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장 · 부유한 이들에게 주는 경고
하나님은 누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가
야고보서의 마지막 장은 울음소리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처음 울도록 명령받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아닙니다. 부유한 사람입니다.
자, 이제 부유한 이들이여, 여러분에게 닥쳐오는 비참한 일들을 두고 소리 높여 우십시오.야고보서 5:1 · 본디새김
조금 뒤에는 또 다른 소리가 들립니다. 일꾼들에게 지급되지 않은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추수하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귀에 들어갑니다. 장의 후반부에서는 고난을 겪는 사람들의 기도와 병든 사람을 위한 간구가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진리에서 벗어나 헤매는 한 사람을 돌이키는 이야기로 편지가 끝납니다.
서로 다른 장면들이지만, 한 가지 질문이 이들을 연결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시며,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그 고통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안전하게 지키려고 재물을 쌓았지만, 야고보는 그 재물이 오히려 주인을 고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고난을 겪는 신자들에게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오래 참으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신뢰하며 자기 삶을 지키는 태도입니다.
그 신뢰는 기도로 이어지고, 기도는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야고보서 5장은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있다는 믿음이 어떻게 억압받는 사람의 견딤과 공동체의 자비로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재물은 왜 주인을 고발하는 증인이 되는가
여러분의 재물은 썩었고 여러분의 옷은 좀먹었습니다.야고보서 5:2 · 본디새김
야고보는 재물이 장차 썩을 것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썩었고, 옷도 이미 좀먹었다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앞으로 닥칠 비참한 일들을 예고했지만, 여기서는 마치 심판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재물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예언자들이 미래의 심판을 그 확실성 때문에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선포하는 방식과 잘 어울립니다. 동시에 실제로 재물을 오래 쌓아 두었을 때 나타나는 부패와 손상의 이미지도 사용합니다. 야고보는 재물의 부패를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판결과 연결합니다.
여러분의 금과 은은 녹슬었고, 그 녹이 여러분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것이며 불처럼 여러분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날들에 재물을 쌓았습니다.야고보서 5:3 · 본디새김
금과 은은 당시에도 가치를 보존하는 재산으로 여겨질 수 있었고, 특히 금은 일반적인 조건에서 쉽게 녹스는 금속이 아닙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금과 은마저 녹슬었다고 말합니다. 귀금속의 부식에 관한 화학적 진술이라기보다, 어떤 재물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강렬한 이미지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녹슨 재물은 단순히 가치가 떨어진 재산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불리한 증거」가 됩니다. 부유한 사람이 법정에서 재물을 내놓으며 자신의 성공과 안전을 증명하려 하지만, 그 재물은 주인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인을 고발합니다.
왜 그럴까요? 뒤의 4절을 읽으면 드러납니다. 그들이 쌓은 재물은 일꾼들의 정당한 품삯을 떼어 먹은 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발의 증거가 되는 것은 재물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재물을 모으고 소유하는 방식에 담긴 불의입니다.
야고보는 부유함 자체를 인간의 모든 죄와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착취하면서 재물을 축적하고, 그 재물을 자신의 안전과 영광의 근거로 삼는 태도를 심판합니다.
그 증거는 주인의 살을 먹습니다. 그들은 재물을 쌓아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 했지만, 재물을 소유한다고 생각했던 그들을 마지막에는 그 재물이 드러내고 파괴합니다. 「불처럼」이 녹이 살을 먹는 모습에 붙든, 불을 쌓아 두었다는 이미지로 뒤에 붙든, 두 읽기 모두 같은 역설을 보여 줍니다.
