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1–14장 · 왕의 잘못과 그 뒤
자신에게 내린 판결
사무엘하 12장은 한 왕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듣고 분노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하나뿐인 어린 암양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몹시 화가 납니다. 그는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며, 빼앗은 양을 네 배로 갚아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단이 대답합니다.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다윗은 정의가 무엇인지 몰랐던 사람이 아닙니다. 정의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자기 행동을 그 정의의 빛 아래 놓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나단의 이야기는 바로 그 간격을 무너뜨립니다.
이 장에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특히 다윗의 죄로 아이가 죽는다는 선언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저자는 그 어려움을 없애기 위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드러내시고 용서하신다는 사실과, 그 죄가 이미 다른 사람들의 삶에 끼친 피해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보내신 사람
여호와야훼께서는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했습니다.」사무엘하 12:1 · 두루새김
11장에서 다윗은 끊임없이 사람을 보냈습니다. 밧세바를 데려오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고, 우리야를 불러오기 위해 요압에게 전갈을 보내고, 마침내 우리야를 죽이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12장은 전혀 다른 주어로 시작합니다.
왕이 사람들을 움직이던 이야기에서 이제 여호와야훼께서 사람을 보내시는 이야기로 바뀝니다.
11장에서 다윗은 왕궁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행동이 판단받아야 할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께서는 나단을 보내시면서 곧바로 다윗이 저지른 죄를 하나씩 말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나단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아주 많았습니다.」사무엘하 12:2 · 두루새김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자기가 사서 기르는 어린 암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 양은 그와 그의 자녀들 곁에서 함께 자랐습니다. 그가 먹는 빵을 먹고 그의 잔에 담긴 것을 마시며 그의 품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에게는 딸과 같은 양이었습니다.」사무엘하 12:3 · 두루새김
나단은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단순한 재산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가족의 일상 속에 깊이 들어온 존재로 그립니다.
이 양을 빼앗는 것은 가난한 사람에게서 돈으로 따질 수 있는 재산 하나를 빼앗는 일만이 아닙니다. 그가 사랑하며 돌보던 관계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어느 날 그 부자에게 나그네가 찾아왔습니다. 부자는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하려고 자기 양이나 소를 잡기는 아까워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의 어린 암양을 빼앗아, 찾아온 손님에게 요리해 주었습니다.」사무엘하 12:4 · 두루새김
부자의 악은 부족함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것을 내놓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물론 암양과 밧세바를 그대로 같은 존재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밧세바는 누군가의 소유물인 가축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의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나단의 비유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두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관계를 짓밟고 빼앗았다는 악의 구조를 드러냅니다.
11장에서는 다윗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어떻게 움직였는지가 중심이었습니다.
12장의 비유는 시선을 바꾸어, 빼앗긴 사람에게 그 일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보게 합니다.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왕
나단의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즉시 반응합니다.
다윗은 그 부자에게 몹시 화가 나서 나단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 그런 짓을 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사무엘하 12:5 · 두루새김
「그는 그 양을 네 배로 갚아야 한다. 그런 짓을 했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사무엘하 12:6 · 두루새김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양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이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행동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똑같은 판단을 내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새로운 정의의 기준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미 다윗이 알고 있는 기준을 다윗 자신에게 돌려줍니다.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다윗은 조금 전까지 자신을 이야기의 바깥에 놓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듣고 판결하는 재판관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나단은 그가 이야기를 듣는 재판관이 아니라 그 이야기 속의 부자라고 선언합니다.
이 순간 다윗은 자기 자신의 입으로 내린 도덕적 판단 앞에 서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2:1은 도둑이 양을 훔쳐 잡거나 팔았을 경우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아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다윗이 네 배로 갚으라고 한 명령은 율법의 법적 원칙과 맞습니다. 그러나 양 한 마리를 훔친 일에 곧바로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그 배상 규정에서 요구되는 처벌이 아닙니다. 다윗의 「죽어 마땅하다」라는 말은 실제 사형 판결이라기보다 그 사람의 행동을 극도로 악하다고 평가하는 격한 선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것과 다윗이 빼앗은 것
나단의 책망은 다윗의 범죄를 곧바로 하나씩 말하는 대신, 먼저 여호와야훼께서 다윗에게 무엇을 해 주셨는지 이야기합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고, 사울의 손에서 너를 구해 냈다.』」사무엘하 12:7 · 두루새김
다윗이 지금 누리는 왕권과 안전은 처음부터 자기 힘만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 역시 이미 많은 것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의 아내를 데려왔습니다.
