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인사와 감사
사슬에 매인 사람의 자유
빌립보서 1장을 읽으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미래를 확신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괴롭히려는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도 기뻐합니다.
바울이 현실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는 누군가 자기에게 괴로움을 더하려 한다는 것도 알고, 죽을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상황을 평가하는 기준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그 차이는 12절에서 처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바울은 「나에게 일어난 일이 오히려 복음을 더 널리 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일로 복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이 계획대로 진행되는가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님께서 드러나시는가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울 개인의 특별한 신앙으로만 이해하면 이 장의 절반을 놓칩니다. 그는 자신의 사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어느 순간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바울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일 뿐 아니라, 바울과 빌립보 사람들이 자기 삶을 이해하는 기준입니다.
이 장은 세 부분으로 전개됩니다. 1:1–11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빌립보 사람들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확신하며, 그들의 사랑이 분별하는 힘과 함께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1:12–26에서는 자기가 갇힌 일이 복음을 막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자신의 삶과 죽음까지 복음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1:27–30에서는 빌립보 사람들이 복음에 걸맞게 살고, 한마음으로 서 있으며, 고난 앞에서 물러서지 않기를 요청합니다.
여기에 단어 하나가 되풀이됩니다. 12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더 널리 전하는 데」 도움이 된 일을, 25절에서는 빌립보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 자라며」 기뻐하도록 돕는 일을 말합니다. 두루새김에서는 서로 다른 표현으로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두 곳에 같은 그리스어 명사 프로코페(προκοπή), 곧 전진·진보가 쓰였습니다.
처음에는 복음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다음에는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복음이 나아간다는 것은 복음을 듣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 복음에 맞게 성장하는 것도 복음이 나아가는 일에 속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마지막의 권면은 갑자기 덧붙은 교훈이 아니라, 바울이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한 뒤 그 복음이 빌립보 사람들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는지 보여 주는 자연스러운 결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노예가 모든 성도에게 쓰는 편지
편지는 자신을 소개하는 한 단어에서부터 특별한 방향을 잡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인 바울과 디모데가 이 편지를 씁니다. 빌립보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 여러분과, 교회를 돌보는 지도자들과 섬기는 일꾼들에게 보냅니다.빌립보서 1:1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소개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라고 소개합니다. 다른 편지들에서 사도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는 경우와 비교하면 눈에 띄는 선택입니다. 물론 「노예」는 바울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표현이지, 로마 사회의 노예제가 정당하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예수님께 속한 사람으로 제시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는 주인의 권한 아래 놓여 자기 삶을 온전히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매인 관계의 언어로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갈 자유를 보장받지 못했지만, 자신의 삶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속했다는 사실이 자신의 앞날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았습니다.
바울은 먼저 「모든 성도 여러분」을 말하고, 그다음에 「교회를 돌보는 지도자들과 섬기는 일꾼들」을 덧붙입니다. 지도자들을 따로 부르지만, 그들이 성도들보다 앞에 놓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몇몇 지도자에게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청하지 않고, 공동체 전체가 복음에 걸맞게 살아가기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빌립보는 그들이 실제로 사는 도시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은 그들의 새로운 소속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빌립보에 살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를 더 근본적으로 정해 주는 관계는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소속은 27절의 시민 생활에 관한 권면에서 다시 중요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인사말만으로 당시 교회 조직의 구체적인 모습을 모두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특히 「교회를 돌보는 지도자들」에 해당하는 원문의 직분을 후대의 단일 주교직과 곧바로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한편 바울이 노예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한 일은 다음 장의 예수님 찬가와 이어집니다. 빌립보서 2:6–11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노예의 모습을 취하시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자기의 명예보다 예수님께서 전해지시는 일을, 자신의 생존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겸손한 사람이 되라는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그가 따르는 예수님께서 어떤 길을 걸으셨는가에 근거한 삶의 방향입니다.
함께 몫을 나눈다는 것
바울의 감사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기쁜 소식인 복음을 위해 함께 힘써 왔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1:5 · 두루새김
「함께 힘써 왔기」에 쓰인 원어(κοινωνία)는 참여·교제·공동으로 나눔을 뜻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교제」라고 하면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떠올리기 쉽지만,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단순한 친목보다 훨씬 구체적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이 하는 일에 마음으로 동의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일에 참여했습니다.
