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노아몬과 니느웨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제국의 마지막

나훔서는 뜻밖의 장면으로 끝납니다.

한 나라가 무너졌습니다. 그 수도는 폐허가 되었고, 백성은 흩어졌으며, 지도자들은 더 이상 나라를 이끌지 못합니다. 도시는 아물 길이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한 나라가 무너졌는데 누구도 그 나라의 상처를 위로하려 하지 않습니까? 니느웨는 무엇을 했기에 그 멸망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까?

나훔 3장은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합니다.

2장이 니느웨의 함락을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쟁처럼 보여 주었다면, 3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니느웨가 어떻게 무너지는가보다 왜 무너져야 하는가를 밝힙니다.

니느웨가 그토록 강력하게 유지해 온 권력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83장 본문 읽기 →

사람들의 피를 흘린 도시 — 제국의 화려함 아래 무엇이 있었는가

나훔 3:1–3 본문 →

도시를 부르는 첫마디

아, 사람들의 피를 흘린 도시에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온통 거짓과 약탈로 가득하고, 먹잇감이 끊이지 않습니다.나훔 3:1 · 두루새김

나훔은 니느웨를 그 도시가 자랑하던 이름이나 업적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원문에서 복수형으로 나타나는 피는 단순한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폭력과 살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폭력으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고, 거짓으로 그 지배를 유지하며, 약탈을 통해 부를 쌓는 제국의 모습을 함께 보여 줍니다.

니느웨는 단지 과거에 많은 전쟁을 벌였던 도시가 아닙니다. 나훔의 고발 속에서 그 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먹잇감을 얻는 곳입니다.

「먹잇감이 끊이지 않습니다」라는 표현은 앞 장의 마지막에 등장했던 사자의 굴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자는 제 새끼들에게 먹일 것을 마련하려고 다른 동물을 잡아 굴을 채웠습니다(2:12–13).

이제 그 비유가 도시의 정체를 드러내는 고발로 바뀝니다.

니느웨의 풍요를 설명하려면 그 창고에 무엇이 얼마나 쌓였는지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재물이 어디서 왔는지도 보아야 합니다.

나훔은 제국의 번영을 제국 자신의 눈이 아니라 먹잇감이 된 사람들의 자리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고대 아시리아의 왕실 비문에는 정복한 도시, 빼앗은 전리품, 포로와 조공에 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합니다. 왕들은 그러한 업적을 자신의 힘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나훔은 같은 종류의 행위를 전혀 다른 말로 평가합니다.

제국이 승리라고 부르는 것을 피 흘림이라고 부르고, 제국이 부라고 부르는 것을 약탈로 얻은 재물로 드러냅니다.

전쟁의 소리가 시체 더미로 바뀌다

2절부터는 소리와 움직임이 빠르게 이어집니다.

채찍 소리가 들리고 전차 바퀴가 덜컹거립니다. 말들이 내달리고 전차들이 튀어 오릅니다.나훔 3:2 · 두루새김

나훔은 전투가 왜 시작되었고 어느 군대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였는지부터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치 눈을 감고 전쟁터에 서 있는 사람처럼, 먼저 소리를 듣게 합니다.

이어서 3절에서는 시야가 열립니다.

말 탄 군사들이 돌진하고 칼과 창이 번쩍입니다. 죽임당한 사람들이 수없이 쓰러지고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입니다. 끝없이 널린 시체에 사람들이 걸려 넘어집니다.나훔 3:3 · 두루새김

소리가 빛으로 바뀝니다.

전쟁을 묘사할 때 사람들은 종종 군대의 당당한 모습과 무기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깁니다. 하지만 나훔은 그 움직임을 따라가던 독자의 눈을 결국 죽은 사람들에게 고정시킵니다.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길을 걷는 것조차 어려워집니다. 인간의 몸이 길 위에 쌓인 장애물처럼 묘사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피를 흘린 도시라는 이름 뒤에는 실제로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이 시체들이 모두 어느 쪽 군대에 속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2장에서 이어지는 니느웨 함락의 광경으로 볼 수 있지만, 제국이 저질러 온 살육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로도 읽힙니다. 아모스 1–2장은 여러 민족이 저지른 폭력을 고발합니다. 중요한 것은 심판의 기준이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이라는 구분에만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자신의 불의도 심판합니다(아모스 2:6–8). 나훔이 니느웨의 폭력을 심판의 이유로 제시하는 것 역시 이러한 예언 전통 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름답게 보이던 제국의 다른 얼굴

