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풀어 읽기 · 22장
이 장의 자리 · 22장 · 동쪽 지파와 제단 다툼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서로를 의심하다
여호수아 22장은 이상한 긴장 속에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전쟁을 마쳤습니다. 지파들은 각자의 땅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평안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요단강 동쪽에서 온 지파들이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갈 차례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은 다시 전쟁을 준비합니다. 이번에 상대해야 할 사람들은 가나안의 왕들이 아닙니다. 조금 전까지 함께 싸웠던 자기 동족들입니다.
한쪽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갈등이 아니라, 양쪽이 하나님께 충성하려 하면서도 서로의 행동을 정반대로 이해했기 때문에 벌어진 위기입니다.
그렇다면 공동체는 무엇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같은 땅에 사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같은 방식으로 신앙을 표현해야 할까요? 아니면 서로 다른 상황에서 나타나는 신앙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할까요?
형제들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 — 마지막으로 남은 명령
여호수아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쪽 지파를 불러 그동안의 수고를 인정합니다.
「너희는 오늘까지 오랜 시간 동안 동족들을 버려두지 않았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명령하신 일을 맡아 지켰다.」여호수아 22:3 · 두루새김
민수기 32장에서 르우벤과 갓 자손은 가축을 기르기에 알맞은 요단강 동쪽 땅을 보고 그곳에 자리 잡고 살기를 요청했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요청을 처음에는 강하게 꾸짖었습니다. 다른 지파들이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자신들만 안전한 곳에 머무르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가족과 가축을 동쪽에 남겨 두되, 자신들은 무장하고 요단강을 건너 동족들과 함께 싸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은 여호수아 1:12–18에서도 다시 확인됩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그들이 약속을 지켰다고 선언합니다. 자기들의 땅을 이미 확보했다고 해서 공동체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지파들이 땅을 받을 때까지 함께했습니다.
여기서 본문이 거듭 사용하는 말이 「동족들」입니다. 원문에서는 이들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땅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같은 백성입니다. 자기 지파가 얻을 몫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파가 평안을 누리도록 돕는 것이 그들에게 맡겨진 책임이었습니다.
「이제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약속하신 대로 너희 동족들이 평안을 누리게 하셨다. 그러니 이제 너희 천막으로 돌아가거라. 여호와야훼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강 동쪽의 땅으로 가거라.」여호수아 22:4 · 두루새김
이 표현은 바로 앞에 있는 여호수아 21:43–45와 이어집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하고 평안을 얻은 것은 여호와야훼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신 결과로 제시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아직 안식과 물려받을 땅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안식을 얻게 된 뒤에는 여호와야훼께서 선택하시는 곳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명령했습니다. 곧 여호수아 22장에서 약속하신 평안을 누리는 일과 제단 문제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신명기의 가르침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땅을 얻은 뒤에도 이스라엘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안식을 얻은 뒤에도 계속되어야 할 충성
「다만 여호와야훼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계명과 율법을 힘써 지키고 실천하여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사랑하고, 그분이 가르치신 모든 길을 따라 살아라. 그분의 명령을 지키고 그분을 굳게 붙들며, 온 마음과 온 생명을 다해 그분을 섬겨라.」여호수아 22:5 · 두루새김
여기에는 신명기에서 반복되는 언약의 말들이 모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가르치신 모든 길을 따라」 살고, 명령을 지키며, 「그분을 굳게 붙들며」 살아가는 삶입니다(신명기 10:12–13; 11:22).
전쟁이 끝났다고 하나님을 향한 책임까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전쟁 중에는 함께 싸우는 일이 공동체가 하나로 묶여 있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각 지파가 서로 다른 땅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눈앞에 공동의 적이 없을 때에도 같은 하나님께 충성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것이 새로운 군사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권면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7절은 므낫세 지파가 요단강 양쪽에 나뉘어 땅을 받은 사실을 다시 알려 줍니다. 하나의 지파조차 강을 사이에 두고 살아갑니다. 이 사실은 뒤이어 등장할 문제가 단지 두세 지파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관련된 문제임을 보여 줍니다.
