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1–9장 · 솔로몬과 성전 건축

하늘도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을 위한 집

솔로몬은 성전을 완성한 뒤 하나님께 두 가지 말을 드립니다. 먼저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영원히 머무르실 곳을 지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도 주님을 담을 수 없는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 어떻게 주님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머무르실 집을 지었다면서, 그 집이 하나님을 담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은 무엇을 위해 성전을 지은 것일까요?

성전을 하나님께 바치는 예식에서 시작한 기도는 점차 성전을 떠나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시선을 넓힙니다. 가장 아름다운 성전을 완공한 날, 솔로몬은 그 성전 가까이에 올 수 없는 사람들의 기도까지 하나님께 맡깁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106장 본문 읽기 →

짙은 구름 속에 계신 하나님을 위한 집

역대하 6:1–2 본문 →

앞 장에서 언약궤가 지성소에 놓이자 구름이 하나님의 집을 가득 채웠습니다. 제사장들은 그 구름 때문에 서서 섬기는 일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5:13–14).

그때 솔로몬이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짙은 구름 속에 머무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역대하 6:1 · 두루새김

여기서 「짙은 구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라펠(⁨עֲרָפֶל⁩)입니다. 빛을 가리는 짙은 어둠이나 구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20:21에서도 모세가 하나님이 계신 짙은 어둠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장면에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백성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지만, 동시에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없게 하셨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심을 알리는 표지인 동시에, 그분이 인간의 시야에 완전히 들어오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성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성전을 완성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때 제사장들은 자기 일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준비한 성전의 질서가 하나님이 계신 자리에서 잠시 멈추어 선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바로 이어서 말합니다.

「저는 주님을 위해 웅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역대하 6:2 · 두루새김

단순히 건물의 높이를 가리킨다기보다 귀하고 드높은 거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지은 집의 가치를 낮추지 않습니다. 성전은 실제로 하나님을 위해 바쳐진 특별한 장소입니다. 다만 그 특별함은 건물이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크기나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두시고 백성과 관계를 맺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건물을 완성한 왕이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업적이 아니다

역대하 6:3–11 본문 →

솔로몬은 몸을 돌려 모여 있는 온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합니다. 백성은 모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왕은 성전을 지은 자신의 수고보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솔로몬이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 찬양을 드린다. 그분은 내 아버지 다윗에게 직접 하신 말씀을 손수 이루셨다. 이렇게 말씀하셨다.」역대하 6:4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입」(⁨פֶּה⁩)과 「손」(⁨יָד⁩)이 서로 대응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직접 하신 말씀」과 「손수 이루셨다」로 옮겼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하나님이 실제로 이루신 것이 나란히 놓입니다. 15절에서도 솔로몬은 같은 표현을 반복합니다.

성전의 완공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주어는 솔로몬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건축했지만, 이 일이 시작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에는 두 가지 선택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이름을 둘 곳으로 예루살렘을 선택했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사람으로 다윗을 선택했다.』」역대하 6:6 · 두루새김

이 두 선택은 별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둘 장소를 선택하시면서, 동시에 그 백성을 다스릴 왕을 선택하셨습니다. 성전과 왕의 권한은 모두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림이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역대기에서 성전의 역사는 다윗 왕조의 역사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짓겠다는 뜻을 먼저 품은 사람은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이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내 이름을 위해 성전을 지으려는 뜻을 품었으니, 그런 뜻을 품은 것은 잘한 일이다.』」역대하 6:8 · 두루새김

그러면서도 다윗에게 직접 짓는 일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성전을 지을 사람은 네가 아니다. 네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내 이름을 위해 성전을 지을 것이다.』」역대하 6:9 · 두루새김

이 장에서는 왜 다윗이 직접 지을 수 없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역대상 22:8과 28:3에서 다윗이 전쟁과 피 흘림에 관련되었다는 설명으로 제시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뜻을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것과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일을 직접 완성해야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다윗의 뜻은 인정받았고, 솔로몬은 그 일을 완성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한 사람의 생애 안에서 모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지나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왕위를 잇고 성전을 지은 일이 바로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6:10).

그리고 마지막으로 궤를 언급합니다.

