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무너진 성벽 소식
무너진 성벽 앞에서 기억하는 하나님의 약속
느헤미야서는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정작 첫 장에는 돌을 쌓는 사람도, 공사를 준비하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멀리 떨어진 수산의 요새에서 한 사람이 소식을 듣고 울며 기도할 뿐입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으면서도,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당장 성벽을 다시 세워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고, 모세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왕이 자신을 너그럽게 대해 주도록 해 달라고 구합니다.
왜 성벽에 관한 문제가 이렇게 긴 언약의 기도로 이어지는 것일까요?
유다 백성은 바벨론에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후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일부가 고향으로 돌아왔고, 예루살렘 성전도 다시 세워졌습니다(에스라 6:15). 그러나 성전이 다시 세워졌다고 해서 공동체의 삶까지 온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과, 그 백성이 여전히 어려움을 겪으며 업신여김을 받고 있다는 현실이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이 간격 앞에 서 있습니다.
느헤미야 1장은 성벽을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가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회복을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수산에서 들려온 예루살렘의 소식
왕의 요새에 있는 사람, 무너진 도시에 마음을 둔 사람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기록입니다. 제20년 기슬르월에 나는 수산의 요새에 있었습니다.느헤미야 1:1 · 두루새김
수산은 페르시아 제국의 주요 왕실 거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기슬르월은 대체로 오늘날의 11~12월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20년은 2:1에 비추어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의 통치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제국의 중심부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11절에서 밝혀지듯, 그는 왕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관리였습니다.
내 형제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몇몇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왔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포로 생활에서 살아남아 그곳에 남아 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의 형편을 물었습니다.느헤미야 1:2 · 두루새김
그는 예루살렘의 건물이나 성벽 상태만 묻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물었고, 이어 도시의 형편을 물었습니다. 성벽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느헤미야는 훗날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과 부당한 일에도 대응합니다(5:1–13).
그들이 내게 말했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살아남아 그 지방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큰 어려움을 겪으며 업신여김을 받고 있어요.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져 있고 성문들은 불에 탔어요.」느헤미야 1:3 · 두루새김
고대 도시에서 성벽은 군사적 방어 시설이었지만, 그 의미는 방어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성벽이 무너진 도시는 외부의 위협에 쉽게 노출되었고, 주민들이 안정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습니다. 성문 역시 출입과 통행을 관리하고 공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백성이 어려움에 빠져 있을 뿐 아니라 업신여김까지 받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고통이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 사이의 관계에도 걸쳐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자신들의 도시조차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포로 생활에서 살아남은 백성이지만, 그들의 삶은 아직 온전한 회복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이 느헤미야를 움직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포로 생활에서 살아남아 그곳에 남아 있는 유다 사람들」이라는 표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살아남은 무리라는 뜻의 하플레타와 사로잡힘에서 남았다는 표현을 함께 사용합니다. 이것이 돌아온 포로들만을 가리키는지, 유다 땅에 계속 머물렀던 사람들도 포함하는지는 문장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보고가 구체적으로 언제 일어난 파괴를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한 뒤 계속된 상태를 말할 수도 있고, 그 뒤 도시를 다시 세우는 일을 둘러싼 갈등으로 생긴 손상을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에스라 4:12–23에는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는 일을 둘러싼 반대와 공사 중단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 사건과 느헤미야 1:3의 보고를 완전히 같은 사건으로 볼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가 먼저 한 일
나는 이 말을 듣고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슬퍼하며 음식을 먹지 않고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느헤미야 1:4 · 두루새김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기로 선택하신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할 때, 백성이 죄를 지어 먼 나라로 사로잡혀 간 뒤에도 하나님께 돌아와 기도하면 하늘에서 들으시고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열왕기상 8:46–50). 느헤미야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 제국의 궁정에 살고 있지만, 그의 기도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향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자신의 이름을 위한 장소로 선택하셨지만, 예루살렘 안에 갇혀 계신 분은 아니십니다.
성벽이 무너지고 백성이 흩어져 있어도, 그들의 기도를 들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이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신실함을 고백하다
하나님을 먼저 어떤 분으로 부르는가
느헤미야는 자신의 고통을 말씀드리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합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야훼, 하늘의 하나님, 위대하시고 두려우신 하나님!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께 간청합니다.」느헤미야 1:5 · 두루새김
여기서 「위대하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압도적인 위엄과 능력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것은 그분에게 백성을 회복시킬 능력이 있으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은 그 능력을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한결같으심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저희는 주님을 거슬러 참으로 악하게 행동했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종 모세에게 주신 명령과 규정과 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느헤미야 1:7 · 두루새김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시지만, 이스라엘은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바로 이 불균형 위에 서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마땅히 받을 것을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충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 자신의 한결같으심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는 것과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은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느헤미야의 기도에서는 둘이 함께 나타납니다.