나훔 3:4–7 본문 →

민족들을 팔아넘기는 여인

4절에서 나훔은 전쟁터를 떠나 갑자기 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모든 일은 아름답고 주술에 능한 창녀가 숱하게 음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는 음행으로 민족들을 팔아넘기고, 주술로 여러 부족을 팔아넘깁니다.나훔 3:4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창녀는 니느웨를 사람처럼 그린 모습입니다. 예언자는 도시를 하나의 여인으로 묘사하면서 그 도시가 다른 민족과 맺은 관계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니느웨는 강한 군대만으로 다른 나라를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나훔은 그들이 다른 민족을 매혹하고, 조종하고, 결국 팔아넘기는 존재처럼 행동했다고 고발합니다.

주술이라는 표현도 이러한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니느웨에서 실제로 행해진 특정 주술 의식을 가리키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비유 안에서는 상대방을 현혹하고 자기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힘을 표현합니다.

니느웨의 권력은 언제나 드러내 놓고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이익을 가져다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매력의 뒤에는 다른 민족을 자기 뜻대로 처분하는 권력이 숨어 있습니다.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는 심판

5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선언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너를 대적한다. 내가 네 치맛자락을 네 얼굴 위로 걷어 올려 민족들에게 네 알몸을 보이고, 나라들에게 네 수치를 드러내겠다.」나훔 3:5 · 두루새김

이 선언은 2:14에도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어지는 심판의 방식이 다릅니다.

이 표현은 현대 독자에게 매우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이미지는 강제적인 노출과 수치심을 이용한 폭력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대 예언 문학에서는 도시나 국가를 여성으로 그려 내고, 그 도시의 패배와 굴욕을 여성의 강제적인 노출에 비유하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노출이 명예와 수치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던 문화적 배경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나훔 3:5를 여성에 대한 성적 모욕이나 폭력이 정당하다는 보편적인 원칙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본문이 실제로 사용하는 고대의 수치 이미지와 그 이미지에 대한 오늘의 윤리적 평가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른 민족들은 니느웨가 자신을 어떻게 꾸몄는지가 아니라, 그 권력의 실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니느웨가 속이고 지배했던 바로 그 민족들이 니느웨의 수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 꾸며 낸 영광이, 그 지배를 당했던 사람들 앞에서 벗겨집니다.

6절에서 이 장면은 더욱 격해집니다.

「네 위에 역겨운 것들을 던져 너를 욕보이고 구경거리로 만들겠다.」나훔 3:6 · 두루새김

제국은 다른 민족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처분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제국이 다른 민족들의 시선 아래 놓입니다.

숨겨져 있던 악행이 드러나는 심판입니다.

누구도 위로하러 오지 않는다

7절에서는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너를 보는 사람은 모두 너에게서 달아나며 말할 것이다. 『니느웨가 폐허가 되었구나. 누가 그 도시를 위해 슬퍼하겠느냐?』 내가 어디에서 너를 위로할 사람들을 찾겠느냐?」나훔 3:7 · 두루새김

보통 도시가 파괴되면 그 도시에 속한 사람들뿐 아니라 가까운 나라나 동맹국도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훔은 니느웨에게 그런 위로의 관계조차 남아 있지 않은 모습을 보여 줍니다.

니느웨는 다른 민족을 끊임없이 착취하고 이용했습니다. 그런 관계에서는 두려움 때문에 복종하는 사람은 생길 수 있어도, 그 권력이 무너질 때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남기 어렵습니다.

많은 나라가 니느웨의 명령에 복종했지만, 그것이 니느웨를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나훔서의 이름과도 묘하게 맞물립니다. 나훔이라는 이름은 위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유다에게는 평화와 회복의 소식이 전해지지만, 니느웨에게는 위로할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선언이 주어집니다.

이 이름의 연관성을 의도된 말장난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책 전체의 흐름에서 두 대상이 서로 다른 결말을 맞는다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니느웨는 많은 민족을 지배했지만, 어느 민족에게도 위로받지 못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니느웨야, 네가 노아몬보다 나으냐?

