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풀어 읽기 · 17장
이 장의 자리 · 17–22장 · 엘리야와 아합
살아 계신 하나님과 죽음 앞에 선 사람들
열왕기상 17장은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말 이후에 펼쳐지는 장면들은 온통 죽음의 위협으로 가득합니다.
비가 끊기고 시냇물이 마릅니다. 한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음식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은 뒤 죽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가까스로 굶주림에서 벗어난 뒤에는 그 아들마저 숨을 거둡니다.
정말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시다면, 왜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되는 것일까요?
열왕기상 17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죽음의 위협 속에서 어떻게 신뢰할 만한 말씀으로 드러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엘리야의 등장: 비를 내리지 않겠다는 선언
설명 없이 등장한 예언자
앞 장에서 아합은 바알을 섬기고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세웠습니다. 이제 그에게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길르앗에 사는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앞으로 몇 해 동안 제가 말하지 않는 한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열왕기상 17:1 · 두루새김
열왕기서는 엘리야를 소개하면서 그의 부모나 가문, 예언자로 부름받은 과정 등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길르앗에 사는 디셉 사람이라는 사실만 알려 줍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 지역입니다. 「디셉」의 정확한 위치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본문은 그가 왕실이나 중앙의 제사장 집단에 속한 인물이 아니라는 인상을 줍니다.
「제가 섬기는」(עָמַד)의 원문에서는 하나님 앞에 서서 섬긴다는 표현을 씁니다. 왕의 신하가 왕 앞에 서서 섬기듯, 엘리야는 자신이 여호와야훼 앞에 서 있는 사람임을 밝힙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아합에게 임명받거나 그의 허락을 받아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섬기는 왕이 따로 있음을 선언합니다.
그는 왕에게 개인적인 충고를 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왕의 통치까지 판단하시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러 온 사람입니다.
왜 하필 비와 이슬인가
농업에 의지하는 사회에서 비가 오지 않는 것은 생존의 바탕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가나안 지역의 농사에서 이슬 역시 중요한 물 공급원이었습니다. 따라서 비와 이슬이 함께 언급된 것은 물의 공급 자체가 막히는 심각한 상황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선언은 아합이 바알을 섬기기 시작한 직후에 나옵니다.
바알은 고대 가나안과 페니키아 지역에서 폭풍과 비, 땅의 풍요와 관련된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아합이 바알을 섬기는 상황에서 엘리야가 비의 중단을 선언하는 것은 단순한 기상 예보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과연 비를 내리고 생명을 유지하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11:16–17은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섬길 경우 여호와야훼께서 하늘을 닫아 비가 내리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솔로몬도 성전 봉헌 기도에서 백성이 죄를 지어 하늘이 닫히고 비가 오지 않을 때, 그들이 돌이키면 여호와야훼께서 용서하시고 비를 내려 주시기를 구했습니다(열왕기상 8:35–36). 엘리야의 선언은 이러한 언약의 경고가 아합 시대의 현실에 나타나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스스로 비를 내리지 않게 하는 능력자가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야훼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비를 멈추고 다시 내리게 하시는 권한은 여호와야훼께 있습니다. 다음 장 18:1에서도 비를 다시 내리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입니다.
엘리야의 말에 권위가 있는 것은 그가 기후를 지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전하는 말씀이 여호와야훼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왕 앞에서 담대하게 말하던 엘리야에게 여호와야훼께서 숨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릿 시냇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도 가뭄을 겪는다
왕 앞에 섰던 사람이 홀로 숨다
「여기를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강을 마주한 그릿 시냇가에 숨어라.」열왕기상 17:3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께서 그를 숨기시는 이유를 본문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합의 위협에서 보호하시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절만으로 구체적인 위협의 내용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방금 왕에게 몇 해 동안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으리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시냇물에 의지해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가뭄은 아합 왕국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 가뭄을 선언한 예언자도 같은 땅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까마귀들에게 먹을 것을 명령하시다
「너는 그 시내의 물을 마실 것이다. 내가 까마귀들에게 그곳에서 네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라고 명령했다.」열왕기상 17:4 · 두루새김
까마귀는 레위기 11:15에서 먹어서는 안 되는 새로 분류됩니다. 다만 이것은 까마귀 자체를 먹지 말라는 규정이지, 까마귀가 가져온 모든 음식이 자동으로 부정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성경의 음식 규정에서 부정한 새로 언급되는 까마귀가 여호와야훼의 예언자에게 먹을 것을 가져온다는 장면은 뜻밖입니다.