「『나는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그의 아내들을 네 품에 안겨 주었다. 또 이스라엘과 유다를 네게 주었다. 그것이 부족했다면 그만큼 또 그만큼 더 주었을 것이다.』」사무엘하 12:8 · 두루새김
오늘날의 독자에게 여성이 왕의 소유처럼 표현되는 언어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고대 왕정의 권력 구조를 반영합니다. 그것이 왕에게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취할 도덕적 권리를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음 절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온 행동을 분명히 죄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다윗에게 부족한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다윗을 인색하게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더욱 깊게 보면, 다윗은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왕권을 여호와야훼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왜 너는 여호와야훼의 말을 업신여겨 내가 보기에 악한 일을 했느냐? 너는 헷 사람 우리야를 칼로 치고, 그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다. 암몬 사람들의 칼로 우리야를 죽인 것은 바로 너다.』」사무엘하 12:9 · 두루새김
11장의 사건은 밧세바와 잠자리를 같이한 일에서 시작하여 우리야를 죽인 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나단은 우리야의 죽음을 먼저 말하고, 그다음 그의 아내를 데려온 일을 말합니다. 다윗의 범죄에서 우리야를 죽인 일이 얼마나 중심적인 문제인지를 드러내는 순서입니다.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직접 죽인 사람들은 암몬 군사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왕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죽음의 책임을 다윗에게 돌리십니다.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해 실행했다고 해서 그 행동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다윗은 왕이지만, 그에게는 다른 사람의 생명과 혼인 관계를 마음대로 해칠 권리가 없습니다. 왕권은 여호와야훼의 뜻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왕에게 주어진 힘을 하나님의 가르침에 반하여 사용한다면, 그는 피해자에게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도 거스른 셈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훼손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의 아내들을 네 품에 안겨 주었다」는 표현을 다윗이 사울의 아내들과 실제로 혼인했다는 기록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사무엘서는 다윗이 사울의 아내들을 모두 자기 아내로 삼았다고 서술하지 않습니다. 고대 왕정에서 이전 왕의 집안과 후궁은 왕권과 연결된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다윗이 사울의 왕권과 왕실을 다스릴 권한을 넘겨받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실제 왕실 여성들의 처지와 완전히 무관한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감추어진 일이 집안에서 드러날 것이다
나단은 이어서 다윗의 행동에 대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제 네 집안에서 칼이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사무엘하 12:10 · 두루새김
다윗은 우리야를 암몬 사람들의 칼로 죽였습니다. 다윗이 다른 사람에게 사용했던 폭력이 자기 집안에도 계속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선언입니다.
본문은 이후 다윗의 집안에서 일어날 폭력을 예고하면서, 왕이 저지른 악이 그 개인의 삶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무엘하 13장 이후에는 암논이 다말을 성폭행하고,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며, 압살롬의 반란과 죽음이 이어집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네 집안에서 너를 덮칠 재앙을 일으키겠다. 네 눈앞에서 네 아내들을 데려다가 네 이웃에게 주겠다. 그가 환한 대낮에 네 아내들과 잠자리를 같이할 것이다.』」사무엘하 12:11 · 두루새김
「『너는 몰래 그 일을 했지만, 나는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환한 대낮에 이 일을 하겠다.』」사무엘하 12:12 · 두루새김
특히 「환한 대낮에」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11장에서 다윗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건을 처리하려 했습니다. 이제 그가 감추려 했던 일에 맞서는 수치가 온 이스라엘 앞에서 드러날 것이라고 선포됩니다.
이 예언은 사무엘하 16:21–22에서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과 공개적으로 잠자리를 같이하는 사건과 연결됩니다.
다윗의 죄에 대한 심판을 말하면서 왜 그의 아내들이 다른 사람의 행동에 노출됩니까?
