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23장 · 지혜의 시작
한 사람을 보시는 하나님
집회서 16장은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착각을 다룹니다.
첫 번째는 사람이 많으면 든든하다는 생각입니다. 자녀가 많고 가문이 번성하면 미래가 안전하리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녀가 아무리 많아도 그 수를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 자신은 눈에 띄지 않으리라는 생각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피조물 가운데 자신처럼 작은 존재를 하나님이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는 많은 사람을 자신의 안전으로 삼고, 다른 하나는 많은 사람을 자신의 은신처로 삼습니다. 두 생각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모두 숫자로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리려 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이 두 착각을 바로잡기 위해 마지막에 뜻밖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바로 천지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만물을 질서 있게 세우셨다는 사실이, 어째서 자녀의 수를 의지하지 말라는 경고와 연결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따라가면 집회서 16장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한 사람이 천 명보다 낫다 — 숫자가 아니라 삶의 방향
첫 문장은 상당히 거칠게 들립니다.
쓸모없는 자녀가 많기를 바라지 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아들들을 두고 기뻐하지 마라.집회서 16:1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많은 자녀는 일반적으로 복으로 여겨졌습니다. 자녀들은 가문의 이름을 이어 가고, 집안의 일손을 보태며, 부모가 늙었을 때 돌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자녀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그가 문제 삼는 기준이 드러납니다.
자녀가 많아져도 그들이 주를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두고 기뻐하지 마라.집회서 16:2 · 두루새김
문제는 자녀의 존재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방향입니다. 여기서 「쓸모없는」이라는 거친 표현도 사람이 타고난 가치나 능력을 평가한다기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이 가져오는 결과를 강조하는 지혜문학의 표현으로 읽어야 합니다.
스승이 경계하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녀가 많다는 사실 자체를 미래의 보증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그들이 오래 살 것이라고 믿지 말고, 그들의 자리에 기대를 걸지 마라. 한 사람이 천 명보다 낫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녀를 두느니 자녀 없이 죽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집회서 16:3 · 두루새김
「한 사람이 천 명보다 낫고」라는 말은 단순히 훌륭한 개인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정도의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수가 많아지는 것이 반드시 참된 번영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그 의미가 4절에서 사회 전체로 확대됩니다.
깨달음이 있는 한 사람 덕분에 도시에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될 것이지만, 법을 어기는 사람들의 지파는 황폐해질 것이다.집회서 16:4 · 두루새김
스승에게 「깨달음」은 개인의 지적 능력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세우는 지혜입니다. 반대로 법을 어기는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더라도 자신들이 의지하는 공동체 자체를 무너뜨립니다.
이렇게 보면 처음의 자녀 이야기는 단순한 가정교육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집안에서 시작된 질문이 도시와 지파의 운명으로 넓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5절에서 스승은 자신이 그런 일을 직접 보고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제 그는 개인의 관찰을 넘어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역사에서 사례들을 찾아냅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했다고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6절에서는 갑자기 불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죄인들의 모임에서 불이 타오를 것이고, 말을 듣지 않는 민족 가운데서 분노가 타올랐다.집회서 16:6 · 두루새김
앞 단락의 「도시」와 「지파」가 여기서는 「모임」과 「민족」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스승이 보여 주는 것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생기는 안전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불의를 행할 때 찾아오는 심판입니다.
첫째는 옛 거인들입니다(16:7).
주께서는 옛 거인들을 용서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자기 힘을 믿고 주께 맞섰다.집회서 16:7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창세기 6:4에 등장하는 고대의 거인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6장은 인간의 악이 땅에 가득해지고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하시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창세기 6:5–7).
힘이 크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의 안전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둘째는 롯이 나그네로 살던 곳의 사람들입니다(16:8).
이는 소돔의 멸망을 떠올리게 합니다(창세기 19:1–29). 집회서는 그들의 죄를 특별히 「교만」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에스겔 16:49와도 잘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소돔의 죄를 교만과 풍족함, 그리고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돕지 않은 태도로 설명합니다.
교만은 단순히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자기 풍요와 힘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손을 내밀지 않는 삶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죄 속에서 우쭐해진 「멸망에 이른 민족」입니다(16:9).
이들을 가나안의 심판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9:4–5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이유를 이스라엘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 민족들의 악과 하나님의 약속에서 찾습니다.
다만 집회서 16:9 자체는 해당 민족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특정 집단으로 확정하기보다는 죄를 자랑하는 민족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강조에 주목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넷째는 걸어서 싸우는 군사 60만 명입니다(16:10).
고집을 꺾지 않고 한데 모인, 걸어서 싸우는 군사 60만 명도 마찬가지로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다.집회서 16:10 · 두루새김
앞의 사례들이 주로 먼 옛날의 사람들과 다른 민족들을 떠올리게 했다면, 이번에는 이스라엘 자신의 역사입니다.