까마귀들은 아침과 저녁에 빵과 고기를 가져옵니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물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여호와야훼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먹을 것을 마련하기 어려운 장소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생존을 위한 음식을 주셨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는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간 시냇물이 마르다
얼마 뒤에 시내가 말랐습니다. 그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열왕기상 17:7 · 두루새김
본문은 엘리야가 잘못해서 시냇물이 말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여호와야훼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공급이 중단되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분명히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의지하던 물줄기는 말라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도착한 장소가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장소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릿 시냇물의 마름은 엘리야의 불순종을 드러내는 사건이 아니라, 이제 다른 장소로 그를 이끌어 가실 새로운 말씀의 배경이 됩니다. 실제로 8절은 2절과 같은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열왕기상 17:8 · 두루새김
시냇물이 마른 뒤에도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그 말씀이 엘리야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보냅니다.
사르밧의 과부: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구하다
여호와야훼께서 보내신 곳은 시돈이었다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그곳에 머물러라. 내가 그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네게 먹을 것을 대 주라고 명령했다.」열왕기상 17:9 · 두루새김
사르밧은 페니키아 해안 지역에 있는 성읍으로, 본문은 특별히 그곳이 시돈에 속한다고 밝힙니다. 앞 장 16:31에서 아합은 시돈 사람들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했습니다. 이세벨과 아합의 관계는 이후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가 퍼지는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엘리야를 바로 그 시돈에 속한 지역으로 보내십니다.
바알을 숭배하던 지역과 연결되는 땅에서, 여호와야훼의 예언자가 보호를 받고 먹을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야훼의 권한이 이스라엘의 국경 안에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고대 사회에서 과부는 남편의 경제적 보호를 잃어 생계가 불안정해지기 쉬운 사람이었습니다. 신명기 10:18과 24:17–21이 과부의 권리와 보호를 특별히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어려움 때문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먹을 것을 대 줄 사람으로 선택하신 이는 스스로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명령했다」는 말씀과 실제로 만난 과부
여호와야훼께서는 한 과부에게 엘리야를 먹일 것을 명령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사르밧에 도착한 엘리야는 성읍 입구에서 나뭇가지를 줍는 과부를 만납니다. 그녀에게 물을 조금 달라고 요청하자 여자는 물을 가지러 갑니다.
하지만 빵도 가져다 달라고 하자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저희는 그것을 먹고 나면 죽을 거예요」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해요. 제게 빵은 없어요. 항아리에 곡식 가루 한 줌, 병에 기름 조금이 있을 뿐이에요. 지금 나뭇가지 두 개를 주워 가서 저와 아들이 먹을 것을 만들려고 해요. 저희는 그것을 먹고 나면 죽을 거예요.」열왕기상 17:12 · 두루새김
그녀의 현실은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신, 먹을 것을 대 줄 사람의 모습과 너무나 다릅니다. 나뭇가지 두 개라는 표현도 상황의 궁핍함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마저 매우 적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했습니다. 과부도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엘리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근거로 비의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과부는 그 하나님을 근거로 자신에게는 빵이 없으며 자신과 아들이 죽을 처지라고 말합니다.
그녀가 여호와야훼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곧바로 구원을 확신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에는 엘리야가 섬기는 하나님과 그녀 자신의 처지 사이에 아직 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먼저 작은 빵 하나를 달라는 요청
엘리야는 그녀에게 뜻밖의 말을 합니다.
엘리야가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집에 가서 당신이 말한 대로 하세요. 다만 먼저 그 가루와 기름으로 작은 둥근 빵 하나를 만들어 제게 가져다주세요. 당신과 아들이 먹을 것은 그 뒤에 만드세요.」열왕기상 17:13 · 두루새김
이 장면을 단순히 하나님의 사람에게 먼저 바쳐야 복을 받는다는 일반적인 원칙으로 읽으면 본문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엘리야가 과부에게 이러한 요청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자신의 지위나 권리가 아닙니다.
그는 즉시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에요. 『여호와야훼가 땅에 비를 내리는 날까지 항아리의 가루는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은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열왕기상 17:14 · 두루새김
이 약속을 빼놓으면 엘리야의 행동은 굶주린 여자의 마지막 양식을 요구하는 장면으로만 남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엘리야의 요청을 여호와야훼의 구체적인 약속과 연결합니다.
과부는 자신의 마지막 양식을 내놓으면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양식이 마지막이 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바라보는 미래가 다릅니다.
과부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 삶의 위험을 모른 척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절박한지 알면서도, 그 절박한 현실과 다른 미래를 약속하시는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왜 가루와 기름은 넘쳐 나지 않았는가
항아리의 가루는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엘리야를 통해 하신 말씀대로였습니다.열왕기상 17:16 · 두루새김
매일의 양식이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엄청난 재산이 쌓였다는 것이 아니라, 굶주림으로 끝날 것 같았던 생활이 계속 유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에게는 아침과 저녁마다 먹을 것이 공급되었습니다. 사르밧에서는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두 경우 모두 여호와야훼께서는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셨지만, 그 공급이 인간에게 미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선도 달라집니다.