「나는 그 안에 궤를 놓았다. 그 궤 안에는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새긴 판들이 있다.」역대하 6:11 · 두루새김

역대하 5:10에 따르면 궤 안에는 모세가 호렙에서 넣어 둔 두 돌판이 있었습니다. 그 돌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증언합니다(신명기 10:1–5).

성전 이야기의 중심에 금이나 백향목이 아니라 언약이 놓입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왕이 무릎을 꿇다

역대하 6:12–17 본문 →

솔로몬은 온 백성이 보는 가운데 여호와야훼의 제단 앞에 섭니다.

솔로몬은 뜰 한가운데 길이 5큐빗, 너비 5큐빗, 높이 3큐빗의 청동 받침대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는 그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펼쳤습니다(6:13).

이 자세는 그의 기도가 지닌 성격을 드러냅니다. 성전을 지은 왕도 하나님 앞에서는 간절히 구하는 종입니다.

그가 기도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고백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능력보다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심입니다.

솔로몬이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 하늘에도 땅에도 주님과 같은 하나님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십니다.」역대하 6:14 · 두루새김

그런데 곧바로 왕조가 이어지는 데 필요한 조건을 언급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 이제 주님의 종인 저의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이 약속도 지켜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앞에서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을 사람이 네 집안에서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네 아들들이 네가 내 앞에서 살아온 것처럼 자기 행동을 살피며 내 가르침을 따라 살 때에만 그렇다.』」역대하 6:16 · 두루새김

다윗 왕조에 주어진 약속은 왕들이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다윗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왕위가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대신, 그 약속이 앞으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그는 이미 왕좌에 앉아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왕이 정당하게 다스리는지는 그가 차지한 자리에만 달려 있지 않고, 그 왕이 누구의 말씀 아래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청동 받침대는 같은 사건을 다룬 열왕기상 8:22–23에는 등장하지 않는 역대기만의 묘사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는가, 하늘에 계시는가?

역대하 6:18–21 본문 →

솔로몬의 기도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말 사람과 함께 이 땅에 사시겠습니까?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도 주님을 담을 수 없는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 어떻게 주님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역대하 6:18 · 두루새김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은 인간이 바라보는 하늘뿐 아니라 그 너머의 가장 드높은 영역까지 아우르는 표현입니다. 솔로몬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담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세계의 어느 한 부분보다도 크신 분이십니다.

솔로몬은 그 질문에 이론적인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기도를 계속합니다.

「그렇지만 저의 하나님 여호와야훼, 주님의 종인 제가 드리는 기도와 간절한 부탁을 살펴 주십시오. 제가 주님 앞에서 부르짖으며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역대하 6:19 · 두루새김

하나님을 어떤 공간에 가둘 수 없다는 사실이 기도의 가능성을 없애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밤낮으로 눈여겨보아 주시기를 구하면서, 동시에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시기를 요청합니다.

「주님의 종인 저와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해 간절히 기도할 때 들어 주십시오. 주님께서 계신 하늘에서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역대하 6:21 · 두루새김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놓인 곳이고,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며 기도를 들으시는 곳으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이곳을 향해」 기도한다는 말은 성전 건물이 기도를 전달하는 물리적인 통로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겠다고 약속하신 장소를 바라보며, 그 약속을 붙들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기도의 시작부터 용서가 등장합니다.

솔로몬은 앞으로 이 성전을 찾는 백성이 언제나 바르고 충실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죄를 지을 것이며,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날이 있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성전은 성공한 백성이 자신들의 풍요로운 삶을 기념하는 장소만이 아닙니다. 실패한 백성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같은 사건을 다룬 열왕기상 8:27은 하나님이 정말 땅 위에 사시겠느냐고 묻지만, 역대하 6:18은 「사람과 함께」라는 표현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질문의 초점은 단지 하나님의 크기와 성전의 크기를 비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토록 크신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과 함께 사실 수 있는가 하는 놀라움도 담겨 있습니다.

