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태어난 날마저 지우고 싶은 사람
욥기 3장에서 욥은 마침내 입을 엽니다. 일곱 날과 일곱 밤 동안 친구들과 함께 침묵하던 그가 처음으로 길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앞서 우리가 들었던 찬양과 너무나 다릅니다.
욥은 「내가 태어난 날이 사라지기를」 하며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그날에 빛이 비치지 않기를 바라며, 자신이 태어난 밤을 달력에서 지워 버리고 싶어 합니다. 어머니 배에서 나올 때 죽었더라면 좋았겠다고 말하고, 죽음조차 찾아오지 않는 삶을 탄식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욥은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에게서 좋은 것뿐 아니라 나쁜 것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욥기를 읽는 우리의 기대가 흔들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고통 속에서도 평온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욥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사람이 자기 존재의 시작마저 부정하고 싶어 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축복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이 두 사실을 함께 붙드는 것이 욥기 3장을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이 장은 욥이 자신의 고난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고통이 극심해졌을 때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지를 시의 언어로 드러냅니다. 그 시는 처음에는 태어난 날을 없애 달라고 외치다가, 죽음의 세계를 바라보고, 마지막에는 다시 지금의 삶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돌아온 자리에서도 욥은 아무런 쉼을 얻지 못합니다.
빛이 없었던 날이기를
욥이 저주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날이었다
3장은 서술자의 짧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그 뒤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욥기 3:1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욥의 말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먼저 알려 줍니다.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앞에서 고발자는 욥이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욥의 저주가 향하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날입니다. 욥은 실제로 삶 자체를 고통스럽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악하시다거나 하나님을 버리겠다고 선언하는 대신, 차라리 자신의 삶이 처음부터 시작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서술자는 여기서 욥의 말을 즉시 잘못이라고 판단하지 않고, 욥의 탄식이 시작되도록 내버려 둡니다. 2장의 끝에서 친구들은 욥의 고통이 너무 심한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욥은 그 침묵을 깨고 자기 고통을 말로 표현합니다.
그의 첫 번째 소원은 현재의 고통을 멈추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출생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고 싶다는 것입니다.
「내가 태어난 날이 사라지기를. 『사내아이가 배 속에 생겼다』라고 말한 그 밤도 사라지기를.」욥기 3:3 · 두루새김
욥은 「내가 태어난 날」과 「사내아이가 배 속에 생겼다」라고 말한 「그 밤」을 나란히 부릅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고 세상에 드러나는 두 순간을 함께 지우려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그 밤에 누가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말했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소식을 전한 사람을 떠올릴 수도 있고, 밤 자체가 말하는 것처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날과 그 밤이 욥에게 더 이상 기념하거나 기뻐할 시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보통 사람에게 생일은 자기 존재가 시작된 날입니다. 욥에게는 그날이 모든 고통의 출발점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오늘의 고통을 없애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고통을 겪는 자신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창조의 첫날을 거꾸로 되돌리는 말
4절에서 욥의 탄식은 한 사람의 출생을 넘어 세상의 빛과 어둠으로 넓어집니다.
「그날이 어둠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위에서 그날을 돌보지 않으시기를. 그날에 빛이 비치지 않기를.」욥기 3:4 · 두루새김
창세기 1:3에서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욥은 정반대의 일을 바랍니다. 그날에 빛이 없기를, 오히려 어둠이 되기를 원합니다.
창세기에서 빛은 창조된 세상이 질서를 얻는 첫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낮과 밤의 질서를 세우십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에 한하여 그 질서가 뒤집히기를 바랍니다. 그날에는 빛이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조차 그날을 돌보지 않으시기를 원합니다.
「돌보지 않으시기를」(דָּרַשׁ)에 쓰인 동사는 찾다, 살피다, 관심을 기울이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욥은 하나님이 그날을 찾아 살피시는 일조차 없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단순히 날씨가 어두웠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날을 기억하고 살피시는 창조의 질서에서 그날 자체가 빠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5절은 더욱 거친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날을 차지하기를. 구름이 그 위에 내려앉고, 낮을 덮는 암흑이 그날을 두렵게 하기를.」욥기 3:5 · 두루새김
여기에서는 어둠이 무언가를 되찾는 주체가 됩니다. 어둠이 그날을 자기 소유처럼 요구하는 것입니다. 빛이 비추어야 할 날을 어둠이 다시 차지합니다.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빛에서 빼앗아 어둠에게 돌려주고 싶어 합니다.
