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시온의 회복
내려오는 에돔, 일어나는 시온
오바댜서는 두 산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는 에서의 산이고, 다른 하나는 시온 산입니다. 에돔은 높은 바위틈에 집을 마련하고 누구도 자신을 끌어내릴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반면 시온은 외국 군대에 짓밟히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재산을 빼앗긴 채 도망쳐야 했습니다.
오바댜가 묻는 것은 단순히 어느 나라가 승리하느냐가 아닙니다. 무엇이 사람과 나라를 안전하게 하는가, 그리고 힘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의 불행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특별히 날카로워지는 까닭은 에돔과 이스라엘이 단순한 이웃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돔의 조상 에서는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형이었습니다. 오바댜는 나라 사이의 배신을 이야기하면서 의도적으로 이 오래된 형제 관계를 다시 불러냅니다. 형제가 무너지는 날, 다른 형제가 무엇을 했는지가 이 책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아무도 내려오게 할 수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
오바댜는 에돔을 향한 전쟁의 소식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에게서 소식이 들려오고, 여러 민족에게 보내진 사람이 전쟁에 나서라고 외칩니다.
오바댜가 본 환상입니다. 주 여호와야훼께서 에돔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야훼께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러 민족에게 소식을 전할 사람이 보내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일어나라! 우리 함께 일어나 에돔과 싸우자!」오바댜 1:1 · 두루새김
에돔을 공격하는 것은 민족들이지만, 사건의 시작에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 민족이 일어서고 무너지는 일을 판단하시고 그들을 움직이시는 분으로 여호와야훼를 제시합니다.
이어서 여호와야훼가 에돔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십니다.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다. 바위틈에 살며 높은 곳에 집을 둔 너는 마음속으로 『누가 나를 땅으로 끌어내리겠느냐?』 하고 말한다.」오바댜 1:3 · 두루새김
에돔은 사해 남동쪽의 험한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나라였습니다. 그 지역의 깊은 골짜기와 가파른 바위산은 적의 공격을 막기에 유리한 지형을 제공했습니다. 높은 곳에 집을 두었다는 표현은 이러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돔의 자신감은 아무 근거도 없는 허풍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자신을 보호해 줄 만한 지형적 조건이 있었습니다. 에돔은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에서 자신이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에돔이 마음속으로 던진 질문에 직접 대답하십니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올라가고 별들 사이에 둥지를 틀어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입니다.오바댜 1:4 · 두루새김
에돔은 「누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대답은 「내가」입니다.
여기서 에돔이 자리 잡은 높은 지형은 독수리와 별들 사이의 둥지라는 모습으로 확대됩니다. 아무리 높이 올라가더라도 여호와야훼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는 것입니다.
에돔을 속인 것은 바깥의 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뒤에 등장할, 힘을 합치기로 약속한 나라들의 배신보다 먼저 제시되는 첫 번째 속임수입니다. 에돔은 자기를 믿었고, 곧이어 자신이 믿었던 다른 나라들로부터도 속임을 당합니다.
남김없이 빼앗기고,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하다
에돔의 멸망을 묘사하는 방식은 뜻밖입니다. 예언자는 곧바로 군대가 밀려오거나 성벽이 무너지는 모습을 설명하지 않고, 두 종류의 일상적인 약탈을 떠올립니다.
「네가 이렇게 철저히 망하다니! 도둑들이 네게 들이닥쳤다면, 밤에 강도들이 쳐들어왔다면, 자기들에게 필요한 만큼만 훔쳐 가지 않았겠느냐? 포도를 따는 사람들이 왔더라도 뒤에 주울 포도는 남겨 놓지 않았겠느냐?」오바댜 1:5 · 두루새김
도둑도 가져갈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포도를 따는 사람들도 열매를 모두 거두지는 못하기 때문에 뒤에 주울 포도가 남습니다. 그런데 에돔에 닥칠 멸망은 이보다 철저합니다.
「에서를 얼마나 샅샅이 뒤졌는가! 숨겨 둔 보물까지 드러났구나!」오바댜 1:6 · 두루새김
지형이 주던 안전뿐 아니라 재산이 주던 안전도 무너집니다. 높은 곳에 쌓아 둔 재산은 에돔을 지켜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더욱 뜻밖의 일이 이어집니다.
「너와 힘을 합치기로 약속한 이들이 모두 너를 국경까지 내몰았다. 너와 평화롭게 지내던 이들이 너를 속이고 꺾었다. 네 빵을 먹던 이들이 네 발밑에 덫을 놓을 것이다. 에돔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오바댜 1:7 · 두루새김
고대 세계에서 함께 식사하는 행동은 서로 우호적이고 믿을 만한 관계임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배신은 단순히 적국이 공격해 온 사건과 다릅니다. 자신을 보호해 주리라고 믿었던 관계 자체가 무너지는 일입니다.
