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00편
이 장의 자리 · 90–106편 · 넷째 권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으며,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람은 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까?
좋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까? 바라던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까? 삶이 평안하고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까?
시편 100편은 감사하라고 여러 번 요청하지만, 정작 감사의 이유로 우리의 형편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신 두 가지 사실을 말합니다. 3절의 「그분께서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습니다」와, 시의 마지막 5절의 「여호와야훼께서는 선하시고,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은 영원하며」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한 고백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관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으며, 그분은 선하십니다.
시편 100편의 감사는 이 두 사실 사이에서 흘러나옵니다.
이 시는 다섯 절에 불과하지만 매우 세심하게 짜여 있습니다. 1~2절에서는 온 땅을 향해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초청합니다. 3절에서는 그 이유를 밝힙니다. 4절에서는 다시 감사하며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초청하고, 5절에서는 더 근본적인 이유를 밝힙니다.
두 번의 초청과 두 번의 근거가 서로 맞물리는 구조입니다. 특히 앞부분에서 중요한 말은 「아십시오」이고, 뒷부분에서 중요한 말은 「감사하고」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감사의 바탕이 됩니다.
감사는 성소 안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감사를 위한 시입니다. 온 땅아, 여호와야훼께 함성을 올리라.시편 100:1 · 두루새김
시편 100편에는 드물게도 이 노래의 성격을 밝히는 짧은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감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다(תּוֹדָה)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나 찬양을 가리킬 수 있고, 감사 제물을 뜻하기도 합니다. 시편 자체는 감사의 대상과 이유를 더 넓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첫 명령에서 드러납니다. 감사를 위한 노래인데,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만 부르지 않습니다.
온 땅을 부릅니다.
성소에서 드리는 감사의 말이 성소 밖의 세계 전체를 향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분명 하나님의 성소를 염두에 두고 있지만, 그분을 찬양하도록 초청받는 대상은 성소 안에 모인 사람들보다 훨씬 넓습니다.
기쁨으로 여호와야훼를 섬기고 노래하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라.시편 100:2 · 두루새김
「섬겨라」(עָבַד)는 일하거나 섬긴다는 뜻을 가진 동사의 명령형입니다. 사람이 주인을 섬기는 일에도 사용되고,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에도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출애굽기의 이야기와 함께 읽으면 특별한 울림이 생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파라오를 위해 고된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1장 13~14절은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가혹하게 부리고 그들의 삶을 고되게 만들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자신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뒤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섬김의 말이 전혀 다른 관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파라오를 섬기는 일은 강요된 고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구원받은 백성이 자기들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됩니다. 시편 100편은 이 대조를 직접 설명하지 않지만, 그 역사적 배경을 기억하면 「기쁘게 여호와야훼를 섬겨라」는 말이 더욱 풍성하게 들립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은 아무도 섬기지 않는 자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분을 섬기게 되었는가에서 나옵니다.
「섬겨라」라는 말에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충실하게 살아가는 태도까지 포함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시편에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환호하고 찬양하는 예배의 행동이 특별히 강조됩니다. 시편 전체에는 눈물과 탄식, 억울함과 두려움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노래들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쁘게 하나님을 섬기라는 시편 100편의 초청을, 믿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명령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왜 기쁘게 섬겨야 합니까? 하나님이 강한 분이시기 때문입니까? 그분의 명령을 어기면 벌을 받기 때문입니까? 시인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을 제대로 알라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7장 12~15절에서는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필요한 제물과 음식을 정합니다. 시편 116편 17절에서도 감사 제물을 드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겠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따라서 시편 100편의 표제를 감사 제사와 관련된 노래로 이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4절에서 감사하며 하나님의 문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이 등장하기 때문에, 실제 성소 예배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표제만으로 시편 100편이 반드시 특정한 감사 제사 의식에서만 사용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습니다」
깨달으라, 여호와야훼가 하나님이심을.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풀밭의 양 떼.시편 100:3 · 두루새김
이 절은 시편 100편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앞에서는 온 땅이 환호하며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초청했습니다. 이제 시인은 그 초청이 무엇에 근거하는지를 밝힙니다. 여기서 「아십시오」는 단순히 어떤 정보를 외우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인정하라는 요청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지으셨고」는 두 가지 의미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의 시작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시편의 문맥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의미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뒤에서 시인은 「그분의 백성」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으셨다는 표현은 인간의 몸과 생명을 만드신 일만을 가리키지 않고,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세우신 일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시편 100편의 「그분께서 우리를 지으셨고」라는 말은 두 의미를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창조주이시며,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이루신 분이십니다. 다만 이 절에서 시인이 두 의미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의도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 읽기 모두 사람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누구인지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습니다」인가,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인가
이 절에는 본문이 전해져 온 과정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의 기록된 자음은 벨로, 「그리고 아니다」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를 따르면 문장의 뜻은 「그가 우리를 만들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입니다. 칠십인역도 이 부정형의 의미를 따릅니다(칠십인역 시편 99:3).