출애굽기 12:37은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걸어서 싸우는 군사가 60만 명가량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민수기 14:26–35에서는 광야에서 반역한 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판결이 내려집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판결에서 예외로 언급됩니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구원을 경험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함께 모인 수많은 사람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거인의 힘도, 도시의 번영도, 민족의 규모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집단의 소속도 불의를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같은 일을 한다고 그 일이 옳아지는 것은 아니며, 많은 사람이 함께 책임을 진다고 각 사람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 스승은 수많은 사람에게서 다시 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립니다.
한 사람의 완고함도, 한 사람의 인내도 잊히지 않는다
고집 센 사람이 단 한 명뿐이라도, 그가 벌을 피한다면 놀라운 일이다. 자비와 분노가 모두 주께서 내리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죄를 용서할 힘이 있고 분노를 쏟아 내신다.집회서 16:11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앞의 「한 사람이 천 명보다 낫고」라는 선언과 묘하게 호응합니다. 앞에서는 지혜로운 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보다 나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고집 센 사람이 단 한 명뿐이라도 그가 심판에서 저절로 제외되지는 않습니다.
숫자가 많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고, 숫자가 적다는 것도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비가 크다면 심판이 약해져야 하고, 심판이 엄격하다면 자비가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두 성품을 서로 반대되는 능력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의 자비가 큰 만큼 그분의 꾸짖음도 크다. 주께서는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 그를 심판하실 것이다.집회서 16:12 · 두루새김
하나님은 사람이 속한 집단의 크기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지가 판단의 대상입니다.
죄인은 빼앗은 물건을 가지고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는 사람이 오래 참은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사람이 베푼 자선을 하나하나 인정해 주십니다.
소돔의 교만은 다른 사람의 궁핍을 외면하는 삶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일 가운데는 다른 사람을 향한 자비가 있습니다.
스승은 여기서 선행을 많이 쌓으면 하나님에게서 보상을 사낼 수 있다는 거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악을 행한 사람이 부당하게 얻은 이익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으며, 반대로 선을 행하면서 기다리는 사람의 삶도 하나님 앞에서 무의미해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셔서 나를 기억하지 못하실까?
17절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말하지 마라. 「나는 주님을 피해 숨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누가 나를 기억하기나 하겠느냐? 이 많은 백성 가운데 나를 기억할 리가 없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피조물 가운데 내 목숨이 대체 무엇이냐?」집회서 16:17 · 두루새김
그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창조 세계가 너무나 크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이 자신처럼 작은 존재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이실 리 없다고 판단합니다.
이 질문에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이 들어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은 방대한 세계의 극히 작은 일부이며 하나님의 모든 일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실에서 이끌어 낸 결론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도 인간을 세밀하게 살피지 못하신다는 뜻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흔들린다는 말은 누구의 주장인가?
18–19절에서는 하늘과 깊은 구렁과 땅, 산들과 땅의 기초가 하나님 앞에서 흔들리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한 가지 읽기는 18–19절부터 스승의 반박이 시작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기만 해도 온 창조 세계가 떨 정도라면, 사람이 어떻게 그분의 눈을 피해 숨을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다른 읽기는 17–22절 전체를 앞에서 등장한 사람의 주장으로 봅니다. 하늘과 땅조차 하나님 앞에서 흔들릴 만큼 그분은 크신데, 그런 분이 어찌 작은 인간 한 사람의 일을 살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읽기는 20–22절에 이어지는 의문문들과 잘 연결됩니다.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하시는 일을 누가 곰곰이 생각하겠느냐?」집회서 16:20 · 두루새김
그리고 23절에서 스승은 이러한 생각들을 「깨달음이 모자란 사람」의 생각이라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전체를 반론자의 말로 이해할 문맥적 근거가 충분합니다. 다만 그리스어 본문 자체가 현대적인 인용부호로 말의 범위를 확정해 주지는 않으므로, 18–19절을 스승의 반박으로 읽는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의 중심 문제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인간의 작음을 어떤 관계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21절에서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폭풍과 하나님의 감추어진 일들이 언급됩니다. 여기서 반론자의 생각을 따라가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활동은 그분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가 됩니다.
「의로운 일들을 누가 알리겠느냐? 또 누가 기다리겠느냐? 언약은 멀리 있기 때문이다.」집회서 16:22 · 두루새김
22절의 「언약은 멀리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도 이런 불신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이 아직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것을 신뢰하거나 기다릴 이유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13절에서 「오래 참은 일」로 풀어 옮긴 그리스어는 휘포모네(ὑπομονή)이고, 22절의 「기다리겠느냐」는 같은 어근의 휘포메네이(ὑπομένω)입니다. 스승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선한 삶을 잊지 않으신다고 믿습니다. 반론자는 당장 확인할 수 없다면 기다림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차이는 하나님의 일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스승 역시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길을 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쟁점은 내가 아직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고 결론 내려도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지적한 뒤, 스승은 비로소 자신의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스승이 천지창조로 돌아가는 까닭
얘야, 내 말을 듣고 지식을 배워라. 내 말에 마음을 기울여라.집회서 16:24 · 두루새김
지금까지 스승은 잘못된 생각을 소개하고 역사적 사례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아버지가 자녀를 가르치는 듯한 목소리로 돌아옵니다.
