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77편

이 장의 자리 · 73–89편 · 셋째 권

바다에 있는 길, 보이지 않는 발자국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이 오히려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시편 77편의 시인은 하나님을 잊어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찾고, 밤새 기도하고, 지난날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억할수록 신음이 깊어집니다. 한때 자신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이 지금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마침내 가장 두려운 가능성을 입 밖에 냅니다. 하나님이 달라지신 것은 아닐까? 한때 베푸시던 한결같은 사랑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이제는 끝나 버린 것이 아닐까?

이 질문이 시편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기억을 더듬어 먼 과거로 돌아갑니다. 물들이 하나님을 보고 몸부림치고, 깊은 바다가 떨며, 천둥과 번개가 온 세상을 뒤흔들던 때입니다.

그런데 그 장엄한 장면의 끝에서 시인은 「그러나 주님의 발자국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라는 이상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곳을 지나가셨습니다. 백성을 구원하셨고, 바다 가운데 길을 내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분의 발자국은 찾을 수 없습니다.

시편 77편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이 일하셨음에도 그 발자국은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발견에 도달합니다.

앞선 시편 76편에서는 하나님의 판결이 들리자 온 땅이 잠잠해졌습니다(76:9). 그러나 이번 시편에서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듯한 상황에서 한 사람이 밤새 하나님을 부릅니다. 모두가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승리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어 괴로워하는 한 사람의 내면으로 시선이 옮겨진 것입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877편 본문 읽기 →

하나님을 찾아도 위로받지 못하는 밤

시편 77:1–5 본문 →

소리 높여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소리 높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내게 귀를 기울이십니다.시편 77:2 · 두루새김

시인은 조용히 하나님을 생각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소리를 내어 부르짖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들리게 하려는 간절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첫 구절에는 이미 하나의 긴장이 들어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귀를 기울이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에는 상황이 나아졌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위로받기를 거부하고, 밤새 잠들지 못하며, 하나님을 기억할 때마다 신음합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셨다는 고백과 자신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는 현실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에서 기도가 반드시 곧바로 평안을 가져오는 행동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괴로운 날 나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밤에도 내 손은 뻗은 채 늘어지지 않았고 내 영혼은 위로받기를 마다했습니다.시편 77:3 · 두루새김

고난을 겪던 날이 밤으로 이어졌고, 시인의 간절한 기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위로받기를 거부합니다.

왜 위로를 거부했을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어지는 질문들을 보면, 그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는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끝났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에게는 잠깐의 위로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의 문제는 고통스럽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올리면 나는 신음하고 곰곰이 생각하면 내 영은 기운을 잃습니다. 셀라.시편 77:4 · 두루새김

보통 성경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힘을 얻는 행동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면 현재의 어려움도 견딜 수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이 시인에게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알기 때문에 지금의 침묵이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그가 기억하는 하나님은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그 사랑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곧 기도하는 사람의 몸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주님, 당신이 내 눈꺼풀을 붙들어 감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뒤흔들려 말도 못 합니다.시편 77:5 · 두루새김

첫 구절에서 시인은 목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잠들지 못하는 상태도 단순히 마음이 불안해서 생긴 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면과 괴로움마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목적으로 그의 잠을 막으셨다고 해설자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잠들지 못하는 시인이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는 말입니다.

밤새 손을 뻗었지만 위로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만 신음합니다. 기도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이제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시인은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 과거를 떠올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 기억조차 평안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기도할 때 손을 들거나 펴는 행동은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28:2에서는 시인이 거룩한 곳을 향해 손을 들고 도움을 구하며, 시편 63:5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손을 드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다만 3절의 원문에서 ‘내 손’에 연결된 동사는 흘러나오거나 쏟아지는 동작과 관련되어 있어, 손을 계속 뻗고 있었다는 뜻으로 읽기도 하고 다른 표현이 본래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두루새김처럼 「밤에도 손을 뻗은 채 거두지 않았습니다」라고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 읽기지만, 원문의 세부적인 동작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날을 기억할수록 더 커지는 질문

시편 77:6–10 본문 →

나는 오래전 날들을, 아득히 먼 세월을 생각했습니다.시편 77:6 · 두루새김

시인은 현재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과거를 돌아봅니다.

