럽게 원했는지 평가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와 개인적인 기대 사이의 관계를 다시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왜 지금은 큰 것을 구하지 말아야 하는가?
「내가 모든 생명에게 재앙을 내리려 한다.」 여기서는 재앙의 범위가 바룩 한 사람이나 유다 왕실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모든 개인이 예외 없이 죽는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뒤에서 바룩의 생명을 지켜 주겠다는 약속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큰 꿈이나 성취를 바라지 말라는 일반적인 금지 명령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 45장은 특별한 역사적 상황에서 바룩 개인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바룩은 심판의 시대에 예언자의 말씀을 기록하는 사람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그 시대에는 공동체가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이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야망의 크기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고 계신 일을 바라보는 것보다 자기 삶에 주어질 성취를 더 크게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분은 바룩이 무엇을 바라지 말아야 하는지 말씀하신 뒤, 자신이 그에게 무엇을 주실 것인지 약속하십니다.
목숨이 전리품이 된다는 말
전리품은 전쟁에서 이긴 사람이 빼앗아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본래 위험과 충돌이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룩에게 전리품을 얻듯 얻게 하시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재산이 아닙니다.
그 자신의 목숨입니다.
이것은 그가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을 지나게 될 것이라는 뜻을 암시합니다. 그런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건져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반복되는 특별한 표현
이 비유는 예레미야서의 다른 곳에도 나옵니다.
예레미야 21:9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주민들에게 바벨론 군대에 항복하는 사람이 자기 목숨을 전리품으로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8:2에서도 같은 약속이 반복됩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가운데서도 생명을 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39:18에서는 에벳멜렉에게 그의 목숨이 전리품처럼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에벳멜렉은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갇혀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해 준 인물입니다(38:7–13). 하나님은 그에게도 모든 위험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대신, 생명을 건질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심판이 닥치는 시대에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네가 어디로 가든」 목숨을 건져 살아남게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는 예레미야와 함께 유다에서 활동했습니다. 여호야김 왕이 그들을 붙잡으려 했을 때에는 몸을 숨겨야 했습니다(36:26).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에도 예레미야와 함께 있었으며, 남은 백성이 이집트로 이동할 때에도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43:6–7).
바룩의 삶은 한 장소에 안정적으로 머물며 평온을 누리는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은 특정한 왕의 보호나 한 지역의 안전에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어디로 가든 생명을 지켜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인간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룩에게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심판의 역사 한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그 개인을 잊지 않으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탄식은 들렸고, 그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직접 약속하시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그돌로트(גָּדוֹל)는 「큰 것들」, 「위대한 것들」을 뜻합니다. 「모든 생명」은 원문에서는 「모든 육체」(בָּשָׂר)라는 표현으로, 인간을 포함한 살아 있는 존재들을 폭넓게 가리킵니다. 히브리어 레샬랄(שָׁלָל)은 「전리품으로」라는 의미입니다. 두루새김은 이 비유를 「전쟁에서 전리품을 얻듯 네 목숨을 건져 살아남게 해 주겠다」고 풀어 옮겼습니다.
맺음 — 두루마리를 기록하던 사람에게 남겨진 약속
하나님께서 역사를 심판하신다는 사실과 그 역사 속의 한 사람을 돌보신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때에 바룩이 전리품을 얻듯 얻게 될 것은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자기 생명이었습니다.
이 장은 그가 이후 얼마나 편안하게 살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인생이 어떤 성공으로 끝났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독자의 시선을 다시 여호야김 넷째 해의 그 자리로 돌려놓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러 주고, 바룩은 그것을 두루마리에 적고 있습니다. 그가 적어 내려가는 것은 나라와 민족들에 대한 무거운 말씀입니다.
바룩의 손에는 자신이 적어야 할 두루마리가 있고, 그의 앞에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시대의 혼란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남겨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바로 그의 생명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