「그들이」 아니라 「저희가」
「부디 귀를 기울이시고 눈을 뜨셔서 주님의 종인 제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저는 지금 주님의 종들인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밤낮으로 주님 앞에서 기도합니다. 저희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께 지은 죄를 고백합니다.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도 죄를 지었습니다.」느헤미야 1:6 · 두루새김
처음에는 「주님의 종들인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곧 「저희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께 지은 죄」를 고백합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집안까지 분명히 말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고난을 다른 사람들의 문제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 자신도 이스라엘의 일원이며, 그 공동체의 역사와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본문은 느헤미야가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는지 하나씩 들지 않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겪는 모든 사람이 개인적으로 그 고난을 불러왔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이 언약에 불순종했던 역사적 사실을 고백하지만, 오늘날 누군가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그 고난을 곧바로 그 사람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판단할 근거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방식은 다니엘 9:4–19에서도 나타납니다. 다니엘 역시 하나님께서 언약과 사랑을 지키시는 분이라고 고백한 뒤, 백성의 죄를 자신의 죄와 분리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의 폐허는 단순히 정치적 실패나 군사적 패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폐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의 역사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그렇다고 그는 무너진 성벽만 바라보며 죄책감 속에 머물지 않습니다. 다음 순간, 그의 기도는 과거의 잘못에서 하나님이 하신 약속으로 옮겨 갑니다.
흩으신 하나님께 다시 모아 달라고 간청하다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놀라운 요청
「주님의 종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배신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사이로 흩어 버리겠다.』」느헤미야 1:8 · 두루새김
성경에서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단순히 잊힌 정보를 다시 떠올려 달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하신 약속에 따라 행동해 달라는 간청으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2:24에서 하나님은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그 언약에 따라 백성을 구원하시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먼저 기억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회복의 약속이 아닙니다. 흩어 버리겠다는 경고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슬러 행동하면 민족들 가운데 흩어질 것이라는 경고가 여러 차례 나옵니다(레위기 26:33, 신명기 4:27). 느헤미야는 포로 생활과 흩어짐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심판에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게 돌아와 내 명령을 지키고 그대로 행하면, 너희 가운데 쫓겨난 사람들이 하늘 끝에 있더라도 내가 거기서 그들을 모으겠다. 그리고 내 이름이 머물도록 내가 선택한 곳으로 데려오겠다.』」느헤미야 1:9 · 두루새김
특별히 9절은 신명기 30:1–5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백성이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지더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모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하늘 끝에 흩어져 있더라도 거기서 모아 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소원에 맞추어 새로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주어진 말씀을 현재 백성의 형편에 비추어 다시 붙듭니다.
이미 돌아왔는데, 왜 다시 모아 달라고 하는가?
포로들이 돌아오는 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백성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고, 돌아온 사람들의 삶도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과, 그 약속이 가리키는 회복을 공동체가 온전히 누리고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바라보는 현실은 바로 이 둘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9절의 「내 이름이 머물도록 내가 선택한 곳」은 문맥상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 장소를 단순히 조상들의 수도나 민족적 자존심의 상징으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회복은 단순히 영토를 되찾거나 도시를 다시 세우는 일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중심으로 모인 백성이 그분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백성이 실제로 살아갈 도시의 안전과 질서 역시 회복의 일부입니다. 다만 느헤미야는 그것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이루시는 더 큰 일 안에서 바라봅니다.
이것이 그의 기도가 성벽 자체보다 언약의 약속에 더 많은 말을 할애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출애굽의 하나님께 포로 이후의 회복을 구하다
「이들은 주님의 종이며 주님의 백성입니다. 주님께서 큰 힘과 강한 손으로 구해 내신 사람들입니다.」느헤미야 1:10 · 두루새김
「큰 힘과 강한 손」은 출애굽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신 일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출애굽기 32:11).
여기서 「구해 내신」(פָּדָה)에 해당하는 원문의 말은 값을 치르거나 권리를 행사하여 누군가를 속박에서 건져 낸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을 이미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고 고백합니다.
3절에서 그들은 큰 어려움을 겪으며 업신여김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10절에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해 내신 백성입니다.
그들의 현재 형편이 그들이 누구인지를 모두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이 논리는 신명기 9:29에 나타난 모세의 간청과도 닮아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이끌어 내신 백성이라는 사실을 들어 간청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처음 구해 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실 수 있다는 믿음이 느헤미야의 기도에 담겨 있습니다.