나훔 3:8–11 본문 →

다른 도시의 운명을 기억하라

8절에서 나훔은 전혀 다른 도시의 이름을 꺼냅니다.

「너는 노아몬보다 나으냐?」

앞에서는 니느웨가 왜 심판받는지 고발했습니다. 이제는 니느웨의 운명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역사의 사례를 통해 보여 줍니다.

노아몬은 이집트의 테베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아몬의 도시」라는 뜻과 관련되며, 아몬 신 숭배의 중심지였던 상이집트의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테베는 실제로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의 군대에게 공격받고 약탈당한 도시였습니다. 아시리아는 테베를 정복한 일을 자신들의 위대함을 보여 주는 증거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훔은 바로 그 사건을 니느웨가 멸망할 수 있다는 증거로 제시합니다.

물로 둘러싸인 도시도 무너졌다

나훔은 먼저 노아몬이 얼마나 강력한 방어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지 묘사합니다.

나훔이 니느웨를 향해 말합니다. 「너는 노아몬보다 나으냐? 노아몬은 나일강 물줄기들 사이에 자리 잡고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바다가 그 도시의 요새였고, 그 성벽도 바다였다.」나훔 3:8 · 두루새김

테베는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에 자리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나훔은 나일강의 물을 설명하면서 「바다」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이 표현을 테베가 실제 바닷가에 있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히브리어 얌(⁨יָם⁩)은 기본적으로 바다를 뜻하지만, 시적인 글에서는 거대한 물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도시를 보호하는 풍부한 물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니느웨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을 것입니다. 니느웨 역시 티그리스강 인근의 지형과 수로를 이용한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노아몬의 강점은 지리적 조건만이 아니었습니다.

「쿠시와 이집트가 노아몬의 힘이었고, 그 힘은 끝이 없었다. 노아몬아, 풋과 리비아 사람들이 너를 도왔다.」나훔 3:9 · 두루새김

쿠시는 이집트 남쪽의 누비아 지역과 관련된 세력이었습니다. 풋과 리비아도 이집트 주변의 지역과 민족을 가리킵니다. 풋의 정확한 지리적 범위에는 불확실성이 있지만, 이 절이 여러 지역의 지원을 강조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나훔은 노아몬이 실제로 무한한 힘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강력하고 풍부한 지원을 받은 도시였다는 인상을 전달합니다.

강력한 지리적 방어 조건이 있었습니다.

많은 동맹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도시는 무너졌습니다.

승리의 기억을 거꾸로 읽다

10절은 짧지만 가혹합니다.

「그런데도 노아몬은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그 도시의 어린아이들마저 길목마다 내동댕이쳐져 죽임을 당했다. 사람들은 그 도시의 귀족들을 누가 차지할지 제비를 뽑았고, 높은 사람들은 모두 쇠사슬에 묶였다.」나훔 3:10 · 두루새김

나훔이 묘사하는 것은 도시의 패배만이 아닙니다.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취급되었는가입니다.

도시의 중요한 인물들이 더 이상 자기 운명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나누어 가질지 결정하는 대상이 됩니다.

노아몬에게 이런 일을 저지른 정복 세력은 바로 아시리아였습니다.

그러므로 나훔의 질문은 단순한 역사적 비교가 아닙니다. 아시리아가 다른 도시에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라는 고발이기도 합니다.

제국이 자신은 패배하지 않는다고 증명하기 위해 쌓아 올린 정복의 역사가 오히려 자신도 무너질 수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이제 네가 피난처를 찾아야 한다

11절은 니느웨를 향해 선언합니다.

「니느웨야, 너도 술에 취하고 모습을 감추게 될 것이다. 너도 원수를 피해 몸을 숨길 곳을 찾게 될 것이다.」나훔 3:11 · 두루새김

여기서 「너도」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노아몬에게 일어났던 일이 니느웨에게도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술에 취한 상태는 심판과 혼란 앞에서 정상적인 판단과 행동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사야 51:17, 예레미야 25:15–16에서도 심판이 술이나 잔의 이미지로 묘사됩니다.

「모습을 감추게 될 것이다」라는 표현은 몸을 숨기거나 보이지 않게 되는 상황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노아몬을 지켜 주지 못했던 물과 동맹군을 떠올리면, 그 피난처를 찾는 일이 얼마나 절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를 위협하던 도시가 이제는 자신을 보호할 곳을 찾습니다.

