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오기 하권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8–13장 · 되찾은 성전

팔려 갈 사람들에서 증언하는 사람들로

마카베오기 하권 8장에는 기묘한 전쟁이 등장합니다. 한쪽 군대는 아직 붙잡지도 않은 적군을 노예로 팔아 버립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가격을 정하고 구매자까지 불러 모읍니다. 승리는 확정된 일이고, 남은 것은 포로를 넘겨주고 돈을 받는 절차뿐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 역전은 단순히 약한 군대가 강한 군대를 이겼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를 돈과 군사력으로 계산하던 세계가, 그 사람들을 기억하고 돌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뒤집히는 이야기입니다.

유다의 군대는 승리한 뒤 적들을 계속 뒤쫓을 수 있었지만 안식일 때문에 멈춥니다. 전리품을 얻었지만 그것을 자신들만 차지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도우셨는데도 다시 하나님께 온전한 화해를 구합니다.

왜 승리한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할까요? 무엇보다, 그들은 무엇을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었을까요?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68장 본문 읽기 →

하나님께서 기억하셔야 할 것들

마카베오기 하권 8:1–7 본문 →

산속의 열 명에서 육천 명의 공동체로

앞서 5장 27절에서 유다와 아홉 동료는 광야로 피신했습니다. 그들은 더럽혀진 종교생활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산에서 풀을 먹으며 지냈습니다.

8장 1절에서는 그들이 마을들에 몰래 들어가 같은 겨레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육천 명가량이 모였다고 기록됩니다. 이 사이에 6–7장의 박해와 순교 이야기가 놓여 있습니다. 독자들은 엘아자르와 일곱 형제의 죽음을 읽은 뒤 유다의 저항을 만나게 됩니다.

7장에서 사람들은 율법을 버리느니 죽겠다고 선언했습니다. 8장에서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되찾으려고 싸웁니다. 행동의 형태는 다르지만, 두 이야기 모두 왕의 명령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책에서 유대교는 단순히 개인이 마음속으로 믿는 종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율법과 관습, 성전과 예배, 공동체의 삶의 질서를 포함합니다. 4장 13절에서 유대 사람들의 전통을 밀어내던 그리스식 생활방식과 대조하여 읽을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이들이 모였다는 것은 단순히 같은 민족의 군대가 조직되었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왕의 강요 아래 무너지고 있던 삶의 방식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다시 연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먼저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 적군의 숫자를 줄여 달라거나 자기들에게 강한 무기를 달라고 먼저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고 기억하셔야 할 대상을 하나씩 열거합니다. 짓눌리는 백성, 더럽혀진 성전, 파괴될 위기에 놓인 도시, 억울하게 흘려진 피, 살해된 어린아이들, 모욕당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특히 3절은 「죽임당한 사람들이 흘린 피가 주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 4장 10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벨이 죽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피가 땅에서 자신에게 부르짖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벨은 이미 죽었으므로 자신의 억울함을 재판관에게 호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피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마카베오기 하권의 기도도 같은 생각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수 없지만, 그들이 당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잊거나 외면한 죽음도 하나님께는 여전히 들리는 호소입니다.

4절의 어린아이들 역시 중요합니다. 이들은 전쟁에서 무기를 들고 저항한 병사가 아닙니다. 왕에게 반역을 일으킨 정치적 지도자도 아닙니다. 그들의 죽음은 박해가 단순히 반란 진압이나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무방비한 생명까지 파괴하는 폭력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기도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그 백성이 모욕당하고 죽임을 당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 없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을 향한 박해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욕과도 연결됩니다.

분노가 자비로 바뀌었다

마카베오가 무리를 이루자, 이방 민족들은 더는 그를 당해 낼 수 없었습니다. 주의 분노가 자비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마카베오기 하권 8:5 · 두루새김

이 한 문장은 앞서 6장 12–17절에서 저자가 직접 제시한 신학적 설명과 이어집니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겪는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라는 틀에서 해석하면서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8장 5절은 그 설명이 이야기 속에서 전환점을 맞았음을 선언합니다.

6–7절에서 유다는 기습 공격을 하고, 전투에 중요한 곳들을 차지하며, 특히 밤을 이용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실제 전술적 판단이었습니다. 밤을 이용하면 작은 군대가 대규모 정규군을 상대할 때 갖는 불리함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준비하고 움직이는 동안 하나님도 자기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고 계십니다.

