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01편

이 장의 자리 · 90–106편 · 넷째 권

하나님의 정의를 노래하는 왕의 집

시편 101편은 찬양으로 시작하지만, 곧 한 사람의 개인적인 생활과 그가 다스리는 공동체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시인은 여호와야훼께 한결같은 사랑과 공정한 판결을 노래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다음에 그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가가 아닙니다. 자신이 무엇을 보지 않을 것이며, 누구를 곁에 두지 않고, 어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것인지에 관한 다짐입니다.

마지막에는 더욱 강경한 선언이 나옵니다. 「아침마다 저는 이 땅의 악한 사람들을 모두 없애겠습니다.」 처음의 노래와 마지막의 선언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어떻게 악한 사람들을 없애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지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누가 이 시를 말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표제는 「다윗의 시입니다」입니다. 본문에서는 말하는 사람이 집안의 사람들을 선택하고, 자신을 섬길 사람을 정하며, 이 땅의 악한 사람들을 심판하고 여호와야훼의 성에서 없애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모든 표현은 개인의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왕이나 통치자의 책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따라서 시편 101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다짐하는 왕의 노래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다윗이라는 표제만으로 다윗이 실제로 어느 시점에 이 말을 했는지, 이 시가 왕의 즉위식에서 사용되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 99편에서 하나님의 왕권과 정의를 노래했다면, 시편 101편은 그 정의가 인간 통치자의 삶에 어떤 요구를 하는지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왕이 하나님께 한결같은 사랑과 공정한 판결을 노래합니다(1절). 이어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자기 집에서 살아갈 것인지 다짐합니다(2~4절). 그다음에는 어떤 사람을 가까이하고 어떤 사람을 거부할 것인지 말합니다(5~7절). 마지막으로 자신이 다스리는 성에서 악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선언합니다(8절).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가 자기 마음과 집안을 지나 공동체를 다스리는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나 이 시는 이상적인 통치의 아름다움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마지막의 강경한 표현은 정의를 실현할 책임과 그 책임을 수행하는 권력의 위험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6101편 본문 읽기 →

왕이 처음 노래하는 것은 자신의 위대함이 아니다

시편 101:1 본문 →

다윗의 시입니다. 한결같은 사랑과 정의를 노래하겠습니다. 여호와야훼, 당신께 찬양을 부르겠습니다.시편 101:1 · 두루새김

원문에서 한결같은 사랑은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사랑과 변함없는 호의를, 공정한 판결은 올바른 판단과 재판, 정의를 가리킵니다. 한결같은 사랑만 말한다면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는 마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반대로 공정한 판결만 말한다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엄격함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둘을 나누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시인이 노래하는 한결같은 사랑과 공정한 판결이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자신이 왕으로서 실천하려는 덕목을 가리키는지 본문은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노래는 여호와야훼를 향합니다. 따라서 한결같은 사랑과 공정한 판결은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시인은 곧바로 자신이 흠 없이 살아가고 악을 멀리하며 의로운 사람들을 가까이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렇게 보면 처음에 노래한 한결같은 사랑과 공정한 판결은 왕 자신이 실천해야 할 통치의 기준으로도 이어집니다.

왕은 하나님께서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이라고 노래하면서, 자신도 그 사랑과 정의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다스리겠다고 다짐합니다.

왕이 자기 힘의 크기나 전쟁에서 얻은 승리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지위에 있는지를 노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자신의 권력이 어떤 기준 아래 있어야 하는지를 고백합니다.

구약에서 왕은 하나님의 정의와 무관하게 자기 뜻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첫 번째 책임은 자기 권력을 무엇보다 높은 것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 권력의 방향을 정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다짐이 진실한지는 어디에서 드러날까요? 시인은 뜻밖에도 왕궁의 공식 재판장이나 백성들이 모인 광장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기 집을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7장 18~20절에서는 왕이 율법을 가까이 두고 읽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특별히 자신의 형제들 위에 마음을 높이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왕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72편 2~4절은 이상적인 왕이 백성들을 의롭게 재판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며 억압하는 사람을 꺾기를 기도합니다. 잠언 20장 28절은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함이 왕을 지키며 사랑으로 왕좌가 굳게 세워진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본문들을 함께 읽으면 왕의 정의가 단순히 처벌의 엄격함으로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제 집 안에서」 — 왕의 온전함이 시험받는 자리