이 장면은 창조의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일반적인 선언이라기보다, 자신의 삶을 견딜 수 없는 한 사람이 창조의 언어를 거꾸로 사용하여 표현하는 탄식입니다.
달력에서도 지워져야 할 밤
6–7절에서 욥은 자신이 어머니 배 속에 생긴 밤을 향해 말합니다.
「캄캄한 어둠이 그 밤을 붙잡기를. 그 밤이 한 해의 날들과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달을 셀 때에도 끼지 못하기를.」욥기 3:6 · 두루새김
욥은 단순히 어두운 밤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밤이 시간의 질서에 속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루는 지나가면 한 해의 일부가 됩니다. 달이 지나가고 해가 바뀌어도, 그날은 실제로 있었던 시간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밤이 「달을 셀 때에도 끼지 못하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흘러도 그 밤만큼은 계산되지 않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7절에서는 그 밤이 「아무것도 낳지 못하기를」 바라며, 그 안에서 기쁨의 외침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어머니 배 속에 생긴 밤을 향한 저주라는 문맥에서는 생명의 시작이 없었기를 바라는 소원과 잘 어울립니다. 태어난 날은 사라지고, 그 밤은 아무것도 낳지 못하며, 그 시간에는 기쁨의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욥은 자신이 존재하게 된 모든 시작을 하나씩 지워 나갑니다.
리워야탄을 깨우는 사람들
8절에서는 갑자기 낯선 존재가 등장합니다.
「날을 저주하는 자들, 리워야탄을 깨울 준비가 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기를.」욥기 3:8 · 두루새김
리워야탄은 구약의 시적인 본문에서 등장하는 강력한 존재로, 바다의 위협적인 존재나 혼돈의 세력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욥은 실제로 리워야탄을 불러내어 세상을 파괴하려는 것일까요? 이 시의 흐름을 보면 그러한 행동을 실제로 계획한다기보다, 가장 강력한 혼돈의 이미지까지 동원하여 자신이 태어난 밤을 없애고 싶어 하는 것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평범한 어둠으로는 부족합니다. 구름이나 밤의 캄캄함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욥은 그날을 지워 버릴 수 있다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두려운 힘까지 불러오고 싶어 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출생을 견디기 어려운 사건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9절에서 욥의 소원은 다시 하늘로 향합니다.
「그 밤 어스름에 뜨는 별들이 어두워지기를. 그 밤이 빛을 기다려도 빛은 오지 않기를. 새벽이 눈을 뜨는 것도 보지 못하기를.」욥기 3:9 · 두루새김
「새벽이 눈을 뜨는 것」이라는 표현은 새벽을 마치 눈을 뜨는 존재처럼 그립니다.
그런데 욥은 그 눈이 뜨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새벽은 긴 밤이 끝나고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바로 그 새로운 시작이 문제입니다. 그가 태어난 밤에 새벽이 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도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0절은 지금까지의 저주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밝힙니다.
「그 밤이 어머니 배의 문을 닫아 주지도, 내 눈에서 고통을 가려 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욥기 3:10 · 두루새김
그 밤이 「어머니 배의 문」을 닫았더라면 자신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과 같은 고통을 눈으로 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철학적 선언이 아닙니다. 욥이 겪고 있는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 전체를 그 고통의 관점에서 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한때 생명의 시작이었던 날이 이제 욥에게는 고통의 시작으로 보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시의 방향이 바뀝니다. 욥은 더 이상 태어난 날을 없애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왜 그날 살아남았는지를 묻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도 4절의 대조가 선명합니다. 창세기 1:3의 「빛이 있으라」와 욥기 3:4의 「어둠이 되기를」은 같은 문장 구조이고, 그 구조에서 빛이 어둠으로 바뀝니다. 5절의 「차지하기를」에 해당하는 동사는 다른 문맥에서는 가까운 친족이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거나 사람을 구해 내는 행동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죽음의 그늘」이라는 표현은 정확한 어원에 논의가 있지만, 이 문맥에서 극심한 어둠을 나타낸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7절의 원문 표현은 사람이 살지 않는 황폐함뿐 아니라 생명이나 결실이 없는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리워야탄은 시편 74:14에서 하나님이 그 머리들을 부수시는 장면에, 이사야 27:1에서 구불구불한 뱀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욥기 41장에서도 리워야탄이 등장하지만, 각각의 문맥에서 묘사하는 특징이 완전히 같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8절의 「날을 저주하는 자들」과 「리워야탄을 깨울 준비가 된 자들」은 주술적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던 사람들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의식이나 관행을 가리키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9절의 원문은 새벽의 눈꺼풀을 말하여, 밤이 끝나고 동이 트는 모습을 감긴 눈꺼풀이 열리는 장면으로 표현합니다.