안전을 위해 쌓은 것이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마지막 날들」은 단순히 인간의 생애 마지막 시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때라는 종말론적 의미를 지닙니다. 야고보는 독자들이 이미 그런 날들의 현실 속에 살아간다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에 부유한 사람들은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보며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시간 감각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정말로 오래 남을 것인지, 무엇이 마지막에 자신의 편에 설 것인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다만 야고보의 관심은 재물의 덧없음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재물을 모으는 과정에서 누가 고통받았는지를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불처럼」을 앞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에 붙이면 녹이 불처럼 사람의 살을 먹는 모습이 되고, 구두점을 달리 찍어 뒤의 재물 축적에 연결하면 불을 쌓아 두었다는 이미지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고대 사본의 구두점만으로 이 문제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이 대목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19–21에서 땅에 쌓아 둔 재물이 좀먹거나 없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시며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가르치신 말씀과 가깝습니다. 두 본문은 재물의 덧없음과 잘못된 축적을 함께 경계합니다.
지급되지 않은 품삯이 하나님께 소리를 지른다
보십시오, 여러분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의 삯이, 여러분에게 떼인 그 삯이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거두어들인 이들의 부르짖음이 만군의 주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야고보서 5:4 · 본디새김
야고보는 앞에서 재물을 법정의 증인으로 세웠습니다. 이제는 품삯이 소리를 지릅니다. 돈은 말할 수 없지만, 그 돈에는 누군가의 노동이 담겨 있습니다. 일꾼들은 실제로 몸을 움직여 수확을 거두었는데, 땅의 소유주는 마땅히 지급해야 할 대가를 주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지급되지 않은 품삯은 단순히 재산의 일부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을 돌려주지 않은 불의의 흔적입니다. 문제는 고용주가 충분히 친절하지 않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정당하게 지급해야 할 품삯을 떼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의 배경에는 구약의 율법이 있습니다. 레위기 19:13은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지 말라고 명령하고, 신명기 24:14–15는 가난하고 궁핍한 일꾼을 억누르지 말며 해가 지기 전에 그날의 품삯을 지급하라고 명령합니다. 가난한 일꾼은 그 품삯에 생계를 의지하기 때문이며, 그가 여호와야훼께 부르짖으면 그것이 고용주에게 죄가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신명기는 일꾼이 여호와야훼께 부르짖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야고보는 그 부르짖음이 이미 만군의 주님의 귀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일꾼들이 땅의 소유주에게 아무리 항의해도 대답을 듣지 못했을 수 있지만, 그들의 부르짖음은 하나님께 도달했습니다.
구약에서 「만군의 여호와야훼」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위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칭호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 위엄 있는 이름을 세계적인 전쟁이나 왕들의 정복이 아니라, 일꾼들의 떼인 품삯을 이야기하는 순간에 부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권력자들의 위대한 업적뿐 아니라, 힘없는 일꾼이 받지 못한 하루 품삯도 보고 계십니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그들의 부르짖음이 그분의 귀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보여 주는 정의는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을 비난하는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따라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지급되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요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감추려는 불의를 듣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만군의 주님」의 그리스어 표현에는 군대들을 뜻하는 히브리어를 소리대로 옮긴 말이 들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는 이사야와 아모스를 비롯한 예언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또한 이 장면은 창세기 4:10에서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벨의 피도 스스로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침묵하지 않았고, 야고보서에서는 떼인 품삯이 그 역할을 합니다. 이는 직접적인 인용이라기보다 불의의 피해가 하나님 앞에서 고발의 소리를 낸다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도살의 날에 자신을 살찌우는 사람
여러분은 땅에서 호사를 누리고 흥청거렸습니다. 도살의 날에 여러분의 마음을 살찌웠습니다.야고보서 5:5 · 본디새김
앞에서는 재물이 썩고 녹스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번에는 부유한 사람 자신이 살찌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가축을 기르는 사람은 도살할 짐승을 살찌울 수 있고, 그 짐승은 먹을 것이 풍성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그 풍성함이 다가오는 마지막 순간을 막아 주지는 못합니다.