8절에서 여호수아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돌아가 동족들과 나누라고 합니다. 전쟁에서 얻은 것들 역시 혼자 차지할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며 보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방금까지 동족들을 버려두지 않았다고 칭찬받았던 사람들이, 곧 동족들을 배신했다는 의심을 받게 됩니다.
보기에 큰 제단 — 같은 행동을 다르게 읽다
동쪽 지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요단강 주변 지역에서 제단을 쌓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요단강 주변에 이르렀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쪽 지파는 거기 강가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눈에 띄게 큰 제단이었습니다.여호수아 22:10 · 두루새김
본문은 이 제단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아직 그 제단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서쪽 지파들은 제단이 세워졌다는 소식만으로 심각한 위협을 느낍니다.
신명기 12:5–14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자기 마음대로 장소를 정해 번제를 드리지 말고, 여호와야훼께서 선택하시는 곳으로 제물을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실로에 하나님의 천막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여호수아 18:1).
물론 이 명령을 이스라엘 역사상 다른 모든 제단의 존재가 무조건 불법이었다는 뜻으로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수아 자신도 모세의 지시에 따라 에발산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여호수아 8:30–31; 신명기 27:4–8).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호와야훼께서 정하신 예배를 대신할 별도의 제사 중심지를 마음대로 세우려는 것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서쪽 지파들의 눈에 요단강 가의 거대한 제단은 실로의 천막과 경쟁하는 새로운 예배 장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이때 11–12절에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라는 말과 「듣고」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서쪽 지파들은 제단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었고,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실로에 모입니다. 그들은 아직 제단을 세운 사람들의 설명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제단을 보고, 아직 확인되지 않은 반역을 판단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걱정을 단순한 편견으로만 볼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공동체의 불순종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했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사절단은 바로 그 경험들을 증거로 내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은 제단의 위치를 가나안 땅에 있는 요단강 주변으로 설명합니다. 11절은 그 소식을 전하면서 「가나안 땅을 마주한 요단강 주변」, 「이스라엘 백성 쪽」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두 표현의 방향과 위치를 정확히 어떻게 맞추어 이해할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제단이 실제로 강의 어느 쪽 둔덕에 세워졌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과거의 상처가 만든 두려움 — 핀하스의 엄중한 경고
이스라엘 공동체는 전쟁을 준비하지만 곧바로 공격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제사장 엘아자르의 아들 핀하스와 열 명의 지도자를 보냅니다.
민수기 25장에서 이스라엘은 브올에서 바알 숭배와 관련된 죄를 지었고, 공동체에 재앙이 닥쳤습니다. 그때 핀하스는 언약을 향한 열심으로 행동했으며, 재앙이 그치는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민수기 25:6–13).
바로 그 인물이 지금 요단강 동쪽 지파들의 행동을 조사하러 갑니다.
「여호와야훼의 온 공동체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배신하다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여러분은 자신들을 위한 제단을 쌓아, 오늘 여호와야훼를 따르던 길에서 돌아서서 그분께 반역하려 합니까?』」여호수아 22:16 · 두루새김
그들에게 이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브올에서 지은 죄가 우리에게 작은 일입니까? 그 죄 때문에 여호와야훼의 공동체에 재앙이 닥쳤고, 우리는 오늘까지도 그 죄에서 깨끗해지지 못했습니다.』」여호수아 22:17 · 두루새김
사절단은 그 사건의 상처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반드시 이전 죄를 법적으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뜻이라기보다, 그 사건을 공동체가 여전히 심각한 경고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아간의 사건입니다.