시편 101:2 본문 →

흠 없는 길을 따라 지혜롭게 살겠습니다. 언제 내게 오시겠습니까? 온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을 거닐겠습니다.시편 101:2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흠 없고 온전하다는 뜻의 말이 두 번 나타납니다. 두루새김은 첫 번째를 「흠 없는 길」로, 두 번째를 「온전한 마음」으로 옮겼습니다. 원문의 이 반복은 왕의 행동과 내면을 연결합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흠 없는 길」의 「흠 없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타밈(⁨תָּמִים⁩)입니다. 완전하거나 흠이 없다는 뜻을 가진 말로, 사람의 삶에 사용될 때에는 정직하고 흠잡을 데 없이 살아가는 태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단어가 언제나 단 한 번의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 절대적인 무죄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자신의 삶이 이미 완전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그 길을 따라 지혜롭게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시인은 그저 선한 뜻을 품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분별하며 살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왕에게는 이러한 분별이 특별히 중요합니다.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자신의 감정과 이해관계가 끼어들 수 있고, 자신이 내린 결정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다짐 한가운데서 갑자기 질문합니다.

「언제 제게 오시겠습니까?」

시인은 무엇을 하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하나님께 묻는 한 문장이 끼어듭니다.

히브리어 마타이 타보 엘라이는 자연스럽게 읽으면 누군가에게 언제 자신에게 오실 것인지 묻는 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시인에게 찾아오시기를 바라는 간구로 읽는다면, 왕의 다짐에 중요한 의미가 더해집니다. 그는 자기 의지만으로 흠 없는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오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다른 읽기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로 앞에 등장한 「흠 없는 길」을 이어받아, 그 길이 언제 자신에게 이르게 될 것인지 묻는 표현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히브리어에서 길을 뜻하는 말은 문법적으로 남성 또는 여성으로 사용될 수 있으므로, 문장 구조상 이러한 풀이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 경우 질문은 온전한 삶을 향한 간절한 열망이 됩니다.

앞 절에서 여호와야훼를 직접 부르며 기도하고, 이 절에서도 「오시겠습니까?」라고 묻는 점을 고려하면 두루새김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이 짧은 문장만으로 다른 가능성을 완전히 없앨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 시편의 가장 인상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가 나옵니다. 「저는 제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왜 하필 집 안인가

왕에게는 많은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공개적인 자리가 있습니다. 재판정에서 백성들의 호소를 들을 수 있고, 사람들 앞에서 정의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기록되고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 안은 다릅니다.

이곳에서는 왕의 모습이 외부 사람들에게 모두 드러나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습관과 가까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나타납니다. 물론 이 시의 「집」은 오늘날의 개인적인 주거 공간만을 뜻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왕이 말하는 집이라면 왕궁과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 곧 궁정 전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뒤에서는 왕의 집에 살거나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렇더라도 왕의 의로움은 백성 앞에서 내리는 공식적인 선언만으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그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공간, 가까운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다루는 태도에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정의를 말하는 왕이 자기 집에서는 불의를 행한다면, 그의 통치는 아직 온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한결같은 사랑과 공정한 판결을 노래하는 사람은 자신의 집에서부터 그 노래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집 안에서 온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시인은 먼저 자신이 무엇을 가까이하지 않을 것인지 말합니다.

눈앞에 무엇을 두고, 마음에 무엇을 머물게 할 것인가

시편 101:3–4 본문 →

악한 일을 내 눈앞에 두지 않겠습니다. 빗나간 이들의 짓을 미워합니다. 그런 짓이 내게 달라붙지 못할 것입니다.시편 101:3 · 두루새김

이 절은 한 사람의 삶에 무엇이 들어오는지를 살펴봅니다.

첫 번째 경계는 눈앞입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가치 없거나 악한 일을 자기 앞에 놓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자신의 관심과 판단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지, 무엇을 가까이 두고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한 다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왕의 문맥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왕의 눈앞에는 많은 일이 놓입니다. 누군가는 이익을 약속하며 부당한 일을 제안할 수 있고, 누군가는 왕의 호의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계획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때 왕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자기가 직접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이 아닙니다. 악한 일을 자기 앞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계속 바라보며, 결국 자신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미워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본문은 「바른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행동」을 말합니다. 악한 행동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에 들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사람에게 달라붙는다는 것은 단순히 한 번 접촉하는 것보다 강한 이미지입니다. 처음에는 자기 밖에 있었던 것이 점차 자신과 떨어뜨릴 수 없는 일부가 되는 모습입니다. 시인은 악한 행동이 자신의 삶에 그렇게 붙어 버리는 것을 거부합니다.