이 비유에서 풍요는 더 이상 안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심판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되는 자기만족을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몸이 아니라 마음을 살찌웠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의를 외면하면서 자신의 만족을 키워 온 삶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그 삶이 어디까지 나아갔는지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의로운 이를 정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는 여러분에게 맞서지 않습니까?야고보서 5:6 · 본디새김
「의로운 이」는 한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의로운 사람이라는 부류를 대표하는 단수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표현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약에서 의로운 분으로 불리시며, 죄가 없으심에도 정죄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3:14; 7:52).
그러나 1–6절의 직접적인 문맥에서는 재산과 권력을 이용해 가난하고 의로운 사람들을 억누르는 일이 중심입니다. 따라서 이 절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으로 확정하기는 어렵고, 의로운 사람들을 대표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는 해석도 강합니다.
더 어려운 것은 마지막 물음입니다.
평서문으로 읽으면 의로운 사람이 억압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지 못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고, 질문으로 읽으면 의로운 이가 실제로 그들에게 맞선다는 수사적 물음이 되며, 하나님을 생략된 주어로 읽으면 하나님께서 불의한 부자들에게 맞서신다는 뜻이 됩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느냐에 따라 맞서는 이가 누구인지, 의인이 맞서는지 맞서지 못하는지가 달라집니다. 이 질문의 주어와 의미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1–6절 전체가 전달하는 판결은 분명합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안전을 보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쌓은 재물과 떼어 놓은 품삯, 그들이 억압한 사람들의 부르짖음은 모두 그들에게 불리한 증거가 되고, 그 증언은 만군의 주님께 도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불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야고보는 그들에게 즉시 복수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래 참으라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일부 그리스어 판본은 이 문장을 물음표로 마치지만, 다른 판본들은 평서문으로 처리하기도 합니다. 고대 사본의 본래 구두점이 이 해석을 확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질문으로 읽으면 이미 죽임당한 의로운 사람이 어떻게 현재형으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 의로운 이를 억압받는 의인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으면 현재형의 맞섬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고, 그의 죽음이 오히려 가해자들에게 불리한 증언이 된다는 의미로 확장할 수도 있지만, 이 마지막 설명은 본문이 직접 진술한 내용이라기보다 문맥에서 끌어낸 해석입니다. 하나님을 주어로 보면 앞 장에서 교만한 자들에게 맞서시는 하나님과 이어지지만, 「그는」의 가장 가까운 선행사는 의로운 사람이므로 이 해석 역시 어려움이 있습니다.
농부는 왜 비를 기다리는가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오래 참으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땅의 귀한 열매를 두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을 때까지 오래 참으며 그 열매를 기다립니다.야고보서 5:7 · 본디새김
「그러므로」는 앞에서 고발한 부유한 사람들의 불의와 이 권면을 잇습니다. 이것은 어려움이 있어도 참고 살라는 일반적인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의를 보고 계시며 심판하실 것이라는 선언 위에 서 있는 권면입니다.
그렇다고 오래 참으라는 명령을 불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침묵이나 체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 자신이 앞에서 부유한 사람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발했고, 그들의 불의를 덮거나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오래 참음은 정의를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정의의 최종적인 실현이 자신들의 힘에만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믿으며 고난 속에서 믿음의 방향을 잃지 않는 태도입니다.
야고보는 그 오래 참음을 농부의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농부는 씨를 뿌린 뒤 곧바로 수확하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비가 필요한데, 자신의 힘으로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기다림과 다릅니다. 열매를 바라보며 자기 몫의 일을 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기다리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농부가 기다리는 것은 「땅의 귀한 열매」입니다.
이 기다림에는 방향과 목적이 있습니다. 고난을 겪는 사람들의 오래 참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사실과 주님께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이 기다림의 근거가 됩니다.
여러분도 오래 참으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까이 와 있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5:8 · 본디새김
「주님께서 오실 때」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가리키는 중요한 표현으로 사용되었고, 7–8절에서도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오심이 가까이 있다는 말은 독자들이 날짜를 계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특정한 시점을 알려 주지 않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자신의 백성을 돌보실 때를 기대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기대가 현재의 삶을 형성합니다.