조금 더 깊이

테베가 공격받은 사건은 일반적으로 기원전 663년경으로 이해되며, 아슈르바니팔의 왕실 비문에도 테베 공격과 전리품을 얻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나훔이 제시하는 모든 세부 장면이 테베 함락 당시 실제로 어떻게 발생했는지는 별도의 역사 자료만으로 모두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 절은 예언자가 기억하고 제시하는 패배의 참혹함으로 읽어야 합니다.

처음 익은 무화과처럼 떨어지는 요새들

나훔 3:12–15 본문 →

성벽의 강함을 과일의 연약함으로 바꾸다

노아몬의 몰락을 보여 준 뒤, 나훔은 다시 니느웨의 방어 시설을 바라봅니다.

「네 모든 요새는 처음 익은 열매가 달린 무화과나무와 같다. 나무를 흔들면 열매가 먹는 사람의 입으로 떨어진다.」나훔 3:12 · 두루새김

보통 요새는 단단한 돌이나 높은 성벽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나훔은 그것을 무화과나무에 비유합니다.

공격하는 사람은 힘들게 열매를 얻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무를 흔들기만 하면 됩니다.

니느웨의 입장에서 요새는 오랫동안 준비하고 쌓아 올린 강력한 방어 시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훔의 비유에서는 쉽게 떨어지는 과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열린 성문과 힘을 잃은 병사들

13절에서는 같은 문제가 다른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보아라, 네 안의 백성은 여자들 같구나! 네 땅의 성문들이 적들에게 활짝 열릴 것이고, 불이 성문의 빗장들을 태워 버릴 것이다.」나훔 3:13 · 두루새김

이 구절은 고대 전쟁 문화에서 여성성을 연약함이나 전투 능력의 부족에 연결하던 관습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여성이 본질적으로 약하거나 전쟁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당시 사회의 성별 고정관념을 이용해 니느웨의 군사적 무력함을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도시를 보호해야 할 문이 이제 아무런 보호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문을 굳게 닫아 적을 막아야 하지만, 나훔은 그 문이 적에게 활짝 열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니느웨가 의지하는 방어 수단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물을 길어라, 벽돌을 만들어라

14절에서는 매우 구체적인 명령들이 쏟아집니다.

「적에게 둘러싸일 때를 대비해 물을 길어 두어라. 네 요새들을 튼튼히 하여라. 진흙 속으로 들어가 찰흙을 밟고 벽돌 틀을 잡아라.」나훔 3:14 · 두루새김

도시가 포위되면 바깥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내부에서 사용할 물을 확보해야 합니다. 무너진 성벽이나 약한 방어 시설은 튼튼히 해야 합니다. 벽돌을 만들기 위해 진흙과 찰흙을 다루고, 벽돌 틀을 사용하여 건축 자재를 마련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서 불이 너를 삼키고 칼이 너를 없애 버릴 것이다. 칼이 메뚜기처럼 너를 먹어 치울 것이다. 메뚜기처럼 수를 불려 보아라. 메뚜기 떼처럼 수를 불려 보아라.」나훔 3:15 · 두루새김

물을 길어 놓고, 요새를 튼튼히 하고, 벽돌을 만들던 바로 그 자리에서 불이 니느웨를 삼키고 칼이 니느웨를 없애 버립니다.

이것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말라는 일반적인 교훈이 아닙니다. 재난에 대비하거나 성벽을 튼튼히 하는 행위 자체가 어리석다는 뜻도 아닙니다.

나훔은 특정한 제국을 향해 이미 내려진 심판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이 명령들은 니느웨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어 능력을 보여 주면서도 그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반어적인 표현입니다.

제국은 거대한 건축물과 성벽을 통해 자기 힘을 드러내 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는 그 건축물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재료를 모읍니다.

그러나 나훔은 그 수고의 끝에 승리가 아니라 불과 칼을 놓습니다.

제국이 자기 손으로 쌓아 올린 힘이 자기 생존을 끝까지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별처럼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나훔 3:16–17 본문 →

메뚜기처럼 수를 불려라

15절 후반부에서 비유가 다시 바뀝니다.