성전의 첫 번째 역할은 억울한 사람의 호소를 듣는 것이다

역대하 6:22–27 본문 →

솔로몬이 구체적인 상황을 들어 올리는 첫 번째 기도는 전쟁이나 국가적 위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 죄를 지어 맹세를 요구받고, 이 성전에 있는 주님의 제단 앞에 와서 맹세하면,」역대하 6:22 · 두루새김

어떤 다툼이 발생하여 맹세로 진실을 가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본문은 누가 맹세를 요구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무조건 너그럽게 봐주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나서셔서 주님의 종들 사이에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악한 사람에게는 자기가 저지른 일에 맞는 벌을 받게 하시고, 옳은 사람에게는 옳다는 판결을 내리셔서 그가 바르게 행동한 대로 갚아 주십시오.」역대하 6:23 · 두루새김

하나님의 용서는 정의를 없애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실이 가려지고 책임이 분명해지는 일 역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성전은 제사를 드리는 곳일 뿐 아니라 억울한 사람이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는 곳입니다.

이는 뒤이어 등장하는 국가적 위기의 기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이 이스라엘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24–25절에서는 백성이 죄를 지어 전쟁에서 패배하는 상황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패배했을 때 솔로몬은 무조건적인 승리를 요청하지 않습니다. 먼저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땅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구합니다.

땅은 단순한 영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유산입니다. 따라서 패배와 회복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다루어집니다.

26–27절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는 상황이 등장합니다.

「백성이 주님께 죄를 지어 하늘이 닫히고 비가 내리지 않을 때, 주님께서 내리신 고통으로 그들이 이곳을 향해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자기들의 죄에서 돌아서면,」역대하 6:26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은 농사를 지으며 비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특히 필요한 계절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수확과 생존 자체가 위협받았습니다. 신명기 11:16–17에서도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는 심판과 연결됩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언약의 배경 속에서 가뭄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모든 시대의 모든 가뭄이 특정한 사람들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일반 법칙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을 전제로 특정한 상황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님의 종들, 곧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그들이 따라야 할 좋은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백성에게 물려주신 주님의 땅에 비를 내려 주십시오.」역대하 6:27 · 두루새김

고통이 사라져도 이전과 똑같은 길을 따라 살아간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에서 회복은 단순히 재앙이 끝나는 것을 넘어섭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들이 그분이 가르치시는 길을 다시 따라 살게 되는 것, 그것이 솔로몬이 바라보는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백성 전체를 보실 뿐 아니라 각 사람의 고통을 아신다

역대하 6:28–31 본문 →

솔로몬은 이제 가능한 재난을 길게 나열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일, 전염병, 곡식의 병, 메뚜기 떼, 적이 에워싸는 일, 여러 병과 재앙이 이어집니다. 그 목록은 특정한 위기 하나를 말하기보다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무너짐을 아우릅니다.

「어떤 사람이든 주님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든, 저마다 자기가 겪는 재앙과 고통을 알고 이 성전을 향해 두 손을 펼쳐 어떤 기도나 간절한 부탁이라도 드리면,」역대하 6:29 · 두루새김

앞에서는 이스라엘 전체의 전쟁과 가뭄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시선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옮겨 갑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같은 재앙을 경험하더라도, 각 사람이 겪는 고통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때 누구는 곡식을 잃고, 누구는 가족의 생명을 걱정합니다. 같은 전쟁을 겪더라도 어떤 사람은 집을 잃고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잃습니다.

솔로몬의 기도는 이 차이를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기가 겪는 재앙과 고통을 알고」라는 말은 사람이 자신에게 닥친 괴로움을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솔로몬은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계신 하늘에서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니, 그가 한 모든 행동에 따라 갚아 주십시오. 주님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아십니다.」역대하 6:30 · 두루새김

사람은 자기에게 닥친 재앙과 고통을 압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누군가의 행동을 보고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아는 일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이 기도는 사람의 마음을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모든 일을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결과만으로 판결하지 않도록 이끕니다.

물론 하나님이 마음을 아신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30절은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한 모든 행동에 따라 갚으신다고 말합니다.