악은 언제나 공개적으로 자신을 악이라고 소개하면서 다가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필요한 타협처럼 보이고, 현실에 맞는 선택처럼 제시되며, 공동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비뚤어진 마음은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악을 가까이하지 않겠습니다.시편 101:4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은 눈앞에 놓인 일에서 마음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비뚤어진 마음」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굽어진 내면을 표현합니다.

「악을 가까이하지 않겠습니다」(⁨יָדַע⁩)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알지 않겠다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순히 어떤 정보가 머릿속에 있다는 뜻보다 관계를 맺거나 가까이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인이 악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갖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자기 삶에서 받아들이고 친숙하게 여기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3절에서는 악한 행동이 자신에게 달라붙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4절에서는 악을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둘 다 악과 자신의 관계를 끊겠다는 다짐입니다.

왕은 남들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의 눈과 마음을 먼저 살핍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공정하게 다스리겠다고 선언한다면, 그 선언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다음 절부터는 왕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본격적으로 다룹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이 자신의 눈과 마음이라는 사실은 이후의 강경한 선언을 읽을 때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왕은 누구의 말을 듣고, 누구에게 자리를 내주는가

시편 101:5–7 본문 →

자기 이웃을 몰래 헐뜯는 사람, 나는 그를 없애겠습니다. 눈빛이 거만하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 나는 그를 견딜 수 없습니다.시편 101:5 · 두루새김

이제 왕의 관심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가장 먼저 지목하는 사람은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도, 반역을 계획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이웃을 몰래 헐뜯는 사람입니다.

왕이 다스리는 공동체에서 은밀한 비방은 단순히 개인이 기분 나빠하는 것을 넘어선 문제일 수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비난이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고, 권력자에게 전달된 거짓 정보가 다른 사람의 지위와 생계를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왕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말은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권력자는 자신이 모든 일을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보고와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주변에 어떤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는 통치의 공정성과 깊이 관련됩니다.

여기서 「없애겠습니다」는 끊어 버리거나 없애는 뜻을 나타내는 강한 표현입니다. 시인이 단순히 그 사람을 불편해하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자신이 다스리는 영역에서 단호하게 내보내겠다는 뜻을 담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어떤 절차와 방식으로 그 일을 시행하려는지는 본문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5절의 두 번째 대상은 「눈빛이 거만하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여기에는 눈과 마음이라는 두 표현이 함께 등장합니다. 3절에서 시인은 악한 일을 자기 눈앞에 두지 않겠다고 했고, 4절에서는 비뚤어진 마음이 자기에게서 떠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살핍니다.

거만한 눈빛은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 태도를, 교만한 마음은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는 내면을 표현합니다. 왜 교만이 통치자의 주변에서 특별히 문제가 될까요?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보는 사람은 그들의 말을 공정하게 듣기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는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바로잡는 데 필요한 비판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왕 가까이에 있다면, 그들의 태도는 왕의 판단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피해야 할 사람들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 땅의 신실한 이들에게 눈길을 두어 나와 함께 살도록 하겠습니다. 흠 없는 길을 걷는 사람, 그 사람이 나를 섬길 것입니다.시편 101:6 · 두루새김

5절과 6절은 서로 대조됩니다. 한쪽에는 몰래 헐뜯는 사람과 교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충실한 사람과 흠 없는 길을 걷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대조는 단순히 나쁜 사람을 멀리하고 좋은 사람을 가까이하라는 일반적인 교훈보다 구체적입니다. 왕이 누구에게 가까운 자리를 내어 주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눈여겨보는 사람들은 그와 함께 살고 그를 섬기게 됩니다.

이것은 왕궁과 통치 조직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가 왕의 가까운 사람이 될 것입니까? 누가 왕에게 조언할 것입니까? 누가 왕의 명령을 수행하며 공동체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까?

3절에서는 「악한 일을 제 눈앞에 두지 않겠습니다」라고 했고, 6절에서는 「이 땅의 충실한 사람들을 눈여겨보아」라고 합니다. 앞의 눈은 무엇을 멀리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고, 뒤의 눈은 무엇을 주목할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무엇을 보지 않을 것인지뿐 아니라 누구를 바라볼 것인지도 정합니다.

올바른 통치는 악을 거부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충실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일도 필요합니다.

시편의 기준은 왕에게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가가 아닙니다. 얼마나 충실하고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인가입니다.