죽음에서 찾는 쉼
왜 누군가 나를 살렸는가
11절에서 욥은 연달아 질문합니다.
「왜 나는 어머니 배에서 나올 때 죽지 않았는가? 왜 태어나자마자 숨이 끊어지지 않았는가?」욥기 3:11 · 두루새김
이 질문은 3–10절의 저주보다 한 걸음 현실에 가까워집니다.
태어난 날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어머니 배 속에 생긴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이제 욥은 자신이 태어났더라도 곧바로 죽었더라면 어땠을지를 생각합니다.
12절에서는 질문의 대상이 달라집니다.
「왜 나를 받아 줄 무릎이 있었는가? 왜 내가 빨 젖가슴이 있었는가?」욥기 3:12 · 두루새김
욥은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뿐 아니라, 누군가 자신을 받아 주고 먹여 살렸다는 사실까지 되돌아봅니다. 「나를 받아 줄 무릎」이라는 표현은 태어난 아이를 받아 안는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무릎이 누구의 것인지는 본문에서 밝히지 않습니다.
젖가슴은 생명을 유지하는 돌봄을 나타냅니다. 갓 태어난 욥은 스스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 그를 품고 먹였기에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욥은 지금 그 돌봄마저 질문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삶의 관점에서는 이 질문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태어난 아이를 받아 안고 먹이는 일은 사랑과 돌봄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은 바로 그 돌봄이 자신을 지금의 고통에 이르게 했다는 역설 속에 있습니다.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과거의 돌봄에 담긴 선한 의도와 현재의 고통스러운 결과가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에게는 이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기뻐할 힘조차 없습니다.
욥이 죽음에서 발견한 것은 영광이 아니라 고요함이었다
13절에서 욥의 말투가 달라집니다.
「그때 죽었다면 지금쯤 나는 누워서 고요히 지낼 텐데. 잠들어 편히 쉴 텐데.」욥기 3:13 · 두루새김
그리고 문장은 왕들과 세상의 조언자들의 모습을 거쳐 15절까지 이어집니다.
「자기들을 위해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운 왕들과 세상의 조언자들과 함께 있을 텐데.」 「금을 가졌고 집을 은으로 가득 채운 높은 관리들과 함께 있을 텐데.」욥기 3:14–15 · 두루새김
욥이 죽음에 관해 상상하는 첫 번째 모습은 고요함과 쉼입니다. 「누워서 고요히 지낼 텐데」, 「잠들어 편히 쉴 텐데」라는 표현들은 죽음을 잠에 비유하는 시적인 언어입니다.
그런데 욥은 왜 왕들과 세상의 조언자들, 높은 관리들을 언급할까요? 이들은 살아 있을 때 커다란 권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도시와 건물을 세우고, 금과 은을 소유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에 삽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그들도 누워 있습니다.
14절의 「자기들을 위해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운」에 해당하는 원문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황폐한 곳을 다시 세웠다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왕들이 세운 위대한 건축물이 결국 폐허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장면에서는 왕의 건축 사업과 권력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두드러집니다.
금과 은으로 집을 가득 채운 높은 관리들 역시 죽음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욥은 이들의 부와 권력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다고 상상하는 고요함을 부러워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토록 중요했던 권력과 재산은 여기에서 거의 의미를 잃습니다. 욥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욥 자신의 과거와도 연결됩니다. 그 역시 많은 재산을 소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재산의 회복이나 높은 지위가 아닙니다.
그는 단지 고통에서 벗어나 쉬고 싶어 합니다.
태어나지 못한 아이와 왕이 같은 자리에 있다
16절에서 욥은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립니다.