「『세라의 자손 아간이 온전히 바친 것을 가져가 하나님을 배신했을 때, 이스라엘 온 공동체에 그분의 분노가 내리지 않았습니까? 아간의 죄 때문에 죽은 사람은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여호수아 22:20 · 두루새김
여호수아 7장에서 아간은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물건을 몰래 가져갔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아이 성에서 패배했고 여러 사람이 죽었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도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면, 두 지파와 반쪽 지파가 하나님을 거역할 경우 그 결과는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오늘 여호와야훼를 따르던 길에서 돌아서려 합니까? 여러분이 오늘 여호와야훼께 반역하면, 내일은 그분께서 이스라엘 온 공동체에 분노하실 것입니다.』」여호수아 22:18 · 두루새김
이들은 동쪽 지파의 행동이 서쪽 지파와 아무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 안에서 연결되어 있고, 그 관계에는 함께 져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역사적 기억이 현재의 사건을 판단하는 데 위험하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실제로 반역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같은 반역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간의 죄가 사실이었다는 것은 확인되었습니다. 지금 문제의 제단에 대해서는 아직 목적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의심하면서도 땅을 나누어 주려는 사람들
「『여러분이 받은 땅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지 않다면, 여호와야훼의 천막이 있는 그분의 땅으로 건너오십시오. 우리 가운데서 땅을 받아 사십시오.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제단 말고 여러분을 위한 다른 제단을 쌓아, 여호와야훼께 반역하거나 우리에게 반역하지 마십시오.』」여호수아 22:19 · 두루새김
약속의 땅은 각 지파가 어렵게 얻은 땅입니다. 이를 나누겠다는 말은 가벼운 제안이 아닙니다. 이 제안은 그들의 목표가 동쪽 지파를 없애는 것이라기보다, 별도의 제단이 생기는 것을 막고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로 남는 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동족들을 심각하게 의심했지만, 아직 동족들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배신하다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마알입니다. 신뢰와 충성의 관계를 저버리는 행동을 가리키며, 특히 하나님께 충실하지 않은 태도를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여호수아 7:1에서 아간의 죄를 설명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너희에게는 여호와야훼 안에서 받을 몫이 없다」 — 동쪽 지파들이 두려워한 미래
동쪽 지파들은 자신들이 반역했다는 고발을 듣고, 매우 엄숙한 말로 대답합니다.
「신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 신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 그분은 알고 계십니다. 이스라엘도 알기 바랍니다. 여호와야훼여, 이 일이 주님께 반역하거나 주님을 배신하는 일이었다면, 오늘 저희를 구해 주지 마십시오.」여호수아 22:22 · 두루새김
그들은 단순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도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먼저 선언합니다.
서쪽 지파들은 제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동쪽 지파들은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단의 목적에 관한 판단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한 것은 한 가지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훗날 여러분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이렇게 말할까 봐 걱정했습니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여호수아 22:24 · 두루새김
요단이 언약의 경계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여호와야훼께서 우리와 너희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 사이에 요단강을 경계로 두셨다. 너희에게는 여호와야훼 안에서 받을 몫이 없다.』 이렇게 여러분의 자손이 우리 자손을 막아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며 섬기지 못하게 할까 봐 걱정했습니다.」여호수아 22:25 · 두루새김
이것은 실제로 서쪽 지파들이 한 말이 아닙니다. 동쪽 지파들이 장차 서쪽의 후손들에게서 들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한 말입니다. 그들은 미래의 어느 세대가 요단강을 단순히 땅을 나누는 경계가 아니라 종교적 경계로 이해하게 될까 두려워합니다.
강 서쪽에는 하나님의 천막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주요한 땅도 그곳에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서쪽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여호와야훼의 백성이고 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동쪽 지파들이 가장 걱정한 것은 자신들의 후손이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며 섬기지 못하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공동체에서 밀려나는 경험이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잃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쪽 지파들은 별도 제단을 쌓는 반역으로 하나님을 잃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동쪽 지파들은 동족들이 밀어내기 때문에 자기 후손들이 하나님을 잃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두 집단은 모두 다음 세대의 신앙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서로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단이 아니라, 제사를 함께 드릴 수 있음을 증언하는 제단
「우리는 또, 훗날 그들이 우리나 우리 뒤에 올 세대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 이렇게 대답하자고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만든, 여호와야훼의 제단을 본뜬 이 제단을 보세요. 번제를 드리거나 짐승을 잡아 바치려고 만든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우리와 여러분 사이의 증거예요.』」여호수아 22:28 · 두루새김
같은 겉모습이 반드시 같은 쓰임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그 구조물을 이용해 제사를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여호와야훼의 제단과 연결되어 있음을 증언하려고 했습니다.