그러나 마소라 본문에 전해진 읽기 전통은 벨로, 「그리고 그분의 것」이라는 읽기를 따릅니다. 이에 따르면 두루새김처럼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두 읽기 사이에는 실제 의미의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읽기는 인간이 자기 존재의 시작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두 번째 읽기는 인간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어느 읽기가 더 이른 본문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문맥에서는 두 번째 읽기가 특히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분께 속해 있습니다」 「그분의 백성」 「그분께서 기르시는 양 떼」, 세 표현이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두루새김이 읽기 전통을 따라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습니다」라고 옮긴 것은 문맥상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시인은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의로운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소속을 단순한 소유 관계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다음에 등장하는 이미지가 소속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의 백성이자 그의 풀밭에 있는 양 떼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설명하면서 양 떼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양 떼는 자신이 살아갈 풀밭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충분히 마련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지지도 않습니다. 양 떼에게는 풀밭이 필요하고, 그 풀밭으로 인도하며 돌보는 목자가 필요합니다.
원문에서는 하나님의 풀밭에 있는 양 떼라는 표현이 쓰였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그분께서 기르시는 양 떼」로 옮겨, 그분이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라는 뜻을 드러냅니다. 시편 100편은 하나님을 직접 목자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은 단지 그분의 권위 아래 놓여 있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그분의 돌봄 아래 있다는 의미도 담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 내거나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고, 그분께 속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가진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온 땅의 초청과 「우리」라는 고백
1절의 대상은 「온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우리」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누구나 하나님께 환호하도록 초청받지만, 시인의 고백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기억합니다.
여기에는 구약 전체에 흐르는 두 가지 시야가 함께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땅의 창조주이십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세우시고 돌보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모든 민족이 이미 이스라엘과 똑같은 언약 관계에 있다는 선언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시편은 그러한 관계를 어떻게 이루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온 땅을 향해 열려 있는 찬양의 초청과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고백을 한 노래 안에 놓습니다.
이 시를 부르는 이들은 자기들이 특별히 소유한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고백하면서, 온 땅이 그분을 찬양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제 시인은 그 하나님께 실제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32장 6절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세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이사야 43장 1절에서도 하나님은 야곱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으로 말씀하십니다. 양 떼의 고백은 시편 95편에도 나옵니다. 시편 95편 6~7절에서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라는 초청에 이어,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풀밭의 백성이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러나 시편 95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곧이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을 굳게 닫지 말라는 경고가 등장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그분의 말씀을 거역했던 역사를 돌아봅니다(시편 95:7~11). 반면 시편 100편에서는 양 떼의 이미지가 감사의 초청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두 시편이 서로 반대되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 95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백성의 책임을 강하게 드러내고, 시편 100편은 그들을 지으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도록 초청합니다. 이 두 시편을 함께 읽으면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이 단순히 보호받는 관계도, 명령에 순종하는 관계도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돌봄을 신뢰하며 그분께 감사하는 관계입니다.
풀밭의 양 떼가 감사하며 성소로 나아가다
감사하며 그분의 문으로, 찬양하며 그분의 뜰로 들어가라. 그분께 감사하고 그 이름을 높이라.시편 100:4 · 두루새김
「문」과 「뜰」은 성소와 관련된 공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배자가 거룩한 장소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2절에서 이미 시작된 움직임입니다. 2절에서는 「기뻐 외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고 했습니다. 4절에서는 그 나아감이 더 구체적인 장면으로 나타납니다.
시인은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네 가지 표현으로 이어 갑니다. 이 반복은 감사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행동임을 보여 줍니다. 원문에서 여기의 감사를 뜻하는 단어는 표제에 등장했던 토다와 같습니다. 시의 맨 처음에 제시된 감사가 이제 실제 예배자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십시오」(בָּרַךְ)에서 「찬양하십시오」로 옮긴 말은 축복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의 명령형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축복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부족한 복을 더해 드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정하고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두루새김은 이 뜻을 따라 「찬양하십시오」로 옮겼습니다.
