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17장
이 장의 자리 · 1–23장 · 지혜의 시작
흙으로 지어진 사람에게 돌아올 길을 주시다
집회서 17장은 인간의 존엄과 유한함을 한 문장에 담으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은 뜻밖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유한한 사람에게 땅을 다스릴 힘을 주시고,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며,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선과 악을 알려 주시고, 자신의 위대한 일들을 보여 주셨으며, 생명의 율법과 언약까지 주셨습니다.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존재라면, 왜 이렇게 많은 것을 맡기셨을까요?
스승은 인간의 위대함을 찬양하기 위해 창조 이야기를 꺼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흙에 불과하니 아무 가치도 없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것이 얼마나 큰지 보여 준 다음, 그 선물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1절에서는 사람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24–26절에서는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초대가 반복됩니다.
사람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전에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돌아감 사이에 인간의 삶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능력과 책임,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자비가 모두 이 유한한 시간 안에서 펼쳐집니다.
유한한 존재에게 다스릴 권한을 맡기시다
스승은 인간의 창조를 설명하면서 창세기의 두 장면을 함께 불러옵니다.
주는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했다.집회서 17:1 · 두루새김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창세기 2:7을,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창세기 3:19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어지는 하나님의 형상과 다스릴 힘은 창세기 1:26–28과 연결됩니다.
사람들에게 정해진 날수와 시간을 주었고, 땅 위에 있는 것들을 다스릴 힘을 주었다.집회서 17:2 · 두루새김
보통 우리는 정해진 시간을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래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정해진 날이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승은 그것까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말합니다.
인간은 절대적인 지배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다스리는 땅에서 나왔고, 언젠가는 그 땅으로 돌아갈 사람입니다. 따라서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그 땅과 무관한 존재로서 마음대로 처분한다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 다스릴 권한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며,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 자신도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입니다.
그들에게 알맞은 힘을 입혔고, 자신의 형상대로 그들을 만들었다.집회서 17:3 · 두루새김
힘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자기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혀 주신 것입니다. 스승은 인간의 능력을 마치 하나님께 받은 옷처럼 묘사합니다.
이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형상」은 창세기 1:26–27의 표현을 직접 이어받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형상이 정확히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정의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능력만을 뜻한다고 할 수도 없고, 몸의 모습이나 다스릴 권한만을 뜻한다고 한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집회서의 이야기 순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맡겨진 권한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땅 위의 생물들을 다스리도록 세워졌습니다.
4절에서는 사람이 들짐승과 새들을 다스리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사람을 두려워하게 하셨다는 표현은 창세기 9:2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동물들이 인간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인간의 무제한적인 폭력을 정당화할까요?
집회서 17장은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규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의 권한이 독립적이거나 절대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능력과 지위는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일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할 만큼 높아졌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권한을 책임 있게 행사할 위치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눈을 주시고, 그 마음에 자신의 눈을 두셨다
6절에는 인간의 여러 능력이 빠르게 나열됩니다.
사람들에게 생각할 힘과 혀와 눈을 주었고, 귀와 마음을 주어 생각하게 했다.집회서 17:6 · 두루새김
눈과 귀와 혀는 몸의 기관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그것들을 생각할 힘과 마음 사이에 놓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단순히 감정을 느끼는 곳이 아닙니다. 고대 성경의 언어에서 마음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심하는 중심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마음으로 헤아리고 혀로 표현할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들을 깨달음의 지식으로 가득 채웠고,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알려 주었다.집회서 17:7 · 두루새김
여기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는 단순히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차이가 아닙니다. 이어지는 율법과 불의에 관한 명령까지 생각하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도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모든 것을 아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알고 배울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존재입니다.
마음 위에 놓인 하나님의 눈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 주려고, 그들의 마음 위에 자신의 눈을 두었다.집회서 17:8 · 두루새김
보통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살피신다는 말을 들으면 심판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은 숨겨진 생각까지 알고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이 장에서도 하나님의 눈은 인간의 행동을 살피는 눈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8절에서 그 눈이 등장하는 이유는 다릅니다.
