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69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깊은 물에서 시온의 노래로
물은 목까지 차올랐는데, 목은 바싹 말랐습니다.
시편 69편은 이 모순처럼 보이는 두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깊은 물에 빠져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호소합니다. 그런데 곧이어 하나님께 부르짖느라 목이 마르고, 그분을 기다리느라 눈마저 지쳤다고 말합니다. 물은 넘치도록 많은데, 정작 자신을 살릴 물은 없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처한 고통의 성격을 드러내는 절묘한 표현입니다. 그는 위험에 둘러싸여 있지만 빠져나올 길이 없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위로해 줄 사람이 없으며, 하나님을 기다리지만 아직 응답을 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시편에는 또 하나의 변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물에 빠져 살려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중간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혹독한 심판이 내려지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고난받는 사람들이 기뻐하고, 하늘과 땅과 바다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시온과 유다의 성들이 다시 세워지는 모습을 노래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절망이 이렇게 넓은 소망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그 변화의 중심에는 시인이 하나님에 관하여 끝까지 붙들고 있는 한 가지 믿음이 있습니다.
자신의 부르짖음을 사람들이 외면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말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입니다.
시편 69편은 그 믿음이 고통을 즉시 없애 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응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 믿음이 얼마나 치열하게 붙들려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발 디딜 곳도, 부르짖을 힘도 없어졌다
시인은 상황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외칩니다.
하나님,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물이 내 목까지 차올랐으니.시편 69:2 · 두루새김
그가 가장 먼저 구하는 것은 자신의 억울함에 대한 인정도, 원수들에 대한 처벌도 아닙니다. 구원입니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합니다.
3절에서는 두 종류의 위험이 겹쳐집니다.
깊은 진창에 빠져 발 디딜 곳이 없습니다. 깊은 물속으로 들어왔고 물살이 나를 휩쓸었습니다.시편 69:3 · 두루새김
진흙탕에 빠지면 발을 움직일수록 더욱 깊이 가라앉을 수 있습니다. 깊은 물에서는 거센 물살 때문에 자신의 위치를 지킬 수 없습니다.
하나는 발을 붙잡고, 다른 하나는 몸을 휩씁니다.
시인은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노력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발을 디딜 곳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그것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시편에서 깊은 물은 죽음에 가까운 위기와 혼돈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자주 등장합니다. 시편 18:16에서는 하나님께서 큰 물에서 시인을 건져 내시고, 시편 88:7에서는 하나님의 파도가 고난받는 사람을 짓누르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69편의 물도 뒤이어 등장하는 적대와 모욕과 사람들 사이에서의 고립을 아우르는 고난의 이미지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얼마나 오래 부르짖었는지를 밝힙니다.
부르짖다 지쳐 목이 타들어 가고, 나의 하나님을 기다리다 눈마저 흐려졌습니다.시편 69:4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께 처음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도록 부르짖었습니다. 목이 마른 것은 기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눈이 지친 것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아서가 아니라 계속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믿음이 있다고 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덜 고통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자신의 괴로움을 줄여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처지를 아셔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통의 깊이를 숨김없이 말합니다.
기도는 이 시점에서 아직 상황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전히 「제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 짧은 소유의 표현에 관계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자신을 건져 주시지 않았지만,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까닭 없는 미움과 숨길 수 없는 잘못
시인은 이제 자신을 물속으로 몰아넣은 고통이 무엇인지 드러냅니다.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내 머리카락보다 많고, 거짓으로 나를 적대하며 나를 없애려는 자들이 강합니다. 나는 빼앗지도 않은 것을 이제 돌려주어야 합니다.시편 69:5 · 두루새김
「까닭 없이」라는 말로 시인은 자신을 향한 적대와 비난에 정당한 근거가 없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빼앗지도 않은 것을 돌려주어야 합니다」라는 표현은 그 부당함을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누군가가 시인을 빼앗은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의 책임까지 떠안아야 하는 처지입니다.