그 참여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편지 뒷부분에서 확인됩니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빌립보 사람들은 돈과 물품으로 그를 도왔고, 어려울 때 필요한 것을 보내 주었습니다(빌 4:10–18). 그들은 바울의 선교를 멀리서 구경하는 후원자가 아니라,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몫을 감당하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관계의 시작은 사도행전 16장에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나고, 감옥에 갇히고, 간수의 가족이 믿음을 갖게 되는 일들을 겪습니다(행 16:11–40). 그곳에서 복음은 처음부터 고난과 따뜻한 맞이함이 함께하는 가운데 전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한 일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빌립보서 1:6 · 두루새김
여기서 「선한 일」에는 두 강조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과 그에 따른 삶의 변화입니다. 다른 하나는 5절에서 감사한 「복음을 위해 함께 힘써 온」 일, 곧 그 구원이 빌립보 공동체 안에서 복음을 위한 참여와 섬김으로 드러나는 일입니다. 두 의미가 서로를 밀어내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개인 한 사람의 마음속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향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의 꾸준함을 칭찬하면서도, 그 가장 깊은 근거를 그들의 의지나 충성심에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완성하십니다.
이 확신은 사람의 행동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하는 선한 일이 무엇에 의지하고 있는지를 밝힙니다. 또한 완성의 시점은 바울이 살아서 돌아오는 날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날」입니다. 바울이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누구의 마음으로 사랑하는가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깊은 사랑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하나님께서 증언해 주십니다.빌립보서 1:8 · 두루새김
「깊은 사랑」(σπλάγχνον)으로 옮긴 원문의 표현은 고대 사람들이 깊은 감정과 애정을 몸의 내장에 연결해 표현하던 방식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단순히 자기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깊은 사랑으로」 그리워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바울에게 전해졌고, 이제 그 사랑이 빌립보 사람들을 향한 그의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이 갇혀 있는 동안에도 빌립보 사람들은 그와 함께 은혜를 나누는 사람들이었습니다(1:7). 그들은 바울의 곁에 직접 서 있을 수 없었지만, 그의 고난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거리는 공동체를 갈라놓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깊은 사랑에 만족한 채 감사의 말을 마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사랑이 더욱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은 어떻게 더 나은 것을 알아보는가
바울의 기도는 예상과 조금 다릅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깊은 지식과 온갖 것을 분별하는 힘과 함께 더욱더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빌립보서 1:9 · 두루새김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무엇이 상대를 위한 일인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의 양이 많아지는 것뿐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 올바르게 정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무엇이 더 나은지 가려내고, 순수하고 흠 없이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빌립보서 1:10 · 두루새김
「무엇이 더 나은지」로 옮긴 그리스어 타 디아페론타(διαφέρω)는 「더 뛰어난 것들」을 뜻할 수도 있고, 「서로 다른 것들」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로 읽으면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는 판단이, 후자로 읽으면 서로 구별해야 할 것들을 알아보는 능력이 강조됩니다. 두 읽기는 사랑이 분별없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편지의 시작에서 이런 기도를 할까요? 15–17절에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전하면서도 시기하고 다투는 마음, 자기 이익을 앞세우는 마음으로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려 합니다. 예수님을 전한다는 말만으로 모든 행동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바울 자신은 그들의 잘못된 마음을 분별하면서도, 복음이 전해진다는 사실까지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 기도는 뒤에 나오는 실제 상황을 이해하는 준비가 됩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빌립보서 1:11 · 두루새김
그 열매는 사람의 도덕적 노력만으로 맺히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옵니다. 열매의 마지막 목적도 그 열매를 맺은 사람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로 화제를 옮깁니다. 앞에서는 빌립보 사람들이 무엇을 분별해야 하는지 기도했다면, 이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떻게 분별하고 있는지 보여 줍니다.
사슬이 복음을 막지 못하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에게 일어난 일이 오히려 복음을 더 널리 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랍니다.빌립보서 1:12 · 두루새김
복음을 전하던 사람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은 이전처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일이 복음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바울은 두 가지 결과를 제시합니다. 첫째, 자신이 갇힌 이유가 알려졌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갇혔다는 사실이 근위대 전체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13절). 둘째, 다른 신자들이 더 용감해졌습니다.