본문은 이 독특한 표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눈이 인간의 양심이나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 자체를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문장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눈이 인간의 마음에 향하는 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일을 깨닫게 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단순히 볼 수 있는 눈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보여 주시는 것을 통해 인간이 그 의미를 깨닫게 하십니다. 창조 세계는 인간이 감각으로 경험하는 대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아 가는 자리가 됩니다.
그들은 주가 한 위대한 일들을 이야기하려고, 그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할 것이다.집회서 17:10 · 두루새김
앞에서 인간에게 혀를 주셨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서 밝혀집니다. 인간은 보고 듣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것을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지식의 중요한 목적은 세상을 마음대로 이용하는 능력을 늘리는 데만 있지 않고, 그 세계를 지으신 분을 알고 그분의 일을 말할 수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에게 주어진 명령은 이웃에 관한 것이었다
11절에서 창조 이야기는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주는 그들에게 지식을 더해 주었고, 생명의 율법을 물려주었다.집회서 17:11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각할 능력과 지식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식을 「더해 주었고」라고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흔히 지켜야 할 의무나 금지 조항의 모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승은 그것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물려주신 소중한 몫처럼 표현합니다. 생명의 율법이라는 이름 역시 그 율법이 어떤 목적을 지니는지 드러냅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과 무관하게 주어진 규칙이 아니라 생명에 관계되는 가르침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하나님은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고 자신이 정한 법을 알려 주십니다(17:12). 1–10절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율법과 언약,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경험은 특별히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굽기 19–24장).
스승은 창조에서 언약으로 넘어갑니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창조의 선물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 주신 선물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 것입니다. 「그들」이라는 표현은 앞서 말한 인류를 이어 받습니다. 11–14절에서는 시내산 언약을 떠올리게 하는 율법과 언약의 언어가 앞에 나섭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말
그들의 눈은 위대한 영광을 보았고, 그들의 귀는 그들의 목소리에 담긴 영광을 들었다.집회서 17:13 · 두루새김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영광에서 이웃으로
주는 그들에게 말했다. 「온갖 불의를 멀리하도록 조심해라.」 그리고 그들 각자에게 이웃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집회서 17:14 · 두루새김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보았다는 사실은 인간을 다른 사람들의 삶과 무관한 종교적 세계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 전체에 율법을 주셨지만, 그 명령은 각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지켜 줄 수 없는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9:18의 이웃 사랑 명령이나 신명기 24:17–22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규정을 떠올리면 이 연결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신도 영광스러워지는 일이 아니라, 자기 곁의 이웃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책임 있게 선택하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두루새김이 「그들의 목소리」라고 옮긴 부분에는 원문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제시된 그리스어 본문의 포네스 아우톤은 문법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뜻합니다. 반면 포네스 아우투라는 읽기는 「그의 목소리」를 뜻합니다. 실제로 전해 내려온 본문에서 두 형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맥으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자연스럽습니다. 출애굽기 19:16–19에는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장면과 함께 우레와 나팔 소리가 등장하고, 신명기 4:12에서는 이스라엘이 불길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두루새김이 따른 문면이 「그들의 목소리」인 이상, 이를 단순히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확정해 인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보시지만, 자비도 잊지 않으신다
그들이 살아가는 길은 언제나 주 앞에 있고, 그의 눈을 피해 숨지 못할 것이다.집회서 17:15 · 두루새김
8절에서 하나님의 눈은 인간이 그분의 위대한 일을 깨닫게 하는 일과 연결되었습니다.
이제 그 눈은 인간의 삶을 살피는 눈으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살아가는 길」은 단순히 사람이 이동하는 경로가 아닙니다. 지혜문학에서 길은 사람이 선택하고 걸어가는 삶의 방향을 나타내는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주의 몫이다
주는 민족마다 지도자를 세웠고, 이스라엘은 주의 몫이다.집회서 17:17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신명기 32:8–9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이 민족들에게 몫을 나누어 주시고,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의 몫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집회서의 「민족마다 지도자를 세웠고」라는 표현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한 가지 가능성은 각 민족을 다스리는 인간 지도자들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민족들과 관련된 하늘의 존재들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2:8의 고대 그리스어 전승에는 하나님의 천사들을 기준으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다는 표현이 나타나고, 다니엘 10:13, 20–21에서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군주들 및 이스라엘과 관계된 미가엘이 등장합니다. 이런 본문들은 두 번째 읽기의 배경이 됩니다.