이 문장을 반드시 실제 재산 분쟁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당한 요구를 받고 억울한 책임을 지게 된 상황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만 무엇을 돌려주어야 했는지, 실제로 돌려주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내 어리석음을 아시고 내 잘못들은 당신 앞에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시편 69:6 · 두루새김
앞에서는 자신이 부당하게 미움을 받는다고 주장했는데, 이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이 두 진술을 모순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사실이 자신을 향한 모든 비난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는 것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완벽한 사람으로 꾸미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어리석음과 잘못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잘못을 아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해진 부당함도 알고 계신다는 믿음과 함께 놓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억울함을 입증하기조차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잘못도, 자신에게 가해진 잘못도 숨길 수 없습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곧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합니다.
주님, 만군의 여호와야훼여, 당신을 기다리는 이들이 나 때문에 부끄러움을 겪지 않기를 빕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당신을 찾는 이들이 나 때문에 모욕을 겪지 않기를 빕니다.시편 69:7 · 두루새김
그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이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이렇게 버림받는다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이 헛된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고난이 다른 사람들의 믿음까지 흔들지 않기를 구합니다.
여기서 시인의 관심은 단지 자신의 명예를 되찾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고난이 공동체의 믿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인은 알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예수님께서 까닭 없는 미움을 받으셨다는 요한복음 15:25의 말은 이 시편 5절의 표현과 연결됩니다. 다만 구약 본문과 신약의 적용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69편에서 말하는 사람은 6절에서 자신의 어리석음과 잘못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시편의 모든 구절을 처음부터 죄 없는 예수님의 경험만을 직접 묘사한 것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먼저 이 시편은 억울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이스라엘의 기도입니다. 신약은 그 기도에 담긴 까닭 없는 미움, 하나님의 집을 향한 열정, 모욕과 버림받음의 경험을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을 이해하는 데 사용합니다. 그렇게 읽을 때 구약의 기도는 본래의 목소리를 잃지 않으면서도, 성경 전체 안에서 더 넓은 의미를 얻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려다가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다
시인은 자신이 왜 이렇게 많은 모욕을 받고 있는지 설명합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모욕을 짊어졌고 부끄러움이 내 얼굴을 덮었으니.시편 69:8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겪는 모욕으로 이해합니다. 특히 10절이 그 이유를 드러냅니다.
당신의 집을 향한 열정이 나를 삼켰고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내 위로 떨어졌으니.시편 69:10 · 두루새김
「주님의 집」은 하나님의 성소를 가리킵니다. 이곳은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과 그분을 향한 예배가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을 향한 열정 때문에 고통받습니다.
「삼켰고」(אָכַל)로 옮긴 히브리어 낱말은 「나를 먹어 버렸다」, 「나를 소모시켰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향한 열정이 시인의 삶을 온통 사로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정은 사람들의 인정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욕이 되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냈지만, 그 결과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고립이었습니다.
내 형제들에게 나는 낯선 사람, 내 어머니의 아들들에게도 남이 되었습니다.시편 69:9 · 두루새김
시인은 자신이 멀리 떨어진 낯선 사람들에게 거절당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도 낯선 사람처럼 취급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불평보다 깊은 상처를 나타냅니다.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아야 할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조차 밀려난 것입니다.
그다음 시인은 음식을 먹지 않고 울었던 일을 말합니다.
내가 음식을 끊고 나를 두고 울었더니 그마저 내게 모욕거리가 되었습니다. 자루천을 옷으로 입었더니 나는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습니다.시편 69:11–12 · 두루새김
음식을 먹지 않는 금식과 자루옷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슬픔과 애통, 때로는 회개와 간구를 표현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음식을 먹지 않은 일을 반드시 특정한 죄에 대한 회개로 한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고통을 표현했지만, 사람들은 그 모습을 놀림거리로 삼았습니다.