「이 제단은 우리와 여러분 사이, 그리고 우리 뒤에 올 세대들 사이에 증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도 번제와 짐승을 잡아 바치는 제물과 친교 제물로 여호와야훼 앞에서 그분을 섬길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훗날 여러분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너희에게는 여호와야훼 안에서 받을 몫이 없다.』라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여호수아 22:27 · 두루새김
서쪽 지파들은 제단이 하나이기 때문에 동쪽 지파들의 제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동쪽 지파들은 바로 그 하나의 제단에 자신들도 속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제단을 본뜬 것을 만들었습니다.
서쪽이 보기에 그 제단은 하나됨을 깨뜨리는 증거였지만, 동쪽이 의도한 것은 하나됨을 지키는 증거였습니다.
요단강에 세워진 또 하나의 기억
이 장면은 여호수아 4장의 돌 기념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뒤, 여호수아는 길갈에 돌들을 세우게 합니다. 목적은 후손들이 그 돌들의 의미를 물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요단강 물을 멈추시고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셨는지 설명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여호수아 4:6–7, 20–24).
22장의 제단도 다음 세대를 바라보고 만들어졌습니다. 훗날 자손들에게 질문이나 비난이 제기될 때, 그 제단을 가리키며 자신들이 여호와야훼의 백성임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4장의 기념물은 하나님의 명령과 여호수아의 지시에 따라 세워졌습니다. 반면 22장의 제단은 동쪽 지파들이 자신들의 걱정 때문에 세운 것입니다. 본문은 그 제단을 쌓으라는 하나님의 사전 명령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앞의 돌들은 과거의 구원을 기억하게 하고, 뒤의 제단은 미래에 관계가 끊어지는 일을 막으려 합니다.
「오늘」의 반역과 「내일」의 배제
서쪽 지파들은 18절에서 「오늘」 반역하면 「내일」 이스라엘 온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실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동쪽 지파들은 24–25절에서 「훗날」 서쪽 지파의 자손들이 자신들의 후손을 밀어낼지 모른다고 걱정합니다.
서쪽의 관심은 현재의 행동이 가져올 가까운 미래의 심판에 있습니다. 동쪽의 관심은 세월이 흐른 뒤 공동체의 기억이 사라질 위험에 있습니다.
두 집단은 서로 다른 시간을 바라보고 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이제 동쪽 지파들은 한층 더 나아가 자신들도 여호와야훼의 천막 앞에 있는 제단 외에 제사 드릴 제단을 세울 생각이 전혀 없다고 선언합니다(22:29). 이 말은 사절단의 가장 근본적인 걱정에 직접 대답합니다.
동쪽 지파들 역시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좋은 의도로 제단을 세웠다고 설명하지만, 자신들의 행동이 다른 지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충분히 생각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은 엘 엘로힘 여호와야훼를 두 번 반복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신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 신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라고 옮겼습니다. 세 낱말이 각각 하나님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잇달아 나열된 것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전쟁을 막은 대화
동쪽 지파들의 설명을 들은 핀하스와 지도자들의 반응은 짧지만 결정적입니다.
제사장 핀하스와 그와 함께 간 공동체의 지도자들, 곧 이스라엘 씨족들의 우두머리들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의 말을 듣고 좋게 받아들였습니다.여호수아 22:30 · 두루새김
앞에서는 그들이 제단에 관한 소식을 「듣고」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이제는 제단을 세운 사람들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꿉니다.