그러나 집회서 17:17 자체는 「지도자」라고 말할 뿐 그 정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쪽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 민족의 질서를 세우셨다는 사실과, 이스라엘이 특별히 그분의 몫으로 불린다는 사실이 나란히 놓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몫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죄가 특별히 보호받는다는 뜻일까요?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해처럼 주 앞에 환히 드러나 있고, 주의 눈은 그들이 살아가는 길을 끊임없이 살핀다.집회서 17:19 · 두루새김
그들이 저지른 불의는 주에게 숨겨지지 않았고, 그들의 모든 죄는 주 앞에 있다.집회서 17:20 · 두루새김
하나님의 몫이라는 특별한 관계가 그분의 판단을 무효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의 언약을 아는 공동체라면,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해는 밝아서 감출 수 없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이 하는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해처럼 드러나는 행위와 도장처럼 보존되는 자비
그러나 스승의 관심은 죄를 찾아내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베푼 자선은 도장처럼 주 곁에 있고, 주는 사람이 베푼 호의를 눈동자처럼 지킬 것이다.집회서 17:22 · 두루새김
도장은 문서나 물건에 권위와 소유, 확인의 표시를 남기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중요한 거래나 약속의 증거를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베푼 자선이 주 곁에 있는 도장과 같다는 것은 그 선행이 잊히거나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습니다.
눈동자는 작고 연약하지만 매우 소중하며 세심하게 보호되는 부분입니다. 신명기 32:10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눈동자처럼 지키셨다고 말합니다. 시편 17:8에서도 시인은 자신을 눈동자처럼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집회서는 그와 비슷한 이미지를 사람의 자비로운 행동에 적용합니다.
하나님의 눈이 인간을 살핀다고 할 때 우리는 쉽게 두려움을 느낍니다. 숨겨 둔 잘못까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눈은 선한 일도 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도움받은 사람조차 나중에는 잊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도장처럼 간직하시고 눈동자처럼 보호하십니다.
자선이 하나님의 사랑을 돈으로 사는 수단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승은 앞에서 모든 지식과 능력과 율법이 먼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선행은 이미 받은 선물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23절은 하나님이 일어나 사람들에게 갚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갚아 주시는 구체적인 시점과 방식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한 일이 사라지지 않으며, 그분이 그것에 응답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죄를 알고 계시고 마침내 갚으신다면,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선 사람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돌아올 길을 마련하셨다
그러나 주는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들에게 돌아올 길을 열어 주었고, 더는 참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격려했다.집회서 17:24 · 두루새김
회개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탈출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 주신 돌아올 길입니다.
이는 단순히 죄를 짓고 회개해야 하는 사람만을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견디느라 이제는 지쳐 버린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향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더는 참기 어려워지고 흔들리는 사람도 그분의 격려를 필요로 합니다.
앞 장에서 경건한 이의 인내를 하나님이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면(16:13), 이제는 더는 참기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다가가 격려하신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스승의 목소리는 직접적인 초대로 바뀝니다.
주에게 돌아가 죄를 버려라. 주 앞에서 간절히 빌고, 잘못을 줄여라.집회서 17:25 · 두루새김
지극히 높은 이에게 되돌아가 불의에서 돌아서고, 역겨운 짓을 몹시 미워해라.집회서 17:26 · 두루새김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말하면서 불의를 계속 붙잡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죄에서 돌아선다는 것을 단순히 잘못을 후회하는 감정으로 줄여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특히 25절에서 「잘못을 줄여라」는 명령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 말은 잘못을 조금만 저지르면 충분하다는 허가가 아닙니다. 앞뒤에서 죄를 버리고 불의에서 돌아서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간절히 비는 일이 실제 행동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도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줄이고 버려야 합니다.