형제 여러분, 심판받지 않도록 서로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재판관이 문 앞에 서 있습니다.야고보서 5:9 · 본디새김
이제는 고난을 겪는 형제들이 서로를 원망하는 문제를 경고합니다. 고난이 길어지고 원하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마음속에 불만이 쌓이기 쉽습니다. 그 불만은 자신을 억압한 사람들에게 향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가까이에 있는 형제자매를 향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원망하지 말라는 말은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고보 자신이 바로 앞에서 일꾼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의 귀에 도달한 정당한 호소로 제시했습니다. 불의를 고발하는 것과 서로를 향해 적대적인 마음을 품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그 구별의 근거로 재판관을 등장시킵니다. 재판관은 멀리 있지 않고 문 앞에 서 있지만, 이미 문을 열고 들어왔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임박함과 기다림이 함께 있습니다. 재판관은 문맥상 하나님 또는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심판의 권한은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다.
불의를 저지른 부유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겪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원망하고 판단할 권한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심판을 기대하는 믿음은 자신의 원한을 신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시는 분 앞에서 자기 삶도 살피게 합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견디는 일이 아닙니다. 그 시간 동안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지키는가의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른 비와 늦은 비」는 고대 이스라엘 농사의 두 계절 비입니다. 이른 비는 가을철에 내려 마른 땅을 적시고 파종과 발아를 가능하게 하며, 늦은 비는 봄철에 내려 곡식이 자라고 여무는 데 도움을 줍니다. 신명기 11:14에서도 이 두 비가 땅의 수확과 연결됩니다. 「오래 참으십시오」는 분노와 조급함에 휩쓸리지 않고 오래 견디는 태도를 가리킬 수 있는 말로, 11절에 나오는 욥의 「견딤」과 완전히 같은 단어는 아닙니다. 11절의 말은 어려움 속에서 끝까지 버티는 성격이 더욱 두드러지지만, 두 표현 모두 고난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믿음의 태도를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 해당하는 파루시아는 도착이나 현존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만 「주님」이라는 칭호 자체는 문맥에 따라 하나님을 가리킬 수도 있으므로, 모든 등장에 동일한 지시 대상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욥의 견딤은 침묵이 아니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을 겪고 오래 참는 본보기로 삼으십시오.야고보서 5:10 · 본디새김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아 고난을 피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배척당하고 위협받았고(예레미야 20:1–2; 26:7–11), 엘리야도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다가 생명을 위협받았습니다(열왕기상 19:1–3).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고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고난이 반드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한 사람을 특별히 언급합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견딘 이들을 복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견딤을 들었고 주님께서 이루신 결말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속으로 깊이 가엾이 여기시고 자비로우시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5:11 · 본디새김
욥기를 실제로 읽으면, 욥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고통을 견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고(욥기 3:1–3), 하나님께 질문하며 자신이 겪는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고난의 이유를 그의 죄에서 찾으려는 친구들의 설명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욥을 야고보가 견딤의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견딤은 아프지 않은 척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질문과 탄식 속에서도 그분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물론 욥기 마지막에서 욥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이해와 발언을 다시 돌아봅니다(욥기 42:1–6). 그러나 욥의 탄식이 있었다는 이유로 그의 견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결말」은 욥의 이야기가 마지막에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욥기 42장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하시고, 친구들의 잘못된 설명을 책망하시며, 욥의 형편을 회복시키십니다.