본문은 이 여성들이 다윗의 죄에 가담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심판받아 마땅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고대 왕정에서 왕의 아내와 후궁들은 왕조의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왕의 여인들을 차지하는 행동은 왕권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나단의 예언은 그러한 정치적 현실 안에서 다윗의 왕권과 집안에 닥칠 수치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남자가 여성들과 강제로 관계를 맺는 행동이 도덕적으로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어떤 사건을 심판의 맥락에서 예고한다고 해서 그 사건을 실행하는 사람의 악한 행동이 선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흐름 안에서 뒤따르는 사건들이 서술되지만, 이후의 가해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이 있습니다.
다윗의 잘못은 자신의 집안에 속한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짧은 고백과 뜻밖의 용서
나단의 말이 끝나자 다윗이 대답합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호와야훼께 죄를 지었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도 왕의 죄를 없애 주셨습니다. 왕께서는 죽지 않으실 것입니다.」사무엘하 12:13 · 두루새김
다윗은 긴 변명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밧세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전쟁 중에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요압에게 책임을 돌리지도 않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다윗은 그 판단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죄가 여호와야훼를 향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죄가 여호와야훼를 향한 죄라는 말은 인간에게 끼친 피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데려온 일을 직접 하나씩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고백은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끼친 피해를 포함한 자신의 행동 전체를 여호와야훼 앞에서 죄로 인정하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윗은 부자가 죽어 마땅하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자신이 그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다윗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죄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실제로 한 사람을 일부러 죽게 했고, 그 과정에서 다른 병사들까지 죽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께서는 그의 죄를 없애 주시고 생명을 지켜 주십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죄가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선언하는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왕께서는 이 일로 여호와야훼의 원수들을 몹시 업신여기셨으니, 왕께 태어난 아들도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사무엘하 12:14 · 두루새김
왜 다윗이 죄를 지었는데 아이가 죽습니까?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해 도덕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모두 제공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아버지의 죄에 스스로 참여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죽음이 다윗의 죄에 대한 심판의 맥락에서 선포됩니다.
그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아이의 죽음이 당연하거나 정당한 희생이었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가 다윗을 대신하여 죄값을 치렀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다윗의 죄를 없애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행동이 가져올 고통스러운 결과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용서는 죄를 없던 일로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죄를 없애 주셨습니다」에 해당하는 말은 헤에비르(עָבַר)로, 「지나가게 하다」, 「옮겨 버리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여기서는 다윗의 죄를 그대로 그에게 남겨 두지 않으셨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14절의 히브리어 본문은 다윗이 「여호와야훼의 원수들」을 몹시 업신여겼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한편 다윗의 행동 때문에 여호와야훼의 원수들이 여호와야훼를 업신여기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원문의 표현과 문맥만으로 양쪽의 관계를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를 위해 땅에 엎드린 왕
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우리야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아 준 아이를 치셨고, 아이는 심하게 앓았습니다.사무엘하 12:15 · 두루새김
여기서 저자는 밧세바를 「우리야의 아내」라고 부릅니다. 이미 다윗과 밧세바는 혼인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이의 어머니를 여전히 우리야와 연결하여 소개합니다. 이 표현은 독자가 아이의 탄생과 우리야의 죽음 사이의 관계를 잊지 않게 합니다.
본문은 그 일을 하나님의 행동으로 서술하지만, 아이의 고통이 왜 필요한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근거로 모든 어린아이의 질병이나 죽음이 부모의 죄에 대한 벌이라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아이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는 음식을 먹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땅에 누운 채 밤을 보냈습니다.사무엘하 12:16 · 두루새김
11장에서 그는 왕궁에 머물면서 사람들을 보내 자기 뜻을 실행했습니다. 명령을 내리면 다른 사람들이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령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살리고 싶지만, 자기 권력으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간절히 비는 일입니다.
왕궁의 높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던 사람이 이제 땅에 누워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집안의 어른들이 다윗을 일으키려 하지만 그는 거절합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도 먹지 않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자신의 체면이나 일상적인 왕궁의 생활보다 아이를 살려 달라고 비는 일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에 아이가 죽습니다.