사람을 돈으로 계산하는 제국

마카베오기 하권 8:8–15 본문 →

적군이 아니라 상품이 된 사람들

유다의 승리 소식이 퍼지자 왕의 관리들은 본격적인 대응에 나섭니다.

빌립은 코일레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사령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니카노르를 보내고, 전쟁 경험이 풍부한 고르기아스를 함께 붙입니다. 니카노르의 군대는 이만 명이 넘습니다. 왕실의 군사 조직과 여러 민족의 병력이 동원된 것입니다.

9절에서는 유대 민족 전체를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그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 계획이 등장합니다.

죽이려는 것과 팔려는 것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두 계획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을 자신들의 삶을 결정할 권리가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니카노르는 로마 사람들에게 바칠 돈 이천 탈란톤을 유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팔아서 마련하려 합니다. 왕국의 재정 문제가 유대 사람들을 노예로 파는 계획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니카노르는 아직 그들을 붙잡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전쟁의 결과를 자신이 미리 결정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계획에서 유대 사람들에게는 저항할 능력도, 그들을 도우실 하나님도 없습니다.

그는 곧바로 바닷가 도시들에 사람을 보내 유대 사람들을 노예로 사러 오라고 불렀습니다. 90명을 한 탈란톤에 넘겨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내리실 벌이 자신에게 닥치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8:11 · 두루새김

그가 사람들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여기는 동안, 저자는 그 사람들의 삶과 역사에 관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을 파는 사람들

12–15절에서는 니카노르의 계획을 들은 유대 사람들의 반응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두려워 달아납니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가진 것을 모두 팔면서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니카노르는 아직 자기 손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을 팝니다. 반면 유대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실제로 남아 있는 것마저 팝니다. 한쪽은 탐욕과 확신에 차 있고, 다른 쪽은 절박함 속에 있습니다.

자기들을 보아서가 아니라면, 조상들과 맺은 언약과 자기들 위에 불린 주의 존귀하고 위대한 이름을 보아서라도 구해 달라고 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8:15 · 두루새김

이 기도는 출애굽기 2장 24절과 닮아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는 장면입니다.

또한 민수기 14장 13–19절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모세는 백성의 공로보다 하나님이 민족들 가운데 나타내신 자신의 이름과 성품에 호소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반드시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면서도 그보다 더 깊은 근거를 찾습니다.

그들이 붙잡는 마지막 희망은 자기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백성과 관계를 맺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90명」으로 옮겼지만,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이들을 소마타, 몸들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노예 거래에서 사람을 거래 대상으로 가리킬 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문맥에서는 사람의 인격과 삶보다 사고팔 수 있는 몸이라는 측면이 앞에 놓입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싸울 것인가

마카베오기 하권 8:16–23 본문 →

유다는 적군의 숫자보다 먼저 기억을 불러낸다

유다는 육천 명을 모아 적군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적군이 실제보다 약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적의 병력이 많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왜 싸워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17절에서 유다가 떠올리게 하는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거룩한 성전이 짓밟힌 일, 도시가 조롱과 괴롭힘을 당한 일, 조상 대대로 이어 온 삶의 질서가 무너진 일입니다.

앞의 두 문제는 1–4절의 기도에도 등장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그 일들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제는 병사들에게 그 일들을 떠올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던 일을, 이제 자신들도 잊지 않고 행동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되찾으려는 것은 단순한 영토가 아닙니다. 17절의 「조상 대대로 이어 온 삶의 질서」에는 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이 포함됩니다. 그렇기에 이 전쟁은 영토와 정치적 지배뿐 아니라 예배와 공동체의 자유를 둘러싼 싸움이기도 합니다.

고개를 한 번 움직이시는 것과 수많은 무기

유다는 말했습니다. 「저들은 무기와 자기들의 대담함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그분은 고개를 한 번 움직이시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치러 오는 적들과 온 세상을 제압하실 수 있다.」마카베오기 하권 8:18 · 두루새김

이 말의 중심에는 무기의 수보다 신뢰의 대상이 있습니다.

니카노르의 군대도 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지휘관을 세웠고, 여러 민족의 병력을 모았으며, 구매자까지 불러 모았습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전력과 자신들의 계획입니다.