다만 욥의 마지막 회복을 모든 고난받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재산과 건강을 이전보다 더 많이 회복할 것이라는 보편적인 약속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야고보가 마지막에 강조하는 것은 회복의 양이나 보상의 크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속으로 깊이 가엾이 여기시고」(πολύσπλαγχνος)는 신약에서 이 자리에만 등장하는 드문 형용사로, 깊고 풍성한 긍휼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품삯을 떼어 먹고 의로운 사람을 억압하는 자들의 불의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고난 속에서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정의와 긍휼은 서로 경쟁하는 성품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자기 고통의 끝을 미리 계산할 수 있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기다림의 근거는 자신이 미래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주님께서 깊이 가엾이 여기시고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일부 해석에서는 「주님의 결말」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 욥이 등장하고 뒤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말한다는 점에서, 욥에게 하나님이 이루신 결과를 가리킨다는 읽기가 문맥상 더 설득력 있습니다. 「속으로 깊이 가엾이 여기시고」에 해당하는 형용사는 폴뤼스플랑크노스입니다. 이 고백은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오래 참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출애굽기 34:6–7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맹세가 필요 없는 말
무엇보다도, 나의 형제 여러분,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그 밖의 어떤 맹세로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예」는 예여야 하고 「아니요」는 아니요여야 합니다. 심판 아래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야고보서 5:12 · 본디새김
오래 참음과 욥의 이야기가 끝나자 갑자기 맹세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처음에는 흐름이 끊긴 것처럼 보이지만, 「무엇보다도」라는 말은 이것이 마지막에 덧붙인 가벼운 충고가 아니라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맹세는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보증하기 위해 하늘이나 땅, 또는 하나님의 이름처럼 자신보다 높은 권위를 끌어오는 행위입니다.
핵심은 말과 실제가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말은 다른 권위를 덧붙여야만 믿을 수 있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의 권면은 하늘이나 땅을 두고 맹세하지 말고 예와 아니요를 분명하게 하라는 예수님의 산상설교(마태복음 5:34–37)와 매우 가깝습니다.
야고보는 모든 종류의 공식적 맹세를 예외 없이 금지합니까? 아니면 진실하지 않은 말을 보증하기 위해 맹세를 남용하는 관행을 경계합니까? 명령 자체는 「그 밖의 어떤 맹세로도」라고 할 만큼 포괄적이어서 단순히 거짓 맹세만 금지한 것으로 축소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 이 한 구절만으로 현대의 법정이나 공적 절차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선서의 문제를 완전히 판정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야고보가 요구하는 삶의 모습은 분명합니다. 자신의 말이 진실하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할 때만 진심을 담고, 일상에서는 맹세와 허풍으로 자신의 말을 부풀리는 삶은 야고보가 말하는 온전한 삶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말의 진실성도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는 일입니다.
이제 편지는 맹세로 자신의 말을 보증하려는 사람에게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말하는 사람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야고보서와 마태복음 5:34–37 사이에는 내용뿐 아니라 표현상으로도 뚜렷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야고보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승받아 사용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충분한 근거가 있지만, 마태복음의 기록을 직접 인용했다고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공적 선서의 문제에는 성경의 다른 맹세 본문과 법적 맥락까지 고려하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고난받는 사람은 기도하고, 즐거운 사람은 노래한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이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찬미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야고보서 5:13 · 본디새김
두 상황은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서로 다른 반응을 명령하면서도 두 사람 모두를 하나님께 향하게 합니다.
고난을 겪는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즐거운 사람은 찬미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이것은 엄격한 감정의 규칙이 아니라,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반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고난 속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일입니다. 즐거운 순간에 찬미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그 기쁨을 자기 능력이나 성취만의 결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입니다.