「메뚜기처럼 수를 불려 보아라. 메뚜기 떼처럼 수를 불려 보아라.」

메뚜기 떼는 많은 수로 이동하면서 식물을 먹어 치울 수 있습니다. 요엘 1:4와 2:3–9에서도 메뚜기의 파괴적인 움직임은 땅을 황폐하게 하는 재앙과 군사적 침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나훔은 칼이 메뚜기처럼 니느웨를 먹어 치울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곧바로 니느웨에게 메뚜기처럼 수를 불리라고 명령합니다.

문맥상 이 역시 반어적인 도전입니다. 가능한 한 수를 늘려 보라는 것입니다. 군사도 늘리고, 사람도 늘리고, 제국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 보라는 것입니다.

많다는 사실이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상인들은 왜 별처럼 많았는가

16절에서는 니느웨의 경제적 규모가 등장합니다.

「너는 네 상인들을 하늘의 별보다 많게 만들었다. 메뚜기는 먹어 치우고 날아가 버린다.」나훔 3:16 · 두루새김

「하늘의 별보다 많게 만들었다」는 표현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과장된 시적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별의 수는 흔히 풍성함과 번성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15:5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나훔은 같은 종류의 풍성함을 니느웨의 상인들에게 적용합니다. 니느웨는 상업과 재물의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물건을 사고팔았으며, 다양한 재물이 그 도시로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상인들의 풍성함은 곧 메뚜기 비유와 연결됩니다. 이 구절은 메뚜기가 무언가를 벗고 날아가는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고, 먹잇감을 약탈한 뒤 날아가는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토록 많던 존재들이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제국은 상인들이 많다는 사실을 번영과 안정의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건을 사고파는 규모가 크다는 것과 위기의 순간에도 그 사람들이 계속 그곳에 남아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추운 날에는 모이고, 해가 뜨면 사라진다

17절에서는 메뚜기 비유가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발전합니다.

「네 높은 관리들은 메뚜기 같고, 네 지휘관들은 메뚜기 떼 같다. 메뚜기 떼는 추운 날 담벼락에 내려앉아 있다가 해가 뜨면 날아가 버린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구나. 그들은 어디에 있느냐?」나훔 3:17 · 두루새김

그들을 한곳에 머물게 했던 조건이 바뀌자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제국을 지탱한다고 여겨졌던 지도층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제국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많은 군사와 상인과 관리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많은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위기의 순간에 어떤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가입니다.

제국의 권력 아래 모여 있던 사람들이 제국이 흔들리자 흩어지고,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의 히브리어 동사 파샤트(⁨פָּשַׁט⁩)는 벗기거나 벗어 버린다는 뜻과 약탈하거나 침입한다는 뜻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앞선 약탈의 문맥에서는 메뚜기가 재물을 휩쓸고 사라지는 모습이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다음 절에서 메뚜기들이 갑자기 날아가 버리는 장면을 고려하면, 사라짐 자체가 강조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메뚜기들은 추운 날에 담벼락에 내려앉아 있습니다. 기온이 낮으면 움직임이 둔해집니다. 그러나 해가 떠오르면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어 날아갑니다.

목자들이 잠들자 백성은 산으로 흩어졌다

나훔 3:18 본문 →

나훔은 마지막 두 절에서 처음으로 아시리아 왕을 직접 부릅니다.

「아시리아 왕아, 네 목자들이 잠들었고 네 힘 있는 자들이 쉬고 있다. 네 백성은 산마다 흩어졌는데 모아 줄 사람이 없구나.」나훔 3:18 · 두루새김

이번에는 메뚜기가 아니라 목자와 양 떼가 등장합니다. 고대 이스라엘과 주변 문화에서 목자는 지도자를 비유하는 중요한 표현이었습니다. 왕은 백성을 돌보고 이끄는 책임을 지닌 존재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목자들은 자기 양 떼를 돌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라의 행정조직이 무너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도자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목자는 양 떼를 돌보고, 위험에서 보호하며, 흩어졌을 때 다시 모아야 합니다. 그러나 니느웨의 지도자들은 그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약탈하며 제국을 넓히는 데 힘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백성이 흩어지는 순간에는 그들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남의 백성을 흩어 놓을 힘은 있었지만, 자기 백성을 모을 힘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제국은 많은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을 끝까지 돌보는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강제로 유지되던 질서는 강제할 힘이 사라지는 순간 무너질 수 있습니다.