그릿 시냇가에서는 엘리야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사르밧에서는 엘리야뿐 아니라 과부와 여자의 집안이 함께 먹고 살아갑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엘리야를 살리시기 위해 과부를 사용하셨지만, 결과적으로 그 과부의 집도 살게 되었습니다.
과부는 도움을 받은 사람인 동시에 엘리야를 먹인 사람입니다. 그녀는 단순히 구원을 받는 사람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굶어 죽을 처지였지만 엘리야에게 작은 둥근 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서로 의지하는 가운데 여호와야훼의 돌보심이 드러납니다.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던 집에 죽음이 찾아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본문은 과부가 이미 여호와야훼의 음성을 직접 듣고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명령했다」는 말씀을 과부가 미리 분명한 지시를 받았다는 뜻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야훼께서 그녀를 통해 엘리야를 먹이시겠다고 정하셨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10:18은 여호와야훼께서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146:9도 여호와야훼께서 나그네를 보호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붙드신다고 노래합니다. 사르밧의 과부 이야기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한 사람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후대의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25–26에서 바로 이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던 시대에 엘리야가 시돈 땅 사르밧의 과부에게 보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십니다. 이것은 열왕기상 17장의 사건을 직접 언급한 신약의 읽기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익숙한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일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다: 양식의 약속으로 해결되지 않는 고통
살아남은 아이가 죽다
이 일이 있은 뒤에 집주인인 그 여자의 아들이 병들었습니다. 병이 몹시 심해져서 아이는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열왕기상 17:17 · 두루새김
본문은 두 사건 사이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과부가 잘못했기 때문에 아들이 병들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충분히 믿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이 찾아왔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17절은 「이 일이 있은 뒤에」라는 말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먹을 것이 공급되는 기적이 있었고, 그 뒤에 아이가 병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공급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그 뒤에 더 이상 고통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증은 아니었습니다.
「제 죄를 떠올리게 하고」
여자가 엘리야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저에게 왜 이러세요? 제 죄를 떠올리게 하고 제 아들을 죽이려고 오셨군요.」열왕기상 17:18 · 두루새김
과부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과부의 해석입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아들의 죽음이 그녀의 죄 때문에 일어났다고 확인해 주지 않습니다. 고난을 겪는 사람이 스스로 죄책감을 느낀다고 해서, 그 고난이 실제로 어떤 죄의 형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아들의 죽음 이전에는 과부가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공급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과부는 엘리야에게 자신의 고통을 쏟아 놓는 사람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과부가 사용하는 「저에게 왜 이러세요?」라는 말은 원문에서 관계의 단절이나 갈등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그녀는 엘리야에게 단순히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묻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게 온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과부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죄와 연결해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 죄를 기억하게 되었는지는 원문에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죄를 다시 문제 삼으셨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또는 엘리야의 존재와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과부 자신이 자신의 죄를 떠올리게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 모두 가능한데, 어느 쪽이든 중요한 사실은 같습니다. 과부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 하나님께 질문하는 하나님의 사람
아이를 어머니의 품에서 받아 들다
엘리야가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을 제게 주세요.」 그는 여자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자기가 머물던 위층 방으로 안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침대에 아이를 눕혔습니다.열왕기상 17:19 · 두루새김
엘리야는 과부의 비난에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죄를 찾아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사람 앞에서 다투는 대신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다룹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께 드린 첫 기도는 우리가 예상할 법한 차분한 간구가 아닙니다.
「이 과부에게까지 재앙을 내리셔서 그 아들을 죽이셨습니까?」
엘리야가 여호와야훼께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야훼, 저의 하나님, 제가 머무는 집의 이 과부에게까지 재앙을 내리셔서 그 아들을 죽이셨습니까?」열왕기상 17:20 · 두루새김
엘리야의 말에는 항의와 질문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과부의 처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미 가뭄 때문에 죽음의 문턱에 섰던 사람입니다. 자신과 아들의 마지막 식사까지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 또다시 아들을 잃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기도는 고통을 경험하는 사람을 멀리서 설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함께 머물며 먹고 살아온 사람의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질문해서는 안 되는 인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떠나는 대신 하나님께 직접 묻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재앙을 내리셨느냐고 물었다는 사실은 본문이 그 죽음의 원인을 하나님의 형벌로 확정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과부의 비난과 엘리야의 질문은 각각 고통 앞에 선 인물의 말입니다. 저자는 어느 쪽의 원인 설명도 확정하지 않은 채, 엘리야가 이어서 드리는 간구를 기록합니다.