사절단은 처음에 상대의 행동을 반역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설명을 들은 뒤에는 그 판단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던 과거의 기억과 신앙적 확신이,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민수기 25장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죄에 맞서 단호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의 설명을 듣고, 그 행동이 실제 반역이 아님을 인정합니다.
두 사건의 차이는 단순히 핀하스가 이전보다 온건한 사람이 되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민수기 25장에서는 불순종이 드러났지만, 여호수아 22장에서는 불순종이라고 의심했던 행동의 의미가 설명을 통해 달라졌습니다.
제사장 엘아자르의 아들 핀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와야훼를 배신하는 이런 일을 하지 않았으니, 오늘 우리는 여호와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로써 여러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여호와야훼의 손에서 구해 낸 것입니다.」여호수아 22:31 · 두루새김
이 장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거나 새로운 기적을 행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사절단이 확인한 것은 동쪽 지파들의 설명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단지 눈에 보이는 제단이나 천막의 존재만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께 충성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사절단이 두려워했던 것은 공동체의 반역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분노였습니다. 이제 반역이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그들이 걱정했던 심판의 이유도 사라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동족들 사이의 전쟁도 멈추었습니다.
처음에는 전쟁을 준비했던 회중이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소식을 좋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그들이 사는 땅을 파괴하러 올라가자는 말을 더 하지 않았습니다.여호수아 22:33 · 두루새김
그 사이에 군사적 승리는 없었습니다. 어느 지파도 굴복하지 않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집단도 없습니다. 대신 양쪽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평화를 회복한 결정적인 사건은 제단을 허문 일이 아닙니다. 본문은 제단을 허물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제단이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증거를 위한 것이라는 설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여호수아 22장은 그 긴장을 쉽게 해결해 주는 규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새로운 시도를 인정하라고 말하지도 않고, 기존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의심스러운 행동을 즉시 죄로 판단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을 지키는 일이 언제나 적을 물리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여전히 형제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제단 — 마지막에 남은 증거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이 제단은 여호와야훼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는 우리 사이의 증거다.」라는 뜻으로 그 제단에 이름을 붙였습니다.여호수아 22:34 · 두루새김
이 말에는 두 가지 관계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파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 고백은 강 서쪽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동쪽 사람들도 함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억을 남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 기억의 의미도 함께 전달되어야 했습니다. 여호수아 4장에서 돌 기념물의 의미를 자녀들에게 설명하도록 했던 것처럼, 22장에서도 사람들이 제단의 의미를 말로 설명한 뒤에야 그 구조물은 공동체 안에서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은 제단에 이름을 붙였다고 말하면서, 그 이름을 별도의 명칭으로 명확하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부 번역은 문맥상 「증거」라는 이름을 보충합니다. 두루새김은 그 이름을 보충하지 않고, 제단을 세운 사람들이 밝힌 뜻을 전달합니다.
맺음 — 강은 여전히 흐르고, 제단은 그 자리에 남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은 강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었지만, 여호와야훼께 속한 백성이라는 사실까지 나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어느 한쪽이 모든 면에서 옳았다고 판정하기보다, 양쪽의 실제 충성을 확인함으로써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여호수아 22장의 마지막에 요단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동쪽 지파들은 여전히 길르앗에 살고, 서쪽 지파들은 가나안 땅에 삽니다. 강은 계속 두 지역을 가릅니다. 실로의 하나님의 천막도 그대로 있고, 강가에 세운 제단도 허물었다는 기록 없이 이야기가 끝납니다.
달라진 것은 서로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처음에 서쪽 지파들은 그 거대한 제단을 보고 반역을 떠올렸습니다. 동쪽 지파들은 그 제단이 훗날 자녀들에게 자신들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증언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대화를 마친 뒤에는 같은 제단을 두고 「우리 사이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단강은 여전히 두 지역 사이를 흐르지만, 강가의 제단은 그들이 서로에게 낯선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없이 증언하며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