이 두 반응은 시편의 세계와 깊이 연결됩니다. 시편 13편은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께 질문하고 구원을 간구하다가 마지막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나아가고, 시편 30편은 탄식과 기쁨, 슬픔과 찬미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 줍니다. 기도는 고난을 부정하는 방법이 아니라, 자신이 겪는 일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상황이 더 구체적이고 심각해집니다. 몸이 아픈 사람이 등장하고, 야고보는 그 사람을 혼자 기도하게 두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은 왜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야 하는가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야 하고,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두고 기도해야 합니다.야고보서 5:14 · 본디새김
이 장면에서 아픈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혼자 감당하도록 요구받지 않습니다. 그는 장로들을 부르고, 장로들이 찾아와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본문이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지만, 병든 사람을 돌보는 책임이 개인의 신앙에만 머물지 않고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할 문제가 된다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장로들은 기름을 바르고 기도합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는 기름이 신체 관리나 치료에 사용되기도 했으므로, 이 기름 바름을 당시의 치료적 관습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표현 때문에 단순한 의학적 처치 이상의 종교적 의미를 지닌 행동으로 읽을 근거도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그 행위가 의료적 처치인지,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행위인지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은 기름이 어떤 방식으로 치유에 작용하는지 설명하지 않고, 기름 자체에 독립적인 초자연적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치유의 권한은 장로들의 지위나 기름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픈 사람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앓는 사람을 구원할 것이고, 주님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가 죄를 지었더라도 그 죄는 용서될 것입니다.야고보서 5:15 · 본디새김
「구원할 것이고」(σῴζω)는 사람을 위험에서 구하거나 보존한다는 폭넓은 의미를 지닌 동사로, 병 고침의 문맥에서는 병에서 낫게 하는 일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주님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입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주어는 장로들도, 병든 사람의 믿음도 아닙니다.
주님입니다.
기도는 치유를 만들어 내는 인간의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병든 사람을 일으키시는 주님께 의지하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병든 사람이 기도를 받으면 반드시 낫는다는 뜻일까요? 본문의 치유에 대한 확신은 매우 강하며, 그 확신을 단순한 바람이나 가능성의 표현으로 약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기도의 효과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상세한 조건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일정한 절차에 따라 기도하면 반드시 즉각적인 육체적 치유가 일어난다는 기계적인 공식으로 해석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특히 병이 낫지 않은 사람에게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적절한 치료와 돌봄을 거부하는 근거가 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야고보는 「죄를 지었더라도」라고 말합니다. 병든 사람이 반드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병들었다고 말하지 않으며, 병과 개인의 특정한 죄 사이에 언제나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죄인을 찾아내는 추궁이 아니라 기도와 돌봄이고, 만일 실제로 죄의 문제가 있다면 그에게는 죄의 용서도 필요합니다.
야고보는 치유와 용서를 서로 완전히 분리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병의 원인을 죄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아픈 사람 전체가 주님의 구원과 자비를 필요로 한다는 데 있습니다.
죄를 서로에게 고백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러므로 여러분이 낫도록 서로에게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의로운 사람의 간구는 효과를 내며 큰 힘을 발휘합니다.야고보서 5:16 · 본디새김
명령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병든 사람과 장로라는 두 역할을 넘어, 공동체 전체가 「서로에게」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죄의 고백은 죄의 목록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를 위한 기도와 함께 놓입니다.
야고보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의 고백이 이루어지는 공동체는 서로를 정죄하는 법정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로 묘사됩니다. 재판관은 문 앞에 서 계시고, 신자들은 서로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자가 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이 구절이 죄를 고백받은 사람이 모든 잘못을 비밀로 감추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그 피해를 바로잡고 필요한 책임을 지는 문제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서로를 위한 기도와 책임 있는 행동은 대립하지 않습니다.
「효과를 내며」는 간구가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는 뜻으로도, 어떤 힘에 의해 작용하게 된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앞뒤 문맥에서 병든 사람을 일으키시고 기도의 응답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므로, 기도에 대한 야고보의 확신은 하나님과 무관한 인간의 능력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로운 사람」은 특별한 영적 능력을 지닌 소수의 사람입니까? 야고보는 이 질문에 대답하듯 한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엘리야입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기름을 바르다」는 몸에 기름을 바르거나 문지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누가복음 10:34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상처 입은 사람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치료하며, 마가복음 6:13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병든 사람들에게 기름을 바르고 고쳤다고 기록합니다. 15절의 「구원하다」는 마가복음 5:34에서 예수님께서 병 고침을 받은 여자에게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동사와 같습니다. 요한복음 9:1–3에서 제자들이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의 상태를 그의 죄나 부모의 죄와 연결하려 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 물음의 전제를 거부하신 일은, 15절의 약속을 이해할 때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16절의 「효과를 내며」(에네르구메네)는 형태상 중간태와 수동태가 같아 두 해석이 모두 가능하며, 수동으로 읽더라도 그 힘을 작용하게 하는 주체는 이 표현 안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세 해 여섯 달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야고보서 5:17 · 본디새김
야고보는 엘리야가 얼마나 위대한 예언자였는지 설명하며 시작하지 않습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 앞에서 가뭄을 선언하고 갈멜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했지만, 열왕기상 19장에서는 이세벨의 위협을 피해 도망쳤고 지쳐서 죽기를 바라기까지 했습니다.