밤에 내 노래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고 내 영은 샅샅이 살핍니다.시편 77:7 · 두루새김

처음에 시인은 하나님께 소리 내어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마음속으로 생각을 이어 갑니다. 원문에서는 자신의 마음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기도가 멈추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내면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면의 탐색은 곧 여섯 개의 질문으로 쏟아집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버리시렵니까? 다시는 반겨 주지 않으시렵니까?시편 77:8 · 두루새김
그 한결같은 사랑이 영영 다했습니까? 그 약속이 대대로 끝나 버렸습니까?시편 77:9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기를 잊으셨습니까? 아니면 노하셔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닫으셨습니까? 셀라.시편 77:10 · 두루새김

먼저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영원히 버리실지 묻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이 다시는 기쁘게 받아 주지 않으실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약속을 문제 삼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은혜 베푸는 일을 잊으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닫으셨는지 묻습니다.

현재의 고통 때문에 시작된 의문이 점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깊어지는 것입니다.

9절의 「한결같은 사랑」은 단순히 순간적으로 베푸는 친절을 넘어,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변함없는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언약을 한결같이 지키시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의 힘이 부족한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맺으신 관계에서 보여 주셨던 한결같은 사랑이 끝나 버린 것은 아닌지 묻습니다.

「그분의 약속은 대대로 끝나 버린 것일까?」라는 질문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문맥상 약속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약속」으로 옮겼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닌지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들은 단순한 불평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결같으신 분이라는 믿음 때문에, 시인은 지금 경험하는 현실을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질문들에는 시간에 관한 표현이 반복됩니다.

영원히, 다시는, 대대로.

시인은 현재의 고통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고통을 영원한 버림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두려워합니다. 현재 경험하는 하나님의 침묵을 미래 전체로 확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는 그 가능성을 사실이라고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끝났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잃으셨다고 확언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아닌지 묻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평온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향한 질문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가장 아픈 생각에서 기억의 방향을 바꾸다

시편 77:11–13 본문 →

나는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오른손이 달라진 것, 그것이 내 아픔입니다.시편 77:11 · 두루새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오른손은 흔히 그분의 능력과 구원 행동을 나타냅니다. 출애굽기 15:6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오른손이 힘으로 영광스럽고 원수를 부수는 것으로 노래됩니다. 시인은 바로 그 오른손이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가 경험하는 고통은 하나님이 약하시다는 의심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능력 있는 하나님이 예전처럼 구원하시지 않으신다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의 셰노트(⁨שָׁנֶה⁩)는 여기서 ‘달라짐’으로 읽을 수도 있고 ‘세월’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으로 옮긴 앞부분의 표현도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크게 두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는 두루새김처럼, 하나님의 오른손이 달라졌다는 사실이 자신을 아프게 한다고 말하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고통을 인정하면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오른손이 일하시던 지난 세월을 기억하겠다고 말하는 읽기입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다음 구절의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동사를 이 구절의 의미를 풀어내는 데 활용합니다.

두 읽기는 시인의 마음에 차이를 만듭니다. 첫 번째에서는 하나님이 달라지셨다는 고통스러운 생각이 절정에 이릅니다. 두 번째에서는 지나간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떠올리는 방향으로 이미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어느 쪽이든 12절부터 시인의 말이 달라진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겠습니다. 주님, 오래전 당신이 이루신 놀라운 일을 참으로 기억하겠습니다.시편 77:12 · 두루새김

앞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기억하겠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처음에 시인은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현재 처지를 생각했습니다. 과거의 하나님과 지금의 현실 사이에 놓인 간격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과거에 실제로 하신 일들을 집중해서 되새기려 합니다. 막연히 옛날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신 모든 일을 되새기고 당신의 행적을 곰곰이 생각하겠습니다.시편 77:13 · 두루새김

앞부분에서도 시인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77:4). 그러나 그때는 생각할수록 그의 영이 힘을 잃었습니다. 이제는 같은 깊은 생각이 하나님의 행적을 향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꾼 일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근거 없이 희망적인 결론을 내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현재의 경험만으로 하나님 전체를 판단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돌아보려 합니다.