「아니면 태어나기 전에 죽어 묻힌 아이처럼, 빛을 보지 못한 아기들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욥기 3:16 · 두루새김
왕들과 세상의 조언자들, 높은 관리들 다음에 등장하는 것은 태어나기도 전에 생명을 잃은 아이들입니다. 한쪽에는 큰 권력을 누리며 오래 살았던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이들을 같은 자리로 바라봅니다.
여기서 욥은 태어나기 전에 죽은 아이의 죽음을 좋은 일이라고 일반화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극심한 고통을 기준으로,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을 삶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한다고 해서 죽음 이후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교리를 주장하는 것으로 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 구절은 죽음 이후의 존재 방식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과 같았으면 좋겠다는 고통스러운 소원입니다.
죽음의 세계에서는 억압하는 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17–19절에서 욥이 상상하는 죽음의 세계는 사회적 질서가 뒤집힌 곳처럼 묘사됩니다.
「그곳에서는 악한 자들도 소란을 멈추고, 지쳐 힘이 다한 사람들도 쉰다.」욥기 3:17 · 두루새김
여기에서 「악한 자들」은 죽음 이후에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살아 있을 때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소란을 일으키던 행동을 더 이상 하지 못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 결과 지쳐 힘이 다한 사람들은 쉼을 얻습니다.
「갇힌 사람들도 함께 편히 쉬고, 일을 몰아붙이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욥기 3:18 · 두루새김
갇힌 사람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을 몰아붙이는 사람의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쉬지 못하게 하고, 일을 강요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목소리입니다. 욥이 상상하는 죽음의 세계에서는 그 소리가 사라집니다.
이것은 단지 모든 사람이 죽으면 평등해진다는 추상적인 말보다 구체적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누군가를 짓누르던 힘이 죽음 앞에서는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9절은 그 모습을 짧게 정리합니다.
「낮은 사람도 높은 사람도 그곳에 있고, 종도 자기 주인에게서 자유롭다.」욥기 3:19 · 두루새김
여기서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은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세상에서는 그 차이가 사람의 삶을 크게 좌우합니다. 그러나 욥이 바라보는 죽음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구별이 더 이상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욥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정의롭고 행복한 낙원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무엇보다 고통과 억압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이곳에는 위대한 성취도, 영광스러운 보상도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저 고통이 멈춥니다.
욥이 지금 죽음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죽음이 풍요로운 삶보다 더 좋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얻지 못하는 쉼을 그곳에서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욥기 전체에서 중요한 주제 하나를 처음으로 뚜렷하게 드러냅니다. 욥의 고통은 개인적인 질병과 상실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는 악한 자의 소란, 지쳐 힘이 다한 사람의 피로, 갇힌 사람의 억압, 종이 자유롭지 못한 처지까지 함께 바라봅니다.
자신의 고통을 말하던 욥의 시선이 고통받는 인간들의 세계로 넓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욥은 다시 현재의 삶으로 돌아옵니다.
조금 더 깊이
성경은 이처럼 극단적인 탄식을 욥기에만 남기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20:14–18에서도 예언자는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그는 자신이 왜 어머니 배에서 나왔는지 묻고, 자신의 날들이 수치와 슬픔 속에 끝나게 된 현실을 탄식합니다. 욥과 예레미야의 말은 세부적으로 다르지만, 고통이 극심할 때 자기 출생 자체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시편 88편도 고난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로, 마지막까지 밝은 해결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성경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을 언제나 확신과 평온으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왜 고통받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욥의 질문은 바뀌었다
20절에서 욥은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고통받는 사람에게 빛을 주시고, 마음이 쓰라린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가?」욥기 3:20 · 두루새김
앞에서는 왜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죽지 않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왜 계속 생명이 주어지는지를 묻습니다.
질문의 범위도 달라졌습니다. 욥은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받는 사람」, 「마음이 쓰라린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빛」은 단순히 햇빛을 뜻하지 않습니다. 생명과 삶 자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창세기에서 빛은 창조의 질서를 이루는 좋은 것이었지만, 지금 욥은 그 빛이 왜 고통받는 사람에게 계속 주어지는지 묻습니다.
빛이 언제나 기쁘게 경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빛을 기다리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다시 깨어나 또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두려울 수 있습니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하루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회복의 가능성입니까, 아니면 고통이 계속된다는 소식입니까?