그가 진지하게 행한 종교적 행동까지 비웃음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13절은 모욕이 얼마나 넓게 퍼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성문에 앉은 이들은 나를 입에 올리고 술 마시는 이들은 나를 노랫거리로 삼습니다.시편 69:13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은 사람들이 모여 거래하고 소식을 나누며 재판을 비롯한 공적인 일을 처리하던 장소였습니다. 성문에 앉은 사람들이 시인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의 모욕이 공적인 자리로 퍼졌음을 보여 줍니다. 반면 술 마시는 사람들이 그를 노랫거리로 삼는 장면은 일상적인 조롱을 나타냅니다.
공적인 자리에서도, 사적인 모임에서도 시인은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시인은 단지 종교적인 견해 차이 때문에 불편을 겪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가족에게서 멀어졌고, 사회에서 모욕당했으며,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는 행위마저 조롱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한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그를 외면하셨다는 결론이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다음 단락에서 바로 그 하나님께 다시 말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은혜의 때를 기다리며
14절은 시편의 흐름이 바뀌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여, 기꺼이 받아 주시는 때에 나는 당신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넘치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당신의 진실하심으로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시편 69:14 · 두루새김
사람들은 자신을 조롱합니다. 가족은 자신을 낯선 사람처럼 대합니다. 자신의 슬픔마저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시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 응답을 구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기쁘게 받아 주시는 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트 라촌은 호의나 받아들임의 때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의를 베푸시고 기도를 받아 주시는 때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시인이 지금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 주실 때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호의를 베푸실 적절한 때에 응답하시기를 구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시인이 의지하는 것은 자신의 기도가 충분히 길거나 간절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호소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은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말들입니다. 출애굽기 34:6에서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이 풍성한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오래 고통받았는지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실하신 분인지를 근거로 응답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15–16절에서는 시편의 시작에 등장했던 물과 진흙탕의 이미지가 다시 나타납니다.
진흙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가라앉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깊은 물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시편 69:15 · 두루새김
처음에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 주시기를 바라는지 구체적으로 구합니다.
진흙탕에서는 건져 주셔야 합니다. 깊은 물에서는 벗어나게 해 주셔야 합니다. 구덩이가 입을 닫기 전에 구원하셔야 합니다.
16절의 「구덩이가 제 위로 입을 닫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표현은 죽음의 위협을 더욱 선명하게 만듭니다. 구덩이가 사람을 삼키고 입을 닫는 모습은, 한 번 들어가면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바라는 것은 단순히 모욕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는 정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 완전히 끝나 버리지 않도록 구해 달라는 것입니다.
17–19절에서는 기도가 더욱 절박해집니다.
당신의 종에게서 얼굴을 숨기지 마십시오. 내가 곤경에 빠졌으니 서둘러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 내게 가까이 오셔서 내 목숨을 되찾아 주시고 내 원수들 때문에 나를 구해 내 주십시오.시편 69:18–19 · 두루새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시인이 가장 절실하게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일입니다.
그는 앞서 사람들 사이에서 낯선 사람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는 자신에게서 멀어지지 말아 달라고 구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은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까이 오시는 것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습니다.
가장 아픈 것은 상처를 알아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20절에서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사실을 다시 고백합니다.
당신은 내가 받는 모욕을 아십니다. 내 부끄러움과 수치를 아십니다. 나를 괴롭히는 자들은 모두 당신 앞에 있습니다.시편 69:20 · 두루새김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어리석음과 잘못을 아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당한 모욕과 부끄러움과 수치를 아신다고 말합니다. 두 진술이 서로 맞물립니다.
하나님은 시인의 내면과 행동만 아시는 분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행동까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시는 앞에서는 시인의 잘못도 숨길 수 없고, 원수들의 잘못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21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깊이 무너졌는지를 드러냅니다.