세 번 몸을 뻗고 생명을 구하다
그는 몸을 쭉 펴서 아이 위에 세 번 엎드리고, 여호와야훼께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야훼, 저의 하나님, 제발 이 아이의 생명이 몸 안으로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열왕기상 17:21 · 두루새김
그는 자신에게 생명을 되돌리는 능력이 있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 아이의 생명이 돌아오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목소리를 들어주셨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엘리야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셨습니다. 아이의 생명이 몸 안으로 돌아왔고, 아이는 다시 살아났습니다.열왕기상 17:22 · 두루새김
아이가 살아났을 때 저자는 엘리야의 몸동작에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엘리야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엘리야가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고 그릿 시냇가로 갔습니다. 다시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고 사르밧으로 갔습니다. 과부는 엘리야가 전한 말씀을 듣고 그 말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호와야훼께서 엘리야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엘리야에게 명령하시기만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을 가지고 부르짖을 때 그 기도에도 응답하십니다.
먹을 것을 공급하는 일에서 생명을 되돌리는 일로 이야기가 깊어집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그 사실을 어머니가 알게 되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3편에서 시인은 여호와야훼께 언제까지 자신을 잊으실 것인지 묻습니다. 하박국 1:2–3에서는 예언자가 하나님께 폭력과 악을 보면서 왜 침묵하시는지 질문합니다. 이 기도들은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이 고통을 느끼지 않거나 질문을 품지 않는다는 생각을 바로잡습니다. 세 번 반복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만, 왜 정확히 세 번이었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 번이라는 숫자 자체에 특별한 신비적 능력이 있다거나, 이러한 동작이 죽은 사람을 살리는 정해진 의식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생명」(נֶפֶשׁ)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네페쉬입니다. 네페쉬는 문맥에 따라 생명, 사람 자신, 목숨, 욕구 등을 가리키는 폭넓은 말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아이가 다시 살아나게 해 달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17절의 「숨을 거두었습니다」에 해당하는 원문에서(נְשָׁמָה)는 아이에게 숨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두 단어가 구별되어 사용되지만, 본문이 생명의 구성이나 몸과 영혼이 나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보세요. 아들이 살아 있어요」
위층 방에서 아래로 내려온 아이
엘리야는 아이를 데리고 위층 방에서 집 안으로 내려와 어머니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엘리야가 말했습니다. 「보세요. 아들이 살아 있어요.」열왕기상 17:23 · 두루새김
본문은 어머니가 어떤 감정으로 아이를 맞이했는지 자세히 서술하지 않습니다. 울었다거나 기뻐 외쳤다는 표현도 없습니다. 대신 엘리야가 한 말을 남깁니다.
1절에서 엘리야는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신다고 선언했습니다. 12절에서 과부는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면서도 자신과 아들이 곧 죽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23절에서 엘리야는 그녀에게 아들이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선언되었던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이제 한 아이의 생존과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과부는 이미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여자가 엘리야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고, 당신이 전하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겠어요.」열왕기상 17:24 · 두루새김
과부가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18절에서 아들이 죽었을 때도 과부는 「하나님의 사람이여」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24절에서는 「이제」 그 사실을 「알겠어요」라고 말할까요?
18절에서 그녀는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면서도, 그가 자신의 죄를 떠올리게 하고 아들을 죽이려고 왔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녀는 엘리야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집에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자기 죄가 드러나고 심판이 닥칠 수 있다는 공포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살아난 뒤에는 같은 표현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제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고백은 단순히 엘리야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가 전하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참되다는 고백입니다.
「참되다는」 말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엘리야가 전하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며 실제로 신뢰할 만하다는 뜻입니다.
과부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확신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지막 양식을 내어 주었으면서도, 아들이 죽자 그 죽음의 원인을 엘리야와 자신의 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혼란이 끝난 뒤 그녀가 붙드는 것은 엘리야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말씀입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 확인되는 것은 예언자의 위대함보다 예언자가 전한 말씀의 참됨입니다.
아합은 바알을 섬기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참되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왕궁의 권력자가 아니라 시돈 지역의 한 과부입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의 「참되다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אֶמֶת)는 에메트입니다. 이 말은 참됨, 진실함뿐 아니라 믿을 만함과 신실함의 의미도 지닙니다.
맺음말 —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온 아이
이 장면에서 신앙은 고통의 원인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지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통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기도하면 모든 죽음이 되돌려진다는 보편적인 약속도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장면을 지나 마지막에 남는 것은 비를 멈춘 예언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위층 방에서 내려오는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그는 아이를 안고 계단을 내려옵니다. 조금 전까지 숨이 없었던 아이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어머니에게 건네줍니다.
이야기 처음에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했던 사람이, 이제 「아들이 살아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과부는 자기 눈앞에 살아 있는 아들을 보며 고백합니다. 「이제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고, 당신이 전하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겠어요.」
그녀는 단지 놀라운 기적을 본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 죽은 자리에서도 일하셨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녀가 처음에 말했던 「저희는 그것을 먹고 나면 죽을 거예요」라는 절망은 이야기의 마지막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마지막 말은 살아 돌아온 아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의 고백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