욥은 생명이 귀하다는 사실을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었을 때에도 왜 계속되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숨겨진 보물보다 죽음을 더 간절히 찾는 사람들
21–22절에서 욥은 그 고통의 깊이를 더욱 강하게 표현합니다.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지만 죽음은 오지 않는다. 숨겨진 보물을 찾을 때보다 더 애써 죽음을 파헤쳐 찾는다.」 「그들은 무덤을 찾으면 기뻐 뛰며 크게 즐거워한다.」욥기 3:21–22 · 두루새김
사람은 보통 보물을 찾습니다. 귀한 것을 발견하면 기뻐하고, 예상하지 못한 재물을 얻으면 환호합니다. 그런데 욥은 죽음을 보물보다 더 간절히 찾는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파헤쳐 찾는다」는 표현은 땅에 감춰진 귀중한 것을 열심히 파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찾는 것은 금이나 은이 아니라 무덤입니다.
이 역전은 인간의 가치관이 고통 앞에서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원하는 것은 더 많은 삶, 더 좋은 삶, 더 풍요로운 삶입니다. 그러나 욥이 묘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소원은 고통스러운 삶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삶을 포기하는 행동에 대한 권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욥은 여기서 무엇을 실행해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죽음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는데도 죽음이 오지 않는다는 말은 욥의 고통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끝낼 수 있는 능력을 자랑하거나, 죽음을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아무런 통제권이 없다고 느낍니다.
삶이 너무 고통스러운데도 그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절망입니다.
하나님이 치신 울타리의 의미가 바뀌다
23절에서 욥은 자신의 처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갈 길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방을 막아 가두신 사람에게, 왜 생명을 주시는가?」욥기 3:23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욥기 앞부분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1:10에서 고발자는 하나님이 욥과 그의 집안과 소유 둘레에 울타리를 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 울타리는 보호의 이미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둘러싸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지키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방으로 막아 가두셨다고 느낍니다.
고발자의 눈에는 하나님의 울타리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였습니다. 그 울타리 안에서 욥은 보호받고 있었으며, 모든 일이 잘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욥의 눈에는 그 둘러싸임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그는 「갈 길이 보이지 않고」라고 말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갈 방법도 찾을 수 없습니다. 더욱 괴로운 것은 자신을 막아 가두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보호가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 주는 경계였다면, 이제는 그 경계가 빠져나갈 수 없는 장벽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같은 하나님의 돌보심이 고통의 자리에서는 보호가 아니라 갇힘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욥이 자신의 고통 속에서 느끼는 현실입니다. 이 구절만으로 하나님이 실제로 욥을 괴롭히기 위해 모든 길을 막으셨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욥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넘길 수도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길이 왜 가려졌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셨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면, 왜 고통받는 사람에게 계속 생명을 주십니까? 하나님이 인간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라면, 왜 자신은 아무 길도 볼 수 없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 주어지지 않습니다.
욥은 지금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쉼이 없다
울부짖음이 물처럼 쏟아지다
24절에서 욥의 시는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옵니다.
「빵을 먹기도 전에 탄식이 나오고, 내 울부짖음이 물처럼 쏟아지기 때문이다.」욥기 3:24 · 두루새김
원문은 문자적으로 내 빵 앞에 내 탄식이 온다는 구조를 가집니다. 두루새김은 빵을 먹기 전에 탄식이 나온다는 뜻으로 읽은 것입니다. 빵 대신 탄식이 나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조금 다른 장면을 그리지만, 욥의 고통이 일상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까지 침범했다는 점에서는 만납니다.
고통은 특별한 순간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먹고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시간에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물은 한 번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계속 퍼지고 쏟아질 수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울부짖음을 그런 물에 비유합니다.
앞에서 욥은 빛과 어둠, 별과 새벽, 리워야탄과 같은 거대한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의 마지막에서는 빵과 물이라는 아주 일상적인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세상이 뒤집혔으면 좋겠다는 거대한 저주가 일상의 고통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먹어야 하고, 숨 쉬어야 하고, 또 하루를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에 탄식이 따라붙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던 일이 내게 닥쳤고」
25절에서 욥은 자신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내가 두려워하던 일이 내게 닥쳤고, 내가 무서워하던 일이 내게 일어났기 때문이다.」욥기 3:25 · 두루새김
이 구절을 읽으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욥은 원래부터 재산과 가족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던 것일까요? 그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바쳤던 이유도 그런 두려움 때문이었을까요?