모욕이 내 마음을 깨뜨려 나는 병들었습니다. 함께 슬퍼할 이를 기다렸으나 아무도 없었고 위로해 줄 이들도 찾지 못했습니다.시편 69:21 · 두루새김
시인은 자신을 구해 줄 강한 사람이나 원수를 물리쳐 줄 군대를 기다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바랐던 것은 자신의 상황을 즉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마음 아파하고 위로해 줄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시편의 고통은 가장 개인적인 깊이에 이릅니다. 바깥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도 괴롭지만, 자신과 함께 아파할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더욱 괴롭습니다.
이 기다림은 4절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다가 눈마저 지쳤다는 고백과 묘하게 겹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기다리고, 동시에 자신과 함께 슬퍼할 사람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에서도 아직 자신이 바라는 응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22절은 그 외로움을 더욱 참혹하게 보여 줍니다.
그들은 내 음식에 독초를 넣었고 내가 목마를 때 식초를 마시게 했습니다.시편 69:22 · 두루새김
먹을 것을 주기는 했습니다. 마실 것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받는 사람을 살리는 음식과 물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도움을 받아야 할 순간에 오히려 더 큰 고통을 겪습니다.
이 장면은 시편 처음으로 독자를 돌려보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목이 마를 때까지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마실 것을 건넨 순간에도 그는 갈증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둘러싼 문제는 단순히 필요한 것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마저 그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이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인의 기도는 가장 거친 방향으로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독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쓴맛이나 독성을 지닌 식물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정확히 어떤 식물인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식초」는 신맛이 나는 액체를 가리키며, 고대에는 물에 타서 음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식초라는 물질 자체가 반드시 해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 절에서는 시인이 음식과 물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그것들이 적절한 돌봄이 아니라 고통과 모욕의 경험으로 주어졌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19:28–29에서는 십자가에서 목마르다고 하신 예수님께 식초가 주어집니다. 이는 시편 69:22의 장면과 연결되어 읽혀 왔습니다.
왜 시인은 원수들에게 이토록 혹독한 심판을 구하는가?
23절부터 시인은 원수들에 대한 심판을 구합니다.
그들 앞에 차린 밥상이 덫이 되고 평안을 위한 밥상이 올가미가 되기를 빕니다.시편 69:23 · 두루새김
조금 전 원수들은 시인에게 독초와 식초를 주었습니다. 이제 시인은 그들 자신의 밥상이 덫이 되기를 구합니다. 이 대조는 우연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일은 본래 생명을 유지하게 하고 관계를 나누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원수들은 시인이 필요한 것을 얻으려 할 때 그 기회를 고통으로 바꾸었습니다. 시인은 이제 그들이 의지하는 밥상마저 위험한 것이 되기를 구합니다.
「평안을 줄 그 밥상」이라는 부분은 히브리어의 연결 관계가 어려워 해석이 갈립니다. 그들이 누리던 평안이나 풍요가 덫으로 변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고, 그들과 평화로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올가미가 된다는 방향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안전하다고 믿던 것이 오히려 위험이 된다는 뒤바뀜이 중심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24–26절의 저주는 더욱 거세집니다. 시인은 원수들의 눈이 어두워지고 허리가 휘청거리며, 하나님의 분노가 그들을 따라잡고, 그들이 머무는 곳이 버려져 텅 비게 되기를 구합니다. 29절에 이르면 그들의 이름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책에서 지워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독자에게 이러한 기도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앞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에 호소하던 사람이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혹한 일이 일어나기를 구한다는 사실이 모순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27절에 제시됩니다.
그들은 당신이 치신 이를 뒤쫓고 당신이 상처 입힌 이들의 아픔을 입에 올리니.시편 69:27 · 두루새김
시인은 원수들이 이미 상처 입은 사람을 다시 공격했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치신 사람」이라는 표현이 하나님께서 직접 어떤 고난을 내리셨다는 뜻인지, 시인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일로 이해하여 표현한 것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고통을 이야기」한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뜻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 절들에 등장한 모욕과 조롱을 고려하면, 이미 고통받는 사람의 상처를 원수들이 더욱 심하게 만들고 있다는 흐름은 분명합니다.