유다 역시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모으고, 부대를 나누고, 지휘관을 세웁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말은 전략이나 무기가 필요 없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는 전투의 결과를 인간의 힘이 최종적으로 결정한다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강대한 제국은 온갖 자원을 동원해 군대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나 유다가 믿는 하나님은 온 세상조차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실 수 있는 분입니다. 제국의 군사력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은 세상 안에 있는 힘입니다. 하나님은 그 세상 자체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과거의 구원이 현재의 용기가 된다

19절에서 유다는 산헤립의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이 죽었던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열왕기하 19장 35절과 이사야 37장 36절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아시리아 왕 산헤립의 군대가 유다를 위협했을 때, 히스기야는 자신들이 가진 군사적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의 백성은 더 강대한 세력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도 눈에 보이는 조건만으로는 미래를 낙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군사력의 크기만으로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20절에서는 바빌로니아에서 갈라디아 사람들과 싸웠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의 병력까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오래된 출애굽 역사와는 다른 전쟁 전승입니다. 두 전승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예상하기 어려운 결과가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유다는 사람들에게 승리를 확신하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21절에서 저자는 그들이 「율법과 조국을 위해 죽을 준비」를 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라고 보장받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지키려는 것이 목숨보다 소중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싸울 준비를 합니다.

이것은 앞 장의 순교자들과도 연결됩니다. 순교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버리느니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유다의 사람들은 같은 충성 때문에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저항합니다.

전투 직전에 읽힌 책

21–23절에서 유다는 군대를 네 부대로 나눕니다.

육천 명을 네 부대로 나누면 한 부대에 천오백 명씩입니다. 유다의 형제 시몬, 요셉, 요나단이 각각 한 부대를 맡고, 유다가 직접 첫째 부대를 이끕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군대 앞에서 거룩한 책이 읽힙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3장 48절에서도 유다의 사람들은 위기 앞에서 율법책을 펼칩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전쟁에 앞서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전통과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전쟁을 앞둔 사람들은 단순히 싸울 의지를 북돋는 연설만 듣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따라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 뒤에 정한 암호는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이것은 군대가 서로를 알아보는 암호이면서, 그들이 의지하는 힘을 나타내는 표어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표현은 18절의 신뢰 고백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유다는 하나님께서 싸워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직접 첫째 부대를 이끌고 적군과 맞붙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것이 서로 반대되는 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한편 16절의 「포로들 때문에 겁에 질리지 말고」에는 본문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리스어 전승에는 「포로들」과 「적들」이라는 서로 다른 읽기가 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무엇 때문에 겁내지 말라는 것인지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20절의 전투의 정확한 역사적 배경은 본문만으로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팔천 명, 사천 명, 육천 명 사이의 관계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전승에는 육천 명 대신 팔천 명으로 읽는 본문도 있습니다. 다만 형제의 이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2장 2–5절에는 요셉 대신 요한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두 기록 사이의 차이를 이 장만으로 확정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엘아자르의 언급도 원문의 문장 구조가 까다롭습니다. 그를 추가로 세웠다는 말과 거룩한 책을 읽었다는 말이 이어지지만, 엘아자르가 책을 읽었는지 유다가 직접 읽었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엘아자르도 지휘자로 세우고, 유다가 거룩한 책을 읽어 준 것으로 옮겼습니다.

승리한 뒤에 드러나는 그들의 정체성

마카베오기 하권 8:24–29 본문 →

노예를 사려던 돈이 그들에게 돌아오다

24절은 전투의 결과를 설명하면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그들과 함께 싸우셨으므로, 그들은 적군 9천 명 이상을 죽였습니다. 니카노르 군대의 대다수에게 상처를 입히고 팔다리를 못 쓰게 했으며, 모두 달아나게 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8:24 · 두루새김

전투 장면 자체는 매우 짧습니다. 저자는 구체적인 군대의 배치나 공격 경로, 누가 먼저 돌격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25절에서 앞서 니카노르가 세웠던 계획이 뒤집힙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사러 온 사람들의 돈도 빼앗았습니다. 적들을 한동안 뒤쫓았지만 시간에 쫓겨 돌아왔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8:25 · 두루새김

저자는 이 역전을 통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질서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전쟁에 이긴 사람들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해집니다.