에돔을 국경까지 내몰았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적 상황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힘을 합치기로 한 관계가 보호의 수단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에돔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에돔의 지혜와 군사력입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입니다. 「그날 내가 에돔에서 지혜로운 사람들을 없애고, 에서의 산에서 지혜가 사라지게 하지 않겠느냐?」오바댜 1:8 · 두루새김
「데만아, 네 용사들이 겁에 질릴 것이다. 이는 에서의 산에 사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 하나도 남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오바댜 1:9 · 두루새김
에돔과 관련된 지혜의 전통은 예레미야 49:7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곳에서는 데만에 더 이상 지혜가 없느냐고 묻습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 역시 데만 사람으로 소개됩니다(욥기 2:11).
오바댜의 묘사는 이러한 이름난 지혜를 뒤집습니다. 판단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도, 싸울 줄 아는 용사도 나라를 구하지 못합니다.
특히 7절은 배신당하는 에돔을 두고 「에돔은 깨닫지 못하는구나」라고 끝나며, 8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에서의 산에서 「지혜가 사라지게」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원문에서는 두 자리에 같은 낱말이 쓰입니다. 배신당한 상황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상태와 지혜의 상실이 서로 연결됩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에돔이 이런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교만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처럼 철저한 멸망이 선언되는 것입니까?
오바댜는 그 답을 10절에서 밝힙니다.
형제가 무너지던 날, 에돔은 어디에 있었는가
「네 형제 야곱에게 폭력을 휘둘렀으니, 부끄러움이 너를 덮고 너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오바댜 1:10 · 두루새김
창세기에서 에서와 야곱은 같은 부모에게 태어난 쌍둥이 형제입니다(창세기 25:24–26). 두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갈등이 예고된 형제였고(25:23), 성장하면서 맏아들의 권리와 축복을 둘러싸고 대립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에서는 야곱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았습니다(33:4).
신명기 23:7에는 이 관계가 더욱 분명하게 표현됩니다. 이스라엘은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바댜가 「네 형제 야곱」이라고 말할 때, 단순히 두 민족의 혈통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돔이 마땅히 기억했어야 할 관계를 다시 일깨우는 것입니다.
먼저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공격받던 날을 떠올립니다.
「낯선 이들이 야곱의 재물을 빼앗아 가던 날, 너는 멀찍이 서서 보고만 있었다. 외국인들이 그의 성문으로 들어와 예루살렘을 놓고 제비를 뽑던 그날, 너도 그들 가운데 하나와 같았다.」오바댜 1:11 · 두루새김
에돔은 외국 군대와 같은 방식으로 처음부터 공격했기 때문에만 비난받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가 무너지는 현장에서 그 일에 동조하고 이익을 취했기 때문에 침략자들과 같은 편으로 여겨집니다.
형제의 고통을 지켜보는 자가 어느 순간 그 고통을 가하는 자들과 같은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네 형제가 불행을 당하는 날에 구경하지 마라. 유다 백성이 멸망하는 날에 기뻐하지 마라.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날에 으스대며 떠들지 마라.」오바댜 1:12 · 두루새김
이 구절들에서 반복되는 것은 「날」이라는 표현입니다. 형제가 불행을 당하는 날, 멸망하는 날, 고난을 당하는 날, 재난을 당하는 날이 거듭 등장합니다. 모두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그 시간을 가리킵니다.
이어서 행동은 더욱 적극적으로 변합니다.
「내 백성이 재난을 당하는 날에 그들의 성문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들이 재난을 당하는 날에 너까지 그 불행을 구경하지 마라. 그들이 재난을 당하는 날에 그들의 재물에 손대지 마라.」오바댜 1:13 · 두루새김
「도망치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갈림길을 지키지 마라.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날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적에게 넘겨주지 마라.」오바댜 1:14 · 두루새김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망칠 길을 찾습니다. 이미 자기 집과 재산을 잃은 사람들이 목숨만이라도 건지려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에돔은 멀찍이 서서 보고만 있었습니다. 14절에서는 갈림길을 지킵니다. 원문에서는 두 장면 모두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주지만, 그 의미는 더욱 무거워집니다. 처음에는 고통받는 형제를 외면했고, 끝에서는 그 형제가 마지막으로 도망칠 길까지 막습니다.
눈으로 구경하고, 마음으로 기뻐하고, 입으로 자랑하고, 손으로 약탈하고, 발로 도망치는 사람들의 길을 막습니다.
형제에 대한 폭력은 하나의 행동이 아니라 이런 선택들이 이어지면서 완성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유다의 편을 드시는 이유를 단순히 혈통 때문에 무조건 편드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유다는 자기 죄 때문에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심판받고 있다는 사실이 에돔의 잔혹함을 정당화하지는 못합니다.