나훔이 보여 주는 아시리아의 마지막 모습은 전쟁에서 진 강대국이기 이전에, 백성을 돌볼 목자를 잃어버린 나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잠들었고」라는 표현을 실제로 지도자들이 잠을 자고 있는 모습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죽음이나 힘을 잃은 상태를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 뜻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5:2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을 먹이는 목자의 역할과 연결됩니다. 에스겔 34장에서는 자기만 돌보고 양 떼를 돌보지 않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이 말씀은 나훔 3:18과 직접적인 인용 관계라기보다 지도자의 책임이라는 주제에서 연결됩니다. 더 넓게 보면 나훔 3장은 창세기 11장의 바벨 이야기와도 주제적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바벨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지지 않으려고 성과 탑을 쌓았습니다(창세기 11:4). 그러나 그들의 계획과 달리 사람들이 흩어집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상황을 다루지만, 인간이 자기 힘으로 영원한 안전을 얻고 하나로 뭉쳐 있으려는 시도가 결국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다만 나훔 3장의 중심은 단순한 인간의 야망에 있지 않습니다. 그 야망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이 장의 고발을 더욱 구체적으로 만듭니다.

고칠 수 없는 상처와 마지막 질문

나훔 3:19 본문 →

나훔서의 마지막 절은 아시리아 왕을 향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네 상처는 아물 길이 없고, 네 부상은 심각하다. 네 소식을 듣는 사람마다 너를 두고 손뼉을 친다. 네 악행에 끊임없이 시달리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나훔 3:19 · 두루새김

니느웨의 패배를 잠깐 겪는 군사적 손실이 아니라, 그 지배 질서의 끝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역사 속 모든 아시리아인의 삶이 그 순간 완전히 끝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의 관심은 아시리아 제국의 통치 권력과 니느웨가 상징하는 지배 체제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무너지는 데 있습니다.

한 나라가 상처 입고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뼉을 친다는 것은 잔혹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질문이 그 반응의 이유를 밝힙니다.

이 문장은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니느웨의 악행이 너무나 널리 퍼져 있었음을 강조하는 질문입니다. 그 권력의 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시달리지 않은」이라는 표현은 원문에서는 악행이 사람들을 휩쓸고 지나가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아시리아의 악행은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다른 지역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그 소식을 듣고 손뼉을 치는 사람들은 단순히 남의 불행을 즐기는 구경꾼으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니느웨의 폭력 아래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나훔은 모든 전쟁의 죽음이나 모든 도시의 파괴를 기뻐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마지막 절에서 기쁨의 이유는 특정한 제국의 끝없는 악행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멸망에 따른 인간의 고통을 지워 버려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훔 자신도 앞에서 시체와 포로와 흩어진 백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몰락을 바라보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입장 역시 지워서는 안 됩니다. 오랫동안 폭력에 시달린 사람에게 억압의 끝은 자신의 삶과 가족을 다시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의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짓밟으며 유지되던 권력이 끝났을 때, 그 권력의 끝은 많은 사람에게 해방의 소식이 됩니다.

맺음말 — 흩어진 양 떼를 모을 사람이 없다

나훔 3:1–19 본문 →

나훔 3장은 니느웨가 그 힘으로 무엇을 했는가를 판단의 중심에 놓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는 능력과 다른 사람의 삶을 지켜 주는 능력은 같지 않습니다. 나훔의 아시리아 왕은 첫 번째 능력을 가졌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두 번째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나훔처럼 특정한 공동체를 향해 하나님이 반드시 멸망을 결정하셨다고 선언할 수 없습니다. 나훔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예언자로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선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심판할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행위를 문제 삼으시는지를 분별하는 기준입니다.

한때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움직이던 제국이 이제 자기 백성을 모으지도 못합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지배했지만, 마지막에는 흩어진 사람들을 돌볼 목자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손뼉을 칩니다.

니느웨의 멸망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된 것은 그들이 본래부터 니느웨를 미워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니느웨가 그들에게 끊임없이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네 악행에 끊임없이 시달리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제국은 수많은 사람을 자기 아래 모을 수 있었지만, 그 사람들의 고통까지 영원히 침묵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나훔서는 그렇게 끝납니다.

산마다 흩어진 백성을 모아 줄 사람은 없고, 먼 곳에서는 그 제국의 끝을 알리는 소식에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