시편 100편은 감사가 하나님께 들어가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 절에서 이미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속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그분께 속해 있음을 아는 사람의 응답입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께서 기르시는 양 떼로 그려졌습니다. 4절에서는 그 백성이 하나님의 문과 뜰로 들어오는 예배자로 그려집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두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두 이미지를 나란히 읽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하는 관계의 풍성함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돌보시는 양 떼이며, 동시에 그분 앞에 감사하며 나아가는 예배자들입니다.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은 그분의 돌봄을 받는 일이면서,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지막 질문이 생깁니다.
왜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라고 해서, 그분이 반드시 좋은 목자라는 사실까지 저절로 증명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는 사실도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시편은 바로 마지막 절에서 그 대답을 들려줍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여호와야훼는 선하시니, 그 한결같은 사랑은 영원하고 그 진실하심은 대대로 이어지리라.시편 100:5 · 두루새김
이 마지막 절은 시편 전체를 떠받치는 가장 깊은 이유입니다.
그분은 크실 뿐 아니라 선하시다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사실과 선하시다는 사실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매우 강한 존재가 반드시 선한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그가 다른 이들을 잘 돌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온 땅의 왕이시라는 선언만으로는 그분을 기뻐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편 100편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가 그분께 속한다는 사실을 먼저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분이 선하시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 기쁜 소식이 되는 까닭은 그분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은 영원하다
「한결같은 사랑」(חֶסֶד)으로 옮긴 말은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사랑과 호의, 충실함을 표현합니다. 이 단어를 단순히 따뜻한 감정이나 잠깐의 친절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그분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를 충실하게 지키시며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는 행동과 자주 연결됩니다.
따라서 시편 100편의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은 영원하며」라는 선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과 호의를 쉽게 거두어 버리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호의는 변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내일은 관계를 저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영원」이라는 말과 연결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인간의 변덕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진실하심은 대대로 이어진다
「진실하심」(אֱמוּנָה)으로 옮긴 말은 굳건함과 믿을 만함, 충실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은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말씀하신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며,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를 변덕스럽게 다루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영원」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습니다. 「대대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말 그대로 「세대에서 세대로」(דּוֹר)라는 뜻을 담습니다.
한 세대가 태어나고 자랍니다. 세월이 흐르면 그 세대는 떠나가고 다음 세대가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시대를 살며,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실하심은 어느 한 세대의 경험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한 세대의 삶은 끝나지만, 그 세대가 의지했던 하나님의 진실하심은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단지 오래 지속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바뀌어도 그분은 여전히 믿을 만한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시편 100편은 처음에 「온 땅」을 불렀습니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넓은 초청이었습니다. 어느 지역에 사는 사람이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부름받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대대로」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제 초청의 시야가 시간으로도 넓어집니다. 온 땅의 사람들뿐 아니라 이어지는 세대들도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경험하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공간과 시간의 한계 안에 가두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36편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여러 행동을 노래하면서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이 영원하다는 고백을 반복합니다. 그곳에서 한결같은 사랑은 막연한 성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며, 광야에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의 문들로 들어가는 사람들
시편 100편은 다섯 절 내내 한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온 땅을 향한 환호의 초청에서 시작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며, 마침내 감사하며 그분의 문과 뜰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흔히 감사할 조건이 충분히 마련되었을 때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고, 문제가 해결되고, 자신의 삶이 안전해졌을 때 비로소 감사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시편 100편이 제시하는 감사의 근거는 인간의 형편보다 깊은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이 언제나 평탄하기 때문에 선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 자신의 성품이 선하십니다.
그분이 진실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흔들림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할 근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사건의 이유를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100편도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편의 처음에는 온 땅을 향해 환호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환호가 단순히 왕의 위엄 앞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만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시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문으로 나아갑니다. 그들은 감사하며 들어가고, 찬양하며 그분의 뜰로 들어갑니다.
그들의 손에 어떤 제물이 들려 있는지는 시인이 밝히지 않습니다. 그들이 각자 어떤 일을 겪고 이곳에 왔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왜 감사하는지는 분명히 알려 줍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이 영원하고, 그분의 진실하심이 대대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한 세대가 이 문을 지나고, 또 다른 세대가 그 뒤를 따릅니다. 사람들의 삶과 시대는 달라지지만 그 문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찬양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감사도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