오바댜는 유다의 무너짐을 이용한 에돔의 죄를 묻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정의는 승리한 쪽의 행동도 판단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587/586년경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무너뜨린 사건과 연결하는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열왕기하 25장에 기록된 사건과 상황이 잘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바댜는 침략자의 이름이나 왕의 연대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묘사만으로 그 사건의 정확한 연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당한 다른 침략과 연결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습니다. 12–14절의 금지 명령은 이미 벌어진 일을 돌아보며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두루새김처럼 「하지 마라」라는 금지의 형태를 살리면, 예언자가 그 끔찍한 행동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멈추라고 명령하는 듯한 효과가 나타납니다.
형제의 날에서 모든 민족의 날로
15절에서 오바댜의 시야가 갑자기 넓어집니다.
「모든 민족에게 닥칠 여호와야훼의 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네가 남에게 한 일을 너도 당할 것이다. 네가 한 일의 대가가 네 머리 위로 되돌아올 것이다.」오바댜 1:15 · 두루새김
지금까지 반복된 것은 유다의 불행한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야훼의 날」이 등장합니다.
에돔은 형제의 날을 이용했습니다. 형제가 약해진 틈에 자신의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역사의 마지막 판단은 아니었습니다. 에돔의 행동을 판단할 또 다른 날이 다가옵니다.
여호와야훼의 날은 에돔에게만 닥치지 않습니다. 「모든 민족」에게 닥칩니다. 이것은 예언의 초점이 단순한 민족적 보복을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에돔은 형제의 고난을 이용해 그를 약탈했습니다. 이제는 에돔 자신이 약탈당합니다. 형제의 도망치는 사람들을 막아섰던 에돔은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형제의 재난을 기뻐했던 에돔도 재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16절에서는 그 심판이 마시는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너희가 내 거룩한 산에서 마셨듯이, 모든 민족도 끊임없이 마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시고 삼키다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될 것이다.」오바댜 1:16 · 두루새김
민족들은 자신들의 힘과 승리가 영원할 것처럼 행동하지만, 결국 자기들의 행동에 대한 판단을 피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민족이 심판받는 날에, 이미 무너진 시온에는 무엇이 남을까요?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너희」가 누구인지 본문은 분명히 밝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에돔을 향해 주로 「너」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너희」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읽기는 에돔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축하하며 거룩한 산에서 마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경우 다른 민족들이 마시는 것은 에돔이 경험하게 될 심판의 잔이 됩니다. 다른 읽기는 「너희」를 재난을 당한 유다 공동체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먼저 고난의 잔을 마셨듯이 다른 민족들도 심판의 잔을 마신다는 뜻이 됩니다. 히브리어에서 마셨다는 뜻의 동사는 무엇을 마셨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행동을 승리의 잔치로 볼지, 재난의 잔을 마시는 것으로 볼지는 문맥을 통해 판단해야 합니다. 두 읽기 모두 문맥상 근거가 있어 한쪽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예레미야 25:15–29에서는 여러 민족이 여호와야훼의 진노의 잔을 마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도망자의 길이 막혔던 시온에 다시 피할 곳이 생기다
그러나 시온 산에는 피신해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산은 거룩한 곳이 되고, 야곱의 자손은 자기들의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오바댜 1:17 · 두루새김
14절에서 에돔은 유다의 도망치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갈림길을 지켰습니다. 그들이 살아남을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시온 산에 「피신해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에돔이 없애려고 했던 바로 그런 사람들이 시온에 다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가 심판 이후에도 자기 백성에게 피할 곳을 마련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시온은 침략자들이 들어와 재산을 나누던 장소였습니다. 이제 그곳이 다시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본문은 또한 야곱의 자손이 「자기들의 땅」을 차지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들이 빼앗겼던 것은 단순히 재물만이 아니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과 그곳에서 이루어 온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러나 18절에서는 다시 매우 엄중한 심판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야곱의 자손은 불이 되고, 요셉의 자손은 불꽃이 되며, 에서의 자손은 지푸라기가 될 것입니다. 야곱과 요셉의 자손이 에서의 자손을 불태워 없애서, 에서의 자손 가운데는 살아남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오바댜 1:18 · 두루새김
불과 지푸라기의 비유는 힘의 차이를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불 앞의 지푸라기는 저항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는 에돔이 안전한 바위산에 사는 강한 민족으로 묘사되었지만, 이제는 쉽게 타 버리는 지푸라기로 그려집니다.
14절에서 에돔은 유다의 「살아남은 사람들」을 넘겨주었습니다. 18절에서는 에서의 자손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선언됩니다.
에돔이 유다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생존이 에돔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심판의 대칭입니다.