또 믿음의 형제자매들 가운데 대부분은 내가 갇힌 일로 주님 안에서 확신을 얻어, 두려움 없이 말씀을 전하는 데 더 용감하게 나서고 있습니다.빌립보서 1:14 · 두루새김
바울을 침묵시키는 것처럼 보였던 사슬이 오히려 그가 왜 갇혀 있는지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바울을 두렵게 만들어야 할 투옥이 다른 신자들에게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감옥이 좋은 곳이라거나, 고난 자체가 저절로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난 변화를 보고하고 있습니다.
사슬은 바울의 움직임을 제한했지만, 복음의 움직임까지 제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단락은 더 복잡한 상황을 보여 줍니다. 바울이 갇힌 일로 용기를 얻은 사람들 모두가 좋은 뜻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근위대」는 바울이 편지를 쓴 장소를 짐작하는 단서입니다. 이 원어는 로마 황제의 근위대를 가리킬 수도 있고, 행정관의 관저나 통치자의 본부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바울이 로마에서 갇혀 있을 때 빌립보서를 썼다고 보았는데, 이 견해는 황제의 근위대와 4:22의 황제의 집안을 자연스럽게 연결합니다. 에베소로 보는 견해는 빌립보와 바울 사이에 여러 차례 소식과 사람이 오간 사정을 두 곳의 거리로 설명하기 쉽고, 가이사랴로 보는 견해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투옥과 연결됩니다. 이 단어만으로 로마라고 확정할 수 없어서, 갇혀 있던 장소를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에서 확실한 것은 바울이 예수님 때문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그 소식이 다른 신자들의 용감한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 때문에 기뻐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고 다투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전하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뜻으로 전합니다.빌립보서 1:15 · 두루새김
같은 예수님을 전하지만 그 일을 하는 마음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는 것을 알고 사랑으로 전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앞세우며,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그에게 괴로움을 더하려 합니다.
왜 그런 적대감이 생겼는지 본문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을 둘러싼 경쟁이나 영향력 갈등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두 집단의 마음을 구별하며, 상대방의 악의를 모른 척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겉치레로 하든 진심으로 하든,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으니 나는 이 일로 기뻐합니다.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빌립보서 1:18 · 두루새김
이 말을 바울이 잘못된 가르침까지 허용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1:6–9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행위를 매우 엄격하게 비판합니다. 하지만 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이 비판하는 것은 예수님에 관해 전하는 내용이 아니라 전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마음을 옳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가치를 그들의 마음과 구별하고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악의를 품고 있으면 그 사람이 하는 일 전체를 부정하고 싶어지고, 좋은 결과가 나타나면 잘못된 방법까지 정당화하기 쉽습니다.
바울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악한 마음은 악한 마음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전해지시는 일은 여전히 기쁜 일로 인정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의 사랑에 지식과 분별하는 힘이 더해지기를 기도한 이유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에게 복음이 널리 전해지는 일은 개인적인 명예가 손상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목숨까지 걸린 상황에서도 같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다음 단락에서 바울은 바로 그 질문을 다룹니다.
바울이 기다리는 구원은 무엇인가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주시는 도움으로 이 일이 나의 구원으로 이어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1:19 · 두루새김
「이 일이 나의 구원으로 이어질」에 해당하는 원문은 그리스어 구약성경인 칠십인역 욥기 13:16과 문구가 일치합니다. 욥은 고통 가운데 자신이 악하다는 친구들의 판단에 맞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사정을 아뢰겠다고 결심합니다. 욥이 기대한 구원은 고통이 곧 끝나는 일만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말하고 있음이 드러나는 문제와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구원은 풀려나는 일일까요, 마지막에 이루어질 구원일까요? 둘 다 근거가 있습니다. 바울은 뒤에서 살아남아 빌립보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으로 기대하므로(1:25–26), 재판을 통해 풀려나는 일이 포함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그는 살든 죽든 예수님께서 높임을 받으시기를 바란다고 말하므로, 하나님 앞에서 받는 최종적인 인정과 구원의 완성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 가능성들을 하나로 좁히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이 기대의 중심을 살아남는 데 두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고 바라는 대로, 나는 어떤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두려움 없이 당당한 가운데, 언제나처럼 지금도 내가 살든 죽든 내 몸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빌립보서 1:20 · 두루새김
바울은 두 가능성 모두에 적용되는 하나의 목표를 제시합니다. 자기 몸을 통해 예수님께서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내 몸을 통해」라는 말에서 바울은 막연한 영적 승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슬에 묶이고, 고통을 겪고,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자신의 몸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벗어나야만 예수님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동시에 죽음 자체를 영광스럽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의 기도와 예수님의 영께서 주시는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다른 신자들의 기도와 성령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에 의지합니다.