이제 기도는 마지막 요청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느헤미야 8–9절은 모세오경의 특정 두 구절을 글자 그대로 옮긴 인용이 아닙니다. 여러 언약의 말씀을 모아 흩어짐과 회복이라는 흐름으로 제시한 기도입니다. 특히 신명기 30장의 약속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이 머물 곳을 선택하신다는 표현은 신명기 12:5, 11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그분의 한결같으심과 자비를 통해 이해한다는 점에서 로마서 11:1–6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이것은 느헤미야 1장을 신약이 직접 인용하거나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을 특정한 신약 사건을 미리 보여 주는 일로 분명히 밝힌 경우는 아닙니다. 먼저 느헤미야의 기도를 이스라엘의 포로와 귀환, 언약과 회복이라는 구약의 역사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페르시아 왕을 「이 사람」이라고 부르다
기도 속에서 바뀌는 시선
「주님, 간청합니다. 주님의 종인 제 기도와 주님의 이름을 기꺼이 두려워하며 받드는 종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부디 오늘 제가 하려는 일이 잘되게 해 주시고, 이 사람이 저를 너그럽게 대해 주도록 해 주십시오.」 그때 나는 왕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관리였습니다.느헤미야 1:11 · 두루새김
「주님의 이름을 기꺼이 두려워하며 받드는 종들」이라는 복수 표현은 앞서 그가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자신의 죄로 고백했던 태도와 어울립니다. 죄의 고백에서도, 회복을 구하는 기도에서도 그는 자신을 공동체와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아주 구체적인 요청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와 하나님의 언약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자신의 하루와 한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오늘」이라는 말은 기도가 실제 행동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가 구하는 「제가 하려는 일이 잘되게」 해 달라는 요청도 막연한 출세나 재물을 뜻하지 않습니다. 문맥상 자신이 왕 앞에서 이루려는 일이 잘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제국의 궁정에서 왕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왕에게는 막강한 권력이 있고, 느헤미야는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 그 왕의 호의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에서 그는 왕을 「이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왕을 깔본다는 뜻은 아닙니다. 뒤이어 전개되는 2장의 이야기를 보면 느헤미야는 왕에게 적절한 예의를 갖춥니다.
왕은 느헤미야의 현실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한 사람입니다. 느헤미야가 끝내 의지하는 대상은 왕의 권력이 아니라 그 왕의 마음까지 움직이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느헤미야는 왕을 무시하지도, 왕을 하나님처럼 여기지도 않습니다.
기도와 행동은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그는 예루살렘에 직접 군대를 보낼 수 있는 왕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방법도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왕을 가까이에서 섬기며 왕에게 말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책이 느헤미야의 높은 궁정 직책을 먼저 강조했다면, 독자는 그의 지위를 예루살렘 문제 해결의 출발점으로 생각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의 직책보다 먼저 눈물과 기도를 보여 줍니다. 그가 어떤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알려 주기 전에, 누구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왕을 만나는 일을 구체적으로 구합니다. 이어지는 2장에서 그는 왕의 질문에 대답하고, 자신의 요청을 설명하며, 필요한 지원을 구합니다.
기도와 행동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는 그가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적인 기회와 책임을 하나님의 자비에 맡깁니다.
조금 더 깊이
2:1에서 왕 앞에 서는 장면은 기슬르월보다 몇 달 뒤인 니산월에 기록됩니다. 적어도 느헤미야의 기도가 단 한 번의 순간적인 반응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열왕기상 8:46–53에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은 사람들 앞에서 자비를 입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솔로몬은 포로를 잡아간 사람들 앞에서 이스라엘이 자비를 입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이 자신을 너그럽게 대해 주도록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두 기도가 완전히 같은 상황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섬기는 페르시아 왕을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던 사람들과 같은 존재로 볼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두 기도에는 죄의 고백, 하늘에서 들으시는 하나님, 출애굽으로 얻으신 백성, 그리고 외국 권력자 앞에서 베푸시는 자비라는 요소들이 함께 나타납니다. 이 공통점들은 느헤미야의 기도가 이스라엘의 오래된 예배와 언약 전통 안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맺음 — 왕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사람의 기도
느헤미야 1장은 조용한 장면으로 끝납니다.
성벽을 다시 쌓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성벽 안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지는 그보다 작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순히 왕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 이미 말씀하신 회복의 약속이 페르시아 왕의 궁정이라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수산의 요새에는 여전히 페르시아 왕이 있고, 예루살렘의 성벽은 여전히 무너져 있습니다. 하나니가 전해 준 소식 이후로 바뀐 것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현실은 아직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을 이해하는 느헤미야의 시선은 달라졌습니다.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위해 시작된 기도가 수산의 요새 안에서 한 사람이 왕을 만나려는 순간으로 좁혀집니다.
그는 자신이 섬기는 왕 앞에 서기 전에, 먼저 자신이 믿는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끝난 자리에서, 왕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이제 시작되려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