나는 가르침을 신중하게 저울질하여 보여 주고, 지식을 정확하게 전한다.집회서 16:25 · 두루새김
스승은 막연한 확신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말을 신중하게 헤아리고 정확히 전달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주께서 만드신 것들은 처음부터 그분의 판단에 따랐다. 주께서는 그것들을 만드실 때부터 각각의 몫을 나누어 주셨다.집회서 16:26 · 두루새김
하나님이 인간의 행동을 판단하신다는 사실은 그분이 만물을 세우실 때부터 지혜와 질서로 다스리셨다는 더 큰 그림 속에 놓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일단 만들어 놓으시고 관심을 끊으신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각각의 피조물에 몫을 나누어 주시고, 그들이 맡은 일을 지속하도록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자기가 만드신 것들을 영원히 질서 있게 놓으셨고, 그것들이 다스릴 일도 대대로 정해 놓으셨다. 그것들은 굶주리지도 지치지도 않았고, 제 일을 그만두지도 않았다.집회서 16:27 · 두루새김
그것들은 저마다 이웃을 짓누르지 않았고, 영원히 주의 말을 거역하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16:28 · 두루새김
본문은 창조 세계가 지속적이고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시적으로 묘사합니다. 특히 일정한 질서를 따라 움직이는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자연의 움직임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스승은 피조물의 질서를 설명하면서 뜻밖에도 「이웃」이라는 관계의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는 각각이 맡은 자리를 따라 움직이고 다른 것을 밀어내거나 억누르지 않습니다. 죄인들은 모여서 반역했고, 법을 어기는 사람들의 지파는 황폐해질 것이며, 교만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창조 세계의 질서와 인간 공동체의 무질서가 대조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연현상의 규칙성을 인간사회의 윤리와 그대로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27–28절은 우선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제 몫을 수행한다는 창조 신앙의 진술입니다. 하지만 「이웃을 짓누르지 않았고」라는 표현은 분명히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도록 지어진 세계 안에서, 인간은 오히려 서로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창조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하나님의 시선을 하늘에서 땅으로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욥기 38:31–33에서 하나님은 별자리와 하늘의 법칙을 들어 인간에게 질문하십니다. 예레미야 31:35–36 역시 해와 달과 별의 질서를 하나님이 세우신 것으로 말합니다. 집회서 15:14–17은 인간에게 선택의 능력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창조 세계의 질서가 인간의 모든 행동을 미리 결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같은 눈길이 땅을 흔들고, 땅을 가득 채운다
그 뒤 주께서는 땅을 바라보셨고, 자신의 좋은 것들로 땅을 가득 채우셨다.집회서 16:29 · 두루새김
「그분이 산들과 땅의 기초를 바라보시면, 그것들은 모두 두려워 떤다.」집회서 16:19 · 두루새김
하나님의 눈길은 창조 세계를 떨게 할 만큼 위엄이 있지만, 동시에 그 세계를 좋은 것들로 가득 채우는 생명의 눈길이기도 합니다.
17절의 사람은 바로 이 눈길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시므로 자신처럼 작은 존재는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이 보여 주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땅을 바라보시고 그곳을 생명으로 채우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은 피조물에 대한 무관심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살아 있는 온갖 생물로 땅 위를 덮으셨고, 그 생물들은 땅으로 돌아간다.집회서 16:30 · 두루새김
이 마지막 문장은 처음의 자녀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스승은 자녀들이 「오래 살 것이라고 믿지 말고」라고 경고하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는 모든 생물이 결국 땅으로 돌아간다는 사실로 장을 마무리합니다.
많은 자녀도, 큰 가문도, 강한 민족도 생명에 끝이 있다는 사실을 없앨 수 없습니다. 인간은 수가 많아질 수 있지만, 그 수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하나님이 땅을 생물들로 가득 채우시는 장면입니다(창세기 1:20–25). 그러나 마지막 행은 창세기 3:19의 말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전도서 3:20 역시 모든 생물이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의 삶은 얼마나 중요한가?
하나님은 집단만을 상대하시고 개인을 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거대한 세계를 다스리시기에 작은 일을 돌보실 여력이 없는 분도 아닙니다. 스승은 그 감추어진 일들의 시기와 방식을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이미 드러내신 창조 세계의 질서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선행이 즉시 보상받고 모든 악행이 곧바로 벌을 받는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오히려 13절과 22절이 보여 주듯 기다림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중 많은 것은 인간에게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집회서 16장은 마지막에 사람의 업적이나 심판의 장면을 놓지 않습니다.
스승은 우리의 시선을 다시 땅으로 향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바라보십니다. 그러자 땅은 좋은 것들로 가득해지고, 수많은 생명이 땅 위를 덮습니다. 그 생명들은 저마다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다가 마침내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 많은 생명 가운데 인간도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에는 끝이 있지만, 그 짧은 삶은 무관심한 세계에 내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고 좋은 것들로 채우신 땅 위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집회서의 스승은 우리가 얼마나 크고 많은 것을 남길 수 있는가보다, 바로 그 땅 위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