승리보다 먼저 안식일을 지키다

25–27절에서 유다의 군대는 적군을 계속 뒤쫓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시간에 쫓겨 돌아왔다고 말하고, 이어 안식일을 앞둔 날이었기 때문에 적들을 오래 뒤쫓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5장 25–26절에서 아폴로니오스는 안식일을 이용해 유대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들이 거룩하게 여기는 날을 폭력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6장 11절에서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동굴에 모였던 사람들이 불에 타 죽는 일이 기록됩니다. 이처럼 안식일은 그들에게 단순한 종교적 습관이 아니었습니다. 그날을 지키는 행위 자체가 목숨을 위협받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8장에서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제 그들은 무기를 들고 적과 싸워 이겼습니다. 계속 뒤쫓으면 더 많은 전리품을 얻거나 적군을 더욱 약화시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뒤쫓기를 멈추고 안식일을 지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며 살아갈 자유를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승리를 위해 율법을 무시한다면 자신들이 싸우는 목적 자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승리는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수단이지, 율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권위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창세기 2장 2–3절과 출애굽기 20장 8–11절의 안식일 이해가 배경에 놓여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창조 세계의 주인이심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또한 신명기 5장 12–15절에서는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자신뿐 아니라 종들까지 쉬게 해야 하는 날로 설명됩니다.

노예로 팔려 갈 뻔했던 사람들이 전쟁에서 살아남아 안식일을 지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니카노르의 거래 계획에 따라 몸이 처분될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쉼의 질서 안에서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그들의 자유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전리품은 누구의 것인가

안식일이 지난 뒤, 유다의 사람들은 전리품을 나눕니다.

28절은 그들이 학대받은 사람들과 남편을 잃은 여자들,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일부를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나머지는 자신들과 아이들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고대 전쟁에서 전리품은 승리한 군대의 중요한 보상이었습니다.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는 일은 특별히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군대는 직접 전쟁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을 나눔에서 빼놓지 않습니다.

학대받은 사람들은 박해의 피해자들입니다. 그들이 싸울 능력이 없거나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해서 공동체의 회복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남편을 잃은 여자들과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 대한 배려는 신명기 24장 17–22절의 율법과도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종이었던 때를 기억하여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리고 승리한 뒤에도 율법의 요구를 따라 약한 사람들을 돌봅니다.

공동체가 되찾아야 할 삶은 강한 사람들이 더 많이 소유하는 삶이 아니라, 약한 사람들도 함께 살아갈 자리를 얻는 삶입니다.

이겼는데도 왜 다시 화해를 구하는가

이 일을 마친 뒤 그들은 함께 기도했습니다. 자비로우신 주께 주의 종들인 자기들과 온전히 화해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8:29 · 두루새김

이미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싸우셨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고, 안식일을 지켰으며,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리품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화해를 구할까요?

그들은 더 큰 승리만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기를 구합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의 분노가 자비로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27절에서는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기 시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9절에서는 그 자비가 온전한 화해에 이르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시작되었지만, 그들이 바라는 회복은 아직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전은 여전히 더럽혀져 있습니다. 공동체의 삶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한 차례의 승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소망은 적군을 무너뜨리는 일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시 온전한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성공과 승리를 무조건 하나님의 승인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했지만, 그것으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돌아볼 것이 없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하나님이 동맹자가 되셨다는 뜻을 그들과 함께 싸우셨다는 말로 풀어 옮겼습니다. 25절에는 그리스어 판본의 차이가 있습니다. 한 읽기는 지형의 제약을, 다른 읽기는 시간의 압박을 강조합니다. 두루새김은 「시간에 쫓겨 돌아왔습니다」로 옮겼습니다. 어느 읽기를 따르더라도 26절에서 적들을 오래 뒤쫓지 않은 이유가 안식일과 연결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승리의 결과와 역전된 운명

마카베오기 하권 8:30–36 본문 →

전리품을 똑같은 몫으로 나누다

30–33절에서는 티모테오스와 바키데스의 군대를 상대로 한 다른 전투들이 빠르게 요약됩니다.

30절은 학대받은 사람들, 부모를 잃은 아이들, 남편을 잃은 여자들, 노인들에게도 자신들과 똑같은 몫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28절에서는 전리품의 일부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예 「똑같은 몫」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전쟁에서 직접 싸우지 못한 사람들도 공동체가 되찾은 재물을 함께 받습니다. 전투에 참여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회복의 혜택을 독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어 31절에서는 적들의 무기를 전투에 중요한 곳들에 보관하고, 나머지 전리품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미래의 공격에 대비하는 군사적 판단도 놓치지 않습니다.

불로 저지른 악행과 불로 돌아온 응징

32–33절에서는 유대 사람들을 괴롭힌 지휘관과 성전 대문들에 불을 질렀던 자들, 칼리스테네스에 대한 응징이 기록됩니다.