시인이 분노하는 이유는 단순히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사람을 더욱 깊은 고통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약한 사람을 보호하기는커녕, 그가 이미 약해진 것을 공격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심판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도의 모든 표현을 현대의 독자가 그대로 자신의 원수에게 적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실제로 느끼는 분노와 억울함까지 기도의 언어로 담아냅니다. 여기에는 악이 심판받아야 한다는 정의의 요청이 있지만, 동시에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인간의 감정도 담겨 있습니다. 악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과, 인간이 자신의 분노를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같다고 여기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특히 시인은 심판을 스스로 행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그것을 구합니다.
이 기도에서 원수들에 대한 최종 판단은 여전히 하나님께 맡겨져 있습니다.
28–29절의 요청도 이러한 흐름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들의 죄 위에 죄를 더해 주십시오. 그들이 당신의 의로움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살아 있는 이들의 책에서 지워지고 의로운 이들과 함께 기록되지 않기를 빕니다.시편 69:28–29 · 두루새김
「그들의 죄에 죄를 더해 책임을 물으시고」라는 말은 그들이 저지른 악이 아무런 책임도 없이 지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책임을 묻는다는 뜻을 드러내어 옮겼습니다. 다만 히브리어 문장은 그 의미를 세밀하게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책」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라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정확히 어떤 기록을 뜻하는지, 죽은 뒤의 운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시편 69편 자체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의로운 사람들 가운데 이름을 두고 생명을 누리는 자리에서 원수들이 제외되기를 바라는 심판의 언어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거친 기도는 쉽게 정리할 수 없는 긴장을 남깁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면서도 원수들에게는 심판을 구합니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기를 바라면서, 원수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분노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시편은 이 긴장을 없애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상처받은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분노까지도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분노의 최종 판단 역시 하나님께 속합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32:32–33에서도 모세와 하나님께서 나누시는 대화에 하나님의 책에서 이름을 지우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노래가 다른 고난받는 사람을 살린다
29절까지 시인은 원수들에 대한 심판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30절에서 방향이 다시 바뀝니다.
그러나 나는 가난하고 아픕니다. 하나님, 당신의 구원이 나를 높은 곳에 세워 주기를 빕니다.시편 69:30 · 두루새김
시인은 원수들을 계속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는 시편 첫머리와 선명한 대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깊은 진흙탕에 빠져 발을 디딜 곳조차 없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여 높은 곳에 안전하게 두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래로 가라앉던 사람이 위로 세워지기를 구합니다.
이것이 시인이 바라는 구원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들어 올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시인은 노래하겠다고 말합니다.
나는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감사로 그분을 높이겠습니다.시편 69:31 · 두루새김
여기서 아직 구원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앞 절에서 구원을 바라는 기도를 드렸고, 이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미래의 구원을 확신하며 미리 감사의 노래를 약속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의 탄식에서 자주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고난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하던 사람이, 기도의 끝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69편에서는 그 찬양의 성격을 특별히 설명합니다.
이를 여호와야훼께서는 뿔 돋고 굽 갈라진 황소보다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시편 69:32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소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특히 다 자란 수소는 가치 있는 제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의 찬양과 감사가 그러한 제물보다 하나님께 더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동물을 바치는 제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선언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시편 50:8–15에서도 하나님은 제물 자체가 부족해서 사람들에게 제사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감사와 어려움 속의 부르짖음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시편 69편에서 시인이 드리려는 감사는 단순한 의식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는 일을 경험하고, 그 구원을 노래하려 합니다. 그 노래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증언이 됩니다.
이 점이 33절에서 분명해집니다.