시인이 바꾸는 것은 고통의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야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현재의 고통에만 갇혀 있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고통만이 하나님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도록 두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거에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이제 시인은 그 기억을 구체적인 사건으로 펼쳐 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야」는 하나님의 이름을 짧게 부르는 형태입니다. 이 구절에서 시인은 일반적인 호칭만 사용하지 않고, 자기 백성 가운데 하신 일로 알려지신 하나님을 직접 부릅니다. 이 시편의 다음에 놓인 시편 78편은 하나님의 행적을 다음 세대에 들려주고 잊지 말라고 권합니다(78:4–8). 시편 77편에서 한 사람이 고난 가운데 붙들었던 기억이, 다음 시편에서는 공동체가 대대로 전해야 할 역사로 확장됩니다.

거룩한 길을 걸으시는 하나님

시편 77:14–16 본문 →

하나님, 당신의 길은 거룩합니다. 하나님처럼 위대한 신이 어디 있겠습니까?시편 77:14 · 두루새김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 직접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등장하는 단어는 「길」입니다. 이 길은 시편 마지막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길은 바다를 지납니다.

히브리어 바코데시(⁨קֹדֶשׁ⁩)는 ‘거룩함 가운데’로 읽을 수 있지만, 문맥에 따라 ‘성소 안에서’라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전자로 읽으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식의 거룩함이 강조되고, 후자로 읽으면 하나님의 길이 그분의 거룩한 처소와 연결됩니다. 두 읽기 모두 가능하며, 이 구절만으로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은 「주님의 길은 거룩합니다」로 옮겼습니다. 이 읽기를 따르면 시인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행동을 그분의 거룩함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인간의 욕망이나 한계에 따라 결정되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며, 그분의 행동에는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성품이 드러납니다.

시인은 자신의 현재 고난이 거룩한 이유를 발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그분이 하신 일에서 살펴볼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당신은 놀라운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민족들 가운데 당신의 힘을 알리셨습니다.시편 77:15 · 두루새김

처음에 그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끝났는지 물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놀라운 일은 한 개인만 알고 있는 은밀한 경험이 아닙니다. 여러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힘이 알려질 정도로 역사 속에 드러난 사건입니다.

당신의 팔로 당신의 백성, 야곱과 요셉의 자손들을 되찾으셨습니다. 셀라.시편 77:16 · 두루새김

이것은 출애굽을 가리킵니다. 「구해 내셨습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גָּאַל⁩)는 되찾다 또는 값을 치르고 풀어 주다는 뜻을 지닙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것을 되찾거나, 얽매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행동과 연결되는 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단지 이스라엘에게 친절을 베푸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팔로 백성을 구해 내셨다고 말합니다.

이제 앞에서 등장했던 오른손의 문제가 새로운 빛을 받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오른손이 달라진 것 같다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돌아보니 바로 그 하나님이 자신의 팔로 백성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이 지금도 똑같은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증거를 발견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하시는 성품을 보여 주는 실제 사건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구원 이야기가 시인의 개인적인 추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먼 조상들의 구원을 기억합니다. 자신이 경험하는 현재가 너무 어두울 때, 그는 자기 인생보다 더 오래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인 바다가 갈라지는 순간으로 들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보통 출애굽을 이야기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부르기 쉽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야곱과 요셉을 함께 언급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서로 별개의 두 민족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정착하게 된 이야기와도 연결되고(창세기 45–47장), 후대에는 요셉에게서 나온 지파들과 북쪽 이스라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 시편에서는 야곱과 요셉의 자손이라는 표현이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구원하신 백성을 풍성하게 불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정확히 어떤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둔 표현인지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물들이 하나님을 보고 몸부림치다

시편 77:17–19 본문 →

하나님, 물들이 당신을 보았습니다. 물들이 당신을 보고 몸부림쳤고 깊은 물들도 떨었습니다.시편 77:17 · 두루새김

시인은 출애굽을 기억하지만, 사건을 순서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어디로 갔는지, 이집트 군대가 어떻게 뒤쫓았는지, 이스라엘이 어떻게 바다에 들어갔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바다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바다가 하나님을 봅니다.