이것은 왕의 권력을 강화하는 기준이기 전에, 그 권력이 올바르게 행사되도록 하는 기준입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왕의 집에 머물 수 없다

속임수를 쓰는 사람은 내 집 안에 살지 못하고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내 눈앞에 자리 잡지 못할 것입니다.시편 101:7 · 두루새김

이 절은 2절의 표현을 다시 불러옵니다. 2절에서 왕은 자기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왕 자신이 온전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과 왕의 집에 어떤 사람이 머무는가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왕의 집이 단지 왕 개인의 사생활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통치의 중요한 중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궁정 안에서 속임수와 거짓말이 자리를 잡는다면, 왕의 의로운 다짐은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왕 자신이 악한 일을 눈앞에 두지 않겠다고 했고, 이어 충실한 사람들을 눈여겨보겠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합니다. 시인은 왕이 무엇을 바라보는지, 누구를 주목하는지, 무엇을 자기 앞에 머물게 하는지를 거듭 이야기합니다.

왕의 눈은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과 선택이 누구에게 권력을 주고, 누구를 가까이하며, 무엇을 받아들일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원칙을 가진 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성에서 악을 어떻게 다룰 것입니까?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마음이 교만한 사람」에 해당하는 부분은 말 그대로 옮기면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거만한 눈을 말하는 표현과 나란히 놓인 문맥에서는 너그러움보다 교만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아침마다」 악인들을 멸하겠다는 선언

시편 101:8 본문 →

아침마다 이 땅의 모든 악한 이들을 없애어 여호와야훼의 성에서 악을 일삼는 이들을 모두 끊어 내겠습니다.시편 101:8 · 두루새김

지금까지 왕은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살피고, 가까이할 사람과 멀리할 사람을 구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공동체 전체의 악을 다루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을 얼마나 자주 할 것인지 나타내는 말이 등장합니다. 「아침마다」입니다. 왜 아침일까요?

아침은 재판의 시간이다

구약에서 아침은 공적인 판단과 통치의 책임을 떠올리게 하는 시간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예레미야 21장 12절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왕실을 향해 아침마다 공정한 재판을 행하고, 빼앗긴 사람을 억압하는 사람의 손에서 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둘을 함께 읽으면, 그는 공동체의 악을 내버려 두지 않고 꾸준히 다루겠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아침마다」를 반드시 매일 아침마다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구체적인 일정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복적으로, 성실하게 악을 다루겠다는 다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없애겠습니다」라는 표현의 강도를 없애 버려서는 안 됩니다.

정의의 책임인가, 무제한적인 폭력의 허용인가

왕에게는 공동체를 악에서 보호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 재판은 단순히 통치자의 권력을 행사하는 기회가 아니라, 잘못을 판단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책임이었습니다.

악을 다스릴 책임이 있다는 사실과, 통치자가 자신이 악하다고 판단한 사람을 마음대로 없앨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시편 101편은 구체적인 재판 절차나 형벌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어떤 행동에 어떤 처벌이 알맞은지도 구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절을 근거로 통치자가 별도의 공정한 판단 없이 누군가를 처벌하거나 죽여도 된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왕이 악을 철저히 없애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하지만, 그 의지를 실행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권한을 주는 규정은 아닙니다.

또한 「이 땅의 악한 사람들을 모두」라는 표현은 왕의 다짐이 매우 넓은 범위에 걸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를 이상적인 통치를 향한 결의를 강조하는 시적 언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시인이 실제 강제적인 처벌과 제거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본문의 강경함은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앞서 시인이 약속한 한결같은 사랑과 공정한 판결, 흠 없는 길, 거짓과 교만의 거부라는 기준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악을 없애겠다는 명분이 왕 자신에게 불의한 행동을 허용한다면, 그는 시의 첫머리에서 노래한 정의를 스스로 배반하게 됩니다.

왜 「여호와야훼의 성」인가

이 시의 마지막 표현은 자기 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성」입니다.

시인은 왕으로서 성의 질서를 바로잡겠다고 선언하지만, 그 성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 성은 여호와야훼께 속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성」은 시온 또는 예루살렘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이 성은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야 하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왕의 책임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성에서 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가 악에 의해 무너지지 않도록 다스리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시편이 공간을 따라 나아가는 흐름이 완성됩니다.

2절에서는 「제 집 안에서」였습니다.

7절에서도 「제 집 안에」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여호와야훼의 성」입니다.

왕의 삶은 자기 집에서 시작해 자기가 다스리는 공동체 전체로 넓어집니다. 왕의 집이 불의와 거짓으로 가득하다면, 그 왕이 여호와야훼의 성에서 악을 없애겠다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을 잃습니다.