바울의 당당함은 혼자 강해지는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백성에게 의지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당당함입니다.
조금 더 깊이
욥기와 일치하는 이 문구는 인용임을 밝히는 표시 없이 쓰였으므로, 욥기의 말을 의식적으로 담아낸 강한 암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주시는 도움」으로 옮긴 원문은 영이 공급하는 도움을 뜻할 수도 있고, 영 자체가 넉넉히 공급되는 것을 뜻할 수도 있으며, 두 해석 모두 문법적으로 가능합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자신의 당당함을 자기 힘만으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
21절은 바울의 고백을 가장 짧고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도 이득이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1:21 · 두루새김
「죽는 것도 이득」만 강조하면 바울이 현재의 삶을 가치 없게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살아 있다는 것의 가치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 몸으로 계속 살아간다면, 내가 하는 일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빌립보서 1:22 · 두루새김
바울에게 삶은 죽음을 기다리며 견디는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사람들을 섬기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바울의 삶과 그 목적을 정하시고, 무엇을 열매라고 부를 것인지까지 결정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죽음 역시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됩니다.
나는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마음이 갈립니다.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 그것이 훨씬 더 좋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1:23 · 두루새김
바울은 죽음을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방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훨씬 더 좋은 이유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로 소개한 사람에게 삶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고, 죽음도 예수님과의 관계 밖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방향을 바꿉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서는 내가 이 몸으로 계속 살아 있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빌립보서 1:24 · 두루새김
바울은 개인적인 소망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이 갈등하는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단순한 자기희생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바울의 문장이 실제로 흔들린다
22절의 원문에서 바울은 몸으로 계속 사는 것이 열매 맺는 일이라는 조건을 제시하다가, 결론을 매끄럽게 맺지 않고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문장 구조 자체가 중간에 끊기는 듯해서, 두루새김은 이를 두 문장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그는 정리된 선택지를 차례로 설명하지 않고, 실제로 두 방향 사이에서 마음이 끌리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떠나서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필요합니다.
이 두 문장은 서로를 취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남아 빌립보 사람들의 믿음과 기쁨을 돕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힙니다.
나는 이것을 확신하기에, 내가 살아남아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무르게 될 것을 압니다. 여러분이 믿음 안에서 자라며 기뻐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빌립보서 1:25 · 두루새김
이 확신이 풀려날 것을 보장하는 특별한 계시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앞뒤 흐름에서는 빌립보 사람들에게 계속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강한 기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생존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살아남기를 기대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 자라며 기뻐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12절의 복음이 널리 전해지는 일과 25절의 믿음 안에서 자라는 일이 만납니다. 원문에서는 두 곳 모두 앞으로 나아간다는 같은 단어입니다. 바울의 삶과 죽음 문제는 이렇게 한 공동체의 성장 문제와 이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빌립보 사람들에게 직접 말하기 시작합니다.
복음에 걸맞은 시민으로 살아가십시오
27절은 빌립보서 1장의 전환점입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걸맞은 시민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래서 내가 여러분을 찾아가 만나든, 떨어져서 소식을 듣든, 여러분이 한 영 안에서 굳게 서서 한마음으로 복음의 믿음을 위해 함께 싸운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빌립보서 1:27 · 두루새김
바울은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를 밝히고는 곧바로 「무엇보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돌아가든 돌아가지 못하든,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 시민이라는 말인가
「시민으로 살아가십시오」(πολιτεύομαι)로 옮긴 동사는 도시나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시민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따라 권리와 의무, 자부심을 지니고 사는 익숙한 개념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익숙한 시민 생활의 언어를 쓰면서 기준을 바꿉니다. 그가 로마 시민권을 지닌 이들에게 그것을 부정하라고 요구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최종적으로 정해 주는 기준이 로마의 명예나 관습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편지 첫머리의 두 소속, 곧 빌립보에 있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여기서 다시 살아납니다.