물들은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행동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이 바다를 건너가는 모습을 따라가지만, 여기서는 바다가 하나님 앞에서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에게 바다는 건널 수 없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바다조차 두려워하며 움직입니다.

먹구름들이 물을 쏟았고 구름들이 소리를 터뜨렸으며 당신의 화살들도 이리저리 날아갔습니다.시편 77:18 · 두루새김
회오리바람 속에서 당신의 천둥이 울리고 번개들이 세상을 밝혔으며 땅은 떨며 흔들렸습니다.시편 77:19 · 두루새김

물과 하늘과 땅이 모두 움직입니다.

이어지는 번개의 이미지로 볼 때, 이 화살들은 번개를 가리키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을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시는 분으로 그립니다.

이 장면은 시편 앞부분과도 대조됩니다. 처음에 시인은 밤에 잠들지 못하고 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하늘과 땅이 요동하고 깊은 물이 떱니다. 시인의 내면에 있던 두려움이 이제 자연 전체의 거대한 움직임과 나란히 놓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시인의 마음을 뒤흔들던 고통 앞에서는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바다와 폭풍을 뒤흔드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동하십니다.

시인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혼란보다 더 거대한 혼란도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이 장엄한 폭풍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길을 가고 계셨을까요?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14:21–22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마른 땅으로 건너간 사건이 기록됩니다. 시편 77편은 그 사건을 시적인 언어로 다시 보여 줍니다. 고대 근동의 여러 문학 전통에서 바다와 깊은 물은 통제하기 어려운 혼돈의 힘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성경 역시 바다를 실제 자연물로 말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위협하는 거대한 힘의 이미지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그 거대한 힘이 하나님과 맞먹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표현은 시인이 바다를 독립적인 신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연의 거대한 힘까지도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으로 그려, 그분의 권위를 드러내는 시적 표현입니다. 폭풍 가운데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다른 구약 본문에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19:16–19에서는 시내산에 천둥과 번개가 나타나고 온 산이 크게 떱니다. 사사기 5:4–5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행진하실 때 땅이 떨고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는 것으로 노래됩니다. 시편 77편의 장면은 이러한 하나님의 현현, 곧 그분이 위엄 가운데 나타나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4장의 바다 사건에 이 시편에 나오는 모든 폭풍 현상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출애굽의 구원 사건을 온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시적 언어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길을 내셨지만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시편 77:20 본문 →

당신의 길은 바다에 나 있었고 당신의 오솔길은 큰 물 가운데로 이어졌으나 당신의 발자국은 알 수 없었습니다.시편 77:20 · 두루새김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길이 거룩하다고 고백했습니다(77:14). 이제 그 길이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지 밝힙니다. 바다입니다.

사람에게는 길이 없는 곳입니다.

육지라면 길을 만들 수 있습니다. 산에는 오솔길을 낼 수 있고, 들판에는 사람이 반복해서 지나간 흔적이 남습니다. 그러나 바다에는 사람이 걸어갈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어려운 상황을 쉽게 해결하셨다는 비유가 아닙니다. 출애굽의 구체적인 기억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다 앞에서 막혀 있었습니다.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다가오고 있었고, 앞에는 건널 수 없는 물이 놓여 있었습니다(출애굽기 14:10–12). 그런데 하나님이 그곳에 길을 내셨습니다.

사람들이 길이 없다고 생각하던 곳에 하나님의 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바다 가운데 길을 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길을 통과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습니다.