마음과 행동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내내 주님을 두려워하며 주님의 길을 따라 살게 해 주십시오.」역대하 6:31 · 두루새김

하나님은 고통을 아시는 분이면서, 그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이 따라야 할 길을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외국인을 위해 기도하다

역대하 6:32–33 본문 →

솔로몬의 기도는 여기에서 중요한 전환을 맞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또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외국인이 주님의 위대한 이름과 강한 손과 펼치신 팔 때문에 먼 나라에서 와서 이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역대하 6:32 · 두루새김

「강한 손과 펼치신 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설명할 때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입니다(신명기 4:34; 5:15). 하나님께서 한 민족에게 행하신 일이 다른 민족에게도 그분을 알리는 계기가 됩니다.

「주님께서 계신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외국인이 주님께 부르짖어 구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민족이 주님의 이름을 알고,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주님을 두려워하게 해 주십시오. 또 제가 지은 이 성전이 주님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역대하 6:33 · 두루새김

외국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어느 민족 출신인지에 따라서만 그의 기도가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나님이 외국인의 모든 소원을 아무런 분별 없이 들어주신다는 일반적인 약속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솔로몬이 밝히는 목적은 그보다 구체적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택은 다른 민족들을 영원히 배제하기 위한 선택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자기 이름을 두신 결과, 다른 민족들도 그 이름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12:3).

또한 훗날 이사야 56:6–7에서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분을 섬기는 외국인들도 하나님의 집에서 기쁨을 얻을 것이며, 그 집이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라는 약속이 나타납니다. 역대하 6장은 그 약속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한 민족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일이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같은 방향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불리시지만,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으로 제한되지 않으십니다.

성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기도

역대하 6:34–39 본문 →

솔로몬은 다시 이스라엘의 전쟁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앞서 24절에 등장한 전쟁과 다릅니다. 24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 패배하는 경우를 다루었습니다. 3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길로 백성이 전쟁에 나가는 경우를 다룹니다.

「주님의 백성이 적과 싸우려고 주님께서 보내시는 길로 나가서, 주님께서 선택하신 이 성읍과 제가 주님의 이름을 위해 지은 성전을 향해 주님께 기도하면,」역대하 6:34 · 두루새김

전쟁의 성격을 구별하는 표현입니다. 모든 전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경우를 전제로 기도합니다. 솔로몬은 이 경우에도 백성이 하나님의 판단과 보호에 의존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마지막 기도에서는 상황이 훨씬 어두워집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백성이 주님께 죄를 지어 주님께서 그들에게 몹시 화를 내시고 적에게 넘겨주셔서, 적들이 그들을 사로잡아 먼 나라나 가까운 나라로 끌고 갔을 때,」역대하 6:36 · 두루새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라는 이 말은 인간에게 죄를 지을 가능성이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앞서 왕조가 이어지려면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기도한 솔로몬은, 이제 백성 모두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현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포로로 끌려간 땅에서 자기 잘못을 깨닫고 돌아서서 주님께 『저희가 죄를 지었습니다. 잘못을 저질렀고 악하게 행동했습니다.』라고 간절히 빌고,」역대하 6:37 · 두루새김

포로들은 단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그곳에 이르게 되었는지 돌아봅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꿉니다.

그런데 포로들은 여전히 먼 나라에 있습니다.

성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제단 앞에 서서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솔로몬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간절히 구합니다.

「그 포로살이하는 땅에서 온 마음과 온 생명을 다해 주님께 돌아와, 주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과 주님께서 선택하신 성읍과 제가 주님의 이름을 위해 지은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역대하 6:38 · 두루새김

이 구절은 기도하는 사람이 서 있는 곳에서 시작하여 점차 성전을 향해 나아갑니다. 먼저 조상들에게 주어진 땅을 바라봅니다. 그다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성읍을 바라봅니다. 마지막으로 그 성읍 안에 있는 성전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도 위에서 방향을 알려 주는 말이 아닙니다. 포로들이 잃어버린 삶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다시 기억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땅을 잃었고 예루살렘에서 멀어졌으며 성전에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주셨던 하나님께 돌아올 수는 있습니다.

솔로몬은 포로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면 자동으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단락에서 그가 직접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위해 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며,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일입니다(6:39).