신하들은 그 사실을 다윗에게 알리기를 두려워합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도 음식을 먹지 않으며 땅에 누워 있었는데,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다윗이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아이가 죽었느냐?」 신하들이 대답했습니다. 「죽었습니다.」사무엘하 12:19 · 두루새김
다윗이 그렇게 간절히 구했던 결과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4:16은 자녀가 부모의 죄 때문에 사형당해서는 안 된다는 법적 원칙을 제시합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상황을 다루지만, 성경 전체를 읽을 때 자녀의 고통을 부모의 잘못에 대한 당연한 대가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를 제공합니다.
아이가 죽자 일어나 먹는 사람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윗은 놀라운 행동을 합니다.
다윗은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른 뒤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야훼의 집에 들어가 엎드려 절했습니다. 자기 집으로 돌아와 먹을 것을 달라고 하자 사람들이 음식을 차려 주었고, 다윗은 그 음식을 먹었습니다.사무엘하 12:20 · 두루새김
신하들도 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신하들이 다윗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아이가 살아 있을 때는 아이를 위해 음식을 먹지 않고 우셨는데, 아이가 죽자 일어나 음식을 드십니다.」사무엘하 12:21 · 두루새김
보통은 반대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일상생활을 하다가, 아이가 죽으면 슬퍼하며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대답했습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 내가 음식을 먹지 않고 운 것은, 『누가 알겠느냐? 여호와야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아이가 살지도 모른다』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사무엘하 12:22 · 두루새김
다윗은 아이가 반드시 살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아이가 살 수도 있습니다. 그 가능성 때문에 그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근거로 아이가 반드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이가 죽었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음식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아이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겠느냐? 나는 아이에게로 가겠지만, 아이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사무엘하 12:23 · 두루새김
다윗은 자신이 아이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여호와야훼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이 장면을 다윗이 슬픔을 완전히 극복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가 이후에 어떤 슬픔을 느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아이가 살아 있을 때 할 수 있었던 기도와 아이가 죽은 뒤 받아들여야 할 현실을 구분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비는 일은 결과를 통제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소망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지만, 마지막 결과를 자기 뜻대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아이의 죽음 앞에서 받아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사무엘하 10:12에서 요압은 여호와야훼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시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요압은 전쟁을 앞두고 있고, 다윗은 아이의 생명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하나님께서 어떤 결과를 주실지 자신이 확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나는 아이에게로 가겠지만, 아이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표현을 죽음 이후에 다윗과 아이가 반드시 다시 만난다는 확정적인 약속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약의 문맥에서 이 말은 죽음이 모든 인간에게 닥칠 현실이며, 살아 있는 사람이 이미 죽은 사람을 자기 삶의 자리로 돌려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이름을 받은 아이 — 솔로몬과 여디디야
아이의 죽음 이후에 새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다윗은 자기 아내 밧세바를 위로했습니다. 그는 밧세바에게 가서 잠자리를 같이했습니다. 밧세바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아이를 사랑하셨습니다.사무엘하 12:24 · 두루새김
앞에서는 다윗이 자기 죄를 감추기 위해 밧세바와 우리야의 삶을 움직였습니다. 이제 그는 아들을 잃은 밧세바를 위로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밧세바는 남편 우리야를 잃었고, 아이도 잃었습니다.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습니다.
또한 저자는 여기서 그녀를 「자기 아내 밧세바」라고 부릅니다. 앞의 15절에서는 「우리야의 아내」라고 했습니다. 두 표현 사이에는 이야기의 진행에 따른 관계의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부르는 말이 달라졌다고 해서 과거의 잘못이 지워진 것은 아닙니다.
솔로몬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의 부모에게는 무거운 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아이를 부모의 죄로만 규정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 아이를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언자 나단을 통해 그 아이에게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 아이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사무엘하 12:25 · 두루새김
처음에 나단은 다윗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 여호와야훼께서 보내신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나단은 여호와야훼께서 그 아이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 다시 등장합니다.