바다는 발자국을 보존하지 않습니다. 물 위에 사람이 걸어간 흔적은 남지 않으며, 물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 그곳에 길이 있었다는 흔적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지나가셨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분이 걸어가신 자취를 사람이 언제나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찾았지만 위로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이 달라진 것 같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왜 지금 행동하시지 않으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돌아보니 하나님이 가장 놀라운 구원을 행하셨던 때에도 그분의 발자국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원래 알 수 없는 분이시니 질문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실제로 하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구원도 기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동을 안다는 것과 그분의 길을 모두 따라가며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다만 이 말을 근거로 시인의 현재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우리가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은 현재의 문제에 대한 숨겨진 해답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대신 시인은 출애굽이라는 이미 알려진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길이 인간에게 항상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바다 한가운데 길이 있었다는 사실만큼이나, 그 길을 내신 분의 발자국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둥과 번개가 지나간 뒤에 남는 양 떼

시편 77:21 본문 →

당신은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당신의 백성을 양 떼처럼 이끄셨습니다.시편 77:21 · 두루새김

시편의 마지막은 뜻밖에도 아주 조용합니다.

방금 전까지 바다는 몸부림치고,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온 세상을 밝혔습니다. 땅이 떨며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남는 것은 양 떼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위엄을 다시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다가 어떻게 갈라졌는지도 반복하지 않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앞서 등장한 모든 능력의 이미지에 방향을 부여합니다. 하나님이 바다를 움직이시고, 깊은 물을 떨게 하시며,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것은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백성을 이끄셨습니다.

양 떼는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강한 군대가 아닙니다. 방향을 잡아 줄 목자가 필요하고, 위험한 길에서는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시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바로 그 양 떼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뒤흔드는 위엄을 가지신 분이지만, 그분의 백성에게는 길을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모세와 아론의 손을 통해」 이끄셨습니다. 앞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오른손이 문제였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이 자신의 팔로 백성을 구해 내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모세와 아론의 손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실제 사람들의 손을 통해 백성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부름받아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근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전달하고 그분의 백성을 인도하도록 세워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다스리시는 것과 사람의 역할을 경쟁 관계로 놓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시편 전체의 또 다른 대조를 완성합니다. 처음에 시인은 고난의 밤에 자신의 손을 뻗었습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오른손이 달라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기억하는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팔로 백성을 구해 내셨고, 모세와 아론의 손을 통해 그들을 이끄셨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뻗어 있는 자신의 손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구원하는 팔과 그분이 사용하신 사람들의 손에 이르는 흐름입니다.

시인은 자기 손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한 백성도 자기 힘으로 바다를 건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갈 수 없는 곳에서 길을 내셨고, 그들을 이끄셨습니다.

아직 답을 얻지 못했지만,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시편 77:1–21 본문 →

시편 77편은 고통에서 확신으로 곧장 나아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끝나 버린 것은 아닌지 물었습니다. 그 질문을 경솔한 것으로 취급하거나 곧바로 거두어들이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행적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어떻게 일하셨는지 안다고 해서, 그분이 지금 왜 침묵하시는 것 같은지 자동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시인은 이 간격을 없애지 않습니다. 그는 고난의 이유를 알아낸 것이 아닙니다. 대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하나님이 실제로 하셨던 일까지 지워 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기도하지만 상황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고 계시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이전에는 위로가 되었던 성경 말씀이나 예배의 기억이 오히려 더 아프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시편 77편은 그러한 경험을 믿음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단순하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깊이 기억하고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바로 그 이유로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시인은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난에서 구원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를 잠 못 들게 했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처음의 질문들에 직접적인 대답이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아직은 한 사람의 밤입니다.

그는 잠들지 못했고, 하나님이 달라지신 것 같아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그는 바다를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 바다 가운데 하나님의 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길은 있었지만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편은 거기서 한 장면을 더 보여 줍니다.

큰 물이 물러간 길을 따라 한 무리의 양 떼가 지나갑니다. 그들은 스스로 바다에 길을 낸 것이 아닙니다. 모세와 아론의 손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을 이끄셨습니다.

시편 77편은 시인의 현재 고통이 어떻게 끝났는지 알려 주지 않은 채, 바로 그 장면에서 멈춥니다.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지만, 백성은 길을 지나왔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