특히 33절에서 성전 대문들에 불을 지른 사람들이 불에 타 죽는 장면은 죄에 걸맞은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의 구조를 지닙니다. 1절부터 이어져 온 성전을 더럽히고 짓밟은 일이 여기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성전은 단순히 건물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중심 장소였습니다. 그곳을 더럽히고 훼손한 행위는 공동체의 신앙과 정체성을 겨냥한 공격이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서술을 오늘날의 폭력적 보복을 정당화하는 일반적인 명령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보여 주는 것은 박해와 전쟁을 겪은 유대 공동체의 역사적 상황과 그 안에서 저자가 이해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여기서 모든 개인적 원한을 폭력으로 갚아도 된다는 보편적 원칙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또한 본문은 실제 전쟁의 참혹함을 숨기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며, 응징 과정에서도 사람들이 죽습니다. 저자는 이 전쟁을 구원의 역사로 서술하지만, 그 사실이 전쟁의 폭력성과 그로 인한 생명의 상실을 지워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노예를 팔려던 장군이 도망친 종이 되다

34절에서 이야기는 다시 니카노르에게 돌아갑니다.

처음에 그는 왕의 고위 관리였습니다. 군대를 지휘했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운명을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유대 사람들을 도우셨으므로, 니카노르는 자기가 가장 하찮게 여기던 사람들에게 굴욕을 당했습니다. 그는 화려한 옷을 벗어 버리고 도망친 종처럼 홀로 내륙을 지나 안디옥에 도착했습니다. 자기 군대를 망치는 데서는 그야말로 크게 성공한 셈이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8:35 · 두루새김

그가 다른 사람들을 취급하던 방식이 자기 운명을 묘사하는 모습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는 유대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목숨을 건져 돌아오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마지막에는 적군이 하나님을 증언한다

처음에 니카노르는 유대 사람들을 자신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유대 사람들을 위해 싸워 주시는 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로마 사람들에게 바칠 돈을 마련하겠다고 장담했던 그가, 이제는 유대 사람들을 위해 싸워 주시는 분이 있다고 알렸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그분께서 명하신 법을 따르므로, 그분의 보호를 받아 해를 입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8:36 · 두루새김

이렇게 전투 전 유다의 고백이 전투 후 니카노르의 입에서도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니카노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거나, 이스라엘의 율법을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가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니카노르가 말하는 「해를 입지 않는다고」라는 표현 역시 모든 유대 사람이 결코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는 절대적 약속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로 앞 장에서 율법을 지킨 사람들이 끔찍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니카노르의 말은 이번 전쟁의 결과를 통해 그가 깨달은 사실을 승리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실했던 순교자들은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던 유다의 사람들은 승리했습니다.

둘 사이의 차이를 단순히 믿음의 크기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이 보여 주는 신앙은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모든 고난을 피한다는 믿음이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도, 전쟁 앞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조금 더 깊이

34절에서 두루새김은 상인의 수를 「3천 명」으로 옮겼지만, 그리스어 전승에는 천 명이라는 다른 읽기도 있습니다. 이 숫자는 판본에 따라 다릅니다. 35절의 마지막 문장의 원문에는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니카노르가 정작 자신의 군대를 망치는 일에만 성공했다는 비꼼입니다. 두루새김은 「자기 군대를 망치는 데서는 그야말로 크게 성공한 셈이었습니다」로 옮겨 이 읽기를 따릅니다. 다른 하나는 군대 전체가 망한 상황에서도 그 자신은 살아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어느 쪽이든 앞서 니카노르가 자신만만하게 세웠던 계획과 실제 결과의 차이가 강조됩니다.

도망친 장군에게서 나온 뜻밖의 말

마카베오기 하권 8:1–36 본문 →

그는 유대 사람들의 하나님을 자신의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군대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들이 붙잡고 있는 언약과 율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적을 물리치는 일뿐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는 일로 응답합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사람은 패배한 니카노르입니다.

그는 유대 사람들을 사기 위해 상인들을 불러 모았던 사람입니다. 왕이 로마 사람들에게 바칠 돈을 마련하겠다고 큰소리쳤던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려 했지만, 이제 자신이 도망친 종처럼 쓸쓸히 돌아왔습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왕국의 중심 도시 안디옥입니다. 그곳에 돌아온 그는 처음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유대 사람들을 위해 싸워 주시는 분이 있다고.

이 말이 의미 있는 까닭은 그것이 유대 군대의 승전 구호가 아니라,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왔던 사람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패배를 통해 적어도 한 가지 사실만은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하찮게 여겼던 사람들은 결코 자신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노예가 될 사람들의 값을 정하던 장군이, 마침내 그들을 위해 싸워 주시는 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8장은 바로 그 뒤집힌 운명의 장면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