다윗의 이름 아래 놓인 이 노래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다윗의 이름 아래 이 노래가 놓여 있다는 사실은 성경의 다른 이야기들과 함께 읽을 때 중요한 질문을 일으킵니다. 사무엘서의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왕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통치에는 심각한 잘못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기 집에서 한 여인을 보았고, 그 여인이 밧세바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왔습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우리아의 죽음을 불러오는 일을 계획했습니다(사무엘하 11:2~17). 이 사건을 시편 101편의 직접적인 역사적 배경으로 연결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두 본문을 나란히 읽으면 날카로운 대조가 드러납니다.

시편 101편의 왕은 악한 일을 자기 눈앞에 두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사무엘하 11장의 다윗은 자신의 눈으로 본 일을 계기로 잘못된 행동을 시작합니다.

시편 101편의 왕은 자기 집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사무엘하의 다윗은 왕궁에서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합니다.

시편 101편의 왕은 거짓말하는 사람이 자기 앞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사무엘하의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거짓과 속임수를 동원합니다.

이 비교는 시편 101편을 다윗의 위대한 인격을 증명하는 노래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오히려 다윗과 그의 뒤를 잇는 왕들까지도 이 시가 제시하는 기준 아래 서야 합니다. 이 점에서 시편 101편의 가치는 어떤 왕이 이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왕 자신도 그 이상 앞에서 판단받아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사무엘하 12장에서 나단이 다윗을 꾸짖는 장면과도 연결됩니다. 다윗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던 정의의 기준 앞에 서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왕 자신의 잘못도 드러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의 정의는 단순한 자기 확신이나 강한 결단만으로 보장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6장 18~20절은 재판관들에게 공정한 재판을 요구합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뇌물을 받지 말며, 정의를 따르라고 명령합니다. 따라서 왕이 악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이러한 공적 책임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 48편 1~2절에서도 하나님의 성과 그분의 거룩한 산이 함께 등장합니다.

인애와 정의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시편 101:1–8 본문 →

시편 101편 전체를 돌아보면 첫 절의 「한결같은 사랑과 공정한 판결」이 마지막까지 중요한 기준으로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의 실제 내용에서는 한결같은 사랑보다 정의와 악의 제거에 관한 표현이 훨씬 두드러집니다.

그렇다면 한결같은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시편은 한결같은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장면을 정의를 행하는 장면만큼 자세히 보여 주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무시하고 시 전체가 온화한 사랑에 관한 노래인 것처럼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1절에서 한결같은 사랑과 공정한 판결을 함께 노래한다는 선언을 기억하면, 적어도 시인이 바라보는 통치가 무자비한 처벌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노래하는 왕은 하나님의 공정한 판결도 함께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통치는 악을 무조건 용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동시에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잔혹함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도 안 됩니다.

이 시편을 읽고 곧바로 자기 주변에서 없애야 할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은 본문의 흐름을 거꾸로 따라가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먼저 자기 마음과 자기 집을 살폈습니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너무 강해지면, 자신에게 비판적인 사람을 모두 거짓말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정의를 지키겠다는 다짐이 오히려 불의한 권력 행사로 바뀔 수 있습니다.

특히 8절의 강경한 선언을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해치거나 강제로 없애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 선언은 고대 왕이 공동체의 악을 다스릴 책임을 강한 시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며, 현대의 개인에게 무제한적인 처벌 권한을 주는 명령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불편한 악만 없애려 합니까, 아니면 자신에게 유리한 악까지 거부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왕의 단호한 선언뿐 아니라 2절의 짧은 기도, 「언제 제게 오시겠습니까?」도 기억해야 합니다. 왕은 흠 없이 살아가겠다고 선언하지만, 그 자신도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겠다고 말하지만, 자기 자신의 삶도 하나님 앞에 놓여 있습니다.

시의 처음에 왕은 하나님께 한결같은 사랑과 공정한 판결을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성에서 악을 끊어 버리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사이에 왕의 눈앞을 지나간 것은 악한 일과 충실한 사람들, 거짓말과 흠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눈이 무엇을 바라볼 것인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자기 집에 누가 머물 것인지, 나아가 여호와야훼의 성이 어떤 곳이 될 것인지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노래하는 왕이 처음 지켜야 할 곳은 자기 권력을 가장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는 자리, 바로 자신의 집이었습니다.

시편 101편은 그 집에서 시작한 다짐을 여호와야훼의 성까지 가져갑니다. 그리고 왕의 모든 약속을 처음에 노래했던 한결같은 사랑과 공정한 판결 앞에 세워 둡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