성전이 사라지는 것과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대목은 신명기 30:1–3과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졌을 때, 그곳에서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고 온 마음과 온 생명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역대기는 훗날 실제로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성전이 불타는 일까지 기록합니다(36:19). 따라서 이 기도는 포로 생활을 경험한 이후의 독자에게도 특별한 무게를 갖습니다.

마지막 기도는 하나님께서 「쉬실 곳」으로 들어가시기를 구한다

역대하 6:40–42 본문 →

솔로몬은 긴 기도를 마치며 다시 성전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궤와 함께 쉬실 곳으로 들어가시기를 청합니다.

「여호와야훼 하나님, 이제 일어나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궤와 함께 주님께서 쉬실 곳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여호와야훼 하나님, 주님의 제사장들이 구원을 옷처럼 입게 하시고, 주님께 한결같이 충실한 사람들이 주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으로 기뻐하게 해 주십시오.」역대하 6:41 · 두루새김

언약궤는 이미 성전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하나님께 이제 일어나 쉬실 곳으로 들어가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궤가 아직 옮겨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곳을 자신이 머무르실 곳으로 받아들이시고 그 백성 가운데 함께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예배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옷처럼 입게」 하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이 제사장들의 삶과 섬기는 일을 감싸기를 바라는 시적인 기도입니다. 성전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지 못하고 백성이 그분이 주시는 좋은 것을 기뻐하지 못한다면, 성전 건물의 완성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마지막 42절은 다시 다윗을 향합니다.

「여호와야훼 하나님,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이들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종 다윗이 보여 드린 한결같은 사랑을 기억해 주십시오.」역대하 6:42 · 두루새김

솔로몬은 성전을 완성한 자신의 업적을 마지막 근거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 자신이 지은 성전이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했던 솔로몬은, 마지막에도 그 다윗과 관련된 신실함과 사랑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성전을 하나님께 바치는 예식의 시작과 끝이 다윗을 통해 이어진 하나님의 언약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쉬실 곳」이라는 표현은 광야에서 오랫동안 이동하던 언약궤의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민수기 10:35–36에는 궤가 떠날 때와 멈출 때 모세가 드린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궤가 떠날 때에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기를, 멈출 때에는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시기를 구했습니다. 동시에 이 기도는 시편 132:8–10과 매우 가까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두 본문 모두 하나님께서 언약궤와 함께 쉬실 곳으로 들어가시기를 구하고, 제사장들과 한결같이 충실한 사람들 및 다윗의 기름 부음받은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시편 132:16에서도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입히시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먼저 「기름 부어 세우신 이들」은 히브리어 사본 전승에 차이가 있습니다. 레닌그라드 사본에는 메시헤카, 곧 기름 부음받은 이들을 가리키는 복수형이 나타나지만, 알레포 사본 및 칠십인역에는 단수형이 나타납니다. 복수로 읽으면 다윗 왕조의 기름 부음받은 왕들을 함께 생각할 수 있고, 단수로 읽으면 우선 솔로몬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읽기든 왕이 하나님의 받아 주심을 구한다는 중심 의미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또 「다윗이 보여 드린 한결같은 사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다윗이 보여 준 신실한 행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언약의 사랑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문맥상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행한 일들과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약속 모두 관련되지만, 원문의 이 표현만으로 어느 쪽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성전을 완성한 날, 솔로몬이 가장 깊이 의지한 것

역대하 6:1–42 본문 →

성전은 하나님을 한곳에 붙잡아 두는 건물이 아니라, 어디에도 갇히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백성이 나아갈 수 있도록 그분이 자기 이름을 두기로 선택하신 장소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은 성전을 받아 주시기를 구하면서, 동시에 그곳에서 하나님을 찾을 사람들의 연약함을 내다봅니다.

화려한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언약궤는 지성소에 놓였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모여 서 있습니다. 그들 앞에 성전을 지은 왕이 있습니다.

그 왕은 높은 청동 받침대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왕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하늘로 펼칩니다.

자신이 지은 집보다 크고,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보다도 크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전의 가장 영광스러운 날에 솔로몬이 보여 준 것은 건물을 완성한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라, 하늘도 담을 수 없는 하나님께 손을 펼쳐 기도할 수 있다는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