이 말은 에서의 자손이 완전히 패배한다고 선언하는 강한 예언적 표현입니다. 그것을 에돔 혈통을 가진 모든 개인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말로 확대하거나, 후대의 어떤 민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18절은 마지막에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못 박습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복수를 선언하는 장면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가 심판을 확정하시는 말씀입니다. 심판을 실행하는 도구로 야곱과 요셉의 자손이 등장하지만 그 판단의 근원은 여호와야훼에게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에서 「도망치는 사람들」로 옮긴 말은 펠리타브(פָּלִיט)이고, 17절에서 「피신해 살아남은 사람들」로 옮긴 말은 펠레타(פְּלֵיטָה)로, 모두 피하다, 벗어나다라는 뜻의 같은 어근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며, 요셉의 자손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름으로도 사용됩니다(에스겔 37:16, 19 참조).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과 요셉의 자손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흩어지고 갈라졌던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넓은 전망을 보여 줍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다시 땅을 차지하다
18절까지의 회복이 생존과 심판의 문제였다면, 19–20절은 그 회복을 구체적인 지역과 땅의 이름으로 펼쳐 보입니다.
네게브 사람들은 에서의 산을, 낮은 지대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의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들은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아의 들도 차지하고, 베냐민 자손은 길르앗을 차지할 것입니다.오바댜 1:19 · 두루새김
네게브는 유다 남쪽의 지역이고, 낮은 지대는 유다의 서쪽에 펼쳐진 언덕 지대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땅은 서쪽 해안 평야와 관련되며, 에브라임과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주요 지역이었습니다. 길르앗은 요단 동쪽의 땅입니다.
남쪽과 서쪽, 북쪽과 요단 동쪽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 하나를 회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이 잃었던 땅 전체를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유다의 멸망보다 앞서 아시리아에 의해 무너졌고, 그 주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습니다(열왕기하 17:5–6). 따라서 오바댜가 그 지역을 함께 언급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재난만을 되돌리는 것보다 넓은 회복을 내다보는 표현입니다.
20절에서는 시야가 한 번 더 넓어집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이 요새에 속한 포로들은 사르밧까지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이 포로들과 스바랏에 있는 예루살렘의 포로들이 함께 네게브의 성읍들을 차지할 것입니다.오바댜 1:20 · 두루새김
앞에서 유다는 쫓겨나고, 재산을 빼앗기고, 도망치는 사람들까지 붙잡히는 백성이었습니다. 이제는 흩어진 포로들이 땅을 다시 차지하는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땅의 이름을 길게 나열한 것은 단순한 영토 확장 목록이 아닙니다.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다시 살 곳을 얻는 장면입니다.
오바댜가 그리는 회복은 막연한 위로가 아니라, 쫓겨난 사람들이 돌아와 자기 삶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자리를 얻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은 그러한 회복이 언제, 어떤 정치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지 자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예언이 강조하는 것은 구체적인 전쟁 일정이 아니라 무너진 삶의 질서가 뒤집힌다는 약속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의 「이스라엘 자손의 이 요새(חֵיל)에 속한 포로들」에서 「이 요새」로 옮긴 원문의 말은 요새를 뜻하는 것으로도, 무리나 군대를 뜻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원문에서는 「가나안 사람들」을 포로들이 있는 곳과 연결할지, 그들이 차지할 땅과 연결할지에 따라서도 문장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두루새김은 포로들이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옮겨 그들이 있는 곳으로 읽었습니다. 스바랏의 정확한 위치 역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포로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큰 흐름은 분명하지만, 각 집단의 위치와 차지할 땅을 하나의 지도로 정확하게 그려 낼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누구의 왕권인가
백성을 구할 이들이 시온 산에 올라 에서의 산을 다스릴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왕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오바댜 1:21 · 두루새김
오바댜의 마지막 관심은 에돔보다 강한 이스라엘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 위에 여호와야훼의 다스리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두 산의 운명을 가르는 것은 지형의 높이가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심판과 회복의 말씀입니다. 형제의 고난을 이용하는 자에게는 책임을 물으시고, 살아남을 길마저 막힌 사람들에게는 다시 피할 곳을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백성을 구할 이들」은 여러 사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본문은 우선 여호와야훼의 구원을 실행하는 사람들의 등장을 말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이 정확히 어떤 인물들이며 어떤 방식으로 에서의 산을 다스리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바위틈에 높이 자리 잡은 에돔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자신을 끌어내리지 못하리라는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 목소리가 사라졌습니다.
대신 한때 짓밟혔던 시온 산에 피신해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고, 흩어진 사람들이 자기 삶의 터전을 다시 차지하며, 백성을 구할 이들이 그 산에 올라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들리는 말은 어느 나라의 승리 선언도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왕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