같은 예언자가 심판의 말씀과 사랑의 말씀을 모두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밧세바의 앞날을 오직 그 죄 하나로만 규정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용서는 과거를 선한 일로 바꾸지 않지만, 과거의 악이 미래의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윗이 잃어버린 아이 대신 솔로몬을 받았으니 상실이 보상되었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죽은 아이와 솔로몬은 서로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본문은 새로운 생명을 말하지만, 앞선 아이의 죽음을 취소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히브리어 읽는 전통을 따라 밧세바가 이름을 지었다고 옮겼습니다. 반면 자음 본문에 기록된 형태를 따르면 다윗이 이름을 짓는 것으로 읽힙니다. 역대상 22:9에서는 솔로몬의 이름을 평화와 연결하면서 그 시대에 평안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여디디야」는 여디드야로, 「여호와야훼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전쟁터로 — 왕의 이름과 왕관
24–25절에서 솔로몬의 탄생과 여호와야훼의 사랑이 기록된 뒤, 이야기는 갑자기 암몬과의 전쟁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11장 1절에서 시작된 전쟁의 연속입니다. 그때 다윗은 요압과 군대를 보내고 자신은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그 사이 왕궁에서는 밧세바와 우리야에 관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요압이 중요한 승리를 거둔 뒤 다윗을 부릅니다.
「이제 남은 군사들을 모아 이 성읍 앞에 진을 치고 성읍을 차지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제가 성읍을 차지하고, 그 성읍에 제 이름이 붙게 될 것입니다.」사무엘하 12:28 · 두루새김
요압의 말은 자신이 마지막 공격까지 마치면 그 승리가 자기 이름과 연결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전쟁의 승리는 단지 군사적인 성과가 아니라 누구의 이름으로 기억될 것인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군사들을 모아 랍바로 가서 성읍을 차지합니다.
다윗은 암몬 왕의 머리에서 왕관을 벗겨 냈습니다. 금으로 된 그 왕관은 무게가 한 달란트였고 보석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 왕관은 다윗의 머리에 씌워졌습니다. 다윗은 그 성읍에서 빼앗은 물건을 아주 많이 가져왔습니다.사무엘하 12:30 · 두루새김
왕관은 권력의 상징입니다.
한때 다른 왕의 권위를 나타내던 물건이 이제 다윗의 승리를 드러내는 물건이 됩니다. 그는 군사적으로 성공한 왕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죄를 지적받고 판단받은 사람입니다.
왕관은 그의 정치적 권위를 나타내지만, 그가 모든 면에서 옳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암몬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
다윗은 성읍 사람들을 끌어내어 톱과 날카로운 쇠 도구와 쇠도끼를 쓰는 일을 시켰습니다. 벽돌을 만드는 일도 시켰습니다. 그는 암몬 사람들의 모든 성읍에서 이렇게 했습니다. 그 뒤 다윗과 모든 군사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사무엘하 12:31 · 두루새김
다만 그들이 정복당한 사람들로서 다윗의 권력 아래 놓였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본문은 31절의 행동에 대해 별도로 옳고 그름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다윗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의 이후 행동 모두가 옳다고 선언할 수는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왕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인간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다윗이 암몬 포로들에게 톱과 쇠 도구를 쓰는 일과 벽돌을 만드는 일을 시켰다고 옮겼습니다. 이는 강제로 일을 시켰다는 해석을 따른 것입니다. 반면 그 도구들을 처형이나 가혹한 형벌에 사용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사람들을 「톱에/톱으로 두었다」고 말하며, 실제 어떤 행동이 이루어졌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같은 사건을 다루는 역대상 20:3에서는 도구를 사용한 행동이 조금 다른 동사로 나타나며, 이것이 처형인지 강제로 일을 시킨 것인지 판단하는 데 영향을 줍니다. 본문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한 가지 의미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포로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다고 단정하는 것도, 단순히 정상적인 노동을 시켰다고 설명하는 것도 모두 조심해야 합니다.
왕관을 쓴 사람의 이야기
사무엘하 12장은 다윗을 완전한 영웅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죄만으로 그의 삶 전체를 끝내지도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그의 죄를 드러내시고, 그 죄를 없애 주셨으며, 그의 삶에 여전히 책임과 고통이 남아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사랑하셨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다윗은 왕관을 쓰고 빼앗은 물건을 많이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 장을 읽은 독자에게 더 오래 남는 것은 왕관의 무게가 아닐 수 있습니다.
왕 앞에 선 예언자의 짧은 한마디가 남습니다.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 말을 들은 뒤에도 왕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제 독자는 그가 어떤 왕이어야 하는지를 판단할 기준을 알고 있습니다.
왕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왕관을 쓴 사람에게까지 말씀하시는 여호와야훼께서 마지막 판단의 주인이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