고난받는 이들이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이들이여, 그대들의 마음이 살아나기를.시편 69:33 · 두루새김
시인의 찬양을 들을 사람들은 힘 있고 안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7절에서 시인은 자신 때문에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를 구했습니다. 이제 33절에서는 고난받는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보고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고난이 다른 사람들의 믿음에 상처를 줄까 염려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구원이 그들의 마음을 살아나게 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도 절망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한 사람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도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런 구원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34절에서 그 기대의 근거를 밝힙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귀 기울이시고 그분께 속한 갇힌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으시니.시편 69:34 · 두루새김
시인은 오랫동안 부르짖었지만 사람들에게 외면당했습니다. 위로해 줄 사람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찾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도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신다고 말합니다.
시인의 고통에는 단지 물질적인 어려움이나 신체적인 위협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업신여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단순한 위로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부인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취급하지 않으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이제 한 사람의 입술을 넘어 온 세상의 찬양으로 넓어집니다.
자신을 삼키려던 바다까지 찬양하게 되기를
35절에서 시인이 바라보는 범위는 갑자기 넓어집니다.
하늘과 땅이 그분을 찬양하기를, 바다와 그 안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이 그분을 찬양하기를.시편 69:35 · 두루새김
처음에 시인은 물에 빠져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물이 목까지 차올랐고, 깊은 물속에서 물살이 자신을 휩쓸었습니다. 그 물은 시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이미지였습니다.
그런데 시편의 끝에서 바다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시인을 삼키려는 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초대받은 바다입니다.
처음에는 세상 전체가 자신을 삼킬 듯한 위협으로 느껴졌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늘과 땅과 바다가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초대됩니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렇게 넓은 찬양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36–37절이 그 이유를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의 성읍들을 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거기 살며 그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분의 종들의 후손이 그 땅을 물려받고 그분의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곳에 살 것입니다.시편 69:36–37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의 기도는 공동체의 미래로 이어집니다. 그동안 시인은 자신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호소했습니다. 원수들에게 쫓기고, 가족에게 소외되고, 사람들에게 조롱당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 성들과 땅이 등장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취급받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얻고, 그곳에 살게 될 것을 바라봅니다.
고립으로 시작한 기도가 공동체가 자리를 잡고 사는 모습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시편 표제에는 「다윗의 시입니다」라는 말이 있지만, 마지막 절들은 시온의 구원과 유다 성들의 재건을 바라봅니다. 중요한 것은 최종적인 시편이 개인의 구원과 시온의 회복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자신만 살아남으면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지시는 분이시라면, 그분은 또한 자신의 백성이 함께 살아갈 터전을 마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소망은 자신의 생애에서 끝나지 않고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시온의 구원과 유다 성들의 재건을 바라보는 표현은 예루살렘과 유다의 파괴를 경험한 시대, 특히 포로로 끌려간 때나 그 이후의 상황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69편 전체가 그때 처음 만들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인 탄식의 노래가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사용되면서 시온의 회복을 바라는 기도로 넓어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본문만으로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쳐 쓰였는지나 어느 시대에 쓰였는지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깊은 물에서 시작하여 다시 살아갈 땅을 바라보다
시인은 두려워합니다. 지쳐 있습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하면서도 잘못을 인정합니다. 원수들에게 분노하고, 그들의 심판을 요청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약속하고, 고난받는 사람들과 온 땅의 미래를 바라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기도 안에 들어 있고, 그 마음속을 하나님 앞에 숨기지 않는 데서 기도의 진실함이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시편이 모든 고통이 끝났다는 장면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이 실제로 언제 어떤 방식으로 구원받았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편은 그의 고통을 없애는 장면보다, 고통 속에서 그가 바라보게 된 미래를 보여 주는 것으로 끝납니다.
시인은 처음에 발을 디딜 곳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그 모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땅입니다. 처음에는 시인이 서 있을 자리조차 없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공동체와 그 후손들이 살아갈 자리가 마련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소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시인이 끝까지 붙들었던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자신에게 속한 갇힌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처음에 시인은 부르짖다가 목이 바싹 말랐다고 했습니다.
그 목소리를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끝에서 그는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까지 바라보며, 그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깊은 물에 빠진 사람이 끝내 바라본 것은 혼자 겨우 살아남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땅에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미래였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