야고보가 그를 기도의 본보기로 제시하는 것은 그가 완벽하게 흔들림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지만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기도했더니」(προσευχή)는 원문에서 기도라는 명사와 기도한다는 동사를 같은 어근으로 반복한 표현으로, 기도 행위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엘리야가 하나님께 실제로 기도했고, 그 기도와 가뭄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었고 땅이 그 열매를 냈습니다.야고보서 5:18 · 본디새김
열왕기상 18:42–45에서 엘리야는 갈멜산에 올라가 몸을 굽혀 기도하고, 사환에게 바다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사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엘리야는 다시 가서 보라고 하고, 이 일이 반복되어 일곱 번째에 마침내 사람의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 하나가 나타납니다. 그 뒤 하늘은 구름과 바람으로 어두워지고 큰비가 내립니다.
야고보는 그 이야기의 끝을 매우 짧게 요약합니다.
하늘이 비를 주었습니다.
땅이 열매를 냈습니다.
7절에서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렸고, 18절에서는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냅니다. 농부도 엘리야도 비를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 앞에서 하나님께 의존하지만, 한 사람은 기다림으로, 다른 사람은 기도로 그 의존을 드러냅니다.
오래 참음과 기도는 서로 반대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래 참는 사람도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하는 사람도 오래 기다려야 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비를 구하며 기도했지만, 사환이 처음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구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즉시 눈에 보이는 응답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기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는 엘리야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통해 기도를 특별한 능력을 지닌 소수의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처럼 여기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신자들도 원하는 것을 기도로 모두 얻을 수 있다는 공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바로 5장 처음에 일꾼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분입니다. 그들의 소리가 만군의 주님의 귀에 들어갔고, 엘리야의 기도에도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힘없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자신에게 의지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기도 이야기를 편지의 마지막 문장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는 갑자기 길을 잃은 한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조금 더 깊이
「간절히 기도했더니」는 문자적으로는 「기도로 기도했다」에 가까운 구조입니다. 다만 이 어법 자체가 언제나 기도의 감정적 강도를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열왕기상 17:1에서 엘리야는 아합에게 자신의 말이 있기 전에는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지만, 그 장면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도록 기도했다는 내용이 직접 서술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그 사건을 기도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또한 열왕기상 18:1은 셋째 해에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다고 말하는 반면, 야고보는 세 해 여섯 달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4:25에서도 예수님께서 엘리야 시대의 가뭄을 세 해 여섯 달로 말씀하시므로, 이 기간은 야고보서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수치가 아닙니다. 열왕기상의 「셋째 해」가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계산된 것인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두 기간을 조화시키는 설명은 가능하지만, 그 계산법이 직접 기록되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에서 벗어나 헤매는 사람을 돌이키다
나의 형제 여러분, 만일 여러분 가운데 누가 진리에서 벗어나 헤매게 되고 누군가가 그를 돌이킨다면,야고보서 5:19 · 본디새김
야고보는 축복의 말을 덧붙이거나 안부를 전하며 편지를 끝내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한 가지 상황을 제시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곧 공동체 안에 있던 사람이 진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라고 해서 그 구성원 모두가 언제나 바른 길을 걷는 것은 아닙니다.