그러나 본문은 그 질문에 확실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욥이 무엇을 언제부터 두려워했는지, 그 두려움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욥이 평소 지나치게 불안해했기 때문에 재난을 자초했다거나, 그의 신앙은 실제로 두려움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지금 자신의 고통을 최악의 두려움이 현실이 된 사건으로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욥이 막연하게 걱정했던 일이 아니라, 참으로 두려워할 만한 일이 자신에게 닥쳤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세계가 없습니다.
욥은 소유와 가족을 잃었고, 몸은 고통받고 있으며, 자신의 길마저 보이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상실을 경험한 지금도 고통은 끝나지 않습니다.
세 번의 부정과 마지막의 소란
욥기의 세 번째 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는 편안하지도 않고 고요하지도 않다. 쉬지도 못하고, 괴로움만 밀려온다.」욥기 3:26 · 두루새김
편안하지도 않습니다.
고요하지도 않습니다.
쉬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괴로움만 밀려옵니다.
욥은 세 가지 표현을 사용해 쉼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 말들은 앞서 죽음의 세계를 묘사할 때 사용된 고요함과 쉼을 떠올리게 합니다. 13절에서 욥은 죽었더라면 누워서 고요히 지내고 잠들어 편히 쉬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7절에서도 지쳐 힘이 다한 사람들이 쉰다고 했고, 18절에서는 갇힌 사람들도 함께 편히 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욥에게는 그 모든 것이 없습니다.
그가 죽음에서 부러워했던 것은 바로 이 쉼이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날을 지워 버리고 싶어 했던 이유도, 태어나자마자 죽었더라면 좋았겠다고 말한 이유도, 죽음의 세계에서 평온을 찾으려 했던 이유도 결국 이 한 가지 현실과 연결됩니다.
그에게 쉼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괴로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로게즈(רֹגֶז)는 17절의 「소란」에 해당하는 말과 같은 낱말입니다. 두루새김에서는 서로 다르게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같은 말이 되풀이됩니다. 죽음의 세계에서는 소란이 멈춥니다. 그러나 욥의 삶에는 괴로움이 밀려옵니다.
욥이 원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라기보다, 자신에게서 완전히 사라진 쉼입니다. 그런데 그 쉼을 살아 있는 곳에서는 찾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 속에서 상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 3장의 마지막에 남는 가장 아픈 역설입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의 원문은 두려워하던 두려움이라는 구조로 두려움을 나타내는 같은 어근을 되풀이합니다. 이 반복은 공포의 강도를 높입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내가 두려워하던 일이 내게 닥쳤고」라고 옮겼습니다.
새벽이 오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
욥기 3장은 한 사람이 자기 출생의 밤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욥은 자신의 온전함을 굳게 붙들고 있다고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 출생을 저주하며,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를 묻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모순일까요? 그렇게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향한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가 자신의 삶을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극단적인 탄식을 삭제하거나 부드럽게 바꾸지 않습니다.
믿음의 언어 안에는 찬양뿐 아니라 질문과 탄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욥기 3장이 삶에 대한 절망을 무조건 옳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욥의 말을 들으며 그가 얼마나 깊이 고통받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평가까지 성경의 최종 결론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욥의 말이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의 고통을 진지하게 들으라는 요청이지, 그의 절망을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한 최종 판결로 삼으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욥은 이미 태어났고, 이미 살아왔으며, 이미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그의 몸은 아프고, 마음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는 과거를 지울 수 없고, 현재의 고통에서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앞서 그는 죽음의 세계에서 왕도 종도, 악한 자도 지쳐 힘이 다한 사람도 모두 쉰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살아 있는 자신에게는 쉼이 없습니다.
욥은 아직 자신이 왜 고통받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이 장에서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친구들 역시 아직 말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듣는 것은 욥 자신의 목소리입니다.
새벽이 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새벽은 이미 왔습니다.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랐지만, 그는 이미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그는 여전히 쉬지 못합니다.
욥기 3장은 고통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고통의 의미를 전혀 찾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끝까지 말하는 자리에서 멈춥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