복음에 걸맞은 시민 생활에는 두 움직임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굳게 서서」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경기에 참여하듯 「함께 싸우는」 모습입니다. 공동체는 복음에 대한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 있으면서, 동시에 복음을 위해 적극적으로 함께 힘써야 합니다. 바울은 믿음의 삶을 개인의 고독한 경주가 아니라 한마음으로 함께 싸우는 공동체의 활동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이 명령은 바울이 찾아가 만나든 떨어져서 소식을 듣든 똑같이 주어집니다. 바울의 권위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따라야 할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바울 개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의 사슬을 풀어 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갇혀 있는 동안에도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복음이 나아가는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선물이라는 역설
또 여러분을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어떤 일에도 겁먹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게 해 주십시오. 이런 여러분의 모습은 그들에게는 멸망하리라는 증거이고, 여러분에게는 구원받으리라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빌립보서 1:28 · 두루새김
반대하는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적대감, 사회적인 압박, 로마 도시의 공적인 가치관과의 충돌 등을 생각할 수 있지만, 본문은 어느 하나를 확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실제로 두려움을 느낄 만한 반대에 부딪혀 있다는 점은 드러납니다.
바울은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기기 위한 공격적인 전략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겁먹지 않고 함께 서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반드시 상대방에게 불행이 닥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끝까지 복음에 서 있는 공동체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과 심판의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가장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통을 겪는 것까지도 은혜로 받았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1:29 · 두루새김
「은혜로 받았기」(χαρίζομαι)에 쓰인 동사는 은혜롭게 베풀다, 값없이 주다라는 뜻으로, 편지 첫머리의 「은혜」와 같은 낱말 계열에 속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일뿐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고통을 겪는 일도 은혜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고난은 아프고 두려운 일인데, 왜 이것을 선물로 이야기할까요?
바울은 감옥에서도 자기 몸을 통해 예수님께서 높임을 받으실 수 있다고 믿고, 예수님 때문에 겪는 고난이 복음이 널리 전해지는 일로 이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제 빌립보 사람들도 같은 싸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선물로 이야기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즐겁거나 선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며 겪는 고난도 예수님과의 관계 밖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위해 고통을 겪는 것과, 사람이 겪는 모든 고통을 무조건 예수님을 위한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바울은 전자를 이야기합니다. 모든 질병과 사고, 불의와 학대를 곧바로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선물로 해석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싸움이 이제 그들의 싸움이 된다
여러분도 나와 같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전에 내게서 보았고, 지금도 내가 하고 있다고 듣는 바로 그 싸움입니다.빌립보서 1:30 · 두루새김
그들이 「전에 내게서 보았」던 싸움에는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빌립보에서의 투옥과 박해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이 실제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일을 겪은 도시의 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직접 보았습니다. 지금은 편지와 소식을 통해 듣습니다.
장소와 시간이 달라졌을 뿐 싸움은 같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로서 홀로 고난을 감당하고, 빌립보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받는 관객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같은 싸움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처음에 바울은 그들이 복음을 위해 함께 힘써 왔다고 감사했습니다(1:5). 이제 마지막에서 그들이 자신과 같은 싸움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1:30). 복음에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복음이 전해지는 기쁨뿐 아니라, 복음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에도 함께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고난을 직접 일으키신다는 뜻과,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감당할 기회가 은혜로 주어졌다는 뜻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도 신학적으로 논의됩니다. 원문의 문법에서는 믿는 일과 고난받는 일에 모두 은혜롭게 주어졌다는 동사가 걸리고, 두루새김도 둘을 함께 「은혜로 받았기 때문입니다」라고 옮깁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난의 직접적인 원인에 관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싸움을 지닌 사람들
바울은 갇힌 일을 갇힌 일이라고 말하고, 악의를 악의라고 판단하며, 죽음을 실제 가능성으로 인정합니다. 모든 실패가 사실은 성공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자기 상황을 이해하는 기준을 예수님께서 정해 주신다고 보았고, 같은 복음을 빌립보 사람들의 삶의 기준으로 내놓았습니다. 그 모든 일의 근거는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신 일에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복음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의 마지막에는 두 장소가 놓여 있습니다. 한쪽에는 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이, 다른 한쪽에는 빌립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바울의 사슬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미래도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을 반대하는 이들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삶을 두려움으로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이 「한 영 안에서 굳게 서서」 한마음으로 함께 싸우기를 바랍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과 빌립보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떨어진 자리에서 같은 복음을 위해 서 있습니다.
사슬은 한 사람의 몸을 묶고 있지만, 예수님 안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