「헤매게 되고」는 길을 잃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그림을 지닙니다. 사람은 잘못된 가르침이나 욕망에 이끌릴 수도 있고, 자신이 믿는 진리와 반대되는 삶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신앙은 머릿속에서 참된 명제를 소유하는 문제로만 제시되지 않고, 걸어가는 길과도 관련됩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비난하며 자신의 옳음을 확인할 수도 있고, 공동체 안에서 자기 편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를 돌이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4장에서 다른 사람을 헐뜯고 판단하는 태도를 경계했던 권면과도 연결됩니다.
야고보는 진리에서 벗어난 것을 진리에서 벗어난 것으로 분명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알아본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상대방을 향한 정죄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목적은 돌이킴입니다.
죄인을 그가 헤매던 길에서 돌이킨 사람이 그의 목숨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수많은 죄를 덮으리라는 것을, 그 사람은 알아야 합니다.야고보서 5:20 · 본디새김
「구원하고」는 15절에서 병든 사람을 구원할 것이라고 할 때 사용한 동사와 같습니다. 그러나 15절에서는 병든 사람을 위한 기도와 회복이 중심이었다면, 20절에서는 죄의 길을 걷는 사람을 돌이키는 일이 중심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구원은 육체의 병에서 회복되는 일로 좁힐 수 없습니다.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고, 죄가 가져오는 최종적인 멸망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야고보서 1:15가 죄가 다 자라 죽음을 낳는다고 말한 것을 고려하면 죄의 궁극적인 결과와 연결할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 자체는 죽음의 성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특정한 구원론적 체계에 맞추어 그 의미를 하나로 확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누구의 목숨이 구원되고 누구의 죄가 덮이는지도 해석이 갈립니다. 돌이킨 죄인의 목숨과 죄로 읽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지만, 그를 돌이킨 사람 자신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논의되어 왔습니다.
「수많은 죄를 덮으리라」는 미움은 다툼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허물을 덮는다는 잠언 10:12와 가까운 관계를 지닙니다. 야고보의 문맥에서는 죄인이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는 사건이 중심이므로, 죄를 덮는다는 것은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게 감추는 일이 아니라 돌이킴과 용서에 연결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야고보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스스로 용서하는 최종적인 권한을 행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편지에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주님께서 병든 사람을 일으키신다고 선언한 것도 바로 앞의 15절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이켜 구원한다는 표현은, 그 사람을 하나님의 구원과 용서로 돌아오도록 돕는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 사람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야고보서 5장의 여러 장면을 지나고 나면, 처음에는 서로 떨어져 있었던 이야기들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불의를 심판하시고, 고난받는 사람을 깊이 가엾이 여기시며, 기도에 응답하시고, 죄인을 돌이키시는 분입니다. 그분께 속한 사람들은 그 성품을 신뢰하며 정당한 품삯을 지급하고, 고난 중에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고, 아픈 사람을 찾아가 기도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간구하고,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을 돌이킵니다. 행함은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 쌓아 올리는 종교적 재산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돌보는 행동입니다.
야고보의 마지막 권면들은 주님의 오심과 그분의 이름, 그분의 치유하시는 행동을 중심에 두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과 분리된 독립적인 윤리 목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이 장에서 직접 논증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권면을 십자가 사건의 직접적인 예표나 인용으로 설명하기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공동체에 주어진 신앙적 요청으로 이해하는 것이 본문의 표현에 더 충실합니다.
처음에는 부유한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품삯을 떼어 놓고 자신의 재물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편지의 마지막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 무엇을 빼앗거나 쌓으려 하지 않고, 진리에서 벗어나 헤매는 사람을 되찾으려 합니다.
누군가가 길에서 벗어나 헤매고 있습니다. 그는 진리에서 멀어졌고, 자신이 가는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를 발견합니다. 그는 멀리서 비난만 하지 않고, 자신의 옳음을 자랑하며 그를 버려두지도 않습니다.
그를 돌이킵니다.
편지는 이 장면에서 끝납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재물을 쌓아 놓은 창고도, 문 앞에 선 재판관의 모습도 아닙니다. 헤매던 사람을 돌이키는 또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