죽은 뒤 누가 찬양하겠느냐는 질문의 의미
살아서 감사 찬양을 드리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누가 하데스에서 지극히 높은 이를 찬양하겠느냐?집회서 17:27 · 두루새김
여기서 「하데스」(ᾅδης)는 그리스어 성경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스올」과 대응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서처럼 감사 찬양이 사라진다. 살아 있고 건강한 사람은 주를 찬양할 것이다.집회서 17:28 · 두루새김
스승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직접적인 목적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시편 6:5는 죽음 가운데서 누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스올에서 누가 감사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시편 115:17은 죽은 사람들이 여호와야훼를 찬양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이사야 38:18–19에서는 스올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은 그분을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공통적으로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단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고, 그분께 감사하며,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할 기회가 주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집회서 17:27–28의 문면은 죽은 사람에게서는 감사 찬양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마치 죽음 이후에도 같은 방식의 회개와 찬양이 계속된다고 가르치는 본문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이 두 절만으로 구약 전체의 죽음 이후에 관한 모든 관점을 정리할 수도 없습니다. 다니엘 12:2처럼 죽은 사람의 부활을 분명하게 말하는 본문도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근거는 하나님의 자비다
주의 자비는 얼마나 크며, 그에게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용서는 얼마나 큰가!집회서 17:29 · 두루새김
사람이 먼저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아닙니다. 24절에서 이미 하나님은 돌아올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29절은 그 길이 그분의 크신 자비와 용서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에게 열려 있는 자비의 길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해조차 빛을 잃는데, 인간이 어찌 완전하겠는가?
사실 사람에게 모든 것이 갖추어질 수는 없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 존재이기 때문이다.집회서 17:30 · 두루새김
인간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을 이루지 못하며, 끝없이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죄를 정당화하는 변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자비롭게 받아 주시는 사람은 처음부터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해보다 더 밝은 것이 무엇이냐? 그런 해도 빛을 잃는다. 그리고 악한 사람은 살과 피를 생각할 것이다.집회서 17:31 · 두루새김
해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뚜렷하게 빛나는 존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 해조차 빛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일식처럼 해의 빛이 가려지는 현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해보다 훨씬 약하고 한계가 있는 인간이 자신의 힘과 판단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주 자신이 하늘 높은 곳의 군대를 살핀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흙과 재다.집회서 17:32 · 두루새김
왕과 백성,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모두 흙과 재입니다. 스승은 이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그러한 존엄과 능력이 인간을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소중하지만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받았지만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자기 능력을 자랑하는 일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돌아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의 「그리고 악한 사람은 살과 피를 생각할 것이다」라는 표현은 앞의 해에 관한 문장과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리스어 전승에는 「악한 자」로 읽히는 형태와 「악한 것」으로 읽히는 형태가 나타납니다. 또한 「살과 피」를 생각의 대상으로 읽을 것인지, 생각하는 주체로 읽을 것인지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두루새김처럼 악한 사람이 살과 피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읽으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앞의 해에 관한 비유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읽기는 살과 피로 이루어진 인간이 악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인간의 한계와 잘못에 빠지기 쉬운 연약함이 연결됩니다. 두 번째 읽기가 주변 문맥에 더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측면은 있지만, 두루새김이 따르는 문면을 그대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불확실한 행을 지나치게 확대하기보다, 양쪽에서 분명하게 말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하늘 높은 곳의 군대」가 구체적으로 하늘의 존재들을 가리키는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포함하는 표현인지는 문맥만으로 완전히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표현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인간이 사는 땅에 한정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러나 인간의 삶이 짧다는 사실이 그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짧은 시간은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눈으로 그분의 일을 보고, 귀로 말씀을 듣고, 혀로 감사하며,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길을 잘못 들었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시간입니다.
스승은 마지막에 인간을 다시 흙과 재 앞에 세웁니다.
우리는 높은 하늘의 군대를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작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 눈은 멀리 있는 하늘만을 향하지 않습니다. 그 눈은 우리가 걷는 길을 살피고, 우리가 베푸는 자비를 지키며, 우리가 돌아올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길까지 보여 줍니다.
흙에서 시작한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무엇을 바라보고, 누구를 사랑하며, 어느 길로 돌아설 것인가.
집회서 17장은 그 물음을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에 남깁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